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비주류 입장에서 B급 삼류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5. 12:45

 

 

비주류 입장에서 B급 삼류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70대 노인에게 3배를 받는 분

 

하도겸 컬럼을 읽었다. 불교닷컴에 실려 있는 기사에서 본 것이다. 이 컬럼에서 컬럼니스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70대 노인에게 3배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재가자의 보시로 살아가는 승가가 언제부터 3배를 받았는지요? 서로 악수하는 것으로 인사하자는 전 종정 고암 스님의 하심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오히려 총무원장 스님부터 재가불자들에게 먼저 3배를 하시면 승가는 더욱더 부처님의 하심을 배워 나갈 것이며, 세상은 오히려 더 스님들을 3보로서 공경할 것입니다.

 

(자승 총무원장께 드리는 우리의 꿈이야기, 하도겸 박사의 ‘삶이야기 이야기’ [특별기고], 불교닷컴 2014-03-14)

 

 

특별기고문이라는 형식으로 불교닷컴에 게제된 기사는 뉴시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하도겸컬럼니스트는 인터넷뉴스신문인 뉴시스에서 매일 컬럼을 올리고 있다.

 

글에서 스님삼배를 지적하였다. 불자들이 스님을 친견하면 삼배를 올리는 것을 예의로 알고 있으나 서로 가볍게 인사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스님이 재가불자에게 삼배를 해야 되는 건 아닌지 반문하고 있다. 스님이 재가자에게 삼배를 한다면 스님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가불자들이 스님을 더 존경하게 될 것이라 한다.

 

서로 삼배를 하였는데

 

언젠가 스님을 친견한 적이 있다. 도심에서 포교당을 운영하고 있는 스님이다. 신도가 많아서 스님을 친견한다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한번 보자고 시자실에서 연락이 왔길레 만나러 간 것이다.

 

이렇게 연락이 된 것은 블로그에 올린 글 때문이다. 2006년 당시 블로그에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무궁화5호 위성발사와 동네 종합유선방송(2006-09-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글을 스님이 본 모양이다. 그래서 시자를 시켜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스님과의 만남은 스님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사방에 책으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스님을 들은 대로 배운대로 삼배를 하려고 일어섰다. 그러나 스님은 그냥 앉으라고 하였다. 그래도 삼배를 강행하자 이번에는 스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카페트 위에서 똑같이 삼배를 하였다. 처음 만났지만 서로 삼배를 한 것이다.

 

진실로 존경하면 삼배가 아니라 구배도

 

방송을 통한 포교에 관심이 있어서 스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위성을 이용한 방식은 막대한 비용과 콘텐츠를 요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스님과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스님들을 만난 적이 별로 없다. 스님을 친견하거나 대면 하는 경우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스님이 불러서 또는 스님의 필요에 따라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도들이 스님을 친견하는 것과 달랐다. 그래서 아직까지 스님에게 삼배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다만 나이든 노보살이 새파란 스님에게 삼배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듣거나 글을 통하여 알고 있다. 

 

스님을 공경하는 것은 불자의 미덕이다. 그러나 잘 모르는 스님, 처음 본 스님에게 까지 삼배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그러나 진실로 존경하는 스님이라면 삼배가 아니라 구배도 가능할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신도들이 스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처럼 스승으로서의 스님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불교신문은 조계종 기관지

 

하도겸컬럼니스트는 불교신문에 대하여도 비판하였다. 이는 불교신문과의 악연때문이라 본다.

 

최근 불교신문에서 하도켬컬럼을 승가모독 행위로 문제 제기 하였다. 그러자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컬럼니스트가 속한 단체에 공문을 보내 압력을 가였다. 이는 명백히 표현의 자유를 제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놈과 땡중”승가모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글로서 정화불사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허컬럼니스트는 글에서 불교신문에 대하여 조계종 기관지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불교신문>은 비록 대한불교조계종의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올바른 언론이 되도록 자율권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어렵다 하더라도 총무원 일부 힘있는 스님의 지시에 따라 바르지 않은 글을 함부로 쓰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지도편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승 총무원장께 드리는 우리의 꿈이야기, 하도겸 박사의 ‘삶이야기 이야기’ [특별기고], 불교닷컴 2014-03-14)

 

 

일반적으로 기관지라 하면 부정적 생각이 떠 오른다. 구 소련시절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지나 북한의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관지는 어떤 단체나 조직에서 그 단체의 목적과 취지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주장과 입장을 대내적 또는 대외적으로 선전하거나 표명하기 위해 발행하는 신문을 말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신문은 조계종 기관지임에 틀림 없다.

