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보시, 어떻게 보시를 할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16. 16:53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보시, 어떻게 보시를 할것인가

 

 

 

종교인들이 늘 강조하는 것

 

해마다 이맘때쯤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구세군 자선남비이다. 그런데 대형마트 앞에서 보았다. 전통적으로 역전등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가 아니라 대형마트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듣는 소리는 항상 똑같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이 많습니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남비 속에 돈을 넣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선남비 말고도 보시하고 나누고 기부하는 곳이 많아서일까 대부분은 지나치고 만다.

 

 

 

 

 

 

charity

 

 

종교인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보시, 헌금, 나눔, 기부라는 말이다. 모두 똑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뉘앙스는 약간씩 다르다. 보시라는 말이 주로 불교에서 쓰이고, 헌금이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나눔과 기부라는 발은 사회단체에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기부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재능기부라는 말이 있다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나 기술 등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불자가수가 불교인들의 행사에 출연하였을 때 출연료를 받지 않고 무상으로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재능기부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어느 불자가수는 음성보시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재능보시의 개념은 확장된다. 최근 도올 김용옥선생의 불교강의를 유튜브에서 보았는데 아는 것을 열심히 사람들에게 알으켜 드리는 것도 베푸는 것이다. (10 싯달타의 행복론)”라고 하였다. 자신이 공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 역시 보시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공유하는 행위 역시 보시에 해당될 것이다.

 

보시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게송

 

보시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 수 없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보시는 무엇이고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이 있다. 맛차리경(Maccharīsutta, S1.32)이 그것이다. 이를 인색함의 경또는 인색 경이라 한다. 인색한 것과 보시를 연관하여 짤막한 게송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보시란 무엇이고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핵심을 가로지르는말로 설명되어 있다. 한마디로 보시의 진수를 보여주는 게송이라 할 수 있다.

 

맛차리경에는 모두 다섯 명의 하늘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네 명이 연속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보시에 대하여 게송으로서 말한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누가 시를 참으로 잘 읊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생각하는 보시에 개념에 대하여 게송으로 읊는다. 그러자 또 다른 하늘사람이 궁금해 하는 점에 대하여 묻는다. 그러자 다시 한번 알기 쉽게 게송으로 설명해 준다. 이렇게 다섯 명의 하늘사람의 질문이 있고 부처님이 두 번에 걸쳐서 게송으로 답한다.

 

1. 하늘사람1 게송

 

먼저 하늘사람 이 다음과 같이 묻는다.

 

 

Maccherā ca pamādā ca eva dāna na dīyati,
Puññam
ākakhamānena1 deyya hoti vijānatāti.

 

(Maccharīsutta, S1.32)

 

 

인색하고 방일하여 보시를 베풀지 않습니다.141)

공덕을 바라고 아는 자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142)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인색하고 또한 게을러서

이와 같은220) 보시를 행하지 않네.

공덕을 바라고 공덕을 아는 자는

반드시 보시를 행해야 하리.”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Through stinginess and negligence

A gift is not given.

One who knows, desiring merit,

Should surely give a gift."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하늘사람의 다섯 게송 중에 첫 번째 것이다. 이는 보시의 가장 일반적인 내용에 대한 것이다

 

공덕을 바라는 자는 보시해야

 

스님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절에 가면 늘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시와 공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공덕을 바라는 자는 보시해야 함을 말한다보시를 열심히 하면 복을 받고  과보로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각묵스님의 141번 각주는 다음과 같다.

 

 

141) 자신의 번영을 숨기려는(atta-sampatti-niguhana) 특징을 가진 색함(macchera)과 마음챙김이 없는(sati-vippavasa) 특징을 가진 방일함(pamada) 때문에 명예를 가져다주고, 영광을 가져다주고, 번영을 가져다주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시(dana)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SA.i.58)

 

(초불연 141 각주, 각묵스님)

 

 

인색한 자는 대체로 보시를 하지 않는다. 보시를 하지 않음에 따라 번영, 행복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각주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각묵스님의 두 번째 각주인 142번은 보시 하는 공덕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42) “’공덕을 바라는(punnam akankhamana)이란 것은 이전의 의도(pubbacetana) 등으로 분류되는 공덕을 바라는 것을 말하고, (vijanata)은 보시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다고 아는 것을 말한다.(SA.i.58)

 

