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중놈과 땡중”승가모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글로서 정화불사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26. 12:52

 

중놈과 땡중승가모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글로서 정화불사를

 

 

 

매일 글을 쓰는 블로거로서 늘 글을 쓰기 위한 소재거리를 찾는다. 대부분 그날 그날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경전의 문구를 삽입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다. 비록 보통불자의 ‘B급 삼류 글쓰기에 지나지 않지만 가급적 품위를 유지하려 한다. 남겨진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 대하듯

 

어느 카페가 있다. 다른 불교카페와 달리 어느 스님을 정점으로 하여 모든 것이 전개 된다. 그런 스님이 종종 올려 놓은 글을 보면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스님은 해외 등으로 잘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안거도 빼 놓지 않는다. 최근 동안거에서 3개월간 무문관 수행을 끝내고 돌아 왔다. 그러자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은 스승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 동안 보고 싶었던 스님을 다시 만나 보게 되어서 감격스럽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신도들은 스승의 귀환또는 영웅의 귀환이라 하여 떠 받들고 있는 글을 접하면서 은근히 시기질투가 일어났다. 머리를 삭발하였다는 이유으로 승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듯한 모습이 불편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스님이 매번 감동적인 글을 올려 놓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해제 기간 동안 몇 차례 글을 올려 놓았을 뿐인데도 마치 부처님 대하듯 깍듯이 모시는 신도들의 행태가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알아 차렸다. ‘그러려니하는 것이다.

 

스님들의 자유로운 삶

 

우리나라 스님들은 잘 돌아 다닌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역마살이 있어서 해외로 자주 나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히말라야에 가서 수행도 하고, 미얀마나 태국에서 살다 오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도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Migo araññamhi yathā abaddho
Yenicchaka
gacchati gocarāya,
Viññ
ū naro serina pekkhamāno
Eko care khaggavis
āakappo.

 

숲속에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초원을 찾아 거닐 뜻,

현명한 자라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39,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자유로운 삶(serina)’이라는 말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원하는 대로 살고 남에게 종속이 되지 않는 삶(Prj.II.83)”이라 한다. 그래서 숲속이라는 고정된 장소에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초원을 유유히 거닐 듯 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이라 하였다.

 

게송에서는 현명한 자라면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 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속박 되어 있지 않은 삶을 말한다. 오로지 진리만 추구하며 가족이나 친구, 조직 등에 속박 되어 있지 않아 마치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자유로운 삶이다. 바로 그런 삶이 출가수행자의 삶일 것이다.

 

출가자는 자유롭다. 일정한 거처가 없어서 안거 때가 되면 모이고, 안거가 끝나면 모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진다. 그런데 돌아 갈 곳이 있는 스님은 반겨 주는 신도들이 있다. 그래서 스승의 귀환 영웅의 귀환이라는 환대를 받으며 그들을 위한 법문을 해 준다.

 

너무 자유롭게 살다 보니

 

스님들은 자유롭게 산다. 그런데 너무 자유롭게 살다 보니 종종 비난을 받기도 한다. 스님같지 않은 스님, 막행막식 하는 스님들을 말한다.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스님에 대하여 불자들은 불편해 한다. 하지만 대놓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스님들 일에 관여 하지 않는 것이 불자된 도리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는 대승보살계에서 십중대계에서 여섯번째 항목을 보면 불자들아, 만일 너희가 출가한 보살이나, 집에 있는 보살이나, 비구나, 비구니의 허물을 자기 입으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말하게 하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기 때문다. 그래서 재가자가 출가자의 허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큰 죄가 된다라고 하였다.

 

스님의 허물

 

스님들이 아무리 잘못 하여도 허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승가의 잘못에 대하여 과감하게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매스컴에 칼럼을 써서 승가의 잘못된 행태에 지적하는 글을 말한다. 그런데 지나치면 지적을 받는 것 같다. 최근 불교포커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중놈’ 시절 잊은 조계종 승려에게 웬 3배?', '스님 성불 막는 오빠부대 빠순이'. <뉴시스>에 연재하고 있는 ‘하도겸 칼럼’ 중 일부 글의 제목이다. 이를 놓고 조계종총무원 기획실과 필자인 하씨가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다.

