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절필 안 하면 다친다고? 어느 재가법사의 협박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4. 16:21

 

절필 안 하면 다친다고? 어느 재가법사의 협박

 

 

 

거의 매일 글을 쓴다. 어떤 날은 두 편씩 쓰는 경우도 있다. 일이 바쁘면 거르는 날도 있다. 어쨋거나 틈만 나면 글을 쓴다. 글을 쓰되 원칙이 있다. 가급적 개인적인 이야기 보다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이다. 그래서일까 찾아 오는 이들이 많다.

 

빚진 것이 없기에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 놓고 산지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찾아온 이들의 누적 숫자가 366만명이다. 이처럼 많이 찾아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솔직한글쓰기 때문일 것이다. 재가불자로서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자유롭고 솔직하게 써서 일 것이다. 거기에다 경전을 근거로 부처님의 말씀을 공유하고자 글쓰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셨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도 ~~^^ 가장 순수하게

니까야 경전만을 가지고 오염되지않고 순수한 불교를
하는 곳이~

연꽃님의 블로그 이기에
내생각도
댓글을 달고 참여 할 뿐입니다

그러니 오해치 들~~마시기를!!
(
다른 곳은 여러 이유로 오염됬음^^)

 

(B법우님)

 

 

비록 익명을 전제로 한 사이버세상이지만 이렇게 견해를 밝히는 법우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 그저 방문하여 읽고 갈 뿐이다. 종종 의견을 남길 경우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긍정적인 글 아니면 부정적인 글이다.

 

인사말을 곁들여 긍정적인 글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짤막하게 감사의 글을 남겨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설령 글을 남기지 않고 단지 보기만 할지라도 일종의 무언의 성원을 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악질적인 글도 있다. 사람들의 생긴 모습이 모두 다 다르듯이 성향 또한 다르기에 실로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접하게 된다. 이들이 남긴 글을 보면 대게 부정적인 내용이다. 대부분 글 같잖게생각하는 것이다. 보통불자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고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깍아 내리려 한다. 그런 예를 하나 보았다.

 

절필하지 않으면 다친다고

 

어느 초기불교를 전하는 카페가 있다. 그곳에 글이 매일 올려지고 있는데 타칭 어느 재가법사가 글을 하나 남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연꽃님은 스스로 매일같이 글을 쓰고 올린다고 하더군요.
단 하루도 글을 쓰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고 했습니다만...

옛날부터 말이 많으면 쓸만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말도 적당히 해야 합니다.
'
연꽃님은 매일같이 글을 쓰고 따라서 말도 많아지니 점점 쓰잘데기 없는 말만 늘어 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금 입니다.

스스로 절필을 하시고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 인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듯 하군요...

말이 많으면 스스로 세치 혀에 의해서 회복불능일 정도로 다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S법사)

 

 

글의 요지는 절필하라는 것이다. 매일 쓰잘데기 없는 글만 써서 구업을 짓지 말고 글쓰기를 그만 두라고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글을 쓰면 다친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절필하지 않으면 다친다.”라는 협박이다.

 

참으로 놀랍고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글이다. 소위 초기불교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고 초기불교를 넷상에서 가장 먼저 전파하였다는 타칭 재가법사라는 자가 대뜸 한다는 말이 절필하라고 강요한다. 더구나 절필 하지 않으면 크게 다칠 것이라 한다. 이는 명백한 협박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폭논리와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절필하지 않는다

 

절필하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고 하여 글을 쓰지 않거나, 모욕당하였다고 쓰지 않거나, 누눈가 쓰지 말라협박하였다하여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글쓰기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듯이 글쓰기 역시 생활의 일부분이다. 다만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가르침을 공유하기 위하여 글을 쓴다. 그 어떤 개인적인 이익도 바라지 않는다. 그 어느 곳에도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글을 쓴다. 그럼에도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한다면 지혜의 검으로 단칼에 베어 버릴 것이다.

 

 

 

 

지혜의 검으로 벤다 하여 진짜 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숲을 잘라 버려라. 나무는 말고.(Vana chindatha mā rukkha, Dhp283)”로 설명될 수 있다.

 

숲을 잘라 버려라. 나무는 말고

 

부처님이 숲을 잘라버려라라고 하였을 때 어리석은 자들은 도끼를 들고 진짜 숲을 자를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노파심에서 나무는 말고 (mā rukkha)라 하였다. 잘라 내야 될 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와 같은 번뇌의 ‘숲’이 잘라야할 숲인 것이다. 숲을 자르라고 하였다고 하여 도끼를 들고 나무를 자르는 새내기 수행승들이 나올까 봐 나무는 말고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 번역자들은 나무를 자르고 숲을 자르라.”라는 식이라 한다. 이는 독일 막스 뮐러의 번역을 중역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막스 뮐러는 숲을 자르라. 하나의 나무만이 아니라.”라 하여 나무를 자르라는 식의 번역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은 전세계 대부분 번역에서 보여 지는데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つのををるのではなくて、

(の)れ。からじる。

(の)とその下生えとをって、

()かられたとなれ。修行僧らよ

 

(Dhp283, 中村元)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무 하나를 베지만 말고

(번뇌의) 숲을 베어라. 위험은 숲에서 생겨난다.

