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건강이 괜찮으신지 염려스럽습니다”글쓰기는 일상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9. 13:36

 

건강이 괜찮으신지 염려스럽습니다글쓰기는 일상이다

 

 

 

봄은 봄인데

 

봄은 봄인데 봄같지 않은 날씨이다. 아직도 두꺼운 옷을 벗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침에 창밖을 보니 눈까지 내렸다. 그러나 낮이 되면 그야말로 ‘봄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대체 봄은 언제부터 시작되려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한시대 왕소군이 읊은 시라 한다. 흉노족을 달래기 위하여 정략결혼하게 된 왕소군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고 노래 하였다고 한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절기상으로는 봄임에 틀림 없으나 체감온도는 아직 봄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 아침 눈까지 내리니 마치 계절에 거꾸로 돌아 간 것 같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대세는 봄으로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눈보라가 몰아쳐도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미 봄을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봄을 정하는 기준이 있다고 한다. 절기상으로는 입춘(2월 4일 또는 5일)을 봄의 시작으로, 천문학상으로는 춘분(3월 21일 또는 22일)을 봄의 시작으로 삼지만, 최근 기상학에서 보는 봄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일평균기온이 5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때는 3월 12일이라는 것이다. 일평균 기온이 5도 이면 봄으로 본다는데 지금이 그 시기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뭇가지에 물오른 것이 이전 같지 않아 보인다.

 

글쓰는 것을 낙으로

 

글쓰는 것을 낙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쓰고 있다. 글쓰기에 과도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제 본업은 뒷전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글만 쓰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일을 하지 않는 스님이나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몹시 부러울 때가 있다. 생계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껏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어느 스님의 무문관일기를 읽고 있다. 지난 동안거 3개월 동안 무문관 수행을 하였다는데 이를 일기 형식으로 연재 하고 있다. 스님은 글에서 무문관(無門關)-문 없는 문에 들어온 이상 들어올 문도 없고 나갈 문도 없다. 모든 곳 문이면서도 모든 곳이 막혀있다. 문이냐 벽이냐는 내 선택에 달렸다.”라고 하며 보고 들을 때마다 문이 열린다. 벽은 거울이 되어 각성으로 빛난다.”라 하였다.

 

하루 한끼를 원칙으로 하는 무문관에서 스님은 “오전 11시에 들어오는 점심도시락을 두 번에 나누어 먹는다, 점심과 저녁으로. 먹는데 30분 걸린다.”라 하였다. 이렇게 두끼를 먹고 사는 무문관 수행자의 일상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추위를 느끼지도 않으며 따뜻한 방이 있는 나는 얼마나 호사스러운가? 21세기형 은거 수행자의 삶이 여기에 있구나. 니체가 말한 <우아한 고독>, 나는 우아한 고독을 즐기고 있다. 닫은 창호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구름을 가르고 나온 햇살이 반짝이다가 다시 구름에 가려지기 되풀이 하는 것이다.

 

(3. 명상일기-무문관에서)

 

 

 

 

 

이는 한국형 무문관 수행 조건을 말한다. 문고리를 자물쇠를 잠그고 하루 한번 배달된 음식만 먹고 사는 수행자에게 달리 할 일이 없다. 글에 따르면 하루 8시간 수행을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따뜻한 방이 있는 나는 얼마나 호사스러운가?”라 하였다.

 

그런데 무문관 하며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통신기기도 허용 되는 것 같다. 종종 무문관 수행자들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것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먹는 문제가 해결 되고 더구나 따뜻한 방에서 추위 걱정 없이 오로지 수행에만 열중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더럽고 힘들고 아니꼬아도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삶은 현실이다. 현실을 떠난 삶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부대끼며 살아 간다. 이 사회에서는 과장이나 사장등의 이름으로, 가정에서는 아빠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 간다. 아무리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도 가족이 있기 때문에 참고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현실이고 현실은 삶이다.

 

그런 한편 생활인은 ‘탈출’을 꿈꾼다. 멀리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요일 아침 교회로 향하는 사람도 많지만 등산복 차림도 많다. 산으로 산으로 가다 보니 일요일 관악산에는 줄을 이어 간다. 작은 도시탈출인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멀리 탈출 할 수 없다. 다시 현실로 돌아 와야 한다. 가족을 위해서 더럽고 힘들고 아니꼬아도 참아야 한다.