 

사실 보도를 하지 않는 불교신문

 

조계종 기관지라 불리우는 불교신문기사를 읽어 보면 종단에 불리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2013 8월에 일어났던 적광스님 납치, 감금, 폭행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음에도 불교신문에서는 사실 보도를 하지 않았다. 단지 총무원에서 불러 준대로 적은 듯이 보였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포항 오어사 자장암 인수인계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적광스님이 지난 21일 총무원 호법부에 환속제적원을 제출한 데 이어 이튿날 참회의 뜻을 밝혔다.

 

지난 22일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만난 적광스님은 “호법부 선배 스님들에게 죄송하다. 내가 원결(怨結)을 많이 지었다. 거듭 사과한다”며 “앞으로는 일체 종단 일에 관여하지 않고, 언론이나 수사기관에도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자장암 건으로 물의, 적광스님, ‘공개 참회 수행전념’ 약속, 불교신문 2013-08-27)

 

 

적광스님은 총무원장스님과 불교계의 비리와 모순과 위선을 폭로하려 하였다. 그러나 총무원 호법부 스님과 재가종무원들에게 끌려가 불교박물관 지하에서 감금, 린치, 폭행을 당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이건 아닙니다” 적광스님의 절규와 강제환속’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처럼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교신문에서는 적광스님이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였다는 식으로 보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식으로 보도한 불교신문을 보고서 조계종 기관지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기관지라 하면 단지 종단의 입장과 주장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거나 표명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하도겸컬럼니스트가 “<불교신문>은 비록 대한불교조계종의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올바른 언론이 되도록 자율권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점잖게 충고한 것이라 보여 진다.

 

꼬리 내린 불교신문, 유구무언의 총무원

 

불교신문에서 승가모독행위로 문제제기하고 이어서 총무원에서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하도겸님은 불교신문 보도로 인하여 명예가 훼손을 당했다며 언론중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언론중재위원회에서는 양자를 불러 중재 요청을 했는데,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불교신문에서 유감표시와 함께 정정보도를 약속했다고 한다. 사실상 하도겸컬니스트의 승리하고 불교신문이 패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닷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정합의서에 따르면, <불교신문>은 19일자 2면에 “본 신문은 1월 25일자 ‘하도겸 칼럼 도 넘다’ 제하의 기사에서 하도겸 칼럼니스트가 불교와 스님들을 비하하고 매도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하도겸 칼럼니스트는 법사로 활동 중인 신실한 불교신자로서 불교와 스님을 비하하고 매도할 의도가 전혀 없고, 칼럼도 불교계의 자성과 쇄신을 위하는 내용을 실은 것임을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라고 게재해야 한다. 제목·본문 활자 크기는 조정대상 기사와 같게 하기로 했다.

 

(‘불교신문’ “하도겸, 불교 비하 의도 없었다”에 합의, 언론중재위 조정… 정정보도와 반론 게재키로, 불교닷컴 2014-03-12)

 

 

기세 좋게 나가던 불교신문이 꼬리를 내린 것이다. 요즘말로 깨갱한 것이다. 또 불교신문 기사를 빌미로 공문까지 보내며 압력을 행사하였던 총무원은 아무 말이 없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일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  역시 깨갱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불교신문이 보도하고 총무원이 거든 이번 사건에서 총무원의 기세는 등등하였다. 불교닷컴 2 20일자 기사에 따르면 조계종홍보팀장은 조계종 이름으로 공문을 발송한 후 “재발 방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칼럼을 예의주시해 나갈 계획”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기세등등하게 나가던 불교신문에서 언론중재위의 권고를 받아 들여 정정보도를 내기로 한 것은 불교역사상 초유의 일이라 보여진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신문이 일개 개인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잘못을 뉘위치고 용서를 비는 정정보도를 내기로 한 것이다. 더구나 하도겸 컬럼니스트에게 반론할 수 있는 글을 게시토록 하기 까지 하였다. 그래서 3 19일자 불교신문 첫화면에 2일간 실릴 것이라 한다.

