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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천인가 하느님인가? “새술은 새부대에”21세기에 맞는 번역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12. 20:22

 

범천인가 하느님인가? “새술은 새부대에”21세기에 맞는 번역은

 

 

 

빨리어 수강생의 80%는 재가불자

 

최근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산스끄리뜨어와 빠알리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기사에서는 “현진 스님(봉선사 산스끄리뜨편집실장)은 11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처음 예상과 달리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수강생의 80%는 재가불자"라고 말했다.(불교닷컴 2013-12-12)”라고 보도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님들을 주대상으로 강좌를 열었으나 거의 대부분 재가불자로 채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원음에 더 가까이 가겠다는 불자들의 바램이라 볼 수 있다.

 

빠알리 삼장사이트와 빠알리어 사전

 

거의 매일 글을 쓰면서 초기경전을 들여다 보고 있다. 경의 문구를 인용할 때는 가급적 빠알리 원본을 이용한다. 활용하는 사이트는 ‘THE TIPITAKA (http://awake.kiev.ua/dhamma/tipitaka/ )’이다. 그래서 빠알리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빠알리 문법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는데 그친다.

 

빠알리 사전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PECD194’ 를 이용한다. 빠알리 사전과 관련하여 다운 받는 방법은 누구나 다운 받을 있는 빠알리 경전과 전자사전,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렇게 매일 빠알리 구문을 접하다 보니 이제 빠알리어가 매우 익숙해졌다. 우리말로 번역된 된 것을 찾아보는  것 또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현재  THE TIPITAKA 사이트에는 빠알리어 경전이 모두 실려 있고 더구나 영문까지 올려져 있어서 한글로 번역된 것과 비교해 보면 누구나 누구나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다.

 

보통불자의 번역비교 작업

 

빠알리어 대하여 잘 모르고 배워 본적도 없다. 그럼에도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번역되어 있는 두 종류의 한글번역서와 빅쿠보디의 영역 CDB를 중심으로 비교하고 있다. 세 종류의 번역을 비교하고 있고 각주까지 참고 하여 나름대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보통불자가 번역비교 작업을 하는 것이 대단히 경솔한 일일 것이다. 학문적 배경도 없고 경전에 대한 지식도 없고 더구나 빠알리어도 모르는 자가 번역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넌센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호기심때문이다. 좋아서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 번역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부처님은 실제로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는지 궁금한 것이다. 이렇게 세 종류의 번역서와 빠알리 원전을 참고 하는데 각주에서는 참고하라는 경을 알려 준다. 그래서 참고경을 찾아 가다 보면 경전에 흠뻑 빠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최고로 재미난 것이 빠알리 원전에 근거한 경전공부라 본다.

 

퇴출위기에 처한 한문경전

 

빠알리 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한국불교는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 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한문위주의 경전이 이제 퇴출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 구문을 참고하여 번역서를 접하였을 때 이제 달리 한문경전을 참고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가끔 한문경전을 근거로한 문구를 접하였을 때 마치 조선시대나 더 멀리 고려시대, 삼국시대의 불교를 보는 것 같다.

 

인터넷으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스님은 한문경전의 문구를 읽어 가면서 우리말로 설명해 주었다. 마치 금강경의 사구게를 멋지게 읽고 난 다음 이를 우리말로 해석해 주는 식이다. 이처럼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거의 대부분 한문경전을 교재로한 것이다.

 

한문게송과 빠알리게송의 차이는?

 

아직까지 스님들의 법문이나 강좌에서 빠알리 원전을 예로 들어 법문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물론 초기경전을 전파하는 스님은 예외이다. 그러나 같은 게송이라도 빠알리 원전으로 접한 것이 훨씬 더 가르침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로 유명한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게송의 원형이 니까야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니까야에서는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로 표현 된다. “이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곧,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S1.11)”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문게송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오로지 빠알리 니까야의 단어를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생멸뒷생멸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문게송에서는 앞구절과 뒷구절에 모두 생멸로 처리하여 그 뜻을 심오하게 만들었으나, 빠알리어를 분석하면 분명히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있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 구문을 보면 앞생멸에 해당되는 것이 ‘Uppādavayadhammino’로서 이는 제행무상으로서의 생멸을 말하고, 뒷생멸에 해당되는 것은 ‘Uppajjitvā nirujjhanti’로서 오온무상으로서의 생멸을 뜻한다. 이렇게 한문게송과 빠알리게송은 다르다. 그래서 빠알리 문구를 접하면 부처님의 원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오욕락과 적멸락, 환희의 경(S1.11)라는 제목으로 올려 놓은 바 있다.

