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담마에 차별없다! 출가자는 재가자로, 재가자는 출가자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10. 11:48

 

 

담마에 차별없다! 출가자는 재가자로, 재가자는 출가자로

 

 

 

전쟁아닌 전쟁을 치루고

 

지난 일주일에 걸쳐서 글공방을 벌였다. 넷상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과 전쟁아닌 전쟁을 치루었다. 오로지 아이디와 필명으로만 통하는 사이버세계에서 어떤 말이든지 오갈 수 있기 때문에 넷상의 공방은 자칫 이전투구의 양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가급적 댓글을 달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망신을 주기 위하여 한 손에는 숯불, 또 한 손에는 을 들고 던질 채비를 하고 있는 자에게 대응한다면 똑 같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성냄과 오물을 뒤집어 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일체 대응을 하지 않으면 성냄이 자신을 태우듯이 숯불을 들고 있는 손이 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똥을 들고 있는 손에서는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7:2)”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댓글놀이를 즐기는 자들

 

싸움을 걸어 온다고 하여 싸움하지 않는다. 특히 댓글로서 싸움을 유도할 때 말려 들지 않는다. 댓글에 댓글이 달려 무수히 많은 댓글이 달렸을 때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댓글놀이를 즐기지 않는다. 다만 본문을 통하여 경전에 근거하여 반박할 뿐이다.

 

또 하나의 세상, 인터넷은 생활과 다름 없다. 단 하루라도 인터넷을 접속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가상공간을 들락거린다. 거기에는 커뮤니티도 있고 친구도 있다. 우호적인 자도 있는가 하면 적대적인 자도 있다. 비록 넷상이긴 하지만 적대적 관계에 있어서는 입에 칼을 물고 싸우는 것 같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익명성을 무기로 하여 비난과 비방을 퍼붓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댓글에 댓글을 달면서 인신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댓글놀이에 동참하지 않는다.

 

정어가 되어 있지 않은 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것도 A4 10장 가량이다. 그러다 보니 검색하면 이곳 저곳에서 걸린다. 불교관련 키워드 검색하면 아마도 대부분 검색에 걸릴 것이라 본다. 실제로 키워드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 또는 수행하는 스님, 공부하는 학인 등 블로그에 한 번쯤은 접속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듯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들어 왔는지 모른다. 다만 관심 있는 분들은 거의 매일 들어오고 때로 흔적을 남긴다. 그때 마다 답을 해 드려야 하나 못해 드려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칭찬과 격려의 글도 받지만 때로 악의적인 비난글을 접하기도 한다. 보통 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아상이 높다든가, 자랑한다든가, 잘난체한다든가 등의 말이다.

 

이런 비난이나 비방이 나오게 된 것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한다든가 부분을 보고 전체로 판단하여 매도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이다. 팔정도 정사유에서 “폭력을 여읜 사유(S45.8)”가 있는데 정사유가 되어 있지 않고, 정어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으면(S45.8)”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정어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대체 어떤 불교학자이길레

 

그런 글을 보았다. 다음과 같은 글이다.

 

 

오늘 제가 지극히 존경하는 불교교수님께서
그동안 연꽃님 글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요즘들어 아비담마에 분별이 부족한 반면에 실론섬의 글이 그 균형을 잡아주고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깨달음이라는 것은 수행자에 한한 것이라, 지극한 범행과 교학과 수행의 극에 달하여서 무상 무아를 뼈저리게 체득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연꽃님의 논지는 비록 세속에서 번다하게 살지만 때때로 알아차림 정도로도 충분히 성자인 양 폼 잡을 수 있는 것이라는...

 

(D법우님)

 

 

평소 격려의 말씀을 주시는 법우님께서 이런 글을 올린 것에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한다. “절필하지 않으면 다칠것”이라고 협박한 바 있는 S님의 답글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언’으로 보인다.

 

매일 글을 쓰고 그것도 10페이지 가량 되고, 더구나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불교학자의 검색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불교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절필하지 않으면 다칠것이라고 협박한 S님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기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더구나 부처님이 제시한 깨달음에 대하여 출가수행자에게나 적용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출가자 흉내나 내는 것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보여진다.

 

글쓰기를 하면서 한 번도 어떤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작성한 적이 없다. 인터넷 시대에 블로그라는 것이 생겨나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글을 올리면서부터 이 불로그는 시작 되었다. 처음부터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다 보니 많이 찾게 된 것이다.

