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페르조나의 거짓가면을 벗어라! 비구 아닌 자의 스님행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 11:22

 

페르조나의 거짓가면을 벗어라! 비구 아닌 자의 스님행세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

 

지난 10월초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헤프닝이 일어났다.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유사 조계종단의 어느 총무원장스님이 특정 후보의 의혹에 대하여 설명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이 스님은 창종하기 전에는 조계종 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스님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조계종으로부터 직권제적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종단을 창종하게 되었는데 사진을 보면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스님복장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데

 

우리나라에서 스님들의 이미지는 삭발한 머리에 회색승복이다. 그래서 회색 한복으로 된 승복을 입으면 모두 스님으로 인정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스스로 스님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속담에 중이 제머리 못 깍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이에 대하여 이제열법사는 미디어붓다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옛 속담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은 신체 구조상 머리는 남이 깎아 주어야 제대로 깎이지 스스로 깎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

즉 이 속담을 이해하는데 있어 속담이 뜻하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제 일을 저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어려움이나 한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속담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하는 본래의 뜻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이고 명분이 바로 설려면 그에 따른 합당한 절차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말은 스님은 혼자서 스님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절에 들어가 스승으로부터 정당한 절차를 밟아 머리를 깎아야 제대로 된 스님이 된다는 의미이다. 속세를 떠나 중이 되려고 해도 제 멋대로 머리를 깎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이제열 법사의 ‘정법당간을 세우자’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의 바른 의미는? , 미디어붓다. 2010-08-06)

 

 

 

 

이제열법사에 따르면 스님은 스님이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절에 들어가 스승으로부터 정당한 절차를 밟아 머리를 깎아야 제대로 된 스님이 된다.”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율장정신에 따른 절차를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행자부터 시작하여 사미계를 받고 조건이 충족 되었을 때 수백가지에 달하는 구족계를 받았을 때 정식으로 비구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스스로 머리를 깍고

 

그럼에도 스스로 머리를 깍고 승복을 사서 걸쳤을 때 이를 스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어지는 이제열 법사의 글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불교를 보면 속담과는 달리 제 스스로 깎을 수 없는 머리를 스스로 깎고 중노릇하는 무리들이 너무나 많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이런 무리들이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종단까지 만들어 정당한 불교단체인양 행세를 한다는데 있다. 대개 이런 무리들의 성향을 보면 부처님의 정법은 들은 바도 본 바도 없고 거개가 사술을 행하거나 외도를 행해온 전력이 있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 이제열 법사의 ‘정법당간을 세우자’① ‘중이 머리 깎는다’ 바른 의미는? , 미디어붓다. 2010-08-06)

 

 

현재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중이 되는 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비구계도 받지 않은 자가 스스로 삭발을 하고 회색승복을 걸치며 비구행세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 스님이라 칭하며 창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불교 종단 이름을 보면 유독 조계종 글자가 들어간 종단이 많다. 매체에서는 이를 유사조계종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이 되어 창종한 종단은 얼마나 될까?

 

4800만 불자에 스님이 5만명?

 

지난 2009년도 문광부에서 발표한 종교현황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불교종단은 무려 168개에 달한다. 이는 문광부에 등록된 단체를 말한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설문조사에 응한 103개 종단에 대한 통계가 실려 있다.

 

통계를 보면 놀랍게도 우리나라 불교인구는 4,830만명이다.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약96%가 불자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더구나 이들 종단의 교역자, 즉 스님 숫자는 무려 5만명에 달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스님 5만명에 불자4천만명, 한국불교 103 종단 현황리스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왜 이런 통계가 나오게 되었을까? 이는 부풀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통계를 보면 총신도가 2천만명이고 스님은 13,000명으로 되어 있다. 신도수가 2배 이상 부풀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문조사된 103개 종단의 신도수가 부풀려져 있다 보니 우리나라 인구수 만큼이나 많은 불자가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단일종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천주교의 경우 정확하다. 단일종단이다 보니 천주교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통계를 그대로 활용하였음을 문광부 자료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종단이 난립하는 것일까?

 

종단이 난립 되는 이유는?

 

조계종단이 창립된 1962년에는 단일종단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등록된 불교종단은 168곳이다. 이렇게 난립된 가장 큰 이유는 이해관계때문으로 본다. 특정 종단에 소속된 스님들이 종단운영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종단을 창종하는 사례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과도한 분담금을 내기 싫어 창종하는 경우도 있고, 어럽게 일군 자신의 절을 지켜 내기 위하여 창종하는 경우도 있다. 또 바라이 죄를 지어 기성종단에서 쫒겨난 자가 창종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게 종단이 많은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속담에 배운 것이 OO이라는 말이 있듯이 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스님행세 하는 것밖에 없어서인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럴싸한 종명을 만들어 스스로 삭발하고 스스로 회색승복을 맞추어 있고 스님행세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리고 누구나 창종을 하여 교주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이제열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늬만 불교신자라는 불자들, 무당한테 부적 받으러 다니면서 불교 믿는다는 불자들, 일반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은 제대로 된 종단에서 교육을 받은 중들이 아니라 사실 저런 사이비 중들이다. 불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중은 겉으로 보기에 조계종단을 비롯한 극소수 종단의 스님들 같아 보이지만, 실상을 파고들어 불교인의 신행형태를 보면 저런 가짜 중들과 그들이 모여 만든 종단의 영향이 훨씬 크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다. 도심보다는 지방으로 갈수록 이들이 대부분의 불교를 잠식하고 있다.