 

범천인가 하느님인가?

 

매일 매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말로 번역된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종류의 번역서를 접하면서 상당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번역된 용어를 보면 한문경전과 그다지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브라흐마(brahm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한역경전을 그대로 답습하여 범천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성전협의 번역은 파격적이다.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금기시 하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과감히 번역어로 채택한 것이다. 이런 영향이어서인지 아직 까지 불자들 사이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묭어 사용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이도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우리 고유의 말임에도 마치 기독교의 창조주를 연상한다.  그럼에도 번역에서 이와 같은 파격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교계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 박사는 번역에 있어 초등학생도 받아들일 수 있는 쉬운 말과 우리 문화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박사는 그 예시로 하늘님을 들었다. 전 박사는 “기독교의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용어”라며 “불교의 범천을 하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했다.

 

(“빨리 대장경 번역, 건강 허락할때까지”, 현대불교신문 2012-09-04)

 

 

현대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도 받아 들일 수 있는 쉬운 말과 순수한 우리 문화를 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범천이라고 한역된 브라흐마를 순수 우리말인 하느님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초기불전 자체가 누구나 이해 하기 쉬운 언어로 설법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은 당시 지배층인 브라만이 사용하는 브라만 언어가 아닌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일상언어로 쉽게 설법하였다. 따라서 번역 작업 역시 이 시대에 맞는 민중언어와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또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게 새롭게 번역하다 보니 ‘하느님’이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번역한 것이라 보여 진다.

 

애국가를 들을 때마다 불쾌감을 느끼는 불자들

 

전재성님은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이라 번역하였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번역임에도 상당수 불자들에게는 거북하고 불편하게 느껴 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파격아닌 파격을 보인 번역에 대하여 찬성하는 이도 있다. 법보신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애국가를 들을 때마다 불쾌감을 느끼는 불자들이 많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한다고 해서 크게 기분 나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인 야훼를 하느님으로 표현하면서 불자들이 묘한 박탈감을 느끼게 됐다.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시원인 한웅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애국가에 하느님이 담긴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 것이다.

 

기독교 신의 이름은 야훼다. 기독교인들이 야훼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하느님이라는 전통적인 명칭에 주목했고 그렇게 번역했다. 민족의 가장 원천적인 믿음의 상징을 기독교의 신으로 치환시켜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애국가를 부르면서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반면에 불자들은 묘한 불쾌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잠시 불쾌한 감정을 접고 기독교의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자들은 야훼를 하느님으로 번역해 낸 기독교인들의 탁월한 선택을 인정해야 한다. 번역은 대중화와 맞닿아 있다. 한국불교는 1700여년의 장대한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국내에 들어온 지 불과 100년 남짓한 기독교에 크게 밀리고 있다. 서구문화라면 무작정 신봉하는 현대사회의 특성이 크겠지만 경전의 우리말 번역에 소홀했던 점도 큰 원인일 것이다. 번역은 다른 말과 글로 된 이질적인 문화를 우리 문화와 언어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노력에 치열했고 불교는 부족했다. 일찌감치 천신(天神)을 하느님으로 사대천왕(四大天王)을 네 명의 하느님이라는 우리말로 번역했더라면 애국가를 부르며 느끼는 불편함은 없었을 것이다.

