진흙속의연꽃

행복론과 불교의 하향평준화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18. 12:51

 

행복론과 불교의 하향평준화

 

 

 

똑 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 똑 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 쌍둥이일지라도 자세히 뜯어 보면 차이가 있다. 왜 이렇게 생긴 모습이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생물학자에 따르면 진화에 유리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한다. 암수가 구별되어 있어서 유성생식에 따라 DNA가 서로 다른 것이 생긴 모습이 다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화에 매우 유리한 것이라 한다.

 

만일 원생생물처럼 누구나 똑 같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전염병이 돌면 몰살될 것이다. 그러나 유성생식에 따라 사람마다 DNA가 다르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아도 몰살 될 염려는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창궐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에이즈에도 끄덕 없이 견디는 사람이 있는 것도 DNA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DNA는 모두 다르다. 그에 따라 얼굴생김새 또한 다르다.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성향이다. 사람들은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성향 또한 모두 다르다.

 

왜 성향이 모두 다를까?

 

이처럼 사람마다 얼굴이 서로 다르고 성향이 서로 다른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DNA에 기인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와 좀 다르게 본다.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Kammasakkā mā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ā.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

 

[세존]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Cūakammavibhaga sutta -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업으로 인하여 뭇삶들의 차별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차별에 대하여 경에서는 부자와 가난한자, 귀한자와 천한자 등으로 구분하여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에 따른다고 하였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얼굴 생긴 모습, 성향 그리고 신체적 또는 정신적 조건 또한 자신이 지은 행위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생긴 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다. 따라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뭇삶들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하다. 마찬가지로 불자들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소위 근기가 높은자가 있는가 하면 낮은자도 있고, 중간근기도 있는 등 다양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눈높이에 맞추어 설법하였을까?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있다.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다음 45년동안 설법한 것이다. 이처럼 뭇삶들에게 말로서 교화한 것에 대하여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또는 ‘방편설’이라 하는데, 이는 뭇삶들의 기질에 따라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런 기질은 청정도론에 따르면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의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기질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것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적이 ‘열반’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 하신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열반론과 행복론이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뭇삶들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열반일까 행복일까?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열반이다. 그럼에도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깨달음이라 하였다. 이는 선종에서의 깨달음을 말한다. 내가 곧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부처임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는 대승불교적 깨달음을 말한다.

 

그런데 테라와다불교가 도입 되면서 이런 깨달음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테라와다 수행법과 빠알리니까야의 번역에 따른 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선종식 깨달음이 곧 불교의 목적이라는 등식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 2004년 불교평론에 연재된 논문을 보면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홍사성님의 논문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가 대표적이다.

 

논문에서 홍사성님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쨌든 이 글의 결론은 이렇다. 중생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 부처님이 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달은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바르게 살면 된다. 불교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 수행은 팔정도와 사념처를 닦는 것을 말한다. 또한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와 같은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자리가 부처의 자리고, 그것을 배반하는 자리가 중생의 자리다. 좀더 분명하게 정리하면 깨닫고자 수행을 한다면 아직도 중생이지만, 깨달음의 삶을 사는 순간부터는 부처로서 사는 것이 된다.

 

(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 홍사성, 2004년 03월 10일 불교평론)

 

 

홍사성님은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는 과정이라 하였다. 그래서 견도, 수도, 무학도의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논문을 보면 대승불교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생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라고 하여  우리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본래불’ 사상이다. 그래서 “깨닫고자 수행을 한다면 아직도 중생이지만, 깨달음의 삶을 사는 순간부터는 부처로서 사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말하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하신 연기법이다. 이미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칙으로서 과거 부처님이 깨달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이 깨달았던 연기법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사성제로 통섭된다.

