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장애업보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4. 12:40

 

장애업보에 대하여

 

 

 

해피스님의 장애인관에 대하여

 

최근 불교포커스에서 장애인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장애불자들의 모임인 ‘보리수아래’의 최명숙대표가 쓴 글이다. 이 글에서 최대표는 해피스님의 장애인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 하였다.

 

 

언젠가 보리수아래 회원이 한국테라와다불교교단의 해피스님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해피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쓰기 위해 장애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여한 특별한 쓰임새를 알고, 그 쓰임새를 다하는 삶을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특별한 삶의 선택된 당사자로서 당당하고 자신있고 차별 받지 않게 삽니다. 그런데 절에 가면, 인과(因果)를 말합니다. 전생에 지은 바 업보(業報)요, 업장(業障)이니 누구를 탓할 것입니까? 자기가 과거에 잘못한 탓에 현재의 아픔을 과보로써 겪는 것이니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생에 죄 지은 표식으로 나타난 장애를 껴안고 눈치 보며 타의적으로 차별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업에 의해 태어남을 설명합니다. 특히,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에서는 “이와 같이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중생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며, 14가지로 행위를 구분한 '업보로서의 태어남'을 말합니다. 그 중 장애는 없습니다. 해피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장애를 업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답으로 하였습니다.

 

(종교의 장애인관을 생각해 봅니다, 최명숙의 보리수 아래서 보내는 편지, 불교포커스 2014-02-27)

 

 

 

a hindrance

 

 

해피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 비구로서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해피스님의 법명은 뿐냐디빠(Puññadīpa)’이다. 굳이 우리말로 풀어 설명한다면 공덕의 섬또는 공덕의 등불이 될 것이다. 뿐냐가 공덕을 뜻하고 디빠가 또는 을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해피스님넷상에서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애불자모임 보리수아래 대표인 최명숙님의 글에 따르면 해피스님의 장애인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무엇이 잘못다는 것일까? 그것은 해피스님의 업보론이다. 해피스님은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장애를 업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피스님의 장애인관은 어떤 것일까?

 

태내외의 부조화라고

 

해피스님의 블로그에 문제의 장애관이 있다. ‘장애는 업보가 아닙니다라는 글에 따르면 마음의 메커니즘에 의한 교리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 하였다.

 

 

마음의 mechanism은 행위 즉 업이 오염되면 오염의 정도에 상응하여 식()이 머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머문 식, 말하자면 업을 상속한 식이 윤회의 당사자라고 알려줍니다. 그런 가운데 행위의 오염은 또한 의도와 소망도 머물게 하는데, mano의 행위의 일부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법회에서는 행위의 오염을 조건으로 머무는 식은 의도와 소망을 속성으로 하고 그 쌓임[식온(識蘊)]의 상태로 윤회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되는 윤회의 mechanism은 식()이 오직 삶의 과정에 대한 앎[기억]이고, 의도와 소망을 속성으로 하는 가운데 다음 생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몸과 만날 뿐이지 몸의 장애를 초래하는 조건으로는 전혀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몸의 장애[뇌의 장애 포함]는, 삶의 과정을 통해 전생의 업의 영향력을 속성[의도와 소망]으로 가지고 오는 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머니의 태 중에서든 태 밖에서든 물질적 결합관계의 부조화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타당한 것입니다.

 

(해피스님, 보가 니다. 2014-02-22)

 

 

해피스님은 체계, 장치라는 뜻의 메커니즘(mechanism)’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마음체계와 윤회체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두 조건발생에 따른 식이 연기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체계는 현생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순간윤회라 보여지고, 윤회체계는 한 존재의 일생에 대한 일생윤회에 대한 것이라 보여진다. 순간윤회나 일생윤회 모두 연기적으로 설명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피스님이 말하는 마음의 메커니즘은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로 설명되는 십이연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십이연기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상카라)과 식과 명색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오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상카라를 뜻하는 업이 오염된다고 하였는데 오염된 업이 식이 머문다라고 하였다.

