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죽음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나?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6. 15:16

 

죽음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나?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20년은 더 살수 있었을 텐데

 

전화를 한 통화 받았다. 낯선 번호가 뜬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름이 뜨도록 해 놓았으나 전화번호만 뜰 때는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안면이 있는 법우님이다. 전화번호를 바꾸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기존의 번호를 고수하다 이번에 010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M법우님은 이번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하였다. 진주에 있는 N정사의 도반들과 함께 테라와다빅쿠을 모시고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다녀 온 것이다. 그래서 현지에서 찍은 사진과 구입한 책 등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하여 그동안 마음고생하였던 것을 모두 털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이었다.

 

M법우님은 남편의 죽음에 애통해 하였다  2012년 말 계단을 내려 가다 발을 헛딛어 그로 인하여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 충격이 심해서 너무 심해 지난 2년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였다. 

 

M법우님과 인연이 된 것은 지난 2012년 일본성지순례에서이다. 2012년 6월 나라-쿄오토의 관서지방과 북큐슈 지방을 3박4일 일정으로 순례 하였는데 M법우님 부부도 동참 하였다. 두 분 모두 공직에서 정년 퇴임 하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몸이라 합류한 것이다.

 

그런데 두 분은 모두 조계종포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M법우님은 영어가 전공이라  국제포교사이고 법우님의 남편은 일반포교사이었다. 국제포교사인  M법우님은 주말 조계사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안내봉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여행지에서 인연을 맺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우님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이 아쉬웠다. 법우님의 말대로 “20년은 더 살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실감난 것이다.

 

기대수명(life expectancy)

 

기대수명(life expectancy)이 있다. 용어사전에 따르면 특정 연령의 생존자가 앞으로 더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생존연수를 말한다. 특정 연도의 각종 사망통계에 나타난 추세대로 사망 주기가 지속된다고 가정하고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느냐를 추정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의 기대수명은 얼마나  될까?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태어난 아기는 평균81.4세로 살 것이라 한다. 여자는 84.6, 남자는 77.9년이다. 그렇다면 2012년 기준 기대수명은 얼마나 될까?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만40(1972년생)의 경우 남자는 39.2년 남았고, 여자는 45.4년 남은 것이다. 이에 대한 기사의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12년 기준 기대수명, 서울신문 2013-10-16

 

 

 

표를 보면 60대의 경우 앞으로 20년을 더 살 수 있다. 이로 보아 법우님이 “20년은 더 살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한 것은 기대수명을 근거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다 죽는다

 

기대수명은 문자그대로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기대수명만큼 살 것이라고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수명 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을지 아니면 더 일찍 죽을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ppa vata jīvita ida
Ora
vasassatāpi miyati,
Yo cepi aticca j
īvati
Atha kho so jaras
āpi miyati.

 

[세존]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는 것입니다. (Stn804_

 

(Jarā sutta-늙음의 경, Sn4.6, 전재성님역)

 

 

결국 늙어 죽는다고 하였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잎이 노랗게 물들어 매달릴 힘이 없을 때 조그마한 충격에도 떨어지고 말듯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어느날 감기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다. 그런 인간의 목숨은 백년이 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죽음은 예고 없이

 

사람들은 대부분 늙어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다 늙어 죽는 것은 아니다. 사고사등으로 죽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 온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게송이 있다.

 

 

Animittamanaññāta

maccāna idha jīvita,
Kasirañca parittañca

tañca dukkhena saññāta.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stn574)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핵심구절은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의 빠알리어가 ‘Animittam’이다. 이는 nimitta가 mark, sign; image의 뜻으로 부정 접두사 a가 붙은 형태로서 Animitta가 무상(無相)의 뜻이지만, 각주를 보면 Animittam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Animittam :

 

Prj.II.457에 따르면, ‘행해야 할 일이 이루어진 특징이 없이(kiriyakaranimittavirahitam)’의 뜻이다. 업이 대가를 치를 때까지는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Animittam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업이 대가를 치를 때까지는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업대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kamma)가 있기 때문에 이 행위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을 때 업보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지금 여기(diṭṭhevā dhamme)에서 받는 과보

 

그 업보는 현세, 내생, 먼 후세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경에서는 현세에서 받거나 다음생에 받거나 훨씬 먼 후생에 받는다. (diṭṭhevā dhamme, u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A6.63)”라고 되어 있다.

