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누가 서민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신자유주의정책의 희생양 세 모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5. 18:22

 

누가 서민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신자유주의정책의 희생양 세 모녀

 

 

산에 올라 가

 

산에 올라 가면 세상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 발밑에 내려다 보이는 세상은 온통 백색의 아파트천지이다. 마치 성냥갑을 세워 놓은 것처럼 총림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단지를 볼 때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생각이 일어 날 것이다. 아파트 한채라도 가지고 있는 중산층이라면 언제 경기가 회복되어 집값이 오를까?”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집이 없는 사람은 저 많은 아파트 중에 어째서 내가 살 집 하나 없을까?”라고 한탄할지 모른다.

 

산밑으로 내려와서 도시의 걸어 보면 수 많은 간판과 마주친다. 크고 작은 간판을 보면 마치 어서 오라는 듯이 손짓 하는 것 같다. 그런 간판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식당간판이다.

 

수많은 간판을 볼 때

 

한 곳에서 오랫동안 있다 보니 거리가 매우 익숙하다. 그래서 작은 변화도 감지 된다. 주로 식당간판이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한번쯤 들어 가 보았던 식당인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바뀐 것을 종종 본다. 그런 경우 장사가 안되서 그만 둔 것이다. 그 자리에 새로운 이름을 가진 식당이 들어서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이렇게 자주 식당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큰 손해를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간판을 볼 때 마다 항상 드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벌어먹고 사는가?”이다. 그럼에도 간판은 계속해서 늘어난다. 대표적으로 치킨집을 들 수 있다. 최근 신문기사에 따르면 전국 점포간 평균 170미터마다 치킨점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보도 되었다. 2012년말 기준 현재 우리나라에는 3만1139개의 치킨점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전해에 비하여 7%가 늘은 것이라 한다. 이렇게 치킨점이 늘다 보니 대한민국은 ‘치킨지옥’이 되었다고 한다.

 

거리의 간판은 변화무쌍하다. 자주바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많은 간판을 달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판을 볼 때 마다 드는 의구심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 같다. 아직까지 못살겠다고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럭저럭 유지하는 것일까?

 

생계형자살을 보는 불교적 시각

 

최근 생계가 어려워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식당에 다니다 다치자 생계가 막막해진 세모녀가 함께 자살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생계형자살이라는 것이다.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떠 오른 것은 오래 되었지만 주로 학업에 찌든 청소년이나 황혼고독등의 이유로 노인의 자살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계형 자살이 알려지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불교계인 것 같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조계종에서는 가난 때문에 자살한 송파 세 모녀를 위하여 위령제를 올려 주기로 했다고 한다. 조계종 노농위원회 주관으로 5일 오후 7시에 광화문 해치광장 마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미디어붓다에서는 “한국불교, 신자유주의 반대 나서라”라는 제목으로 이학종기자의 컬럼이 실렸다. OECD국가 중에서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폐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곤장감

 

불교저널에서는 석촌동 세 모녀 자살과 관련하여 김문갑박사의 ‘가난한 조선, 부자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컬럼이 실렸다. 국민소득 2만4천불의 부자나라에서 생계로 인하여 자살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하여 넌센스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옛날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관리는 즉각 처형되었다. 순()임금 때 홍수조절의 임무를 띤 곤()이 그 임무에 실패하자 순임금을 곤을 처형한다. 바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이제 자살율 1위 국가를 만든 정책담당자들 또한 처형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옛날처럼 저자거리로 끌고 가 목을 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책임은 물어야 할 것 같다. 대통령은 복지부장관을 즉각 해임하고, 사과하여야 한다. 본인의 책임도 아닌 일로 모 장관을 해임했는데, 이런 복지 사각지대를 내팽개친 복지부장관은 해임이 마땅하다. 아울러 서울시장도 사과해야 한다. 조선의 지방수령 자리는 고을 내 복지를 제1차로 책임지는 자리였다. 하물며 지방자치제 하에서 해당 자치단체장이 중앙정부의 일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김문갑박사, 가난한 조선, 부자 대한민국, 불교저널 2014-03-04)

 

 

김문갑박사는 책임자 처벌을 요구 하고 있다. 요순시대같으면 처형감이고 조선시대 같으면 곤장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해임하고 서울의 하늘아래 살고 있었으므로 서울시장도 공개 사과를 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돈벌기선수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생존하는 것을 말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먹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벌아야 쌀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쌀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여기 미적분 문제가 있다. 머리가 좋은 학생은 푸는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능이 떨어지는 학생은 도저히 풀 수 없다. 그런데 머리가 좋은 학생의 입장에서 바라 보았을 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문제를 그냥 풀면 되는데 그것 하나 풀지 못하여 끙끙 거리는 것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사회로 나오면 누구나 돈을 벌어야 한다. 돈벌기선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을 잘 번다. 너무 돈이 잘 벌려 주체하지 못한다. 그런데 돈을 잘 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돈못버는 사람이 한심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돈못버는 입장에서 보면 미적분문제 푸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돈버는 문제이다. 그래서 늘 가난하게 산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하지만