 

해피스님이 말한 오염이라든가 머문다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는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Sakhārapaccayā viññāa, S12.2)”라 되어 있는데,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형성(상카라)가 오염되어서 의식(윈냐나)에 머문다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오염되어 식이 머문다라는 표현이 생소한 것이다.

 

업은 깜마의 번역어이다. 깜마는 의도에 발생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구의 삼업을 들 수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한 행위는 모두 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업은 악업도 있지만 선업도 있다. 그래서 각자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 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장애 업보설을 부정하는 해피스님

 

그런데 해피스님은 장애가 업보와 무관한 것이라 하였다. 육체적 장애이든 정신적 장애이든 출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된 것이라 보고 있다. 또 태어나서 사고나 질병 등으로 장애가 발생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업보와 무관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해피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근본경전[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M136)(http://cafe.naver.com/happybupdang/1444)>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http://cafe.naver.com/happybupdang/1443)>에서 부처님은 업에 의한 태어남을 설명합니다. 특히,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에서는 「이와 같이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중생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며, 14가지로 행위를 구분한 '업보로서의 태어남'을 말합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설해지는 업보로서의 태어남 가운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금생에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해피스님, 5 리수 아래 , 2012-05-17)

 

 

글에서 해피스님이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전 문단에서 업보로서 장애에 대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애에 대하여 전생에 지은 업보로 보고 있기 때문에, 과거전생에 잘못한 것에 대하여 죄짓는 마음으로 살아 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스님은 맛지마니까야 M135 M136을 들어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해피스님은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을 인용하여 업보로서의 태어남 가운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럴까?

 

이 문구에 대히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의 생긴 모습은 왜 다를까? 또 성향은 다를까?  한번 생긴 모습과 성향은 일생 동안 거의 변함이 없다. 왜 이런 차별이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하였다.  업에 따라 차별이 생겼음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행위, 즉 업(kamma)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업설은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니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인 것이다. 그래서 얼굴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이라 본다. 장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 따르면 장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M129-3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그에 대한 과보로 장애를 가진 자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해피스님이 업에 대한 작은 분석경(M135)’ 14가지 사례 중에 장애라는 말이 없음을 지적하며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태어남 가운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신구의로 악업을 지었을 때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M129)”로 태어 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해피스님은 이 문구에 대히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에서 말한 장애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모두 해당 된다고 본다. 비록 경에서는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어 축생에서 인간 되기가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지만 신구의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었을 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피스님이 어머니의 태내에서 잘 못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산모의 부주의로 잘못될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초기경전 그 어디에서도 태내의 부조화로 인하여 장애가 발생하였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피스님의 장애인관은 법륜스님의 견해와 일치한다. 법륜스님은 장애에 대하여 유전적 요인과 산모의 부주의 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라는 제목으로 비판한 바 있다.

 

장애 보다 더 무서운 차별대우

 

해피스님은 마음의 메커니즘을 들어 장애는 업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보리수아래 최명숙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설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장애인으로 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선행으로 후생에서 장애를 극복하게 되는 것일까요?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보아야 한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할까요?

 

(종교의 장애인관을 생각해 봅니다, 최명숙의 보리수 아래서 보내는 편지, 불교포커스 2014-02-27)

 

 

불교인으로서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 경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 존재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애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도 그런 장애를 가졌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1)”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명숙 대표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물음표(?)를 하였다. 반드시 경전적 근거를 들어 장애를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 외에 더 요인이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대표는 문화적 요인을 들었다. 장애라는 것이 반드시 생물학적 요인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도 만들어 질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평등권리같은 것이다. 장애인을 차별대우하는 것 자체가 장애 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는 반드시 생물학적으로만 구분할 수 없다. 지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하여 이들만 장애인이라고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명숙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와 원한,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 이렇게 다섯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장애를 저주이거나 업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라는 불교의 교리와 신앙의 측면에서 모두가 장애인이라는 말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장애인관을 생각해 봅니다, 최명숙의 보리수 아래서 보내는 편지, 불교포커스 2014-02-27)

