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악법도 법이다? 담마(法)와 위나야(律)를 스승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26. 12:27

 

 

악법도 법이다? 담마()와 위나야()를 스승으로

 

 

 

크리스마스날 조계사에서

 

크리스마스날 조계사가 매스컴에 떠 올랐다. 철도파업지도부 중의 일부가 조계사로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일부 종편방송에서는 시종일관 은신으로 보도 하였다. 그러나 정웅기 불시넷 회장은 손석희의 JTBC뉴스 대담에서 은신이 아니라 피신임을 강조하였다.

 

매스컴에서는 조계사가 새로운 성지로 떠 올랐다고 일제히 보도 하였다. 2000년 이후 노동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하다 수배되면 조계사를 피난처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동성당과 대비 된다.

 

지난 70년대와 80년대는 명동성당이 수배자들에게는 피신처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서 신도들의 불편함을 이유로 들어 더 이상 피신처로 받아 들일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수배자들은 대안으로서 조계사를 피신처로 삼은 것이다. 이는 이번 철도파업 수배자중의 한사람이 갈곳이 조계사 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발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조계사의 어느 여성신도는 이북 가서 김정은이 꼬붕이나 해!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이 와서 조계사 물을 흐리냐(2013-12.25 오마이뉴스)”라며 고성을 질렀다고 한다. 마치 지난 8월 끌려 가는 적광스님을 보고서 사미인 주제.. 완전히 깡패네라고 말한  어느 노보살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사건을 바라 보는 또 다른 시선도 있어서 우리사회에서 두 개의 시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스님들 법문을 듣다 보면 종종 출가하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출가이유를 보면 십인십색이라는 말이 맞을 듯 하다. 모두 갖가지 사연과 인연으로 수행자의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출가이유 중에서도 수배당하여 절에 피신하다 그 인연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국사건에 연루 되어 깊은 산중으로 들어 갔는데, 산중에는 절이 있기 때문에 절에 머물다 출가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가에서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가에 들어 온 자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나가는 것도 자유이다. 한번 들어 왔다고 하여 못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들어 오는 것도 자유이지만 역시 나가는 것도 자유이다. 이런 점이 타종교와 가장 다른 점이다. 유일신교에서는 들어 가는 쉽지만 나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에서는 사회의 약자에 대하여 쉼터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생겨 났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옛날에는 절이라는 곳이 고아원이나 양로원 역할을 하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집이 없으면 절로 들어 간 것이다.

 

 불가에서는 차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 준다. 이런 전통이어서일까 시국사건 수배자들이 절을 피신처러 삼는 것은 이제 일상화 된 것 같다. 그런 대표적인 사건이 2008년 당시 촛불수배자들이었다.

 

여고생의 작은 촛불하나가

 

2008년 봄은 촛불시위가 거의 매일 열렸다. 이른바 광우병 파동에 따른 미국산쇠고기 수입때문 이었다. 이에 대하여 아직도 종편에서는 광우병괴담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우병 보다도  주권에 대한 것이었다. 주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자존심의 회복심리가 촛불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여고생의 작은 촛불하나가 도화선이 된 것이다.

 

처음 촛불은 작았다. 그러나 촛불이 계속 옮겨 붙음에 따라 촛불의 규모도 커졌다.  그런 촛불문화제를 처음 본 것은 2008년 연등축제를 하루 앞둔 연등회날이었다. 이날 조계사에서 인사동, 종로2가를 거쳐 다시 조계사로 들어 가는 길놀이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여유가 있자 청계천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를 보러 갔다. 주로 여고생 등이 주축이 된 소박한 문화제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어린이나 노인들도 다수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이컵에 초를 넣어 만든 촛불을 서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서 국민들의 정서가 정부에서 말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08 5 3일 청계광장

 

 

 

 

촛불문화제 참석하여

 

이렇게 한번 불이 붙은 촛불은 도무지 꺼질줄 몰랐다. 오히려 활활 더 타올랐다. 마침내 시청앞 광장에서는 거의 매일 대규모 촛불문화재가 열렸다. 종종 집회에 참석한 후기 여러 개를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목록을 뒤져 보니 모두 삭제 되어 있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고 다음측에서는 이를 받아 들여 모두 삭제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촬영해 놓았던 사진과 동영상 자료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후 불교계에서 열린 대규모 시국법회(장엄등으로 태어난 '촛불소녀', 7.4시국법회를 보고)전국불교도 대회(8.27 범불교도대회, 지관스님도 바닥에 앉아)’에 참여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2008 7 4일 시국법회