여기서 공덕(punna)이란 위의 「휩쓸려감 경」(S1:3) {3}d의 주해에서 보듯이 (jhana)을 뜻한다. 그곳의 주석서에 의하면 이러한 공덕은 세 가지 의도(cetana)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이전의 의도(pubba-cetana), 나중의 의도(apara-cetana), 해방의 의도(munca-cetana)이다.(SA.i.23) 그곳의 복주서는 이 셋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이 가운데서이전의 의도란 근접삼매(upacara-jjhana)의 의도를 말하고, 나중의 의도란 자유자재가 된 상태(vasibhav-apadana)와 나중에 들어서(samapajjana) 생겨난 [삼매의] 증득[等至, samapatti]이라는 의를 말하고, ‘해방의 의도란 오염원들을 억압한 뒤 일어난 첫 번째 본삼매(patham-appana)의 의도를 말한다.”(SAT.i.65)

 

(초불연 142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보시 공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의도, 삼매 등의 용어를 이용하여 아비담마론으로 길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주석을 인용하여 공덕에 대하여 의도, 삼매 등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약간 핀트가 빗나간 동떨어진 이야기라 보여 진다.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시는?

 

전재성님은 인색하고 게으른자에 대한 각주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220) eva : Srp.I.58에 따르면 이와 같은 1) 명예를 주는 보시, 2) 성취를 주는 보시. 3) 행복을 주는 보시를 말한다.

 

(성전협 220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일반적인 보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름아닌 바라는 보시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시는 1) 명예를 주는 보시, 2) 성취를 주는 보시. 3) 행복을 주는 보시 이렇게 세 가지 범주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가지 보시는 대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예, 성취, 행복을 바라면서 보시하는 행위를 진정한 보시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가 있다.

 

뿐냐(Puñña, 공덕행) 빠빠(Pāpa, 악행)에 대하여

 

스기랑카 아상가 교수에 따르면 공덕 짓는 것을뿐냐(Puñña)’ 라 한다. 보시를 하면 공덕을 짓게 되는데 그 과보로 천상세계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다. 그런데 뿐냐와 반대 되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빠빠(Pāpa) 이다. 빠빠는 무엇인가?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악행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보시를 하면 공덕(Puñña)도 쌓을 수 있지만, 보시하는 것이 때로 악행(Pāpa) 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가 악행에 해당될까? 아상가 교수는 불교tv 강의에서 뿐냐와 빠빠의 차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뿐냐(Puñña)와 빠빠(Pāpa)

 

뿐냐(Puñña)와 빠빠(Pāpa)가 있는데요. 빠빠는 악행(evil action)을 의미하고 뿐냐는 선행을 또는 불교용어로공덕행(meritorious deeds)’을 의미해요. 그래서 뿐냐와 빠빠 선행과 악행의 분류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차이도 있지요.

 

뿐냐 즉 선행을 말할 때는 중생의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우리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좋은 일은 중생의 삶 안에서 이해해야 해요.

 

예를 들면 제가 스님들께 공양을 대접하면서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길 기대합니다. 잘 살펴 보면 이 행위 자체는무집착에서 나오죠. 무엇을 보시하든 그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을 남에게 주고 나면 내가 그만큼 희생하고 내게서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 만큼의 너그러움과 무집착이 있는 거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천국에 태어나리라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리라는 큰 기대를 하죠. 그 것이 다시 집착의 한 측면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집착이라는 맥락 안에서 우리는약간의선행을 하는 겁니다. 직접적 행동은 보시에 의해 이루어지죠. 하지만 그 보시에는 모종의장기적 기대가 있어요.

  

사람들은 흔히 많은 선행을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선행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 해요. 보상을 원하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운동에 큰 돈을 기부하면 비록 그 것이 자신의 돈을 내어놓는 무집착을 요한다 해도 선행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반면 그 정치가가 권력을 잡으면 우리는 그에게 상당한 것을 보답으로 기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적 행위는 달라요. 제가 내생에정토에 태어나겠다는 희망으로 승가에 공양할 때 그 것은 평범한 방식으로 우리의 부를 사용하거나 낭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Kusala뿐냐행을 구분해요. Kusala행은 비록잠시 동안이라도탐진치가 없이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뿐냐 행은 궁극적으로 윤회하는 중생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적 삶 안에서 애쓰는 거지만 중생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면 무언가 필요해요.