 

번역자들은 diṭṭhevā dhamme에 대하여 현세 또는 금생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딧테와 담메(diṭṭhevā dhamme)’라는 말은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과보로 받는 것이 이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로 본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업이 대가를 치를 때까지는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주석은 결국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그 언제가 바로 지금 여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기대수명으로 얼마나 더 살지 추정은 가능하지만 수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만 업대로 살 뿐이다. 그래서일까 성전협의 니까야 각권 말미에 있는 ‘33개의 불교 세계관을 보면 인간수명에 대하여 미결정(未決定)’으로 되어 있다.

 

인간 수명이 왜 미결정(未決定)일까?

 

이런 미결정은 인간 이하의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에도 공통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인간 이상의 욕계천상에서 부터는 수명이 확정 되어 있다.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인간 위에 있는 사천왕(cātu-māha-rajikā)의 경우 수명이 500천상년이다. 이는 인간의 수명으로 따지면 9백만년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사는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의 경우 수명이 무려 84,000겁이다.

 

이렇게 천상의 수명이 정해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선행공덕에 대한 과보라 본다. 욕계천상의 경우 믿음()’보시()’지계()’의 공덕에 대한 과보로 수명과 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와 복()에 대한 것이다.

 

인간들이 가장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다. 환갑잔치 등에서 수와 복이 들어간 한자어가 바로 천상과 같은 수와 복을 누리고자 함이라 볼 수 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떤다

 

천상에서는 수와 복이 확정 되어 있어서 그 기간만큼 살고 지은 공덕만틈 복을 누린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이하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중생의 경우 마땅히 정해진 수명도 복도 없다.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늘 죽음에 벌벌떤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Phalānamiva pakka na

pāto patanato bhaya,
Eva
jātānamaccāna

nicca maraato bhaya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tn576)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게송의 네번째 구절을 보면 nicca maraato bhaya이다. Nicca는 ‘constant; continuous’의 뜻으로 ‘늘’ 또는 ‘항상’이라고 번역된다. maraato는 maraa+to 형으로, maraa는 death, 즉 죽음을 뜻한다. bhaya은 ‘Fear, fright; danger, calamity’ 로 ‘두려워하다, 무서워 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nicca maraato bhaya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떤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かれらにはつねにれがある라 하여, “그들은 항상 죽음의 공포에 떤다라고 번역된다. 법정스님은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라 번역하였다. 타닛사로 빅쿠는 “the constant dangeer is death.”라 하여 항상 있는 위험은 죽음이다라고 번역 하였다.

 

이렇게 죽음은 언제 어디서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닥칠지 모른다. 이 모두가 과거에 지은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행위가 지금 여기(diṭṭhevā dhamme, here and now)’에서 과보로서 익게 된다면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떠는 것이다.

 

도망 갈곳이 없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이런 공포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그래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을까봐 벌벌 떠는 것이다.

 

늘 이렇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보니 누군가 죽었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내려 앉는다.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도망 가보았자 부처님손바닥안이다. 그 어디에도 죽음으로부터 도망 갈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하여 숙명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hi  so upakkamo atthi

yena jātā na miyare,
Jarampi patv
ā maraa

evadhammā hi pāino.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stn575)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이는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회피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나하고 관련 없는 일이라 여기기도 한다. 반드시 죽는 것임도 애써 부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evadhammā hi pāino’라 하였다. 여기서 pāino pāi+ino로서, pāi‘a living being, 有生命的, 生物을 뜻하므로 뭇삶또는 중생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evadhammā hi pāino에 대하여 직역하면 “이것이 뭇삶의 법칙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라 하여 담마에 대하여 ‘운명’으로 번역하였다.

 

나까무라하지메는 あるどものめはこのとうりである라 하여 실로 살아 있는 자들의 결정은 이와 같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법정스님은 실로 생이 있는 자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라 하여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타닛사로 빅쿠는 “For there's no way”라 하여 다른 어떤 길도 없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그러나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사실 나의 일이다. 이는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것이다. 나아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타인의 불행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S56.11)”라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현실이고 도저히 피할래야 피해 갈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애써 모른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지적이 맛지마니까야에 보인다.

