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비폭력에 대한 사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11. 21:53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비폭력에 대한 사유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싫어 한다. 그래서 폭력없는 세계에서 살고자 한다. 그런 폭력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신체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폭력하면 두둘겨 패거나 흠씬 얻어 맞는 것을 연상한다. 그러나 반드시 신체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준다.

 

 

“Akkocchi ma avadhi ma      악꼿치 망 아와디 망

ajini ma ahāsi me”,           아지니 망 아하시 메
Ye ta
upanayhanti               예 땅 우빠나이한띠

vera tesa na sammati.         웨랑 떼상 나 삼마띠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법구경, Dhp3, 전재성님역)

 

 

 

 

 

법구경 3번 게송이다.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은 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담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Dhp1)”라고 게송이 시작된다. 그런데 두 번째 쌍으로 된 것이 폭력에 대한 것이다.

 

3번과 4번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Akkocchi ma avadhi ma,Dhp3)”로 시작 된다. 이렇게 법구경 426개의 게송 가운데번 째와 네 번째에 폭력과 적의에 대한 것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비폭력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게송에서는 욕하는 것과 때린 것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폭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신체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것만이 아님을 말한다. ‘욕하는 것(Akkocchi)’도 폭력으로 보는 것이다. 언어폭력을 말한다.

 

이렇게 폭력에는 신체적폭력과 언어폭력이 있다.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면 몸에 흔적이 남지만 언어폭력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게 된다. 이런 상처는 신체적 폭력이 가장 크고 그 다음 언어폭력이 될 것이다.

 

폭력을 당한 자가

 

그런데 게송을 보면 폭력을 가한 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폭력을 당한 자가 적대감을 품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Ye ta upanayhanti vera tesa na sammati, Dhp3)”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Ye ta upanayhanti : DhpA.I.44 에 따르면, 신들이나 인간이나 재가신도나 승려들이나 그들이 누구이건 원한을 품으면, 즉,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는 생각에 근거한 반복적인 원한을 품으면, 수레의 축을 가죽끈으로 감싸거나 썩은 생선을 새끼줄로 묶은 것과 같이, 적의가 그 사람들에게 일어날 때 진정되지 않는다.

 

(Ye ta upanayhanti  각주, 전재성님역)

 

 

각주에 따르면 반복적인 원한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매를 맞고 욕설을 들은 자가 상대방에 대하여 원한의 감정을 품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때리고 욕을 한 자에 대하여 악한 감정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적의(敵意)’라고 하였다. 적대감 또는 적개심을 말한다.

 

이런 적의는 성냄과는 달리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단지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계기로 그 사람이 생각날 때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아나 진정되지 않고 부르르 떨듯이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와 같은 반복적으로 원한을 품는 것에 대하여 수레의 축을 가죽끈으로 감싸거나 썩은 생선을 새끼줄로 묶은 것과 같이라 하였다. 여기서 수레의 축을 가죽끈으로 감싸는 것에 대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다만 썩은 생선을 새끼줄로 묶은 것의 의미는 반복적으로 원한을 가지면 가질수록 썩은 냄새만 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악한 감정을 품는 자의 옆에 있으면 악취가 나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구경 3번 게송을 보면 때린 자와 욕설한 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맞은 자가 품는 악감정, 반복적인 원한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악한 감정을 품으면 품을수록 눈에는 독기를 뿜고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해지기 때문에 해로운 마음으로 인하여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부부싸움 네 단계

 

신체폭력 못지 않게 언어 폭력도 무섭다. 비록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오로지 입으로만 전쟁을 치룰지라도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다. 입에 칼을 물고 싸우는 듯한 모습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부부싸움에서 이다. 그렇다면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어떤 모습일까? 불교TV사이트에서 김송호 박사의 강의에서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불교방송 이사회 막말퍼레이드, 누구책임이 더 큰가’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부부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가트만 박사는 3,000쌍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설문조사가 1년동안 행태를 파악하였는데, 외곽에 집을 지어 놓고 CCTV를 설치하여 자원자를 받아 생활하게 한 것이다. 분석한 결과 싸움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난-경멸-방어-담쌓기’ 이렇게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째, 비난단계이다

 

남자들의 경우 “당신 왜 맨날 하는 게 그 모양이야?”라고 말하거나, “하루종일 집구석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와 같은 비난의 말을 퍼붓는다. 이렇게 말할 때 여자들은 어떻게 말할까. 여자들의 경우 “아니 말하는 것이 당신 엄마를 꼭같이 닮았어?” 라든가 “왜 하는 것이 없어? 당신이 그러니까 애들도 나를 깔보지” 라고 받아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부싸움에서 비난단계라 한다.

 

둘째, 경멸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웃기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해?” 라고 말한다. 또 여성의 약한 부분, 예를 들면 정치나 사회현안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 대응을 잘 못하면 “야, 그것도 모르냐?”라고 면박을 준다. 좀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머리는 뒀다가 국 꿇여 먹어?” “그런건 네가 잘 보는 TV에는 안나오디?” 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멸하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열받기 시작한다. 여자의 경우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있어?” “아니, 꼴에 남자라고” 이렇게 남자를 깔아 뭉게는 발언을 한다. 이 단계가 경멸의 단계이다.