 

빠빠는 물론 악행이지만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고 큰 차이는 없어요. 빠빠를 행할 때마다 마음이 이런 선하지 못한 것들에 사로잡히지요. 그래서 빠빠와 Akusala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뿐냐와 Kusala에는미세한차이가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더 잘 알기 위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나 아라한의 행동은 Kusala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아상가교수, 2010부처나 아라한은 공덕을 짓지 않을까, 아상가교수의 ‘업과 재생(rebirth)’강의를 듣고’)

 

 

아상가교수에 따르면 뿐냐는 선한 행위를 말한다. 비록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빅쿠들에게 보시하고 사원에 기부하는 행위일지라도 선한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뿐냐(공덕)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후원회에서 돈을 보시하고 어떤 대가를 바란다면 이는 빠빠(악행)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일종의 뇌물을 말한다. 공무원에게 급행료를 지불한다드든지 일감을 따기 위하여 접대하는 행위 역시 대가를 바라기 때문에 뿐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뿐냐와 빠빠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내용

보시

상태

뿐냐

(Puñña)

공덕행

(meritorious deeds)

모종의 장기적 기대

(스님들께 공양대접하며

천상에 나기 바람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것,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이해

빠빠

(Pāpa)

악행

(evil action)

보상을 원함

(정치헌금 같은 것, 따라서 보시가 아님)

지혜롭지 못한 행동,

Akusala와 별 차이가 없음

 

 

뿐냐와 빠빠의 가장 큰 차이는 대가 또는 보상을 바라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가를 바라면서 보시하는 것은 빠빠(악행)에 해당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는 하는 것은 뿐냐(공덕행)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공덕(뿐냐) 쌓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Puñña ce puriso kayirā,        뿐냥 쩨 뿌리소 까리야

kayirātheta punappuna      까이라테땅 뿌납뿌낭
Tamhi chanda
kayirātha,        땀히 찬당 까이라타

sukho puññassa uccayo.           수코 뿐냣사 웃짜요

 

선한 일을 행했으면,

더욱 더 거듭해야 한다.

그 의욕을 돋우어야 하리.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

 

(Dhp118)

 

 

2. 하늘사람2 게송

 

 

보시에 대한 두 번째 게송은 인색한 자에 대한 것이다. 인색한 자는 보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자신만의 이익과 안락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이다. 이에 대하여 두 번째 등장하는 하늘사람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Yasseva bhīto na dadāti maccharī tadevādadato bhaya,
Jighacchā ca pipāsā ca yassa bhāyati maccharī,
Tameva bāla
phusati asmi loke paramhi ca.

Tasmā vineyya macchera dajjā dāna malābhibhu,
Puññāni paralokasmi
patiṭṭhā honti pāinanti.

 

(Maccharīsutta, S1.32)

 

 

인색한 자 두려워서 베풀지 않으니

그 두려움은 베풀지 않은 자의 것입니다.

인색한 자가 두려워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은

어리석은 그를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성가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색함을 길들이고

더러움을 극복하여 베풀어야 합니다.

공덕은 저 세상에 [가서도]

생명가진 자들의 지주가 됩니다.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인색한 자는 두려워서 베풀지 않네.

베풀지 못하게 하는 두려운 것은

인색한 자가 두려워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이니,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만나는 것이네.

 

인색함을 반드시 이겨서

마음의 티끌을 극복하고 보시해야 하리.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That which the miser fears when he does not give

Is the very danger that comes to the nongiver.

The hunger and thirst that the miser fears

Afflict that fool in this world and the next.

 

Therefore, having removed stinginess,

The conqueror of the stain should give a gift.63

Deeds of merit are the support for living beings

[When they arise] in the other world.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이 게송에 대한 특별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게송을 보면 인색한 자가 죽어서 가는 곳은 아귀의 세계가 된다. 인색한 자는 베푸는 것 자체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인색한 자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수전노가 있다. 돈의 노예가 된자는  자신의 돈이나 재물을 타인에게 나가는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여긴다. 그래서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그렇다면 인색한 자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경에서는 인색한 자가 두려워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이니(S1.32, 전재성님역)”라 하였다. 이는 아귀의 세계를 말한다. 입은 작은데 배는 남산만큼 커서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늘 갈증에 시달리는 아귀를 말한다.

 

그런데 그런 아귀의 과보는 반드시 죽어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만나는 것이네.”라 하였다. 인색한 자는 살아서도 아귀의 세계에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역시 아귀의 세계에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공덕을 쌓으라고 하였다. 보시공덕을 많이 쌓게 되면 그 밑천으로 인하여 선처에 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보시공덕이 가장 큰 의지처라 하였다.

 

3. 하늘사람3 게송

 

보시에 대한 세 번째 하늘사람 게송은 보시의 에 대한 것이다. 흔히 보시나 기부는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 인줄 알고 있으나 다음 게송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Te matesu na mīyanti addhāna va sahabbaja,
Appasmi
ye pavecchanti esa dhammo sanantano.
Appasmeke pavecchanti bahuneke nadicchare,
Appasm
ā dakkhiā dinnā sahassena sama mitā.