 

야마왕과 죽음의 전령사

 

데와두따경(M130)에서 야마왕은  이 사람아, 그대는 이 세상에서 다섯 번째 천사가 나타난 것을 보지 않았는가?(amho purisa, na tva addasa manussesu pañcama devadūta pātubhūta)”라고 묻는다. 여기서 천사라고 번역한 것은 devadūta에 대해서이다. Devadūta는 ‘gods' messenger’의 뜻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우리말로 ‘신의 전령사’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죽음의 사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죽음의 왕을 뜻하는 야마(Yama)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야마왕의 질문에 뭇삶은 다섯 번째 천사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다섯번째 천사 즉, 죽음의 전령사는 어떤 것일까?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amho purisa na tva addasa manussesu itthi vā purisa vā ekāhamata vā dvīhamata vā tīhamata vā uddhumātaka vinīlaka vipubbakajāta

 

[야마왕]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되어서 부풀게 되고 푸르게 되고 고름이 생겨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Devadūta sutta-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죽음의 왕 즉, 염라대왕이라 볼 수 있는 야마왕은 죽음의 영역에 넘어 온 뭇삶을 다그치고 있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다섯 번째 사인(징조)을 보고서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애써 애면한 듯한 뭇삶에게 말한 것은 다름 아님 죽음에 대해서이다. 그래서 죽은 자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피고름이 생겨난 끔찍한 주검에 대한 것이다.

 

죽은지 삼일이 지나면 구더기가

 

요즘 문자를 받다 보면 두 가지 유형을 본다. 하나는 경사(慶事)’이고 또하나는 조사(弔事)’이다. 결혼식과 같은 경사와 장례식과 같은 조사는 늘 주변에 있는 일이다. 특히 조사와 관련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하는 것이 예의라 한다. 경사와 달리 한번 밖에 일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죽은 이의 시신을 보기 힘들다. 그런데 생명 기능이 끊어졌을 때 24시간이 지나면 고름 등 분비물이 나온다고 한다. 죽은지 36시간 즉, 삼일이 되면 구더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시신을 가능한 3일 이내에 매장을 하든가 화장을 하는 것이 관례라 한다.

 

이렇게 죽은 자의 몸에서 피고름이 나고 더구나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이런 사실이 현실임에도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는 것에 대하여 경에서는 천사(devadūta)’를 보지 못한 것으로 설명한다.

 

다섯 천사의 경고

 

이런 천사의 경고는 모두 다섯가지로 설명된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M130)

고성제(S56.11)

첫 번째 천사

 

‘이보게, 인간 가운데 갓난아이가 침대에서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하고 누워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태어남도 괴로움

(jātipi dukkhā)

두 번째 천사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태어나 팔십이나 구십이나 백세가 되어 늙고, 허리가 서까래처럼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몸을 떨며 걷고, 병들고, 젊음을 잃고,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사지가 얼룩이 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늙는 것도 괴로움

(jarāpi dukkhā)

세 번째 천사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중태이고,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앉혀 주어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병드는 것도 괴로움

(vyādhipi dukkhā)

네 번째 천사

 

‘이보게, 왕들이 인간 가운데 도둑이나 범죄자를 잡으면 갖가지 형벌로 다스리는 것, 즉 채찍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장으로 때리고,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appiyehi sampayogo dukkhā)

다섯 번째 천사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되어서 부풀게 되고 푸르게 되고 고름이 생겨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죽는 것도 괴로움

(maraampi dukkhā)

 

 

다섯 종류의 천사에 대한 것을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와 비교해 보았다. 간난아이가 똥으로 분칠을 하며 울 때 이는 태어남도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사인이다. 또 야마왕은 늙는 것, 병드는 것, 형벌로 고통받는 것을 말한다. 삶의 과정에서 한번쯤 겪어 본 것들이다. 그래도 알아채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 다섯 천사의 이야기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이보게, 그대는 방일한 탓으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베이비박스(baby box)

 

TV에서 베이비박스(baby box)’라는 것을 보았다. 걸그룹 베이비복스가 아니라 아기를 넣어두는 상자를 말한다. 왜 이런 상자가 필요할까? 그것은 미혼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산모가 작은 철체 상장 안에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유기되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베이비박스 (baby box)

 

 

 

 

 

 

 

베이비박스가 열렸을 때

 

 

 

이렇게 베이비박스를 설치해 두자 작년의 경우 약 삼백명의 아기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TV에서는 22살의 미혼모를 보여 주고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임신이 되어 세 살짜리 아들을 홀로 키우는 장면이다.