(번뇌의) 숲과 그 잡초를 잘라서

(번뇌)으로 부터 벗어난 자가 되어라. 수행승들이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숲을 베라고 하였다. 물론 나무도 베라는 것이다. 비록 괄호를 이용하여 번뇌라는 말을 집어 넣었으나 이는 빠알리 원어인 mā rukkha(나무는 말고)’문구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우리말로 중역한 법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한 그루의 나무를 베는 것에 그치지 말라.

숲을 베라. 번뇌의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니.

수행자들아, 번뇌의 나무를 모두 베어

숲에서 벗어난 자가 되라.

 

(법정스님역)

 

 

법정스님 역시 나무를 베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일역을 중역한 것에 따른 한계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올바른 번역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전재성님의 번역이다.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

 

(법구경, Dhp283, 전재성님역)

 

 

거해스님 역시 정확한 번역을 하였다. 다만 주석적 번역이 단점이다.

 

 

오 빅쿠들이여! 욕망의 숲을 쳐 버려라.

이는 진짜 나무를 친다는 뜻이 아니니

욕망의 숲은 위험을 낳는 것

그것을 뿌리까지 모두 제거하라.

그러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리니.

 

(법구경, Dhp283, 거해스님역)

 

 

거해스님역을 보면 mā rukkha에 대하여 이는 진짜 나무를 친다는 뜻이 아니니라 하여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게송에 실린 듯한 번역을 하였다.

 

미래의 다시 태어남이 되는 땔감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는 모두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경전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는 경우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모두 지혜의 검에 베일 대상이 된다. 여기서 지혜의 검은 진짜 칼이 아니라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혜의 검이다. 그런 지혜의 검으로 불자들은 덤불과 숲을 쳐낸다. 그런 덤불과 숲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은 숲(vana)라 부르고, 작은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은 덤불(vanatha)라 부른다. 또는 먼저 성장한 나무들은 숲이라 부르고, 나중에 성장한 나무들은 덤불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방식으로 미래의 다시 태어남으로 이끄는 커다란 번뇌들을 숲이라 부르고, 현세에서의 지속적인 삶에서 악한 영향을 끼치는 작은 번뇌들을 덤불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고 숲들을 여의어라.’ 즉,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이 양자는 네 가지길(四向: cattaro magga)을 통해서 제거 되기 때문이다.

 

(Dhp283 주석, 전재성님)

 

 

법구의석 각주에 따르면 덤불은 작은 번뇌이고 숲은 큰 번뇌라 설명되어 있다. 이런 번뇌는 미래의 다시 태어남으로 이끄는 땔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숲을 치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팔정도를 닦아 사향사과를 성취함으로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검을 잡고

 

이렇게 번뇌라는 숲은 제거의 대상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검()을 예로 들어 표현 하였다.

 

 

계와 마음이라는 제목아래 표현된 삼매와 세가지 통찰지와 근면함이라는 이런 여섯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계의 땅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 위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빳사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한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버릴 것이다.

 

(청정도론 1, 1장 계)

 

 

청정도론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라는 표현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칼이라 함은 날이 한쪽에만 있는 한날을 말한다. 칼 도()자가 이에 해당된다. 식칼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검이라 함은 두 날이 있는 것을 말한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검()을 말한다.

 

여기 어떤 수행자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있다. 그런데 그 검은 단 칼에 베어 버릴 수 있는 매우 날카롭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벤다는 것일까? 그것은 번뇌라는 덤불이다. 얼키고 설킨 덤불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 검이 바로 지혜의 검이다. 통찰지라는 반야의 검을 두 손에 잡고 난마처럼 얽힌 번뇌를 자르고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릴 것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또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보다 부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해보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 모르는 것을 접하였을 때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위빠사나에 대하여 모르는 자들이 삼매가 최고라 말한다. 빠알리니까야를 읽지 보지 않은 자들은 대승의 가르침이 역시 최고라 한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이라든가 불교는 이고득락의 종교라고 말한다. 불교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왜 행복전도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자살하였을까? 그것도 자신만 자살한 것이 아니라 남편까지 동반자살하게 만들었을까? 행복이 삶의 전부라면 왜 요즘 행복이라는 말 대신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할까?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불교에 대하여, 경전에 대하여 잘 모르는 자들이 가르침을 서슴없이 왜곡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실증이라는 잣대에 의지하여 가르침을 재단하려 한다. 이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무식을 폭로 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가르침을 왜곡하여 삿된 견해를 이야기 하고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한다면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릴 것이다.  지혜의 검은 진짜 칼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201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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