 

이 불로그가 이렇게 논란의 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만 매일 삶을 흔적을 남기고 그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삶의 해법을 찾고자 구도의 마음으로 작성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회의론자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서 아는체 한다느니 출가자 흉내를 낸다느니 하면서 별스런 말을 한다. 만일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글을 쓴다면 블로그광고를 하여 수입을 올린다든가, 책을 내어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든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서 유명인 행세를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재가가는 내일의 출가자

 

회의론자들의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한계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길이 있고 재가자에게는 재가자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은 수행승의 수행적 삶에 맞게 불교를 접목하고 중생들은 중생들의 삶에 맞게 불교를 접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여 설하시지는 않았다. 초기경전에서 비구들이여라고 시작 되는 경에서 하시는 말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가자 불교 따로 있고 재가자 불교 따로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 하는 꼴이 된다. 출가자도 재가자로부터 나왔고, 재가자는 잠재적인 출가자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제행무상 법칙을 적용하면 출가 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자로 일생을 보내라는 법이 없다. 출가 하였더라도 속퇴하여 재가자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재가자라 하여 죽을 때 까지 재가자로 삶을 살아 가야 한다는 법이 없다. 재가자일지라도 어느 땐가 출가하여 출가자로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기도 하고, 재가자가 출가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오늘의 출가자는 내일의 재가자가 될 수 있더. 또 오늘의 재가가는 내일의 출가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재가자가 출가자 흉내내면 어설픈 도인 흉내내는 일?

 

그럼에도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여 재가자는 출가자의 지향하는 불교를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하였다.

 

 

재가자가 출가자 흉내내면 어설픈 도인 흉내내는 일이라고 해피스님께서도 설법하시더군요.
재가에서 담마를 공부하면서 실천할수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경전을 근거로 잘배워 알아야 할것입니다.
저는 재가에 있으면서 오계-보시-수행(자비희사) 사무량심을 실천하려고 목표를 삼고있습니다.
부족한 저로써는 잘 실천이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결국은 따라 갈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생이될지 몰라도 언젠간 해탈열반을 실현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재가에서의 수행이 진전되면 높은수행을 향해 향상해야될것입니다.
최종목적은 해탈열반이고 실천을 어떻게 실행하여 나아갈지 고민중 입니다._()_

 

(B법우님)

 

 

B법우님은 해피스님 이야기를 하였다. 해피스님은 넷상에서 잘 알려진 스님이다. 테라와다 빅쿠로서 초기불교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애쓰는 스님이다. 그런데 재가자가 출가자 흉내내면 어설픈 도인 흉내내는 일이라고 말하였다면 이는 실망스런 일이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히 구분하여 서로 역할에 충실하자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재가자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해탈이나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도인 행내내는 것일까? 해탈이나 열반에 대한 이야기는 출가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재가자는 오로지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만 해야 하고 해탈이나 열반을 넘보면 안된 것일까? 해탈이나 열반을 이야기 하려면 반드시 출가해야만 하는 것일까? 해탈과 열반은 출가자의 전유물이기 때문에 재가자는 절대로 넘보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마치 재가자는 율장을 보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재가자는 절대 율장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하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재가자는 절대 율장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율사스님은 법보신문에서 승가의 청정과 유지를 목적으로 한 출가자만의 내부 규정을 보는 것이 재가신도들의 수행과 신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보신문2007년 12월 20)”라고 말하였다. 재가자는 출가자의 내부 규정, 즉 수백가지에 달하는 비구계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가신도로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불자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 (법보신문2007년 12월 20)”라고 하였다. 재가자들이 스님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하게 구분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래서 출가자는 출가자로서 역할이 있고 재가자는 재가자로서 역할이 있어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깨진다.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테라와다전통에서는 재가자에게도 율장을 공개하고 심지어 교육까지 시킨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블로그에 지금 당장 재가자에게 율장교육을 허하라, 출가 비구 250계와 출가 비구니 348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빅쿠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하여

 

남방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빅쿠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하여 재가자에게 율장공부를 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가자가 율장을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율장을 열면 가장 먼저  “이 책은 스님들만 보는 책이니 신도들은 읽지 마시오.” 라는 경고문구가 있다는 것이다.