 

 

 

 

 

2008 8 27일 범불교도대회

 

 

촛불문화제 당시 사회를 본 사람은 현재 정의당 국회의원 박원석의원이었다. 그런데 촛불문화제가 장기화 됨에 따라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촛불문화제를 주도한 사람들은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그 때 피신 장소로 선택된 곳이 조계사이었다. 그 때 조계사를 방문하였다. 그래서 불교음악 씨디를 선물로 증정 하였다. 그 때 기록으로 남긴 것이 조계사 촛불시위 수배자들의 24시간을 생중계로 보는 세상(2008-07-14)’이다. 이렇게 조계사는 2000년 이후 명동성당을 대신하여 민주주의 성지가 된 것이다.

 

 

 

2008 7월 조계사 촛불시위 수배자들

 

 

공무원과 공기업의 철밥통

 

종편방송에서는 매우 자극적인 언어를 써 가며 파업을 비난하고 있다. 현철도공사 직원들의 평균임금이 연봉 칠천만원에 육박하고 평균연령이 ‘50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개혁을 해야 함을 강조 하고 파업하는 행위는 결국 철밥통을 지키기 위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맹공을 퍼붓고 있다.

 

공기업 개혁에 공감한다. 그런데 이왕이면 공무원 개혁도 하였으면 한다. 현재 공무원이나 공기업 임직원들이 누리는 혜택이 매우 과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분보장, 고용보장, 노후보장이라는 삼중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국민의 평균치 이상의 과도한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개혁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공무원이나 공기업에서는 이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한다. 그래서 어느 정부에서는 초기에는 개혁을 외쳤으나 결국 용두사미로 끝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는 공무원들이 법을 만들고 공무원들이 법집행을 하고 공무원들이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공무원연금제도이다. 그래서 공무원연금 제도 개혁 없이는 그 어떤 개혁도 개혁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수차례 글을 올렸다. 그결과 넷상에서는 치열한 댓글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공무원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30년 넘게   공무원생활하고 남는건 연금밖에 없는데 새로운 카스트니 뭔니 개소리 하지 말고 퇴직금   4-5억주고 국민연금 수준으로 주세요   공무원 언제 퇴직금 줬습니까?   퇴직금 두둑히 챙겨주고 국민연금수준으로 제발주시기 바랍니다. (KJK, ‘한국의 새로운 카스트제도, 공무원 연금 의 댓글)

 

 

지난 2월에 올린 한국의 새로운 카스트제도, 공무원 연금 귀족의 제목으로 올린 글은 현재 넷상에서 논쟁중이다. 한번도 메인뉴스에 올려져지지 않았지만 현재 추천이 138이고 댓글이 106개 달렸다. 주로 공무원연금제도에 대한 비판글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공무원들의 억울함을 호소 하는 댓글도 보인다.

 

위 댓글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대기업 기준으로 비교하여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이 스스로 빈곤층이라 하는데, 이런 댓글을 보면 역시 공무원연금개혁뿐만 아니라 공무원 개혁, 공기업개혁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느끼게 해 준다.

 

철도노조 파업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정부의 불통때문이다. 철도공사 직원들이 우리나라 근로자 평균치 보다 두 배이상의 급여를 받고 더구나 신분보장, 정년보장, 노후보장이라는 삼박자를 갖춘 철밥통집단임에도 파업에 대하여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현 정권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과 같은 선거부정과 관련 있다.

 

철밥통이라 불리우는 공무원과 공기업을 개혁하려면 강력한 민주정부가 들어서야 하는데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여 선거자체를 무력화 시켜 버린다면 앞으로 선거는 하나마나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선거를 통한 혁명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우리사회의 구성원이 다양하기 때문에

 

블로그에 글을 매일 쓰고 있다. 보통불자의 일상에 대한 것이다. 주로 불교관련 이야기나 가슴설레는 경전의 이야기를 전하지만 종종 정치에 대한 것도 다룬다. 이럴때 마다 어느 네티즌들은 실망을 표시한다. 순수하게 불교관련 이야기만 써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중에 살지 않고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잘못된 법이나 제도의 모순, 그리고 지도자의 거짓과 위선 등을 보았을 때 이를 지적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라 본다. 비록 힘없는 보통 불자에 지나지 않지만 이렇게 고발함으로 인하여 의식과 제도가 개선되고 사람들의 삶의 질이 나아진다면 당연히 현실참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어떤 일이든지 서슴지 않음을 본다. 이때 주장하는 것은 법과 원칙이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자들은 대게 독선적이고 아집이 강하다. 특히 민주주의 시대에 법과 원칙을 강조한다는 것은 독재임을 스스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칼럼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따라서 그 가운데 어떠한 이해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개별 집단 사이의 타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는 대립적인 이해관계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대립성을 풀어 나가려는 호혜적인 정신적 자세, 요컨대 '관용'을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로 추앙한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숙명이다.