 

“'진흙 속의 연꽃'과 같은 다음의 파워블로거와 같이

 

불교신문과 총무원은 “땡중” “중놈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여 승가모독으로 몰아 부쳤다. 그러나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자승 총무원장께 드리는 우리의 꿈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불교신문에 실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이미 뉴시스와 불교닷컴에 실려 있다. 그런데 글에서 개인적으로 깜짝놀랄만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필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불교정론을 위해 애쓰는도박승에게 보도 보복 폭행을 당하고서도 치료비조차 청구 않은 이석만 대표가 이끄는 <불교닷컴>의 조현성 기자, <미디어붓다>의 이학종기자, <불교포커스>의 정성운 주간, <불교저널>의 김종만 편집장, '진흙 속의 연꽃'과 같은 다음의 파워블로거와 같이 <불교신문>의 기자들도 부처님 말씀대로 항상 세상을 맑고 밝게 비추는 목적으로만 쓰이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불교신문’ “하도겸, 불교 비하 의도 없었다”에 합의, 언론중재위 조정… 정정보도와 반론 게재키로, 불교닷컴 2014-03-12)

 

 

불교계 신문사이트에서 바른 목소리를 내는 기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진흙 속의 연꽃도 함께 거론 하였다. 그것도 파워불로거라 하였다.

 

그런데 필명을 보면 진흙 속의 연꽃이라 하여 띄어쓰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필명을 진흙속의연꽃’이라 하여 붙여쓰기로 하고 있다. 이렇게 붙여쓰기 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 필명이라 하지만 이름과 같은 것이라서 띄어 쓰기 보다 붙여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늑대와 함께 춤을 이라는 인디언 이름이 있다. 이를 띄어 쓰면 문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늑대와함께춤을이라고 붙여 쓰면 이름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진흙속의연꽃라고 붙여 쓴 것이다. 

 

이렇게 필명이 거론 되는 것에 대하여 당혹스럽다. 항상 비주류 입장에서 B급 삼류 글쓰기를 하고 있는 보통불자에게 과분한 처사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서 나열된 스님들이나 재가단체, 그리고 정론직필의 기자와 동등하게 거론 하였다는 사실이 파격적이다. 이처럼 필명을 거론 한 것은 조계종기관지라 비난을 받고 있는 불교신문 기자들이 각성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비판한 것은 아니다

 

필명이 종종 인터넷 매체에서 거론 되기도 한다. 올린 글을 인용하여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종단과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비판한 글과 관련된 내용이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사항이지만 글을 쓰면 쓸스록 비판적으로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자꾸 알게 됨에 따라 비판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려도박이나 승려폭행, 승려술판 사건 등 부처님과 불자를 부끄럽게 하는 스님들과 승가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글을 쓸 초창기에는 누구보다도 승가와 스님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신정아 사건이 일어 났을 때나 종교차별 행위가 벌어졌을 때 여러 차례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옹호 하지 않는다.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의 행태가 세상에 알려 지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종단과 승가, 스님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블로그 초창기에 승가와 스님에게 냉소적이며 비아냥 대는 자와 댓글공방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어느 네티즌이 절에서 사는 사람이냐?”라고 물었다. 이 말이 처음에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절에서 태어났느냐는 뜻이었다. ‘부모가 스님아니냐는 것이다.

 

글을 쓸 초창기 때만 해도 모든 스님들은 독신비구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처 종단도 있어서 스님들도 재가불자와 똑같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스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출가수행자라면 당연히 독신이고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함에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는 반승반속에 실망한 것이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부터 경전상의 빅쿠 모습과 너무나 차이가 나고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행위가 다반사인 것을 확인 하였을 때 확실히 비주류로 돌아 섰다.

 

비주류 입장에서 B급 삼류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비주류는 주류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한국불교가 주류라면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비주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주류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메인스트림불교테라와다불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불교적인 것이 주류로 되어 있어서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류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비주류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비주류 입장에서 B급 삼류 글쓰기를 지향한다. B급이라 하면 스님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수행을 해 본적도 없고 불교학을 공부한적도 없는 보통불자이기 때문에 B급이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주류 B급 불자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당연히 삼류글쓰기가 된다. 왜 삼류인가? 인터넷에 올리는 글은 스님들의 법문도 아니고 학자들의 논문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글을 쓰기 때문에 삼류글쓰기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제행무상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듯이 비주류가 언젠가 주류가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주류라 하여 천년만년 계속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류가 비주류가 되고,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B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음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B급의 보통불자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만은 에이플러스(A+)을 지향한다. 그래서 수행자 보다 더 수행자다운 수행자를 지향하고, 학자보다 더 학구적인 자세를 지향한다.

 

또 지금 삼류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내용은 초일류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스님법문 보다 더 감동적인 글과 학자들의 논문 보다 더 가치 있는 글쓰기를 지향한다.

 

 

 

2014-03-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