 

경전 번역에 있어 불교계는 갈 길이 멀다. 번역은 우리말로 경전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문경전의 음만 우리말로 바꿔놓고 한글번역이라 우기고, 경전을 우리글로 번역하면 원뜻이 달라지고 품위가 떨어진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따지고 보면 한문경전 또한 인도경전을 중국의 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원전인 산스크리트와 팔리어 경전과 대조해 보면 번역과정에서 의미가 달라진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한문경전을 우리글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한다면 이는 시대 역행일 따름이다. 이러니 ‘반야심경’을 수없이 염송하면서도 뜻을 전혀 모르는 불자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번역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한문경전만 보던 때보다는 훨씬 수월해졌다. 산스크리트, 팔리어는 물론 영어로 번역된 경전까지 다양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에 있어 용어 등이 모두 통일돼야 한다는 강박증도 버려야 한다. 중국만 해도 무수히 많은 번역본이 존재했다. 선택은 대중들의 몫이다. 우리보다 역사가 훨씬 짧은 서구도 그들의 언어로 된 경전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경전 번역에 있어 중요한 저작이 출간됐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이 ‘십지경’을 순 우리말로 풀어 낸 것이다. 한문 투의 번역에서 벗어나 십지(十地)를 열 단계의 깨달음 지평으로, 환희지(歡喜地) 등을 큰 기쁨의 지평 등으로 번역했다. 확실히 이해가 쉽다. 우리말 번역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모범답안을 손에 쥔 느낌이다. 쉽게 읽히고, 이해가 빠른 아름다운 우리말 경전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천신과 하느님, 김형규님, 법보신문 2013-05-06)

 

 

 

 

Standard edition of the Thai Pali Canon

 

 

 

김형규님은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한문경전의 용어를 답습한 번역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한문경전에서 볼 수 있는 용어나 이름에 대하여 단지 한글로 음으로만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문경전에서 범천이라 하였을 때 빠알리 니까야를 우리말로 옮겼을 때 역시 범천이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번역이 문제가 있을까? 그것은 중국이라는 환경에서 만들어진 말을 음만 바꾸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맞는 번역은?

 

중국에서 불교를 처음 받아 들였을 때 그 때 당시 중국인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풀어서 만들었다. 한자어로 범천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인들이 만든 용어를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진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맞는 번역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말로 된 것으로서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브라흐마에 대하여 범천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이라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새롭게 번역된 빠알리 니까야의 번역어 대하여 중국방식을 답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이라 번역한 것은 파격이라기 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본다.

 

번역에서도 시장경쟁의 원리가

 

번역자 마다 번역이 다르다. 한편에서는 한글을 아는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한문경전의 용어에 대하여 단지 음만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번역용어에 대한 문제가 나올 때 마다 이슈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용어통일을 기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용어통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마성스님이 남겨 주신 글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하여 하나의 모임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논의만 무성하였을 뿐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났다고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용어통일을 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만들고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김형규님은 글에서 번역에 있어 용어 등이 모두 통일돼야 한다는 강박증도 버려야 한다. 중국만 해도 무수히 많은 번역본이 존재했다. 선택은 대중들의 몫이다.”라고 하였다. 하나의 통일된 번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번역에 있어서도 시장경쟁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말과 같다. 선택은 독자들에 달렸다는 말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많이 이용하였을 때 그 번역이 생명력이 있어서 오랫동안 전승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새술은 새부대에 

 

초기경전을 접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더구나 빠알리 원전을 접하는 것은 인터넷시대에 행운이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한문경전에 크게 의지하여 법문을 하고 한문경전을 강의하는 것이 대세이다.

 

불교tv나 불교방송에서 경전공부나 불교강좌를 보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과 같은 한문경전이 대부분이다. 특히 금강경의 경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강좌가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빠알리 니까야 문구에 근거한 초기불교 강좌는 거의 없다. 시대는 광속으로 바뀌는데 한국불교는 아직까지 서당식 한문교육에 크게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은 뿌리 깊은 한문의 영향이어서인지 어느 빠알리 니까야 번역을 보면 마치 한문경전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라라는 속담도 있는데 부처님의 원음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굳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번역한 것은 파격아닌 파격이라 본다.

 

 

 

201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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