 

흔히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예는 많이 있다. 성공스토리를 들어 보면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까지에는 그만한 육체적 정신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신체건강하고 더구나 머리까지 비상한 자라면 지금 가난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신체조건이 떨어지고 더구나 지능도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세상은 너무나 살아가기 힘든 것이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온전한 몸을 가진 자와 다리가 불편한 자와 경주를 하는 것과 같다. 또 칠판에서 미적분 문제를 풀 때 지능지수가 150에 달하는 수재와 지능지수가 그 절반에 해당되는 자와 경쟁시키는 것과 같다. 이렇게 게임이 되지 않는 룰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이명박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이다.

 

똑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하면 자본을 많이 가진가 승자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신자유주의이다. 그래서 모든 규제를 풀어 버렸을 때 결국 자본이 많은 자가 독식하게 되어 있다.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이 되어 양극화가 심화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경쟁에서 낙오 되어 더 이상 이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 세 모녀 자살사건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보여 진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사회에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가진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100미터 경주나 미적분 문제 풀기 경쟁에 아예 참여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리에 장애를 가진 자는 100미터 달리기는커녕 육교 올라가는 것 조차 에베레스트만큼이나 험준한 것이다. 또 뇌에 장애를 가진 자들은 미적분이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자들은 경쟁에 참여할 기회 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노력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살기 수월한 자와 세상살기 고단한 자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수 있다. 누구나 열심히 가리지 않고 일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갖추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지능도 보통 이상이라면 똑 같은 조건에서 노력하면 앞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사람들이 모두다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똑 같은 것이 아니다. 신체가 부실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지능이 낮다면 역시 한계가 있다. 더구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똑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잘난 자가 승리하기 마련이다.

 

같은 조건이면 신체조건이 월등한 자가 이기고 또 머리가 비상한 자가 승리할 것이다. 이처럼 불공정한 룰을 가진 신자유체제 하에서는 신체적으로 육체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자는 낙오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나고 똑똑한 자를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 격차가 벌어지다 보니 잘난 자는 마치 미적분 문제를 척척 푸는 것처럼 세상살기가 수월하고, 못난 자는 자신의 머리로는 미적분을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처럼 세상살기가 고단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정책을 유지하는 한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 되고 말 것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불공정한 룰을 만들어 놓고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 자유경쟁체제로 만들어 놓은 신자유주의에서는 밥을 못먹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단지 노력부족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는 신자유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모녀의 자살 역시 지난 이명박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에 따른 영향도 상당히 끼쳤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현 박근혜정부 역시 신자유주의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가 극명하게 표출 된 것이 아마도 용산참사일 것이다. 이명박정부 초기에 벌어진 이 끔찍한 사건은 야만의 시대를 대표한다. 모든 규제를 풀어 놓고 무한경쟁을 유도 하였을 때 자본이 적거나 사회적으로 약한 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정책이 유지하는 한 제2, 3의 송파 세모녀 자살사건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이런 비극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누가 서민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줄 의무가 있다. 그것이 가진 자들의 사회적 의무로 본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특권을 내려 놓고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이번 자살 사건에 대하여 정책담당자는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정치인들이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무릎꿇는 장면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박원순시장은 무릎을 꿇었다. 그 사진을 보고 감동하여 글을 하나 올린 것이 서민앞에 무릎꿇은 시장을 보고, 강만수에 대한 이외수의 승리(2011-10-29)라는 글이다.

 

 

 

쪽방촌의 박원순시장

무릎을 꿇고 서민의 하소연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 : 박원순 첫날 '시민과 함께' 민생행보(종합2보), 연합뉴스 2011-10-27

 

 

사진을 보면 박원순 시장이 쪽방촌을 찾아 무릎을 꿇고 앉아 서민의 말을 경청하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사진을 스크랩하여 글과 함께 올린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장면이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거에서 승리한 그 다음 날 시장으로서 첫 출근할 때 시청사가 아니라 쪽방촌부터 찾았기 때문이다. 만일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면 선거 이전에 이런 퍼포먼스를 펼쳐야 했을 것이다. 과연 우리 정치인 중에 누가 서민 앞에 무릎을 꿇고 경청하는 자가 있을까?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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