 

 

최명숙대표는 모든 사람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에 동의한다. 육체적으로 결함을 가진 자에게만 장애라는 딱지를 붙일 수 없음을 말한다. 육체가 멀쩡하다고 하더라도 알코올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알코올장애라 할 것이더. 도박에 미쳐 있다면 도박장애가 될 것이고, 여자에 미쳐 있다면 섹스장애가 될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았을 때 역시 장애로 본다.

 

또 장애라는 것이 반드시 뇌구조에 결함에 따른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보터 마음을 정화시킨다.(A4.37)”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장애가 되는 것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장애라는 것은 탐욕, 성냄 등 오장애를 말한다. 이 장애에 대한 빠알리어가 āvaraa’이다. 아와라나는 덮개를 뜻한다. 그래서 다섯가지 장애에 대하여 오개(五蓋)라고도 한다.

 

누구나 오장애를 가지고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와 원한,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 이렇게 다섯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의 장애로서 다섯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기와 질투 하는 것도 장애에 해당되고, 집착하는 것도 장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색계와 무색계 존재도 장애인?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반드시 육체나 뇌의 결함이 있어야만 장애인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신체조건을 모두 구족하고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여 그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욕계천상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인간 보다 수승하다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도 장애인이 되고 만다.

 

색계와 무색계는 남녀구별이 없는 중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장애인이라 볼 수 있다. 또 색계의 경우 몸이 있긴 하지만 성의 구별이 없고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감각기관으로 따진다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중에 안이의(眼耳意)’만 기능하게 된다. 또 색계사선천의 무상유정천의 경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중에 정신기능이 빠진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만 있게 된다. 또 무색계의 경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중에 오로지 (, 마노)’만 기능한다. 이렇게 인간기준으로 본다면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사는 존재는 모두 장애인이 되고 만다.

 

지옥에 사는 중생도 장애인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잔인하여 살생의 과보로 태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귀는 인색과 집착의 과보로, 축생은 우치와 탐욕의 과보로, 아수라는 성냄의 과보로 태어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은 과보로 악처에 태어난 것인데 탐욕과 성냄 등의 장애에 따른 것이다.

 

몰리야 씨바까의 경(S36.21)에서는

 

초기경전전에서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다고 하였다. 이는 쑤바가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생겨납니까?(m135)”라고 묻자, 부처님이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자이고…”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과거의 요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몰리야 씨바까의 경(S36.21)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S36.21)

 

 

지금 여기에서 현재 나의 모습은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에 의한 것 뿐만 아니라 일곱가지 요인이 더 있다고 하였다. 대표적으로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이나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을 들 수 있다. 사고를 당하여 장애인이 되었다면 이런 캐이스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때문이라고? 느낌이 발생하는 여덟 가지 요인과 접촉(phassa)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바 있다.

 

장애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방식

 

그러나 선천적 장애에 대하여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한 피습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에 의한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해피스님이나 법륜스님의 장애인관을 보면 어머니 태내에서 부주의나 유전적 요인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맞지만 전부 맞다고 볼 수 없다.

 

육체적 결함이나 뇌의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장애에 대하여 모두 유전적 요인이나 태내의 환경탓으로 돌리는 것은 생물학적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생물학적 요인 플러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강조 되고 있는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과보가 성숙되었을 때 업보로 나타나기 때문에 부처님은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고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 납니다.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 M135)”라 하셨기 때문이다.

 

“두(Du), (Sa), (Na). (Sa)"

 

생활속의 아비담마에서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의 후회라는 이야기가 있다. 업보가 무르익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오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의 후회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이 읊은 네 가지 음절로 된 두(Du)-(Sa)-(Na)-(Sa)라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그들은 매우 부유한 젊은이들이었지만 아무런 공덕행도 짓지 않았을 뿐더러 오직 불선업만 지었다. 예를 들면 도덕적 계율을 파하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어서 로하꿈비 지옥(Lohakumbhī-niraya)에 떨어져 육만 년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과거 생에 나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공덕의 길을 닦지 않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네.