 

재가자가 율장을 보면 어떤 치명적인 문구라도 있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테라와다전통에서는 재가신도들에게 율장을 모두 오픈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재가자에게 율장을 가르치는 까닭은 출가자는 자신들이 도저히 지킬 수없는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기 때문에 출가자를 더욱 존경하고 승단을 보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율장은 금서인가, 불교평론 2005-12-10)라고 하였다. 재가자들이 율장 공부를 함으로서 빅쿠들이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고, 또한 재가자들이 빅쿠들이 계율을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달리 율장을 모두 공개 하고 교육시키고 있다고 한다.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D16)”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다. 출가자가 재가자가 될 수 있고, 재가자가 출가자자 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숨겨진 것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 아난다여 ,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 . (D16)”라 하였다. 출가와 재가를 차별한다거나 더 이상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이 소위 ‘행복론’이다.

 

목적이 열반임에도

 

요즘 불교계에서는 중생의 안락과 행복 또는 생명의 안락과 행복이 마치 불교의 목적인양 말한다. 조계종에서 추진하고 있는 종교평화선언이나 승가청규에도 불교의 목적이 마치 안락과 행복인처럼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다! 불교의 행복론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욕락이 되기 쉬운 행복론

 

그렇다면 행복론은 주장하는 이들의 경전적 근거는 무엇일까? 대부분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들고 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는 문구를 근거로 들고 있다.

 

전도선언에 따르면 부처님이 중생의 이익(hita)과 안락(sukha)을 위해 전도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문구만을 들어 말한다면 불교가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말은 어느 종교에서나 강조하는 말이다.

 

행복은 오욕락을 추구하는 일상적 행복도 있지만 종교가 추구하는 행복은 모두 다르다. 유일신교라면 창조주를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들만의 행복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행복론을 말한다. 그러나 행복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잘 먹고 잘 살기만을 바라는 ‘오욕락이 되기 쉽다. 그런 행복을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만일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며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의 의미는?

 

대부분 불자나 스님들이 불교가 ‘행복(sukha)의 종교’라거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말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행복론을 강조하는 이들이 간과 하는 것이 있다. 전도선언에서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sukha, 행복)을 위하여 전도하라고 말씀을 하였지만 또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본래부터 눈에 띠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그들이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Dutiyamārapāsasutta-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S4:5(1-5), 전재성님역)

 

 

 

 

Buddha footprint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행복)을 떠나는 전도자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을 전하긴 전하된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말이다

 

만일 전도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일부만 전달하면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직무유기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에게나 이해 하기 사성제, 십이연기와 같은 설법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근기에 따라 대기설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심을 내는 설법, 보시하고 지계 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부터 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말씀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스스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

 

경에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다름 아닌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전도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익과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아님을 말한다. 해탈하여 열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진정한 전도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가 있을 수 없다. 출가자는 재가자가 될 수 있고, 재가자는 출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열반임에 분명하다. 행복이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충분조건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불교의 목적이 단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견해는 외도에 가깝다.

 

그럼에도 대승불교 도법스님 등이 주장하는 생명과 평화사상에 기반한 행복론이 기승을 부린다. 이에 일부 불자들은 편승하여 불교가 행복의 종교라고 말한다. 더구나 재가불자들은 재가불자의 한계로 인하여 지금 여기에서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이라 한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고 더 이상 불자이기를 포기하는 말과 같다.

 

힌두교보다 못한 종교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재가불자라고 할지라도 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일까? 만일 재가불자들의 삶에 대하여 단지 삼보에 대한 믿음, 오계준수, 보시 등에 한정 시켜 버리고 만다면 바라문교 보다 더 못한 종교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면 '해탈'을 추구하는 힌두교보다도 못하게 되는 것!!

연꽃님께서 '행복'추구는 불교의 진정한 목표가 아니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부처님께서 외도라고 지적했던 힌두교 조차도 인생의 최종목표는 '해탈, 열반'이었습니다.

