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석양의 단풍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9. 11:23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석양의 단풍

 

 

불과 몇 일 만에 세상이

 

단풍이 절정을 치닫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붉게 물든 단풍을 본다. 이제까지 도시의 가로와 공원은 녹색일색이어서 항상 그런 색깔인 줄 알았으나 어느 날 고개를 돌려 보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

 

불과 몇 일 만에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선과 각으로 이루어진 삭막하기 그지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어 당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울굿불굿 또 노랗게 물든 나무에서 새로운 옷을 입은 도시의 모습을 본다. 이는 다름아닌 자연의 놀라운 기적이다.

 

한 곳에 오래 살다 보니

 

한 곳에 오래 살다 보니 관찰력이 생겼다. 더구나 글쓰기가 일상화 되다 보니 현상에 대하여 유심히 살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계절의 변화에 대하여 카메라에 담고 감상문을 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렇게 울굿불굿 노랗게 단풍이 절정을 이룰 때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디카에 담아 둔다.

 

 

 

 

 

 

오래 된 아파트는 갈수록 망가져 간다. 그러나 오래된 아파트 가로와 정원에 심어져 있는 나무는 갈수록 무성해진다. 아파트 단지는 낡아 가지만 숲은 더욱 우거져 오래된 아파트를 압도하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만든 그 순간부터 중고로 변해 가지만 생명이 있는 나무는 생장을 거듭하여 성장한다. 이렇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엔트로피(Entropy)와 네겐트로피(Negentropy)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그 순간부터 엔트로피(Entropy)’법칙의 적용을 받아 무너지고 부수지고 사라지고 말지만,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들은 발육하고 성장하고 번성하게 되어 네겐트로피(Negentropy)’법칙이 적용된다. 그래서 건물이 낡아져 가는 것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고, 반대로 숲이 더욱 더 우거져 가는 것은 무질서에서 질서로더욱 더 자기조직화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늘 이맘 때 단풍을 보면서 자연의 극적인 변화에 주목한다. 불과 몇 달전에 주목하였던 벚꽃 나무가 이제는 옷을 바꾸어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늘 걸어 다니는 생태하천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은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다. 그리고 늘 극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결과는 어떤 것일까?

 

늘 다니던 길에 은행나무가

 

늘 다니던 길에 은행나무가 있다. 도시의 가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수 년간 같은 길을 걷다 보니 은행나무의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년 365일 늘 같은 길을 수년간 다니다 보니 은행나무에서 발생되는 작은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도시에서 봄을 알리는 전령사는 개나리와 벚꽃이다. 일반적으로 3월 말에 개나리가 먼저피고 이어서 4월 초에 벚꽃이 피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즘은 개나리와 벚꽃이 거의 동시에 피는 것 같다. 그래서 4월 중순이 되면 어김 없이 세상은 노랗고 하얗게 물든다.

 

그런데 진짜 봄을 알리는 전령사는 은행나무이다. 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벚꽃과 달리 은행나무는 가로와 도로 곳곳에 있다. 그래서 은행나무에서 싹이 났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 되었음을 의미한다. 은행나무에서 일제히 파란 싹이 나올 때 신록이 시작되는데 그 때가 대략 4 20일 전후이다.

 

은행나무는 4 20일을 전후하여 일제히 싹이 나온다. 어느 것은 일찍 나오고 또 어느 것은 늦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도시의 가로는 한순간에 변해 버린다. 어느 날 고개를 들어 쳐다 보면 앙상한 가지에서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은행나무는 극적으로 변신한다.

 

그렇다면 은행나무가 잎을 달고 머무는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은행나무잎은 대략 11 20일 전후하여 떨어진다. 따라서 은행나무에서 잎을 볼 수 있는 기간은 정확하게 7개월 간이다. 일년 열두달 중에서7개월간은 잎이 무성하여 옷을 입고 있지만, 나머지 5개월간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벌거벗은 채로 있게 된다.

 

은행나무에서 잎이 질 때

 

은행나무에서 잎이 질 때 우수수 떨어진다. 마치 비오는 것처럼 후두둑떨어진다. 실제로 경험한 것이다. 언젠가 승용차가 은행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승용차 천장에 후두둑하며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거센 비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은행나무는 어느 날 일제히 잎이 났다가 어느 날 일제히 잎이 진다. 그것도 잎파리 하나 남겨 두지 않은채 모두 떨어진다. 그래서 낙엽이 진 은행나무를 보면 앙상하기만 하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파리 하나 남지 않는 앙상한 가지의 은행나무만 보게 된다.