 

(Maccharīsutta, S1.32)

 

 

먼 길을 같이 떠난 동료들이 하는 것처럼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가지는 자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죽지 않나니143)

이것은 오래된 법칙입니다. 

 

적게 가져도 어떤 자들은 나누어 가지고

많이 가져도 어떤 자들은 베풀려하지 않습니다.

적게 가져도 베푸는 보시는

그 가치가 천 배는 됩니다.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험한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처럼

조금 있어도 나누어주는 사람은

죽는 자 224)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가르침이네.

 

어떤 사람은 조금 있어도 베풀고

어떤 사람은 많아도 베풀지 않으니

조금 있어도 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하게 헤아려지네.”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They do not die among the dead

Who, like fellow travellers on the road,

Provide though they have but a little:

This is an ancient principle.64

 

Some provide from the little they have,

Others who are affluent don't like to give.

An offering given from what little one has

Is worth a thousand times its value.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빠알리 게송에서 ‘Te matesu na mīyanti라는 구문이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죽지 않나니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죽는 자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 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y do not die among the dead”라 하였다. 대체 이 말은 무슨뜻일까?

 

죽는 자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

 

먼저 빅쿠 보디의 영문 각주를 보았다.

 

 

64  Spk: Those do not die among the dead: They do not die among those who are "dead" by the death consisting in miserliness. The goods of the miser are just like those of the dead, for neither distribute their belongings.

 

(CDB 64 각주, 빅쿠 보디)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그들은 죽는 자 가운데 죽지 않는다 : 그들은 돈과 함께 관용이 모두 결핍된 것(miserliness)’에 있어서 형성된 죽음으로 인한 사망인 자들 사이에서 죽지 않는다. 수전노들의 선행은 죽은 자들과 다름 없다. 그들의 소유물에대해서 공헌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CDB 64 각주 번역)

 

 

초불연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143) “여기서죽은 자들 가운데(matesu)’라는 것은 베풀지 않는 습성(adanasilata)이라는 죽음(marana)에 의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라는 뜻이다. 베풀지 않는 습성을 가진 자들의 재물(bhoga)은 죽은 자들의 재물과 같다. 그러므로 보시하는 습성을 가진 자(dana-sila)들은 이러한 죽은 자들 가운

데서도 죽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SA.i.58)

 

(초불연 143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224) matesu : Srp.I.58에 의하면, 여기서 죽은 자는 인색한 자를 뜻한다. 인색한 자가 소유한 것은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의 것과 같다.

 

(성전협 224각주, 전재성님)

 

 

세 개의 각주를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은 인색한 자의 죽음과 대비하여 설명된 것이다.

 

지금 남에게 돈을 쓰는 것이 마치 살점 떨어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하는 수전노가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과연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을까? 이렇게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 모르는 수전노의 돈이라는 것은 차라리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각주에서는 수전노가 가지고 있는 돈은 마치 죽은 자가 소지 하고 있는 돈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조금 있어도 베풀줄 아는 사람에 대하여 죽는 자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주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 모르는 자는 죽은 자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4. 하늘사람4 게송

 

네 번째 하늘사람의 게송은 참사람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사람이란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포함하여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참사람은 어떻게 배푸는 것일까?

 

 

Duddada dadamānāna dukkara kamma kubbata,
Asanto n
ānukubbanti sata dhammo durannayo.
Tasm
ā satañca asatañca  nānā hoti ito gati,
Asanto niraya
yanti santo saggaparāyaāti

 

(Maccharīsutta, S1.32)

 

 

베풀기 어려운 것을 [참된 자는] 베풀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참된 자는] 행하나니

참되지 않은 자들은 따라하지 못합니다.

참된 자들의 법은 실로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들과 참되지 않은 자들의

태어날 그곳은 서로 각각 다릅니다.

참되지 않은 자들은 지옥에 태어나고

참된 자들은 바르게 천상을 향합니다.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참사람의 가르침은 따르기 어렵다네.

주기어려운 것을 배풀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하는 참사람을

참답지 않은 사람은 흉내를 내기도 어렵네.

 

그러므로 참사람과 참답지 않은 사람은

사후의 운명이 다르니

참답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참사람은 하늘나라로 간다네.”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The bad do not emulate the good,

Who give what is hard to give

And do deeds hard to do:

The Dhamma of the good is hard to follow.