 

부처님은 사성제로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이 초전법륜경(S56.11)에 상세히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는 법안이 열렸을 때 이를 수다원의 깨달음이라 한다. 사성제의 이해를 말한다. 이를 견도(見道)’라 한다. 이제 막 깨달아 궁극의 경지를 맛본 단계를 말한다. 그 궁극의 경지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체험을 하였다고 하여 깨달음이 완성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열반을 체험하여 견도하였다고 할지라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탐진치이다. 이런 탐진치를 소멸시키는 과정이 수행이다. 그래서 사다함과 아나함의 과정에 대하여 수도(修道)’라 한다.

 

수도 단계의 사다함과 아나함 역시 궁국의 경지인 열반체험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그런 번뇌는 거친 것이 아니라 미세한 것이다. 들뜸, 자만, 무명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만 등 다섯가지 미세한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더 닦을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무학도(無學道)’라 한다. 바로 아라한의 단계가 무학도인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견도(수다원), 수도(사다함, 아나함), 무학도(아라한) 이렇게 단계적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Kīāgiri sutta -끼따기리 설법의 경, 맛지마니까야 M7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최상의 지혜는 단번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배우고 닦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돈오점수에 가깝다. 궁국의 경지를 맛보었다고 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 자체가 깨달음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견도(수다원), 수도(사다함, 아나함), 무학도(아라한) 이렇게 단계적 가르침이다.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이 되는 것

 

초기불교에서 견도의 단계는 더 이상 중생이 아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단계이다. 한번 궁극의 경지를 맛 본자에게 있어서 삶이라는 것은 탐진치를 소멸시켜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결국 깨달음의 완성으로 이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완성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았던 궁극의 경지와 같아지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로 가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홍사성님의 깨닫고자 수행을 한다면 아직도 중생이지만, 깨달음의 삶을 사는 순간부터는 부처로서 사는 것이 된다.”라는 말은 대승불교적 발상으로서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다고 본다.

 

불교의 하향평준화

 

이와 같은 홍사성님의 논문은 2004년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지금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이 목적이라는 말은 파격적이었고, 일종의 기존불교에 대한 도전으로 비추어졌다. 그런데 조성택 교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성택교수는 불교의 목적이 열반이 분명함에도 불교의 수행 최종 목적은 행복이라 하였다. 이런 주장은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기반하고 있다. 흔히 행복론을 말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는 문구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이다.

 

 

율장의 《마하박가(Maha칥agga)》에는 붓다가 60명의 제자에게 최초로 전법을 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른바 불교의 시작이다. 붓다는 “……가라. 가서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법을 설하라. ……”고 하였다. 제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한 예수와는 구별이 되는 대목이다. 예수에게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알림의 구체적 내용이 중요했다. 붓다는 ‘무엇’이라고 하는 설법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설법인가가 중요하였다. 붓다에게 무엇을 설하느냐의 문제는 일차적 중요성이 아니었다. 무엇을 설하느냐의 문제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왜 설하느냐의 문제로서 그 각각의 현장에 따라 결정될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설법의 현장에 맞게 무엇이든 설하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조성택, 2004년 03월 10일, 불교평론)

 

 

조성택교수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인용하고 있다. “……가라. 가서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법을 설하라. ……”라는 전도선언이 바로 행복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가 되는 말이다. 홍사성님 역시 이 문구를 인용하여 깨달음 지상주의 불교를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종교평화선언 추진을 하였던 도법스님 역시 늘 ‘뭇삶들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전도선언 문구를 활용하였다.

 

이렇게 불교행복론자들이 근거로 삼는 것이 중생의 이익과 행복이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행복의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행복론은 불교를 하향평준화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이 열반임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춘다고 하여 행복론을 주장한다면 불교가 전반전으로 하향평준화 되는 것이다.