 

( 이제열 법사의 ‘정법당간을 세우자’① ‘중이 머리 깎는다’ 바른 의미는? , 미디어붓다. 2010-08-06)

 

 

불자들도 불자나름이다. 기복만 쫒는 불자가 무뉘만 불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가 단지 스스로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걸쳤다고 해서 스님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스님으로 보이지만 무뉘만 스님인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절차도 밝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비중으로 보는 것이다.

 

사이비승려들의 특징은

 

사이비승려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돈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보시공덕이다. 보시를 많이 해야 복을 받고 이 다음에 죽어서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승려가 된 자들의 홈페이지를 보면 은행계좌번호가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 천원짜리 한장이라도 낱낱이 공개하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 설령 공개한다고 하더라도 회원이 아니면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또하나의 특징은 과도한 불사(佛事)’이다. 돈을 끌어 모으는데 있어서 불사만틈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보시해야 하는가?

 

보시는 좋은 것이다. 부처님도 초기경전 도처에서 보시공덕에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보시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

 

(Dakkhiāvibhagasutta-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2,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부처님에게 가사를 보시하려 하자 부처님은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십시요. 그대가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면 니와 참모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M142)”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고따미가 가사를 개인적으로 보시하려 하자 승단에 보시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비구 개인의 성장 보다 승가가 성장하여야 함을 말한다. 불법승 삼보가 있어야 불교가 성립 하듯이 승가가 있어야 비구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개인적으로 보시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라 본다.

 

나홀로 종단인 경우

 

하지만 스스로 중이 된 자들이 만든 종단에는 승가가 있을 수 없다. 나홀로 종단인 경우 종단과 개인이 동일시 되기 때문에 보시를 해도 결국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 마치 재정공개가 되어 있지 않은 사찰에서 입장료수입이나 기도비가 주지의 개인금고와 같듯이 일인 종단의 보시금 역시 스스로 스님이라 칭하는 자의 사금고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읊은 대가를 향유하지 않습니다

 

법문을 한 대가로 보시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또 수행지도를 한 대가로 과도한 회비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정이 공개 되어 있지 않은 개인통장으로 들어간다면 가르침과 어긋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Gāthābhigita me abhojaneyya
Sampassata
brahmaa nesa dhammo,
Gāthābhigita
panudanti buddhā
Dhamme sati brāhma
a vuttiresā.

 

[세존]

나는 시를 읊은 대가를 향유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바로 보는 이에게 옳지 않습니다.

시를 읊은 대가를 깨달은 이는 물리치니,

바라문이여, 법이 있다면 그것이 진솔한 삶입니다.

 

(Sundarikabhāradvājasutta-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 숫따니빠따 Sn3.4, 전재성님역)

 

 

바라문 쑨다리까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헌과를 받아 달라고 요청하자 부처님이 말한 내용이다. 부처님은 나는 시를 읊은 대가를 향유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법문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금한다는 말이다. 법문을 하였다고 하여, 수행지도를 하였다고 하여 보시를 유도하거나 과도한 불사를 일으키는 현상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 볼 수 있다.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일어난 특별한 체험이 있었다 하여 이를 바탕으로 창종하여 교주가 되는 자들이 많다. 이렇게 스스로 교주가 되었을 때 강조하는 것은 보시 공덕이다. 대부분 불사를 크게 일으키는데 이 과정에서 보시를 유도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법문을 설한 대가로 보시를 유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쑨다리까에게 번뇌가 부서지고 의심이 소멸된 완전한 위대한 선인에게 다른 음식과 음료수로 봉사하십시오.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그것은 복 밭이 될 것입니다.(Sn3.4)”라고 말한다.

 

초기경에서 말하는 보시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을 보시하라는 것이 가장 큰 보시라는 것이다. 번뇌 다한 자에게 금이나 은을 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탁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보시하는 것이 최상의 공덕이라 하였다. 그래서 음식 등 사대필수품을 보시하는 것이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있어서 복밭(puññapekhassa)’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는 시대

 

요즘은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는 시대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였다고 하여 이를 기반으로 스님이 되는 자도 있고, 공부를 하다 보니 무언가 알 것 같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자들도 있다. 그래서 스승 없이 스스로 삭발하고 인사동에서 회색승복을 사 입으면 스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스님이 되면 승복의 권위가 생긴다. 유발의 속복을 입은 자 보다 삭발하고 소매가 긴 승복을 입은 자를 더 높이 쳐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스스로 머리를 깍고 스님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뉘만 스님일 뿐 스님이라 볼 수 없다. 율장에 따른 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스님이 된 자들은 반승반속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정법을 펼친다고 할지라도 스님 흉내를 내는 자들은 망어죄를 짓는 것과 같다. 거짓으로 비구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 아닌 자가 비구행세를 하였을 때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결국 피해자가 될 것이다. 과도한 불사를 일으킴으로 인하여 피땀 흘려 번돈을 스님 아닌 자, 비구 아닌 자에게 바칠 것이기 때문이다.