 

 Therefore their destination after death

Differs for the good and the bad:

The bad go to hell,

The good are bound for heaven.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네 번째 게송에 대한 각주는 세 번역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번역만 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네 번째 게송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밥값내놓아라!”

 

이제 까지 세 번째 게송을 보면 세속에서의 보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공덕을 바라는 보시라든가, 공덕은 저 세상의 의지처가 된다든가, 조금 있어도 베푸는 보시 공덕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런데 네 번째 게송은 참사람(sata)’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의 보시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 보시는 재가자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출가자는 보시를 받는 대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출가자는 보시공덕을 쌓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출가자도 공덕을 쌓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보살로서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를 이루기 이전에 수 많은 생을 거듭하면서 보살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가자가 보시물에 의존하여 공덕을 쌓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도와 과를 이루지 못하고 시주물만 축내고 있다면 죽어서 어떤 운명이 될까? 마성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의 선방에서도 간혹 밥값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시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승려가 수행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것은 밥도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출가자의 의무는 재가자에게 법을 설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도로부터 재시를 받고 법시를 베풀어 줄 수 없는 사람은 참으로 비참하다. 그런 사람은 재가로부터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출가자는 밥값을 다하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 한다.

 

(출가자의 밥값, 마성스님)

 

 

빅쿠들은 출가자의 시주와 보시에 의하여 살아 간다. 그런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일만 하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그래서 선방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스님들에게 밥값내놓아라!”라고 다그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출가자가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세속인 들이나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서 본업 보다 부업에 더 열중한다면 밥값을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밤샘 술판을 벌이고 도박에 열중한다면 불자들은 본전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럴경우 밥값내라고 다그칠 수 있다. 그렇다면 출가자는 무엇으로 베풀 것인가?

 

출가자는 무엇으로 베풀어야 하나?

 

출가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가르침대로만 살려 하기 때문에 세속인들이나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일을 하지 않는 출가자들이 돈이 있을리 없다. 그래서 돈으로 보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교계신문을 보면 간혹 스님들이 거금을 쾌척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스님들은 그 돈이 모두 어디서 난 것일까?

 

일을 하지 않고 돈이 없는 스님들이 베풀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재가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이 출가자가 베풀 수 있는 일이다. 이를 다른 말로 법보시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도 주기어려운 것을 배풀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하는 참사람이라 하였다. 이를 출가자의 법보시로 해석한다.

 

5. 부처님 게송1

 

네 명의 하늘사람이 네 개의 게송을 읊었다. 그러자 어느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누가 시를 잘 읊었습니까?”라고 묻는다. 마치 콘테스트에서 누가 일등이냐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차례로 모두 잘 읊었다라고 말하면서 내것도 들어 보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보시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부처님은 짤막하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 하신다.

 

 

Dhamma care yopi samuñchaka cara

dārañca posa dadamappakasmi,

Sata sahassāna sahassayāgina

kalampi nāgghanti tathāvidhassa teti.

(Maccharīsutta, S1.32)

 

 

[세존]

이삭을 주워서 연명을 하더라도 항상 법을 실천하고144)

아내를 부양하며 가진 것이 적더라도 보시를 실천하면

천의 보시물로 베푸는 보시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

이 사람 [보시의] 오직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하도다.145)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세존]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벼이삭을 모아 229) 아내를 부양하고 살면서

조금 있어도 보시하네.

천사람의 십만의 제물조차도

그러한 보시에 비해 십육 분의 일의 230) 가치도 없네.”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If one practises the Dhamma

Though getting on by gleaning,

If while one supports one's wife

One gives from the little one has,

Then a hundred thousand offerings

Of those who sacrifice a thousand

Are not worth even a fraction

[Of the gift] of one like him.65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부처님의 게송에서는 보시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다. 이는 다음 게송과 더불어 보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능력껏 보시한다는 것

 

이 게송에서는 조금 있어도 보시하는 공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보시라는 것이 반드시 많이 한다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능력껏 보시하라는 말이다.