인도인은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4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지금도 독실한 힌두교인들은 이러한 삶의 목표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지요. artha(직업, 건강, 돈 등의 삶을 지탱해 주는 물질적인 요소), kama(사랑, 기쁨, 행복 등의 의미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즐겁고자 하는 욕망), dharma(, 개인이나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도덕적, 사회적인 의무), moksha(완전한 해방, 인생의 궁긍적인 목표)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독실한 재가신자는 돈을 벌고 결혼을 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종교활동을 유지하면서 나이가 들면 바라나시 같은 종교적인 도시에 가족을 떠나서 홀로 임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이 나네요. 나이가 들어 힌두교인의 최종목표인 moksha를 이루고자 바라나시에 많은 장년층에 모여들었답니다. 그런데 의학이 발전하면서 이들의 나이가 80, 90십세가 되도록 생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게 또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군요. 하여간.... 종교의 목표가 단지 행복추구라면 우린 인도인이 생각하는 삶의 목표의 2단계에서 멈추고 있는 셈이 됩니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강조했던 부처님 당시의 외도들의 생각에도 못미치는 것이 불교의 목표가 되는 셈이지요.

불교는 불교 다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선정만을 강조하고 즐거움을 강조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의 외도들 보다도 못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E법우님)

 

 

용수의 공가중 삼제로 대표되는 공사상은 기존 불교를 비판하며 성립 되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불교는 기존 바라문교를 비판하며 성립되었다. 바라문교의 브라만과 아뜨만을 부정하며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불교의 성립 배경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바라문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대규모 동물희생제로 제사지내는 제관역할로서의 바라문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의 바라문으로 되돌아 갈 것을 말하였다. 그것이 법구경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는 정형구로 정착되었다. 예전의 바라문의 삶과 아라한의 삶을 동일시 한 것이다. 청정범행으로 대표되는 바라문의 삶과 아라한의 삶을 동일시 하였기 때문이다.

 

E법우님은 힌두교의 인생4주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고대 바라문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세존]

바쎗타여, 왕족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바라문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평민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노예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이러한 네 가지 집단에 의해서 수행자의 집단이 생겨났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경에서 수행자 집단이 출현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 수행자 집단에는 네 가지 계급이 모두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상위 계층인 바라문도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떠나 수행자가 될 수 있었고, 왕족이나 평민, 노예도 수행자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바라문에 대하여 인생4주기로 설명된다.

 

정통바라문에서는 범행기(梵行期)와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棲期), 유행기(遊行期) 이렇게 인생4기가 있었다. 그런데 손자가 태어나고 할 일을 다한 바라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유행하며 보냈다. 집을 떠나 탁발에 의존하고 숲에서 명상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이는 바라문이 타락하기 이전의 삶의 모습이다. 이런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독실한 힌두교인들은 인생4주기에 따른 삶을 살아 간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인들이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단지 이익과 행복을 위한 삶으로 축소하여 적용한다면 힌두교 보다 못한 종교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극소수의 출가자와 대다수의 재가자

 

불교는 크게 출가자와 재가자로 나뉜다. 극소수의 출가자와 대다수의 재가자로 구분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출가자가 이만여명으서 전체 불자수에 비하여 0.2%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국민으로 보았을 때 극소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세간적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역류도라 한다. 이렇게 출세간적 가르침이라 하여 반드시 출세간의 출가승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출세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세상속에 살고 있는 재가자는 단지 삼보에 대한 믿음, 오계준수, 보시의 삶만 살아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해탈이나 열반은 다음 생에 기약해야 하는 것일까?

 

팔정도 등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출세간적이긴 하지만 원리로서 확정된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부처님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출재가를 막론 하고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별적으로 적용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재가불자라 하여 단지 믿음, 지계, 보시의 생활을 해야지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안되는 것일까?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반드시 머리를 깍아야만 할까? 생활속에서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면 출가자 흉내를 내는 건방진 행위일까?

 

재가불자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불자들 대다수를 차지 하는 재가불자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낮은 근기에서 높은 근기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재가자라 하여 행복론을 묶어 두고 믿음, 지계, 보시로 천상에 태어나는 이야기만 하고,  해탈과 열반을 이야기 하면 출가자흉내는 것으로 보기에는 재가자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출가자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출가자가 출가자로서 끝까지 간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출가하고 난 다음 환속하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보면 출가자라 하여 반드시 출가자로 인생을 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 그럴까? 제행무상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제행무상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재가자도 출가가자 될 수 있다. 재가자라 하여 재가의 삶으로 머물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자가 재가자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재가자가 출가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담마(가르침)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열반에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2013-11-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