 

도시를 풍성하게 하였던 은행나무 단풍이 절정이다. 어떤 은행나무는 아직 녹색을 유지 한 것도 있지만 또 어떤 것은 유독 진노랑으로 짙게 물들어서 눈길을 끈다.

 

 

 

 

 

이렇게 노랗게 물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 잎이 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략 11 20일 전후하여 일제히 지기 때문에 단풍을 감상 할 수 있는 기간은 불과 10여일 밖에 남지 않게 된다. 

 

죽을 까봐 벌벌 떠는

 

지금 보는 노랗고 빨갛게 울긋불굿 단풍은 오래지 않아 지고 말 것이다. 단풍이 들었다는 것은 이제 떨어질 날이 몇 일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고 하는 것과 같다. 울긋불긋 절정을 치닫고 있는 단풍은 앞으로 일어날 운명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머리가 하얕게 세었다는 것은 수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예고 하는 것 같다. “생겨난 것은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제행무상의 법칙에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1.

Animittamanaññāta maccāna idha jīvita,
Kasirañca parittañca tañca dukkhena saññ
āta.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2.

Nahi  so upakkamo atthi yena jātā na miyare,
Jarampi patv
ā maraa evadhammā hi pāino.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3.

Phalānamiva pakka na pāto patanato bhaya,
Eva
jātānamaccāna nicca maraato bhaya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4.

Yathāpi kumbhakārassa katā mattikabhājanā,
Sabbe bhedanapariyant
ā1- eva maccāna jīvita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5.

Daharā ca mahantā ca ye bālā ye ca paṇḍitā,
Sabbe maccuvasa
yanti sabbe maccuparāyanā.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n3.8)”라 하였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해도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을 까봐 벌벌 떠는 것이다.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옹기는 깨어질 운명에 있듯이 사람 역시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Sn3.8)”라 하였다. 이는 누구든지 죽음으로 귀결 되는 운명적 파탄을 암시한다.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석양의 단풍

 

울긋불긋 노랗고 빨갛게 단풍진 나무들을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라도 진홍색으로 유독 진하게 물든 단풍이 있다. 그래서 마치 불타는 듯이 보인다. 같은 은행나무라도 어느 것은 진노랑색으로 유독 밝게 보이는 것이 있다. 이렇게 빛나는 단풍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런데 이런 진홍색 단풍과 진노랑의 은행이 저녁 햇살에 비칠 때 매우 눈이 부신다. 석양에 비치는 단풍나무를 보면 마치 호숫가에 비친 물결처럼 반짝 거린다. 이렇게 해질 무렵 석양에 비치는 단풍은 빛난다. 그러나 단풍이 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듯이 석양의 햇볕 역시 비칠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새빨갛고 진노랑으로 빛나는 단풍을 석양에 보면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다. 절정을 향해 치닫지만 곧바로 이어질 파국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시세분출과 추풍낙엽

 

무엇이든지 생겨나는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 하였다. 그런데 꺼지기 전에는 대게 절정으로 치닫는다. 마치 주식시장에서 시세분출을 보는 것 같다.

 

주식이 상승할 때는 한 없이 상승할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너도 나도 사자고 덤벼든다. 정부에서 허가한 국민도박장이나 다름 없는 주식시장에서 개미투자자가 몰려 들 때 주식시장은 한껏 달아 오른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으고 심지어 빚을 내어서 개미들이 주식에 참여 하였을 때 파국은 점차 다가온다. 이런 조짐이 보이면 노련한 투자자들은 물러 설 때가 되었음을 안다. 마치 지진과 같은 큰 재앙을 앞두고 쥐떼들이 집단으로 이동하듯이 개미투자자가 달려 들었을 때 주식시장이 끝나감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미투자자들은 마치 불나방처럼 달려 들어 주식시장이 한껏 달아 오른다.

 

개미투자자의 가세로 인하여 주식시장이 후끈 달아 올랐을 때 마침내 시세분출을 한다. 가파르게 상승하다 시세분출을 하여 최고가를 기록한다. 하지만 시세분출이 끝나면 주식시장은 그 순간부터 그대로 고꾸라진다. 그것도 기약없는 가파르게 하향세이다.

 

단풍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눈부시게 빛나는 단풍 역시 시세분출하는 것과 같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것이다. 그러다 잎파리를 유지 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질 때 맥없이 떨어진다. 더구나 세찬바람까지 몰아치면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된다. 이렇게 무엇이든지 절정으로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파국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선종에서는 족함을 알라고 하였다. 소욕지족의 생활을 말한다.