 

보시하면 공덕이 있다고 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다 바친다거나 빚을 내서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능력껏 보시하였을 때 그 공덕은 매우 큰 것이라 한다. 이런 능력껏 보시는 현재 한국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초기불교를 전파하는 수행처나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능력껏 보시를 강조 하고 있다. 이렇게 능력껏을 강조하는 것은 기도천도재로 인한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법문을 하고 수행지도를 하기 때문에 재가자들의 보시에 의지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가자의 경제능력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능력껏 보시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삭줍기와 가난한 자의 보시

 

게송에서 Dhamma care’라는 말이 있다. 이는 ‘법을 실천하고’라는 뜻이다. 여기서 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빅쿠보디의 각주와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십선행을 짓는 것을 말한다. 오계를 준수하고 선업을 짓는 자가 보시하는 공덕은 매우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찢어지게 가난한 경우도 있다. 이를 게송에서는 ‘samuñchaka이라 하였다. ‘벼이삭을 모은다라는 말이다. 이삭줍기를 말한다. 밀레의 그림을 보면 이삭줍는 여인들(The Gleaners)’이 있는데 이는 수확이 끝난 뒤 밀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세명의 여성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삭줍기가 있다. 농촌에서 추수가 끝난 다음에 논이나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이다. 손으로 줍기도 하지만 쓰레기 받이와 빗자루로 쓸어 담기도 한다. 이런 이삭줍기는 한톨의 농산물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들을 상징한다. 이삭줍기로 생계를 연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벼이삭을 모아 아내를 부양하고 살면서라 하였는데 이는 매우 가난함을 말한다.

 

이렇게 가난한 자가 십선업을 지으면서 보시 하였을 때 그 가치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를 빠알리게송에서는 천사람의 십만의 제물조차도 그러한 보시에 비해 십육 분의 일의 가치도 없네.”라 하였다.

 

부처님 당시 타락한 브라만들은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으로 엄청난 양의 제물을 보시하였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벼이삭을 주어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십선행을 닦는 자의 보시 공덕에 비하면 십육분의 일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가난한 자의 보시가 부유한 자의 보시보다 새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보시하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보시는 것에 새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십육분의 일(cara pi)’의 의미

 

이렇게 새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kalampi’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230) cara pi : 1/16 이란 뜻이고 가이거도 그 의미를 취했다. 이것은 원래 베다시대의 제사장에게 딸린 16제관이 있었는데, 그 하나의 제관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조금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성전협 229-230 각주, 전재성님)

 

 

carapi는 십육분의 일의 뜻이라 한다. 작은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서 조금의 의미라 한다. 이 구문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았다.

 

 

145) “’백 천 배(satam sahassana)’라는 것은 천의 천 배에 다시 백을 곱한 것이다. ‘천의 보시물로 보시하는 자(sahassa-yagi)’란 것은 천명의 비(bhikkhu-sahassa)에게 보시하거나 천 냥의 돈(kahapana-sahassa)로 구입한(nibbattita) 보시물(yaga)로 보시를 하는 자를 말한다. 백 천 배

라는 것은 이러한 보시로 10꼬띠(koti)의 비구들이나 10꼬띠의 돈으로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시는 앞의 가난한 사람의 보시의 한 조각(kala)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 조각(kala)’이라는 것은 16분의 1도 되고 백 분의 1도 되고 천 분의 1도 된다. 여기서는 백분의 1을 말한다. 이렇게 계산하면 이 보시는 가난한 사람의 보시의 10,000꼬띠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SA.i.59)꼬띠(koti)는 중국에서 구지()로 음역을 했는데 1꼬띠는 천만을 뜻한다.

 

(초불연 144-145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십육분의 일의 의미인 carapi에 대하여 한 조각이라 번역 하였다. 그래서 백 천 배의 보시도 이 사람 [보시의] 오직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하도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Are not worth even a fraction: the word "fraction" (kala) can mean a sixteenth part, or a hundredth part, or a thousandth part; here a hundredth

part is intended. If one divides into a hundred parts (the value of) a gift given by him, the gift of 10,000 kotis given by the others is not worth one portion of that.

 

(CDB 65 각주, 빅쿠 보디)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kala에 대하여 ‘fraction(조각)’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십육분의 일이나 백 또는 천의 분의 일과도 같은 의미라 하였다. 이렇게 kala에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조각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고, 전재성님은 십육분의 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 한글번역을 보면 십육분의 일이라는 말은 도처에 등장한다. 마치 새발의 피처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경우에 대하여 십륙분의 일만큼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천체가 비추는 광명이든 그 모든 것은 달이 비추는 광명의 십육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달이 비추는 광명이 최상이라고 불린다.”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대규모 동물희생제

 

그렇다면 부처님은 게송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그것은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바라문의 타락이 극에 달하여 대규모동물희생제나 심지어 인신공양까지 제물로 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천사람의 십만의 제물조차도라고 하여 부처님 당시 브라만의 제사임을 표현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단지 천의 보시물로 베푸는 보시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라고 하여 단지 보시라고만 표현 하였다빅쿠 보디는 Then a hundred thousand offerings Of those who sacrifice a thousand”라 하여 브라만의 제사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Though Spk speaks of alms offerings to bhikkhus, v. 94 just below implies that the animal sacrifices of the Brahmins are what is being rejected.