 

셋째, 방어단계이다

 

자기방어의 단계라 한다. 예를 들어 여자가 “당신은 맨날 그 모양이야?” “왜 맨날 술만 먹어?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라고 공격하면, 남자들은 “내가 맨날 그랬다고 그래” “일주일에 다섯 번 밖에 안했어” 라고 말하면서 방어모드로 들어간다.  그래도 계속 비난을 하면 “당신은 그러는게 문제야” “당신은 안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방어단계이다. 이제 막판으로 가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당신이나 잘하셔” “그래, 나 이러는 거 이제 알았어?” “나, 원래 그런사람이야!” 라고 말하면서 대든다. 위험수위에 온 것이다.

 

넷째, 담쌓기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일절만 해라, 일절만 응?” 라든가 “알았어, 됐어, 이제 그만해!” 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알았거든!” “됐거든!” 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담쌓기이다. 가장 위험수위가 높은 단계이다. 담쌓기 단계에 들어서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표현을 할 수 없다. 그 다음 부터는 각자의 길로 가게 된다. 문제가 심각해지는 단계이다.

 

이렇게 부부싸움에는 네 단계가 있다. 오로지 세치 혀로 싸우는 부부싸움에서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 순서로 점차 높아 진다는 것이다. 이런 부부싸움에서 도끼나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입으로 상대방을 난타하고 난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 인간(사람)을 볼 때마다

 

폭력에는 신체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폭력을 가한 자 보다 폭력을 당한 자의 원한에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폭력을 가한 자는 자신이 가한 폭력에 대하여 잊어 버릴 지 모르지만, 폭력을 당한 자는 끝까지 잊어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 생각이 떠 오를 때마다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적개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적의 자체가 매우 해로운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Akkochi ma avadhi ma         악꼿치 망 아와디 망

ajini ma ahāsi me              아지니 망 아하시 메

ye ce ta nupanayhanti          예 짜 땅 누빠나이한띠

vera tesūpasammati              웨랑 떼수빠삼마띠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진다.

 

(법구경, Dhp4,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부처님은 적의를 품지 말라고 하였다. 비록 상대방에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폭력을 당했을지라도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악한 감정을 품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의가 사라졌을 때 원한 역시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생각하는 반복적인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반복적인 원한이다. 일시적인 원한이 아니라 ‘그 인간(사람)’을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아웨라 혼뚜(averā hontu, 증오를 여의어지이다)”

 

그 인간을 볼 때 마다, 그 인간이 생각날 때 마다 적개심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반복적인 원한을 품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를 때리고 욕한 자에 대하여 그 인간이 사죄를 하지 않는 한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나에게 폭력을 가한 그 인간이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리가 없다. 그 인간에게 반복되는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원한이 사라지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Na hi verena verāni              나 히 웨레나 웨라니

sammantīdha kudācanam            삼마나띠다 꾸다짜낭

averena ca sammanti              아웨레나 짜 삼만띠

esa dhammo sanantano             에사 담모 사난따노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

 

(법구경, Dhp5, 전재성님역)

 

 

법구경 5번 게송에서는 ‘원한의 여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원한을 원한으로서 갚는다고 하여 원한이 풀리지 않음을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침이나 코가 묻은 오점을 동일한 것으로 씻는다면 깨끗해질 수 없는 이치와 같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원한을 원한으로 앙갚음하면 오히려 서로 적대감만 증대시켜 사태가 더욱 악화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부부싸움에서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 순서로 전개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averena ca sammanti)”라 하였다.

 

여기서 빠알리어 averenaavera + ena로서, 아웨라(avera) ‘friendly, kindness, みなき(원한 없음), 恚心なき(성내는 마음 없음)’의 뜻이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애송(The chant of Metta)’을 보면 “아웨라 혼뚜(averā hontu, 증오를 여의어지이다)”라고 발원 하는 것이다.

 

누구나 폭력을 싫어 한다

 

원한의 여읨은 쉽지 않다. 나에게 폭력을 가한 그 인간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부처님은 원한을 여의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정도에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있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sakappo: yo kho bhikkhave, nekkhammasakappo avyāpādasakappo, avihisāsakappo, aya vuccati bhikkhave, sammāsakapp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2)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3)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팔정도 정사유에서 세 번째 항목이 폭력을 여읜 사유(avihisāsakappo)’이다.  아위힝사산깝뽀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해코지 않음[불해(不害)] 에 대한 사유’라 하였다. 여기서 빠알리어 avihisā는 ‘humanity, absence of cruelty, Mercy, 不害, 無害, 不殺生’의 뜻이다. 비폭력을 뜻한다. 그래서 아위힝사산깝뽀(avihisāsakappo)는 비폭력의 사유, 폭력을 여윈 사유, 불해의 사유, 불살생의 사유의 뜻이 된다.