 

조계종기획실은 지난 1월 말 하씨가 소속한 한 박물관장 앞으로 ‘협조 요청’을 보내 “저희 종단과 스님들에 대한 도를 넘은 비난과 조롱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바”라면서, 하씨에 대한 ‘적절한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한 칼럼니스트의 ‘중놈’에 조계종 ‘발끈’, 불교포커스 2014-02-25)

 

 

 

 

 

불교포커스에 따르면 한 컬럼니스트의 글이 문제가 되고 있다. 컬럼에서 중놈등과 같이 승가를 모독하는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조계종 기획실에서 발끈하여 시정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여기서 ‘발끈하다’라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사소한 일에 왈칵 성을 내다’의 뜻이다. 기사에서 표현한 대로 발끈한 것이라면 조계종 기획실에서는 사소한 일에 성질을 낸 것이다.

 

대체 어떤 컬럼이길레

 

그렇다면 대체 어떤 컬럼이기에 발끈 하며 시정조치까지 취하였을까? 문제의 글  “‘중놈시절 잊은 조계종 승려에게 웬 3?”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63년 11월의 일이다. 서울대학교 의예과 1학년 학생 김종화는 조계사 뒤뜰에 있는 양철지붕으로 대충 만들어진 열악했던 청년 회관을 찾았다. 당시 불교를 전혀 몰랐던 김종화 현 한국불교연구원 제4대 이사장은 우리나라 불교학을 세운 고() 불연(不然) 이기영 전 동국대학교 교수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강의를 처음 접했다. 무슨 말인지도 전혀 못 알아들었는데 강의 도중 귀명삼보게(歸命三寶偈)를 강조했던 원효선사의 가르침에 마치 어둡고 깜깜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배가 등대를 보고 길을 찾듯이 그런 감격을 느끼고 불교를 믿게 됐다. 불교에서 말하는 ‘초발심(初發心)’이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불법승은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제자로 흔히들 알고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의 불법승은 세 개가 아닌 하나로, 한마음 즉 일심(
一心)이다. 고 이기영 교수에 의하면 일심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의지할 것도 없다고 한 원효스님은 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歸一心源), 널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饒益衆生)를 하라고 강조했다. 결국, 일심으로 보살(菩薩)이 되라는 뜻으로 불법승이 하나임을 선포한 것이다. 최근 몇몇 조계종 스님은 마치 3보가 출가한 스님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원효스님은 귀명삼보게를 통해서 승보는 ‘무량한 공덕을 담으며 여실하게 수행하는 자’(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라고 한정했다. 나아가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며 대승에 대한 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자여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작년 말 연임에 성공한 대한불교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캠프에 있었던 조계종 중앙종회 3선 의원이자 한 사찰의 주지도 포함된 10여명의 중앙승가대학 출신 비구·비구니 스님 고성방가의 음주 사건이 신문과 방송을 채운 적이 있었다. 충남 공주의 한국문화연수원 레크레이션룸에서 밤새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진 이 날 하루에 소주 한 박스와 맥주 세 박스 분량의 술이 발견됐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불교 연수 시설에서 승려들이 밤새 술판을 벌인 것도 모자라 자성과 쇄신을 강조한 조계종은 바로 원장만 해임한 채 호법부가 철저하게 조사만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조계종에 기부금 등을 보시했던 신자들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려 얼굴도 못 들게 했던 그 스님들의 사건은 이제 조용해졌다. 지난 6월에도 성매매로 처벌까지 받은 스님에게 조계종은 ‘문서견책’이라는 솜방망이 징계를 했다. 이번 사건에는 자승 총무원장 연임에 공로를 세운 스님까지 포함됐으니 아예 처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있다. 지난 5월 1일에는 ‘삼귀의와 오계’를 주제로 한 조계종 토론회에서 어떤 스님은 비구니 교단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오직 출가 비구만이 삼보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금 조계종의 계율 해석에 의하면, 문수보살에게 불이(
不二)법문을 가르치고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의 사리불(舍利弗)까지도 부처님이 그토록 가라고 해도 그의 높은 법력이 두려워 문병가기를 꺼리게 했던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 유마거사도 삼보가 아니다. 그런데 보살에게 깨우침을 주었던 유마거사도 3보가 아닌데 성매매를 하고 밤새 음주에 고성방가를 조계종의 스님들은 여전히 정말 3보라고 해도 좋단 말인가?