 

(CDB 65 각주, 빅쿠 보디)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주석에서 빅쿠들에게 자선의 공양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바로 아래 94번 게송에서와 같이 거절 되어야 할 브라만의 동물희생제를 암시한다

 

CDB 65 각주 번역)

 

 

이처럼 빅쿠보디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백천의 보시라는 것이 브라만의 대규모동물희생제를 비판 하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음 게송을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하늘사람5 게송

 

부처님이 천사람의 십만의 제물이라고 말하자 이에 대하여 하늘사람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질문한다.

 

 

Kenesa yañño vipulo mahaggato
Samena dinnassa na agghameti,
Katha
1 sata sahassāna2 sahassayāgina
Kalampi nāgghanti tathāvidhassa teti.

(Maccharīsutta, S1.32)

 

 

왜 이들의 충만하고 광대한 보시146)

참된 사람 보시보다 가치 없는 것입니까?

천의 보시물 베푸는 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

참된 자의 한 조각에 왜 미치지 못합니까?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왜 그 굉장히 풍부한 큰 제사가

올바른 보시로서 가치가 없는가? 232)

천 사람이 십만의 제물조차도

그러한 보시에 비해 가치가 없는가?”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Why does their sacrifice, vast and grand,

Not share the value of the righteous one's gift?

Why are a hundred thousand offerings

Of those who sacrifice a thousand

Not worth even a fraction

[Of the gift] of one like him?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빠알리 게송을 보면 yañña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146) ‘보시’로 옮긴 원어는 yañña (제사)인데 문맥에 따라 보시의 뜻으로도 쓰인다.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신들에게 행하는 제사는 보시의 개념으로도 쓰인다. 제사 자체가 신들에게 공물을 보시하는 것이며 제사에 동참하는 사제나 여러 사람들에게도 보시를 하기 때문이다.

 

(초불연 146각주, 각묵스님)

 

 

 Yañña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sacrifice(희생); alms-giving(자선)’의 뜻이다. 한역으로는 ‘, 牲祭, 祭祀, 祭式의 뜻이다. 제사와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이는 다름 아닌 브라만의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뜻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이를 제사가 아닌 보시로 번역하여 충만하고 광대한 보시라 하였. 전재성님은 굉장히 풍부한 큰 제사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sacrifice, vast and grand(광대하고 큰 희생제)’ 라 하였다.

 

브라만들의 제사를 보면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 대체 브라만들의 어떻게 제사를 지냈을까?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바라문들]

 ‘물과 토지와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있는 자들의 필수품인 것과 같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습니다.

 

두 발이나 양 뿔, 어떤 것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들은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는데,

왕은 뿔을 잡고 소를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은 ‘불법적인 일이다’고 소리쳤습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바라문들이 한 번 제사지낼 때 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소나 양 등이 제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상을 부처님은 비판한 것이다.

 

부정한 보시, 잘못된 보시

 

부처님은 아무리 제물을 많이 준비 하여도 살생하여 제물로 올리는 것은 아무런 공덕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천 사람이 십만의 제물조차도 그러한 보시에 비해 가치가 없는가?”라고 묻는다. 아무리 큰 제사일지라도 십선업을 닦는  가난한 자의 보시공덕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부정한 보시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232) Samena dinnassa na agghameti. : Srp.I.59에 의하면, 부정한 보시, 즉 잘못된(visma)보시를 말하는 것이다. 잘못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입각한 보시를 말한다.

 

(성전협 232 각주, 전재성님)

 

 

잘못된 보시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행위에 입각한 보시라 한다. 지금 대규모 동물희생제로 큰 제사를 지냈다면 이는 살생을 한 것이다. 따라서 부정한 보시가 된다. 이뿐일까? 도둑질하거나 사기 등으로 모은 재물을 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6. 부처님 게송2

 

이와 같은 하늘사람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번째 게송을 답한다.

 

 

Dadanti heke visame niviṭṭ
Chetvā vadhitvā atha socayitvā,
Sā dakkhi
ā assumukhā sadaṇḍā
Samena dinnassa na agghameti.

Eva sata sahassāna sahassayāgina
Kalampi nāgghanti tathāvidhassa teti.