 

참는 것을 불교용어로 말하면 인욕(忍辱)이다.  ‘치욕스런 일을 참는 다’는 뜻의 인욕은 생활인들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없다. 상사가 야단 쳐도 가족을 생각하면 참는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자신의 월급 반은 욕을 얻어 먹은 대가로 타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생활인은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 갈 수 있다.

 

인욕의 달인

 

만일 자신의 성질대로 산다면 이 세상은 싸움이 그칠 날 없을 것이다. 인욕하며 살기에 사회가 안정되어 보이고 질서가 잡혀 보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생활인은 ‘인욕의 달인’이라 볼 수 있다. 마하야나에서 인욕바라밀을 강조 하지만 현실의 삶 자체가 인욕바라밀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욕하며 살아가는 생활인들에게 무문관 이야기는 누구나 바라는 꿈과 같은 생활이다. 단지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챙겨야 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 껏 돌아 다니는 수행자들을 보면 가장 자유로운 것 같다.

 

마음내키는 대로

 

출가자들은 자유로운 삶이기에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살지 않는 것 같다. 도시에 사찰이 없는 이유도 바로 출가자들의 걸림 없는 삶 때문일 것이다. 발길 닿는대로 마음 내키는대로행동하다 보니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틀어져도 걸망을 꾸린다고 한다.

 

도시의 포교당에서 인간적인 갈등이나 재정문제에 봉착 하였을 때 걸망을 꾸려 훌쩍 떠났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마치 역마살이 낀 것처럼 여기 저기 구름처럼 떠 돌아 다니는 출가자에게 있어서 정착지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일년에 두차례의 안거기간에는 정착한다.

 

탁발전통이 없는 한국불교에서 먹는 문제, 자는 문제, 입는문제 등 소위 의식주가 해결되기 때문에 오로지 수행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효과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수십안거를 해도 깨달았다는 사람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라 한다. 그 래서일까 안거가 끝나 해제법문에서  밥값 내놓아라!” 라는 노스님의 호통을 듣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먹을 것 걱정안하고 더구나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장소에서 안거를 보내지만 그것도 부족한지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무문관 수행을 하는 출가자들이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하는 무문관 수행자들은 길게는 6년간 방문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재가불자에게 무문관수행은 꿈과 같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매일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사는 생활인에게 10일간 단기 집중수행코스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10일간 직장을 쉬고 집중수행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도심에서 열리는 수행처에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시간이 돈인 사회에서 이동하는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참여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것이 인터넷이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은 삶의 일부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과 돈과 정력낭비를 막아 주는 가상공간에 스님과 학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미친듯이 자판을 두들기며

 

매일 글을 쓰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주제가 정해지면 미친듯이 자판을 두들긴다. 그러다 보면 오전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 정신없이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인 것이다. 이런 일을 수년째 반복하고 있다.

 

글을 썼다하면 10페이지가 넘을 때 있다. 보통 10페이지 안팍이다. 물론 인용문이 있기 때문에 많아 보인다. 순수하게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면 A4한장 채우기도 힘들지만 경전을 근거로 하면 무한정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건강이 괜찮으신지 염려스럽습니다

 

최근 댓글을 통하여 어느 법우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장황한 글을 올리시느라 연꽃님은 건강이 괜찮으신지 염려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초기불교를 알리는 인터넷카페 운영자 H님의 글이다.

 

한번 글을 올릴 때 마다 10페이지 가량이 되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을 느끼는 법우님들이 많은 것 같다. 실제로 안면이 있는 법우님에 따르면 자꾸 분량이 늘어나다 보니 따라가기 힘들다고 한다. 더구나 내용도 갈수록 현학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덜 보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지적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좀 더 줄여 줄 것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글이 너무 길면 대충보거나 설렁설렁 넘어 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많아 보이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인 견해 보다 경전을 풀이한 것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글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에게 감사 해야 될 것 같다.

 

오리지널 저작권은 붓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은 마음껏 공유해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댓글에서 S 법우님은 오리지널 저작권은 붓다에게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카페나 블로그등에 보면 글을 옮겨가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글을 가져 가지 못하도록 오른쪽마우스버튼을 금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S법우님은 공개적으로 인터넷에 올릴 때에는 이미 개인의 글이 아닙니다. 불자 모두의 글입니다. 오리지널 저작권은 붓다에게 있습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인터넷에 올린 글은 이미 개인의 손을 떠난 것이다. 인터넷 속성상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 되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글이라도 공적인 개념으로 된다. 더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경전의 글이라면 더욱 더 공적인 것이 된다. 그럼에도 오른쪽마우스를 금지해 놓았다든가 제한을 두어 회원끼리만 공유한다면 이는 부처님저작권위반이라 볼 수 있다.