 

( 소통 아니라 소탕에 골몰한 박근혜 '불통령', 오마이뉴스 2013-12-25)

 

 

칼럼에서는 불통과 소통을 말하고 있다. 불통은 주로 독재자들에게 해당되는데 주로 쓰는 말이 법과 원칙이라 한다. 반면 소통은 민주주의자들에게 해당되는데 주로 쓰는 말이 대화와 타협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화와 타협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우리사회의 구성원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를 대변하는 곳이 국회이고 대변하는 자들이 정치인이다. 그런데 법과 원칙만 강조한다면 이는 대화와 타협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일당이 지배하는 공산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

 

어떤 이는 법과 원칙은 지켜 져야 함을 강조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에 의한 다양성을 기본으로 한 다양한 사회에서 마치 전체주의적 발상을 연상케 하는 법과 원칙을 너무 강조한다면 이는 대화와 타협을 근본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정해진 법과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함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예를 들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들먹여 준법정신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게 보수나 기득권층에 해당된다. 지금 이런 방식이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댓글을 주신 법우님에 따른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이 분의 무식을 약간 보충해드립니다. 잘난 척하기 위해서요!) 소크라테스는 저런 말 한 적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악법이 법이라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 선택이랍니다. 71살에 죽었어요. 그리스 시민들로 이루어진 2심의 배심원 재판제도에서, 1심의 비등비등했던 유무죄 판정 상태를 끝까지 개김?으로써 2심에서 압도적인 사형 판결을 받아낸 것이니까요. 그래서 철인의 전형으로서 숭앙 받는 거지요. 그 개김?의 자설적 다큐멘타리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입니다.

---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준법의 문제가 아녜요! 이 무식한 양반아! 그 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와 같은 우리 인간의 다양한 윤리적 관심사들을 끝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답에도 만족하지 않았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아포리아”라고 말하죠. 중론송의 4구비판과 닮았답니다. 소크라테스 이후는 플라톤이 아닙니다. 헬레니즘 철학이죠. 에피쿠로스/제논/퓌론 등의 다양한 후계 계통들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서양 역사의 선택에 의한 기독교의 간택인 것으로 봐도 될 겁니다, 제 견해로는요.

 

(I법우님)

 

 

법우님에 따르면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독배를 마셨다는 것은 잘못알려진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보면 일본 학자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온 구절을 그런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적은 것이 와전되었는 것이다. 따라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오로지 우라나라에서나 통용되는 것으로서 독재정권이 독재를 합리화 하기 위하여 널리 퍼뜨린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말을 하였을까? 다른 법우님이 남겨 주신 글을 보면 이번 판결은 잘못 되었지만 나는 아테네의 사법체제를 존중한다. 내가 도망간다면 죄없는 나를 사람들이 오해하게 될 것이기에 내 명예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후세사람들이 내 무죄를 알아주고 이번 판결을 비난할 것이다.”라는 취지로 말을 했다는 것이다.

 

저항권(Right of resistance)이란 무엇인가?

 

학교 다닐 때 영어공부를 하다 눈에 확 띄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저항권에 대한 것이었다. 영어교재에 실려 있는 것은 미국의 수정헌법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었다. 어느 정부이든지 헌법에 명시된 조항을 위배하면 국민들이 정부를 갈아 치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저항권을 접하였을 때 매우 놀랐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정부에서 하는 말은 모두 옳은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설령 과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모두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언론과 매스컴에서 말하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에 저항하면 큰 죄나 짖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부에서 법과 원칙을 강조할 때마다 따라 주는 것이 미덕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영어 교재에서 국민들이 정부를 갈아 치울 수 있다는 미국의 수정헌법 조문을 인용한 글을 보고서 오늘날 미국이 이렇게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저항권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위키피다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저항권(Right of resistance) 또는 혁명권(Right of revolution)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헌법의 기본원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행하여지고 그 침해가 헌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국민이 자기의 권리,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실력으로 저항하는 권리이다.