(Maccharīsutta, S1.32)

 

 

어떤 자들은 바르지 못하게 살면서 보시를 행하니

자르고 죽이고 고통 주는 것으로 [보시를 하도다.]

그 보시는 눈물과 폭력으로 얼룩진 그러한 것이니

그러므로 참된 사람 베푼 것에 비하면 가치가 없도다.

천의 보시물 베푸는 이런 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

참된 자의 한 조각에 미치지 못하도다.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32, 각묵스님역)

 

 

[세존]

어떤 사람은 부정하게 살면서 보시하니

상처내고 죽이고 또한 괴롭히네.

그 보시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니

올바른 보시로서 가치가 없고,

천 사람이 십만의 제물조차도

바른 보시에 비해 십육 분의 일의 가치도 없다네.”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2, 전재성님역)

 

 

Since they give while settled in unrighteousness,

Having slain and killed, causing sorrow,

Their offering-tearful, fraught with violence-

Shares not the value of the righteous one's gift.

That is why a hundred thousand offerings

Of those who sacrifice a thousand

Are not worth even a fraction

[Of the gift] of one like him.

 

(Stinginess, CDB S1.32, Bhikkhu Bodhi)

 

 

부처님의 두 번째 게송이다.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으로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이다.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보시

 

이 게송에 대한 세 번역자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시에 대한 매우 중요한 문구가 발견된다. 그것은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보시는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동물을 희생해 가며 올린 제사 등을 말한다.

 

비록 이 게송이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돼지를 잡고 닭을 잡는 행위 역시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도적질하여 모은 돈, 사기쳐서 모은 돈, 투기하여 불로소득으로 모은 돈을 보시하는 것 역시 눈물과 폭력으로 얼룩진 것이다.

 

이렇게 남의 생명을 빼앗고, 도둑질한 것 등 다른 존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공양이나 보시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표현 하기를 바른 보시에 비해 십육 분의 일의 가치도 없다네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십육분의 일이란 매우 작은 것을 말한다. 초기경에서는 달빛과 별빛의 예로 들고 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지구상에 도달된 모든 별빛은 실로 달빛의 16분지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달빛을 그 최상으로 한다.”라는 정형구가 있다.

 

불자들이 보시할 만한 단체는?

 

불자들이 늘 듣는 말이 보시이다. 그래서 절에 가면 스님들이 항상 보시를 강조한다. 보시하면 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도 보시 나름이다. 만일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이나 재물을 보시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아무런 공덕이 없다. 살생한 대가로 번돈, 도둑질이나 사기쳐서 번 돈, 불법과 탈법에 따른 투기로 번돈, 내기 하여 번 돈, 남의 눈에서 피눈물 지게 하여 번 돈 등으로 보시 하여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정한 돈으로 부정한 보시를 하였을 때 비록 가난한 자의 깨끗한 보시공덕의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보시와 관련하여 반드시 절에다 하라는 법은 없다. 좋은 일을 하는 종교단체나 사회단체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각 종교단마다 경쟁적으로 구호단체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보시할 만한 단체는 어떤 것이 있을까?

 

몇 달 전 알고 지내는 법우님으로부터 보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은 불교단체 중에 장애자를 돌보는 ‘S 에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비록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능력껏 일정액이 빠져 나가도록 자동이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참하기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신청하였다. 그러자 담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떤 이유로 신청하였는지 누구의 소개로 신청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특히 가입을 권유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변의 권유로 신청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아는 사람 위주로 소개하여 보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작은 금액이지만 능력껏 보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본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보시한다고 하여 반드시 돈으로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가지고 있는 재능을 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기가수라면 출연료를 받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김용옥선생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도 베푸는 삶이라 볼 수 있다. 그도 저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몸으로라도 보시 하는 것이다. 법당에 나와 법당 청소라도 하면 이것도 보시가 되는 것이고 아는 사람들에게 미소라도 지어 주면 미소보시기 될 것이다. 이렇게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우는 것이다.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보시하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보시한 적이 없는 자는 죽은 자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치 수전노가 베풀지 않을 때 그 재물은 죽은 자의 재물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금 있어도 나누어주는 사람은 죽는 자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S1.32)”라 하였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서 이삭줍기 하듯 삶을 살아도 베푸는 삶을 살 때 그 보시 공덕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어떤 사람은 부정하게 살면서 보시하니

상처내고 죽이고 또한 괴롭히네.

 

그 보시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니

올바른 보시로서 가치가 없고,

 

천 사람이 십만의 제물조차도

바른 보시에 비해 십육 분의 일의 가치도 없다네.”(S1.32)

 

 

 

2013-12-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