 

마음껏 퍼가도록

 

그러나 오른쪽마우스버튼을 해제 하여 마음껏 퍼갔을 때 단점도 있다. 잘못된 것이 사이버공간을 떠 돌아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가르침을 왜곡하는 커다란 구업을 짓게 된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이를 철저하게 막고 있다. 오로지 블로그나 카페에 방문해서 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올려진 글은 그대로 방치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업데이트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스크랩금지가 맞다.

 

오른쪽마우스버튼을 금지 하지 않는다. 저작권은 부처님에게 있으므로 마음껏 퍼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글이 계속 업데이트 되기 때문에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전에 스크랩한 글은 잘못된 채로 있게 된다. 이런 점이 고민스런 것이다.

 

공황상태에 빠진 법우님

 

블로그에 올린 글과 관련하여 글로서 소통하고 있다. 글을 올려 주신 분들의 필명을 보면 익숙해서 마치 오래된 친구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한번도 안면이 없는 사이이다. 단지 인터넷 공간에서 필명과 올려진 글로서만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이가 몇살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설령안다고 해도 인터넷공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올려진 글로서밖에 판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려진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이처럼 필명이 익숙하다 보니 올려주신 글을 읽는 것도 커다란 재미이다. 그 중에 E법우님이 아주 재미난 글을 주셨다.

 

 

아침 출근시간에 여느 때처럼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켰습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즐겨찾기를 해놓은 연꽃님의 블로그를 눌렀는데 블로그가 없어진겁니다.
그냥 다음의 블로그 홈페이지에 접속이 되네요.
뭔가 좀 기분이 이상하여 잠시 뒤에 지하철에 갈아탄 다음 재차 연꽃님의 블로기 즐겨찾기를 확인해보니 확실하게 연꽃님의 블로그가 폐쇄되어 버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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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하철에서 내려서 사무실에 도착하는 내내 정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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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무실에 도착해서 컴퓨터를 켜서보니 연꽃님의 블로그에 제대로 들어가 지더군요.
그러나 한 시간여 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 핸드폰의 문제라던가 그 시간에 다음의 홈페이지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법우님)

 

 

E법우님에 따르면 블로그가 사라져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아마 일시적 접속장애에 따른 현상이라 보여진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 경우 다시실행하면 된다. 그럼에도 연결이 되지 않을 때 갖가지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대부분 좋지 않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E법우님은 접속이 되지 않자 정신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여 확인해 보니 정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 법우님에게 감사드린다.

 

이삼십대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을

 

그런데 비록 글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수 없이 많이 지켜 보아 주시는 님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님들인지 알 수 없지만 통계자료를 보면 성별과 연령대는 알 수 있다. 특히 이십대와 삼십대에 주목한다. 무응답 40%를 제외하면 이십대가 4%, 삼십대가 10%로서 적은 비율이지만 가장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더욱 더 비율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삼십대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많이 쓰고 싶다. 왜냐하면 이삼십대는 한국불교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힘이 붙어서

 

글을 쓰다 보면 격려도 받고 동시에 비판도 받는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너무 몰입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는 님들도 있다. 사실 그렇다. 하루 일과중의 반 이상을 글쓰기에 몰입 하고 그것도 쉬는 날 없이 쓰기 때문에 건강을 염려하는 것 같다. 그래서 쉬엄쉬엄 쓰라고 한다. 또 양도 줄이라고 한다. 이렇게 염려 하지만 사실 숙달 되어 있어서 크게 게의치 않는다. 이는 글쓰기에 힘이 붙었기 때문이다.

 

정신에 근육이 생겼기 때문에요

 

하던 일을 자주 하다 보면 눈을 감고도 한다. TV에서 보는 생활의 달인이 그렇다. 수행도 마찬가지라 한다. 처음 하기가 어렵지 습관을 들이다 보면 쉽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서장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힘을 얻었다.” 하면 힘이 덜 들지요. 운전 처음 배울 때 그렇지요.