조선 시대 숭유억불에 의해 승려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몰래 마을에 가야 할 정도로 그 위상이 노비와 다름이 없었다. 그게 다 인과응보고 자업자득이다. 고려 시대 국교로 숭상받던 불교는 훌륭했지만, 3보라며 까불던 승려의 폐해가 너무 컸기에 그렇게 됐다. 경허·만공·수월 스님 등에 이어 깨달음을 얻어 선지식이 된 성철 스님은 불교의 자존감을 되살리고자 1947년 ‘봉암사 결사’ 이후로 재가자들에게 3배를 하도록 했다. 성철스님과 같은 스승께 불법승에 대한 예를 취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로 승려들에게 3배의 예를 취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는 폐해를 낳았다.

칠순의 노인에게도 3배를 받는 스님들은 출가와 동시에 카스트제도의 최상위계층인 브라만 신분이 돼 부처님 전에 보시하는 재가자들을 하인 대하듯 한다. 마음공부를 해야 할 조계종 승려들에게서 이미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하심(
下心)’은 찾을 수 없다고 여러 재가자가 말한다. 재가 시절부터 용성스님에게 ‘금강경’(金剛經)을 배우는 등 열심히 공부하고 출가했던 제3대, 4대, 6대 3번이나 종정을 역임한 고암스님은 신자들에게 큰절을 못 하게 하고 악수만 했다고 한다. 한곳에 6개월 이상 머물지 않고 오직 항상 자신을 낮추는 하심행(下心行)을 실천한 그분은 이미 가고 이제 조계종에는 그의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조선 시대 중놈 시절을 잊은 대한불교조계종단을 연임에 성공하면 자성과 쇄신 결사를 제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던 자승 총무원장이 앞으로 공약을 어떻게 지켜 나갈지가 관전 포인트다.

 

([하도겸 칼럼]‘중놈’시절 잊은 조계종 승려에게 웬 3배?, 뉴시스 2014-01-14)

 

 

컬럼을 보니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다만 컬럼에서 “3보라며 까불던 승려라든가 중놈 시절을 잊은이라는 표현이 돋보일 뿐이다.

 

조계종에서 발끈한 내용을 보면

 

그런데 바로 이런 표현을 문제 삼아 조계종 기획실에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불교 포커스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기획실은 이 문건에서 “저희 종단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중놈’ ‘땡중’ 등 비하적인 표현과 현실성 없는 일방적인 주장을 통해 종단과 스님들을 비난하고 있다”면서 “불교에 대한 애정과 비판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귀 기울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해야 진정 글쓰는 의미와 보람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칼럼니스트의 ‘중놈’에 조계종 ‘발끈’, 불교포커스 2014-02-25)

 

 

이것이 조계종에서 발끈한 내용이다. 스님에 대하여 중놈’ ‘땡중등과 같은 비속어를 사용하고 승가를 모독하였다는 것이다.

 

땡중이라 하였다고

 

이처럼 발끈한 조계종에서 문제 삼은 컬럼이 또 있다. ‘땡중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컬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컬럼은 어떤 내용일까? 해당 부분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불교조계종 주변에는 비구 승려들 쫓아다니는 오빠 부대가 적지 않다. 계율 따위는 신경 안 쓰는 무애한 승려들에게야 편리한 부분도 있겠지만, 가끔 이들 사이에 섬싱(something)이 생겨 결국 종단을 나가는 일이나 은처(隱妻)하는 일까지도 더러 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대처(帶妻)를 한다고 결혼하지도 않은 태고종 스님들까지 전통사찰에서 모두 쫓아낸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려가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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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도 그런데 젊은 비구 승려는 왜 쫓아다니는지 모르겠다. 엄청난 착각이든가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런 ‘땡중’ 한테 몇억 싸서 절에 간다고 한들 결국 반말이나 배신만 돌아올 따름이다.