 

료안지(龍安寺) 돌정원(石庭)

 

지난해 일본 여행에서 료안지(龍安寺)에 갔었다. 쿄오토에 있는 일본전통사찰이다. 료안지는 선종사찰로서 돌정원(石庭)’으로 매우 유명하다. ‘카레산스이(枯山水)’ 양식이라 불리우는 돌정원의 특징은 비어 있는 것이다. 다 채우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돌정원에 놓여 있는 돌의 개수를 세어 보면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항상 14개로 보인다.

 

다채워짐을 의미하는 보름은 15라는 숫자이다. 그래서 돌정원에서는 15개의 돌이 놓여 있다. 그러나 어느 방향에서 보든 돌이 하나 숨겨져 있어서 14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모두 15개의 돌은 정원의 어느 곳에서 쳐다 보아도 반드시 한 개는 다른 돌에 숨겨져 볼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중앙의 위치 오직 한곳만 15개의 돌 전부 불수 있는 것이다.

 

Gert Van Tonder and Michael Lyons’에 따르면 고승의 처소에 중심이 있고 15개의 돌 배치는 이곳을 근원으로 한 이분기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단 이정도의 면적의 정원에 15개의 돌을 배열하면 그 중 1개는 숨겨져 보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이것을 표현의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찬반양론이 있다. , 동양에서는 십오야(만월)에 해당하는 15라는 숫자를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 15 1개 부족한 14는 불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일본동조궁의 양명문에 보여지는 것과 같이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 라는 사상이 있고, 건조물을 일부러 불완전한 채 해 놓는 것이다.

 

(龍安寺, 위키백과)

 

 

 

 

 

일본어판 위키백과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라고 한다. 그래서 덜 완성된 채로 보이기 위한 것이 료안지의 돌정원이다. 보름으로 상징되는 15는 완전함을 의미하지만 15일이 지나면 달은 이지러질 것이기 때문에 붕괴로 본다. 따라서 절정에 이르기 바로 이전, 14에서 멈추게끔 보여지게 하는 것이 돌정원의 포인트이다.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엑스터시(절정)라는 말은 동양사상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채워진 것 보다 덜 채워진 상태를 더 선호 하는 듯하다. 다 채워지면 넘쳐나고 깨어지고 분출하고 고꾸라질 것이기 때문에 채워지기 이전, 즉 보름달 보다 보름달 바로 이전의 상태를 더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단풍을 보면 이제 시세분출을 눈 앞에 둔 주식시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새로 지은 아파트가 그 순간 부터 낡아지고, 새로 산 제품이 그 순간 부터 중고로 변하듯이 모든 것은 완성된 시점에서 붕괴가 시작 된다.  한번 크게 솟구쳤다가 맥없이 고꾸라지고 마는 것처럼, 황혼녁에 불타듯이 빛나는 단풍을 보면 눈물찬란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세상의 무상함과 자연의 무상함을 느낀다.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노인을 보면

 

지는 낙엽을 보면 무상함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노인을 보면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렇게 세월은 우리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래서 파국으로 몰고 간다.

 

누구나 인생무상, 자연무상을 느낀다. 그러나 범부들이 느끼는 것과 현자들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자아에 대한 것이다.

 

범부들은 기뻐도 내가 기쁘고 슬퍼도 내가 슬프다고 여긴다. 그래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을 때 내마음이 쓸쓸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 났을 때 아파도 내마음이 아픈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여 돌아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불자들은 나에 대하여 오온으로 본다. 낙엽을 보았을 때 색수상행식의 화합으로 되어 있는 오온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져서 무상함을 오온이 아는 것이다. 그래서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오온이 슬픈 것이다.

 

그 때 그 상황에서 슬퍼할 만한 조건이 일어난다. 그런 슬픔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다.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은 조건이 다 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석양에 비친 찬란한 낙엽을 보면서 눈물이 날 듯 하지만 이는 내가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조건에 따른 오온이 눈물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Sn3.8)”라 하였다.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낙엽이 떨어지고야 만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존재는 죽음을 맞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다음과 같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할 것을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너,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한다.

 

(Dutiya maraasati sutta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2, 앙굿따라니까야 A6:20, 전재성님역)

 

 

지금 잠이 들었을 때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시작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밤이 왔을 때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라고 하였다. 차를 타고 가다 뒤에서 박아서 죽을 수도 있고, 길거리를 지나다 간판이 떨어져서 즉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의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아느냐?(M131)”라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인생의 절정기라 하여 죽음은 나와 관계가 없는 먼나라의 일은 아닐 것이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파국이 멀지 않았듯이 석양의 햇볕에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단풍에서 찬란한 슬픔을 본다.

 

  

2013-11-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