처음에는 힘이 잔뜩 들다가 나중에는 옆에 다 살피면서 곧잘 갑니다.

그것이 힘을 얻어서 그런 겁니다. 힘이 덜 드는 겁니다. 공부에도 그래요.

공부도 처음에는 좀 힘이 들지요. 좀 하다보면 힘이 덜 들어요.

힘이 덜 든다는 것은 힘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무비스님, 서장 대 강좌 3 - 2 강)

 

 

무비스님은 수행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는데 간화선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잘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앉아 있다 보면 잘 되는데 이에 대하여 “정신에 근육이 생겼기 때문에요.”라 하였다. 정신에 근육이 생길리가 없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이 생기면 하나도 힘들지 않게 된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글쓰기도 마찬가지라 본다. 처음에 글을 쓸 때 A4한장 채우기도 힘들었지만 요즘은 10장 정도 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치 운동을 열심히 하면 근육이 생기듯이 글쓰기를 수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하다 보니 글쓰기에 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초인적인글쓰기라 하는데 누구나 오래 하다 보면 가능한 일이라 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런 글쓰기를 8년 하고 있으니 서당개 풍월 읊는 시기는 지나서 일 것이다. 그래서 H법우님이 건강이 괜찮으신지 염려스럽습니다라고 걱정 해 주었지만 염려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글쓰기는 끼니때가 되면 밥먹는 것처럼 일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힘을 길러야 한다고

 

부처님도 힘을 말씀 하셨다. 부처님의 힘에 대하여 여래십력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다섯 가지 힘을 길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오력이다.

 

오력은 여래십력에서 다섯 가지 힘과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힘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믿음의 힘, 정진의 힘, 새김의 힘, 집중의 힘, 지혜의 힘이다. (A5.14)”라 하였다. 이런 힘을 길러야 깨달음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중에 사띠(새김)의 힘이 있다. 이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satibala: idha bhikkhave ariyasāvat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 vuccati bhikkhave satibala.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

 

(Balavitthatasutta -힘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4, 전재성님역)

 

 

이 경과 동일한 내용이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S48.10)’에도 실려 있다. 오력중에 염력(satibala)’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satinepakkena samannāgato)’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총혜라 하였다. 지혜와 결합된 사띠를 말한다. 이는 단지 알아차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면 엄청난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지혜와 결합된 사띠에 대하여 새김의 힘이라 하였다.

 

지혜와 결합된 사띠

 

전재성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지혜와 결합된 오력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해제에서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새김의 힘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는데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법문은 일반적으로 팔정도에서 정의되는 것과는 다른 정의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새김이 마음챙김이 아니라 새김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5권 해제, 전재성님)

 

 

해제글에 따르면 사띠의 번역어가 새김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사띠번역어 논쟁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마음챙김은 정확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영어사전에 있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 폄하 하는 학자도 있다. 또 어떤 비판자는 마음이라는 것은 챙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해야 할 대상이라 하였다.

 

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기억에 대한 어떤 어원을 갖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대상에 마음을 두고 이를 지켜 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력에서 사띠발라 (satibala, 念力) 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이라 하였다. 바로 이 문장이 기억의 기능으로서 사띠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라 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기억과 알아차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새김이라는 용어가 사띠번역어로 적합하다고 하였다.

 

강한 성취감에

 

힘을 기르면 엄청난 힘을 발휘 할 수 있다. 부처님도 힘을 기를 것을 강조 하였다. 그것이 오력이다. 이런 힘이 있어야 수행도 원활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일 운동을 하면 근육이 붙듯이 매일 다섯 가지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매일 정진해야 한다. 그래서 오력에서 정진의 힘이 있는데 이는 육단심으로 선방에 앉아 밀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선법과 불선법을 가려내여 선법이면 증장시키고 불선법이면 쳐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습관들이는 것을 수습(修習)이라 한다. 마치 신입사원이 들어 오면 조직에 적응하기 위한 수습기간이 있듯이 수행을 하려면 습관부터 먼저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글쓰기도 일종의 습관이다. 글쓰기습관을 들여 놓으니 매일 글을 쓰게 되고 글쓰는 것이 낙이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초인적인 글쓰기라거나 건강이 염려 된다고 말하지만 글쓰기에 힘이 붙어서인지 전혀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하나의 글을 완성하면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바로 이맛에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2014-03-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