 

이미 때는 늦었다

 

이처럼 버려진 아기나 미혼모의 아이를 보았을 때 이는 하나의 신호나 다름 없다. 경에서는 이를 알아차려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첫번째 천사를 못 보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럼에도 알아 채지 못하자 점차 강도를 높여 늙은이, 병든 자, 죽은 자를 보지 못하였는지 물어 본다. 결국 죽은 자를 보고서 그 때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죽음의 사자가 들이 닥쳤을 때 자신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방일 즉, 게으름 탓으로 보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경고신호를 보냈건만 애써 외면하듯이 살아 간 것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많이 진채 죽음을 맞이 하였을 때는 이미 늦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대가 그 과보를 겪어야한다.”라고 말한다.”라고 함으로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음을 말한다.

 

그저 그러려니

 

천사의 경(Devadūta sutta, M130)에서는 야마왕과 천사가 등장한다. 이를 우리말로 하면 염라대왕저승사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마하야나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초기경전에서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이야기에 대하여 회의론자나 단멸론자들은 자신의 감각적인지과학적검증의 잣대를 들이대려 할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삽입 된 것이라든가 부처님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경을 읽을 때 가려서 읽어야 된다든가 거품을 빼고 읽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불자라면 그저 그러려니하고 보면 될 것이다.

 

부처님이 방편으로 설명한 것은 가르침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기 쉽게, 이해 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야마왕과 천사가 등장한 것이다. 단지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된다.

 

조 블랙의 사랑(Meet Joe Black, 1998년)

 

저승사자와 관련하여 영화를 하나 보았다. EBS의 ‘세계의 명화’에서 본 ‘조 블랙의 사랑(Meet Joe Black, 1998년)’ 이다. 이 영화는 브래드 피트, 앤서니 홉킨스, 클레어 포라니가 주연으로서 저승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 대한 줄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줄거리:

사랑하는 두 딸과 함께 남부럽지 않은 삶을 보내고 있는 ‘빌’. 어느 날 잠결에 듣게 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후로도 수시로 들려오며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장녀인 ‘앨리슨’은 곧 다가올 그의 65세 생일 파티 준비에 정신이 없지만 빌은 그런 모든 것이 번거롭게만 느껴진다.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차녀 ‘수잔’은 어느 날 한 카페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고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남자는 아쉽게 헤어지며 돌아서지만 차마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 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다가 그 자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만다.

 

그날 저녁,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빌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고, 그곳에서 자신을 저승사자라 밝힌 한 남자가 낮에 수잔이 만났던 남자의 몸을 빌려 그의 앞에 나타난다. 빌에게 남은 시간은 65세 생일 전까지의 며칠. 저승사자는 그때까지 빌과 함께 머물며 ‘조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수잔은 자신의 집에 만난 ‘조’에게 금세 사랑을 느끼게 되고 조 역시 그녀에게 빠져든다. 한편 조와 지내면서 조금씩 달라진 빌은 수잔의 애인인 ‘드류’와 계획하던 합병을 취소하고, 이에 불만을 느낀 드류는 이사회를 소집해 그의 퇴직을 강요한다.

 

설상가상으로 조가 수잔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빌은 노발대발하지만 조는 그에게 수잔을 함께 데려갈 것을 선언하는데...

 

(조 블랙의 사랑 , EBS 2014-02-20)

 

 

 

조 블랙의 사랑(Meet Joe Black, 1998년)

 

 

 

영화의 줄거리는 저승사자가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고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그것은 “세금과 죽음은 확정적이다”라는 말이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금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소득이 생겨나면 꼬박꼬박 징수해 가는 것이 세금이다. 그래서 세금은 죽음처럼 피해 갈 수 없는 것으로 나온다. 더구나 언제 밀어 닥칠지 모르는 세무조사는 죽음과 같고, 세무조사자를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세금과 죽음은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이 영화 대사에서 몇 차례 등장한다.