 

(저항권, 위키백과)

 

 

저항권은 헌법이 독재자의 손에 유린당했을 때 저항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비록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밀어 붙이지만 법이라는 것은 헌법의 하위에 있기 때문에 헌법보다 우선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지난 2008년 촛불문화제에서 로고송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었다. 이는 헌법 제1 1항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제조 2항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헌법은 모든 법의 최상위에 있다. 그래서 헌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독재권력에 대하여 국민이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 에서 저항권은 어떤 것일까? 위키피디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불가침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명권, 자유권 그리고 행복추구권이다: 이 권리들을 보장받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정부가 만들어졌으며, 피지배자의 동의에서 정부의 정당한 권력이 나왔다;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그 목적을 파괴하면, 사람들은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새 정부를 만들 권리가 있다."(미국 독립선언서)

 

 

이것이 미국에서의 저항권이다. 어떤 정부라도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침해하였을 때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위키백과에 따르면 시민혁명의 경험이 없는 독일에서는, 저항권과 혁명권을 구분하여, 저항권은 기존의 헌법수호를 위한 것이고, 혁명권은 기존의 헌법파괴를 위한 것이라고 하여, 구별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법 같은 담마()와 위나야()

 

국민들은 헌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정부에 대하여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는 모든 법보다 우선하는 것이 헌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판단은 헌법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라는 기구가 생겨났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 거론 되는 모든 것은 담마(Dhamma)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한자어로 ()’이라 하고 우리말로 가르침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판단은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을 기준으로 한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주장을 하였을 때 이것이 불교적인지 비불교적인 판단하는 기준은 빠알리니까야에 쓰여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지에 대하여 확인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판단기준이 있다. 그것은 위나야(vinaya)’이다. 이를 한자어로 ()’이라 한다. 우리말로 계율이라 보통 말한다. 따라서 출가자나 재가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은 계율에 위배되는지 따진다. 이렇게 불교에서 담마와 위나야는 사회에서의 헌법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M16)”라고 말씀 하셨다.

 

저항권을 보는 듯한 부처님의 가르침

 

 그런데 빠알리니까야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치 저항권을 보는 듯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M16)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 앞에서 듣고 세존 앞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들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맞지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Mahāparinibba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98, 전재성님역)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먹이며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거나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드시 경전에서 확인하여 그 말이 담마와 위나야에 맞는지 확인하고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 마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법과 원칙을 노래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이라는 것이 과연 헌법에 맞는 것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헌법에 맞으면 수용할 수 있지만 헌법에 위배된다면 내칠 수 있음을 말한다.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때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면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이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수와 진보늬 차이이고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지위와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는 자들은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 영원히!”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위와 기득권을 쥐고 영원히 향유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변화를 두려워 하는 보수기득권층에서 늘 내세우는 것은 법과 원칙이다.

 

양심과 수치심이 결여 된 자들이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정의에 따른다고 보면 틀림 없다. 정치권력을 쥔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 되도록 만든 법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득권자들은 변화’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하는 자나 집단에 대하여 불온시하고 심지어 남북이 갈려져 있는 상황에서 종북몰이까지 서슴지 않는다.

 

정치나 시국관련 글을 쓰면 싫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가 우리의 현실과 직결 되어 있음에도 불자라는 이유로 굳이 피하고자 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정치에 무관심함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불이익은 매우 크다. 그래서 양심없는 보수기득권은 정치무관심을 유도한다거나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선거를 무력화 시키기도 한다. 이런 현실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치에 오염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글을 쓰는 이유

 

그럼에도 정치적인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깊은 산중에서 세월아 네월아하며 살아간다면 현실세계에서 돌아 가는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현실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강조하신 보시나 지계 등의 생활은 결국 봉사하는 삶, 도덕적 삶으로 귀결된다. 보시의 예를 든다면 직접적인 물질적인 보시가 부처님의 가르침의 전부는 아니다. 남에게 가르쳐 주는 것도 보시이고 미소 한번 지어 주는 것도 보시이다. 그래서 이를 법보시라 하고 미소보시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불평등한 법과 원칙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 되고 기회가 박탈 된다면 당연히 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헌법에 위배 되는지 판단하여 바로 잡는 것이 직접적인 물질적인 보시 보다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을 들고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것은 선거권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집단을 단죄하여 다시는 하나마나한 선거를 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부처님은 항상 담마()와 위나야()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만일 누군가 법률을 이야기 하였을 때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따져 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과 계율이다. 그 기준은 어떤 것일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빠알리니까야이다. 모든 불교적 행위는 빠알리 삼장에 쓰여 있는 담마와 위나야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은 글을 쓰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2013-1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