 

그는 자신의 악행을 크게 후회하였다. 하지만 오직“두(Du)"라는 단어만 입 밖에 내고는 다시 무시무시한 솥 밑바닥으로 가라않았다. 그는 선행을 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또 다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고통스런 과보는 끝이 없내. 나는 인간으로 있을 때 악업을 지었다.”하지만 그도 완전한 문장을 말하지는 못하고 오직 “나(Na)"라고 하는 말만 입 밖에 내었다. 그는 자신의 지은 불선업을 후회하였다.

 

악업의 고통스런 과보는 “두(Du), (Sa), (Na). (Sa)"라고 말한 네 명의 젊은이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내생에 가서야 비로소 무르익는 것은 아니다. 현생에서도 악업을 지은 자는 자신의 악업에 대한 생각으로 쇠해간다.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정도에 이르기 까지 몸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생활속의 아비담마, (15) 2 - 인색, 후회, 해태와 혼침, 회의적 의심)

 

 

늘 술에 절어 사는 알코올 중독자가 있다. 늘 흐리멍덩한 상태로 있다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또 마약중독자가 있다. 부유한 집에 태어난 자가 “심심해! 심심해!”를 연발하며 마약에 중독되어 늘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한 세상 살다 갔다면 어떻게 될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임종순간에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절어서 일생을 보낸 자라면 늘 흐리멍덩하게 살았으므로 역시 흐리멍덩한 존재로 태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위 이야기에서와 같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Du) 또는  (Sa), (Na), (Sa)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기독교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 지는데

 

해피스님은 장애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업이 오염되면 오염의 정도에 상응하여 식()이 머문다고 하였고, 업을 상속한 식이 윤회의 당사자라 하였다. 그래서 ()이 오직 삶의 과정에 대한 앎[기억]이고, 의도와 소망을 속성으로 하는 가운데 다음 생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몸과 만날 뿐이지 몸의 장애를 초래하는 조건으로는 전혀 작용할 수 없다라고 하여 윤회의 메커니즘으로 과거전생이 지은 업이 장애로 작용할 수 없음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설명은 기독교를 의식한 것이라 보여 진다. 해피스님은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스님의 생물학적 장애인관은  장애에 대하여 쓰임새로 보는 기독교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해피스님은 자신의 글에 대하여 이 글은 지금 다시 보아도 장애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적절히 표현한 것 같습니다.”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초기경전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 생물학적 접근방식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불교의 장애인관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라 보여지지 않는다.

 

장애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정상적인 사람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사람들은 신체불구나 뇌결함이 있는 자를 장애자라 한다. 그러나 누구나 미래의 장애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장애의 개념이 더 확장 된다. 탐욕, 성냄 등 도 역시 장애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불구, 뇌결함 뿐만 아니라 탐욕, 성냄 등 오염원에 덮힌 자도 장애인으로 본다. 그래서 누구나 장애인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탐진치로 대표 되는 오염원을 소멸 시킨 번뇌 다한 아라한만이 장애에서 벗어난 것으로 본다.

 

그 장애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무명에 있다고 하였다. 무명이라는 덮개에 씌여 있고 갈애에 묶여 있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한다고 하였다. 장애에 따른 마음의 메커니즘과 윤회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Iti kho ānanda,

kamma khetta,

viññāa bīja,

tahā sineho.

 

Avijjānīvaraāna sattāna

tahāsayojanāna hīnāya dhātuyā

viññāa patiṭṭhita.

 

Eva āyati punabbhavābhinibbatti hoti.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하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재생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A3.76, 존재의 경, 전재성님역)

 

 

 

 

2014-03-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