 

한눈에 알아 본 저승사자

 

영화에서 저승사자는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과 성이 조 블랙(Joe Black)이기 때문에 특히 성을 보면 블랙으로서 어두운 세계에서 왔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어느 가난한 흑인 노인은 한눈에 저승사자를 알아 본다. 검은 옷이나 검은 이미지가 아닌 사람의 몸을 빌어 사랑에 빠진 저승사자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하루 빨리 데려가달라고 말한다. 한평생 착하게 살다가 암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먼저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이 많아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자는 저승사자는 달갑지 않다. 그동안 이룩해 놓은 부와 명예, 궈력을 두고 가기엔 너무 아쉬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절정의 삶을 누리고 있는 회장에게 있어서 저승사자는 반갑지 않은 존재이다. 더구나 아직까지 해야 될 일이 많은 자에게 있어서 저승사자를 본다는  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다. 그런 부자도 한눈에 저승사자가 자신을 데리러 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체념한다. 왜냐하면 저승사자는 인간의 능력위에 있고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상행 꽃마차와 지옥행 열차

 

영화에서 저승사자를 보았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암시 한다. 그런 저승사자는 예기치 않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다.

 

죽음을 맞을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저승사자와 마주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도 저승사자는 두려울 존재가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하다 안되면 성내는 삶을 살며 선업 보다 악업을 더 많이 지은 자에게 있어서 저승사자는 무서운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저승사자를 보는 순간 두려움에 떨지 모른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 사람들은 항상 죽을까봐 벌벌 떤다(nicca maraato bhaya(stn576)”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 노인처럼 저승사자에게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였듯이 반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걸림 없이 산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걸림없다 하여 막행막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없이 마음의 장애 없이 산사람들이다. 악업 보다 선업이 월등히 많았을 때 검은 이미지의 저승사자가 아니라 꽃마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법구경 16번 게송 인연담에 재가신도 담미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담미까는 평소 수백명이나 되는 비구들에게 공양하기를 즐겨 하였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순간에 여섯 천상계에서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천 마리의 씬두(sindhu) 산 준마가 이끄는 백 오십 요자나 길이의 여섯 수레가 다가왔다. 거기에 서있는 하늘사람들이 우리가 하늘나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법구경 16번 게송인연담, 담미까 재가신도 이야기, 전재성님역)

 

 

삼보에 대한 신심과 보시공덕으로 살아 온 담미까가 죽자 여섯 천상에서 서로 모시겠다고 꽃마차를 보내 온 것이다. 이렇게 공덕행을 하면 꽃마차로 서로 모셔 가려 하지만 꽃마차 숫자는 극히 적음을 말한다.

 

반면 악행을 지어 악처로 가는 자는 매우 많을 것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데려갈 기차가 끝도 없이 대기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대부분 지옥행 열차, 축생행 열차, 아귀행 열차, 아수라행 열차를 타게 됨을 말한다.

 

 

 

 

銀河999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익은 과일처럼 태어난 자는 누구나 죽어야 하는 운명에 있다. 이런 사실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애써 모른 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빛나는 청춘과 젊음이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생각하며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애써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과보가 무르익는다면 지금 여기에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업대로 산다고 한다. 이처럼 업대로 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 30년후가 될지, 1년후가 될지, 내일이 될지, 아니면 지금 숨쉬는 동안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언제 저승사자를 보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천사의 경에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경고 하셨다.

 

 

1.

Coditā devadūtehi

ye pamajjanti mānavā,
Te d
īgharatta socanti

hinakāyūpagā narā.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방일하네.

비속한 몸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랜 세월 슬퍼한다.

 

 

2.

Ye ca kho devadūtehi

santo sappurisā idha,
Codit
ā nappamajjanti

ariyadhamme kudācana.

 

천사의 경고를 받고 나서야

이 세상에서 참사람들은

언제나 고귀한 가르침에

교훈을 찾고 방일하지 않는다.

 

 

3.

Upādāne bhaya disvā

jātimaraa sambhave,
Anup
ādā vimuccanti

jātimaraasakhaye.

 

집착에서 두려움을 보고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하고

태어남과 죽음을 부수었다.

 

 

4.

Te khemappattā1 sukhino

diṭṭhadhammābhinibbutā,
Sabbaverabhay
ātītā

sabbadukkha upaccagunti.

 

안온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Devadūta sutta-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2014-03-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