 

조성택류의 행복론

 

사람들의 생김새와 성향은 다양하다고 하였다. 이는 DNA가 다르기도 하지만 이전에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래서 뭇삶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치관도 다르고 인생관도 다르다. 이런 다양한 근기를 가진 뭇삶들에게 부처님은 기질에 맞는, 근기에 맞는 설법을 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보는 팔만사천 법문이고 구체적으로 빠알리니까야에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말씀 하시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래서 교학적으로는 사성제, 수행적으로는 팔정도가 요구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양하다 보니 이제 갓 불교에 입문한 자와 수행의 깊이가 있는 자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대기설법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의 목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목적이 열반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행복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불교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이다. 단지 뭇삶들의 근기에 맞추어 행복론을 말하였을 뿐임에도 조성택 교수처럼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수행의 목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증진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의 햐향평준화로 이끌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을 오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성택류의 행복론이 왜 불교수행의 목적이 될 수 없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론은 다양하다. 마치 사람의 생김새와 성향이 다양하듯이 행복이라는 말 역시 불교에서 다양하게 쓰인다. 가장 아래로는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부터 선정삼매, 그리고 가장 수승하게는 적멸위락(寂滅爲樂)’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행복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오욕락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행복에 대한 빠알리어는 수카(sukha)’이고 한자어로는 즐거울 락()’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말은 즐거울 락 또는 즐길 락에 대한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이고득락이라 하여 이때 락이 수승한 경지를 뜻하기도 하지만 조성택류의 견해에 따르면 이고득락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가르치는 행복은 어떠한 행복이며 또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 불교적인가? 세속 사회에서의 행복이 주로 욕망의 충족을 통한 것이라면 불교가 가르치는 행복은 욕망을 덜어냄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다. 욕망을 분모로 욕망의 충족을 분자로 하여 얻어지는 그 결과를 행복지수라고 한다면 세속적 욕망 추구는 분자를 끊임없이 늘임으로써 행복지수를 높여가려 하지만 분자와 함께 커지는 분모 때문에 행복지수는 그대로이거나 줄어갈 뿐이다. 붓다가 우리에 가르친 것은 분모를 줄임으로써 행복지수를 크게 한다는 것이었다.(분모가 제로가 되면 행복지수는 무한대가 된다.)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감소를 통해 행복지수를 높여가는 것이 바로 불교적 행복 추구 방법이다. 또 중요한 불교의 행복 추구 방식은 자신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타인을 도움으로써 나의 행복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나의 욕심을 덜어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조성택, 2004년 03월 10일, 불교평론)

 

 

조성택교수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의 행복이다. 그래서 자신의 글에서 “불교의 근본 취지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즉 고를 떠나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고나 무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출가 중심 불교의 산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조성택류는 이를 출가자의 불교라고 한정하면서 행복의 불교를 강조한다. 그래서 욕망을 비워가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출가자중심의 불교를 비판하면서 일상의 행복을 논한다는 것은 마치 빈대를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 같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에 있는 것이지 하향평준화된 일상적 행복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목구멍 포도청론

 

이렇게 재가불자가 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궁극적 행복론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어떤 이들은 목구멍 포도청론을 말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지금 고통받고 있는 뭇삶들에게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말들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뜻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상하게 들리는 해탈열반론을 이야기하면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가 하면, 또 전혀 현실에 맞지 않는 쓸데 없는 이야기로 취급한다.

 

목구멍 포도청론자들은 출가자에게나 적합한 해탈열반이라는 말을 재가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고도 말한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조성택류처럼 행복론에 기반하여 가르침을 하향평준화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기 때문에 비록 재가의 삶을 힘겹게 살고 있는 뭇삶일지라도 목표는 크게 가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하향평준화된 행복론만을 재가자에게 강조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뭇삶들에게 행복론을 강조하였을 때 어떤 문제가 있을까?

 

행복은 느낌이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고 하였을 때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가장 수승한 경지는 락(sukha)에 대하여 적멸위락과 같은 열반의 경지를 보는 것을 말한다.

 

열반의 경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열반에 들어간 자는 있어도 열반을 성취한 자는 없다고 한다. 열반에 들면 산냐(지각)와 웨다나(느낌)가 소멸 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열반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열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 선정삼매에서 행복(sukha)를 맛보면 모를까 상과 수가 멸한 열반에 대하여 열반락이라고 보는 것은 모순이다. 무상, , 무아, 더러움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보는 전도된 지각을 가진자가 하는 소리라 보여진다.