 

승복의 권위와 페르조나(Persona)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승복을 입어야만 할까? 소매가 긴 두루마기 한복스타일의 회색 승복을 입어야만 가르침이 더 잘 전달 되는 것일까? 유발에 소매가 짧은 속복을 입은 자가 정법을 말하면 권위가 없어서일까? 스스로 삭발하고 스스로 스님이 된 자들은 목적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 되어 있다.

 

유발과 속복을 입고서도 얼마든지 법을 펼칠 수 있음에도 굳이 승복을 입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는 승복의 권위를 빌어 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치 현직 공무원으로 있을 때 끝발이 더 있는 것처럼, 그리고 현직 대기업에 몸담고 있을 때 일하기 쉬운 것차럼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승복은 다름 아닌 페르조나(Persona)이다.

 

융심리학에 페르조나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를 알게 된 것은 이부영 교수가 지은 그림자-마음속의 어두운 반려자’ ,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를 통해서이다. 융연구소에서 수학한 바 있는 이부영 박사의 역작이다.

 

책에서는 융심리학 전반에 대하여 소개 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불교의 아뢰야식과 유사한 집단 무의식과 여성성과 남성성을 표현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이었다. 그런데 융심리학에서 발견한 용어 중의 하나가 페르조나이다. 페르조나란 무엇일까?

 

페르조나란 무엇일까?

 

페르조나는 라틴어로서 가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누구나 가면을 하나씩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면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남자라면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아버지라 불리고, 직장에서는 과장이나 부장또는 사장이라는 직함이 불린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움에 따라 집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강조 되고 직장에서는 그 직위에 걸 맞는 행동이 요청된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가면과 직위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 간다. 이런 생활이 오래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한다. 자신의 본 모습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가면대로 살기 때문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스님상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개 이상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런 가면은 초기불교 용어인 ‘산냐(sañña)’와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가면을 쓰면 하나의 상이 형성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일종의 페르조나이다. 그런데 절집에서는 상이 하나가 더 있다. 스님상이다.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이어 스님상이 있어서 다섯 가지 상이 있다고 말한다.

 

스님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승복의 권위를 말한다. 삭발하고 소매가 긴 회색승복을 걸치는 순간 스님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페르조나이다. 승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승복을 걸치고 살지만 마음은 늘 바깥을 향한다면 어떻게 될까? 몸은 출가하였는데 마음은 늘 세속에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마치 능력이 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이다.

 

가면을 쓰면 가면대로 살아 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마음의 불일치를 겪게 된다. 이것이 다름아닌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신경증이다. 일반적으로 신경증을 ‘노이로제라 한다.

 

승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승복을 입은 순간 나는 스님이다라는 스님상이 형성 되는 것이다. 이는 타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천주교 신부가 로만 칼라의 사제복을 입었을 때 나는 신부이다라는 신부상이 형성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목사들도 가운을 입는다. 대형교회 목사가 마치 대학졸업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소매가 긴 가운을 입고 목회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긴 가운을 입음으로서 목사상을 형성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긴가운을 입음으로서 나는 목사다라고 하는 하나의 상이 형성된다.

 

승복, 사제복, 목사복을 입는 것은 하나의 상이다. 그리고 동시에 권위를 상징한다. 그래서 승복, 사제복, 목사복이라는 페르조나를 쓰게 된다. 그래서 승려로서, 신부로서, 목사로서 살아 가게 된다.

 

페르조나의 거짓가면을 벗어라!

 

스스로 삭발하고 스스로 승복을 입고 스승없이 스스로 스님행세를 하는 자들이 있다. 비구계를 받지 않았음에도 마치 비구라고 행세하는 것은 망어죄를 짓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여 오계를 어기는 것이다.

 

오계도 지키지 않는 자를 불자라고 볼 수 없다. 승복이라는 페르조나 뒤에 숨에 승복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것과 같다. 비구 아닌자가 비구행세를 하는 것은 반승반속으로서 마치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스스로 스님이라 칭하는 자들은 이제 승복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리고 페르조나의 거짓가면을 벗어야 한다.

 

 

Anikkasāvo kāsāva              아닉까사오 까사왕

yo vattha paridahissati        요 왓탕 빠리다히사띠

apeto damasaccena                아뻬또 다마삿쩨나

na so kāsāvamarahati.            나 소 까사와마라하띠.

 

혼탁을 여의지 못하고

가사를 걸치고자 한다면,

자제와 진실이 없는 것이니

가사를 입을 자격조차 없다. (Dhp 9)

 

 

 

 

 

2013-11-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