 

폭력을 가한 자나 폭력을 당한 자나 모두 피해자

 

불교에서는 폭력과 살생에 반대한다. 이는 다름 아닌 오계에서의 불살생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자여,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41, 전재성님역)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은 폭력이다. 폭력을 행사 하였을 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늘 마음속에 원한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두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경험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폭력을 행사 하는 자들은 폭력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서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 하였다.  폭력 행위 등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 문득문득 떠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해질 무렵 거대한 산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일어난 죄의식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 것이라는 말이다.

 

악행을 저질렀을 때 피해 갈 수 없다.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산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어두운 과거의 악행에 압도당하고 말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폭력을 가한 자나 폭력을 당한 자나 모두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가상세계에서의 폭력

 

나에게 욕을 하고 나를 때린 사람이 있다. 이런 폭력이 현실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현실세계와 사이버세상을 들락 거리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상세계에서의 폭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익명을 전제로 하여 오로지 아이디와 필명으로만 소통 되는 사이버 세상에서 언어폭력이 난무한다. 마치 입에 도끼를 물고 태어났듯이, 마치 입에 칼을 물고 있는 듯이 마구 언어 폭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우 상대방으로부터 좋지 않은 경험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얻은 것이 있다면 칭찬하지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입에 칼을 물고 공격한다. 그리고 비난과 비방을 퍼 부어 댄다. 이에 대하여 묘원법사는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난

 

 

세상을 바르게 사는 방법 중의 하나가

비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누구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말이 없다고 비난받는다.

 

말을 하면

말이 많다고 비난받는다.

 

필요한 말을 하면

필요한 말만 한다고 비난받는다.

 

바른 행동을 하면

잘난체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

나쁘다고 비난을 받는다.

 

이름 없이 살아도 비난을 받고

이름이 나면 더 비난을 받는다.

 

살인을 한 범죄자도 비난을 받지만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는 더 많은 비난을 받는다.

 

비난을 받고 똑같이 상대를 비난하면

상대와 내가 같은 사람이다.

 

상대의 비난을 상대의 일로 두고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비난, 묘원법사)

 

 

비난이라는 글이다. 글에서 말을 해도 비난 받고 말을 하지 않아도 비난 받는다고 하였다. 또 말을 길게 해도 비난 받고 짧게 하면 짧게 한다고 비난받는다고 하였다. 해코지 하려는 자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비난 하기 때문에 차라리 상대하지 않은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한다. 이글은 법구경의 다음과 같은 게송과 유사하다.

 

 

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법구경 Dhp227)

 

 

이렇게 세상에는 비난 받지 않는 사람이 없다. 비난 하는 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

 

그렇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면 칭찬하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좋은 예가 있다. 어느 법우님이 올려 주신 글이다.

 

 

저 같은 경우에는 묘원법사님의 카페를 통해서 배운 것 단 하나, 마음을 호흡에 머무는 것을 연습하거나 단순히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만으로도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특히 제 같은 경우는 아상(특히 자존심)이 높아서, 사소한 것으로부터 큰 것까지 마음이 불편하거나, 괴로운 적이 많았는 데, 순간의 이러한 불선법을 알아차리는 힘이 조금이나나 생겨남으로 인해서, 그 괴로움이 다 없어지지는 않지만, 그 크기가 작아짐을 느끼며, 괴로움의 강도가 점점 흐릿해짐을 느낌니다.

이러한 작은 수행의 힘을 느낄때 마다, 부처님의 여기와서 보라는 말씀에 피부가 와 닿더군요.
자연히 부처님의 말씀을 믿게 되면서, 보시, 지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구요.

과연,믿음, 지계, 보시만으로 이러한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까요. 저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미국의 병원에서, 그 효과가 증명된, MBSR 이라는 위빠사나 일종의 명상도, 그 실용성에 있지 않을 까 싶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는, 고통, 괴로움에서,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단순하고도 바로 알 수 있는 수행, 위빠사나수행이 아닐 까 싶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담마)에는 재가자 출가자 차별이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극히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수행을 하지 않는 채, 믿음, 지계, 보시만으로 부처님의 진정한 의의를 깨닫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티가 수없이 많고, 지혜가 너무나도 부족한 재가자이지만, 최종의 목표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열반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왜냐하면, 열반을 추구하지 않은 이상, 끊임없는 윤회의 괴로움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

__()__     

 

(B법우님)

 

 

B법우님은 도움을 받은 케이스에 해당된다. 이렇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칭찬을 한다. 그러나 상대방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입에 칼을 물게 된다.

 

그 동안의 구업에 깊이 참회하며

 

보통불자가 인터넷에 글을 쓰면서 많은 구업을 지었다. 한 번 뱉어진 말을 주어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내 뱉어진 문자들은 사이버세상을 둥둥 떠 다닐 것이다. 그래서 인연이 되면 누군가의 읽어 보게 되고 영향을 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보게 될지.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정어(正語)를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혹시라도 글쓰기로 인하여 누군가 피해를 보았다면 용서를 빈다. 그리고 깊이 참회한다. 비록 누군가 나를 욕하고 때렸을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원한을 품지 않겠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위힝사산깝뽀(avihisāsakappo), 폭력을 여윈 사유를 해 본다.

 

 

 

2013-1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