 

초기경전에서는 락은 대부분 눈과 귀 등 오욕락과 관계된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십이연기에 있어서 느낌에 대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katamā ca bhikkhave tisso vedan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imā vuccanti bhikkhave tisso vedan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의 느낌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이다.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란 이러한 것이다.

 

(Aṭṭhasatapariyāyasutta- 백여덟 가지에 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2,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즐거운 느낌(sukhā vedanā), 괴로운 느낌(dukkhā vedan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adukkhamasukhā vedanā)이다. 여기서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 수카웨다나(sukhā vedanā)’이다. 수카라는 말이 즐겁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즐겁다라는 말이 한자어로 이고 또 다른 말로 행복이라 한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라는 말대신 행복한 느낌으로 바꿀 수 있다.

 

다섯 가지 느낌이 있는데

 

그런데 행복한 느낌은 또 두가지로 나뉜다. 다음과 같은 근거가 되는 가르침이 있다.

 

 

Katamā ca bhikkhave pañca vedanā: sukhindriya dukkhindriya somanassindriya domanassindriya upekkhindriya, imā vuccanti bhikkhave pañca vedanā.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의 느낌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만족한 느낌, 불만의 느낌, 평정한 느낌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느낌이란 이러한 것이다.

 

(Aṭṭhasatapariyāyasutta- 백여덟 가지에 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2,전재성님역)

 

 

세 가지 느낌에서 두 가지가 추가 되었다. 그것은 만족한 느낌 (somanassindriya)과 불만의 느낌(domanassindriya)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즐거운 느낌(sukhā vedanā)괴로운 느낌(dukkhā vedanā)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 따르면 즐거운 느낌(sukhā vedanā)육체적인 행복에 대한이고, 만족한 느낌 (somanassindriya)정신적 행복에 대한 것이라 한다. 괴로운 느낌(dukkhā vedanā)육체적 괴로움에 해당되고, 불만의 느낌(domanassindriya)정신적 괴로움에 속한다고 한다. 이렇게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섯 가지 느낌에서 평정의 느낌(upekkhindriya)’이 있다. 이는 세 가지 느낌에 있어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adukkhamasukhā vedanā)’에 대비 된다. 다섯 가지 느낌에서 평정한 느낌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다름아닌 사선정에서의 평정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다섯 가지 느낌은 모두 네 가지 선정상태에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수카인드리야(sukhindriya)에 대하여

 

다섯 가지 느낌에서 번역을 보면 즐거운 느낌이라 하였는데, 빠알리어를 보면 수카인드리야(sukhindriya)’라 되어 있다. 수카웨다나가 아닌 것이다.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And what, bhikkhus, are the five kinds of feelings? The pleasure

faculty, the pain faculty, the joy faculty, the displeasure faculty,

the equanimity faculty. These are called the five kinds of feelings.

 

(S36.22, 빅쿠보디, CDB 1280p)

 

 

빅쿠 보디는  기능(faculty)’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빠알리어 인드리야기능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기능을 뜻하는 faculty’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수카인드리아(sukhindriya)에 대하여 The pleasure faculty(즐거움의 기능)’이라 번역하였다. 초불연의 각묵스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평온의 기능[捨根]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상윳따 니까야, 백팔 방편 경, S36:22,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은 수카인드리아(sukhindriya)에 대하여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의 번역한 기능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육체적‘[樂根]’을 추가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수카인드리아(sukhindriya)에 대하여 즐거운 느낌이라 번역하였다. 인드리야가 기능 또는 능력이라는 뜻이 있음에도 느낌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각주에 설명되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세 가지 느낌의 연장선상에서 용어의 통일을 기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외관상 보기에 오역으로 보인다. 전재성님의 번역 방식대로 한다면 즐거운 능력으로 번역했어야 하지 않을까?

 

다섯 가지 느낌을 표로 만들어 보면

 

부처님은 세 가지 느낌과 다섯 가지 느낌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런데 빠일리어를 보면 쓰임새가 다르다. 다섯 가지 느낌에 대하여 각 번역자의 번역용어를 참고하여 표를 만들었다.

 

 

다섯 가지 느낌

느낌

전재성님

각묵스님

빅쿠보디

sukhindriya

즐거운 느낌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The pleasure

faculty

dukkhindriya

괴로운 느낌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the pain faculty

somanassindriya

만족한 느낌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the joy faculty

domanassindriya

불만의 느낌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the displeasure faculty

upekkhindriya

평정한 느낌

평온의 기능[捨根]

the equanimity faculty

 

 

표를 보면 다섯가지 느낌은 기능(indriya)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세 가지 느낌을 세분화 하여 다섯 가지로 만들었는데, 이는 선정수행에 대한 것으로 본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평정한 느낌의 차이는?

 

특히 다섯 번째의 우뻭카인드리야의 경우 평정 또는 평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선정에 있어서 평온을 말한다. 네 번째 선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 atthagamā adukkha asukha upekhāsatipārisuddhi catuttha jhāna upasampajja viharati. Aya vuccati bhikkhave, sammāsamādhīti.

 

행복도 고통도 버려지고,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든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집중이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팔정도에서 네 번째 선정에 대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upekhāsatipārisuddhi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이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upekhāsatipārisuddhi에 대하여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고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우뻭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에 대하여 한자어 捨念淸淨(사념청정)’이라 한 것이다.

 

다섯 가지 느낌과 세 가지 느낌은 다른 것이다. 특히 세 가지 느낌에 있어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adukkhamasukhā vedanā)’과 다섯 가지 느낌에 있어서 평정한 기능(upekkhindriya)’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같은 평정일지라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에 따른 평정함은 어리석고 아둔한 평정이다. 조건에 따라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 아니면 괴로운 느낌이 되기 쉽다. 그러나 다섯 가지 느낌에서 보는 평정한 기능(upekkhindriya)’은 사선정을 유지하는 한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가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평온한 마음이라도 선정상태에 들었을 때의 평온과 선정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의 평온은 천지 차이가 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유

 

선정상태를 유지하는 한 희열(piti)과 행복(sukha)과 평온(upekkha)을 맛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정을 벗어나면 모두 다 깨진다. 단지 선정상태에서 희열과 행복과 평온을 맛 본 것은 일시적 느낌이다. 그래서 일시적 해탈이라 한다. 이런 일시적 해탈은 일반적으로 세간적 마음으로 분류 된다. 반면 출세간의 마음은 사향사과의 마음이다.

 

그런데 선정상태가 아닌 세 가지의 마음이 있다. 이는 일상적인 마음이다. 일상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마음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조건에 따르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 행복(sukha)한 마음이었다가도 금새 괴로운 마음으로 변한다. ‘변덕이 죽끓듯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즐거운 마음, 행복한 마음일지라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선정삼매에서 행복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정에서 벗어나면 그 행복이 그대로 유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행복(sukha)은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행복한 느낌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조건에 따라 끊임 없이 변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Pathamaruparamasutta-형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136,전재성님역)

 

 

 

 

 

 

 

 

Bo tree

 

 

부처님은 즐겁다고 하는 것을 괴롭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느낌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즐거운 마음, 즉 행복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에 따라 마음이 변한다. 그래서 변덕이 죽끓듯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마음이 변한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왕복한다. 설령 선정상태에서 지고의 행복을 누렸을지라도 그 때 뿐이다. 일시적 해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한 느낌은 변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고, 변하기 때문에 결국 괴로운 것이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너도 나도 행복에 대하여 말하지만

 

사람들은 느낌에 목숨을 건다. 순간적인 즐거운 느낌에 올인하는 것이다. 그 즐거운 느낌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행복을 말한다. 지금 행복한 자는 더욱 더 행복하기를 바라고, 지금 불행한 자는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 나도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런 그런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변하기 쉽고 부서지기 쉽다. 그런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2013-11-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