 

([하도겸 칼럼]스님 성불 막는 오빠부대 ‘빠순이’ㅡ 뉴시스 2014-01-19)

 

 

전문을 읽어 보면 한국불교와 승가를 모독하는 글이 아니다. 다만 못된 승려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이다. 계율따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막행막식을 일삼는 스님에 대하여 땡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계종 기획실에서 발끈 한 것은 땡중이라는 말 때문이다. 아무리 막행막식하는 스님이 라도 불자들이 스님에 대하여 땡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식으로 잘못된 것이라 한다.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자

 

컬럼에서 중놈’ ‘땡중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하여 조계종 기획실에서는 조치하였다고 한다. 어떤 조치인가? 컬럼니스트가 일하고 있는 곳에 서면으로 공문을 보내 소청심사 신청을 해 놓은 상태라 한다. 그곳은 국립민속관으로서 공공기관의 영역에 속한다. 한마디로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조치라 볼 수 있다.

 

‘땡중’시리즈 네 가지

 

이렇게 조계종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컬럼니스트는 컬럼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SNS 페이스북을 점령한 스님들…’이라는 제목의 컬럼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 ‘땡중’은 페이스북에 계속 아프다고 합니다. 다리도 아프고 예전에 수행하다 아프게 된 속이 요즘 더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서 마침 겨우 찾은 몇 개 남은 파스를 붙였더니 좀 낫더라며 선방 수좌 연기를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성철스님이나 선지식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공부하다 죽어라!’라고 했다면서 상황을 리얼하게 만듭니다. 그런 글을 올리자마자 많은 신도가 메신저와 댓글로 계좌번호 달라고 합니다. 한 분이 그 스님의 거처에 갔더니 최신 에어 맥북을 비롯해서 없는 게 없더랍니다. 그 스님은 한 달에 한 번씩은 그런 글을 올린다고 합니다. 사실 파스 한 장 붙이면 낫는, 어쩌면 없는 고통으로 일확천금을 해 나갑니다. 육신통을 하는 부처님도 절대로 못 할 ‘뻥튀기’라는 대단한 신통력입니다.

한 ‘땡중’을 사칭한 사기꾼은 베스트셀러작가 승려처럼 아주 부드럽게 “힘들지! 어렵지! 내가 도와줄까! 밥 사줄까?”라는 댓글을 자주 남깁니다. 그러면서 젊은 처자들에게 접근합니다. 만나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차고 마시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결국, 모텔에서 눈을 뜬 한 처자는 매우 당황해서 재빨리 도망쳐 나옵니다. 여기저기 통해서 알아보니, 예전에 조계종 승려 하다가 잘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종단의 유력 사찰 출신이고 이미 종단 사람이 아니므로 가만히 보고는 있다고 합니다. 마치 화두를 잡듯이 말입니다.

한 ‘땡중’은 페북에 계속 누더기가 된 누비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연출된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자주 올립니다. 부처님 당시에 시신을 덮는 천 등 줘도 안 입는 그런 헌 옷을 주워다가 빨아 지은 옷은 똥을 닦은 헝겊과 같으므로 분소의(
糞掃衣)라고 합니다. 무애한 원효 스님 아니 소성 거사나 가능했을 그 수행을 흉내만은 참으로 기막히게 잘 냅니다. 군데군데 헤어지고 낡아 구멍까지 난 곳을 보고 사람들은 마음이 찡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 땡중의 페북에는 계좌번호를 달라고 하는 댓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땡중은 자기가 어느 절 주지이니 놀러 오라고 하기는 좀 그랬는지, 차 한 잔 하러 오라고 합니다. 얼마 전 단체로 그 절을 찾은 한 분은 화장실로 착각해서 구석 뒷방을 열었다가 옷장에 수업이 걸려있는 새 옷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패션쇼 불사를 하실 예정이었나 봅니다.

어떤 승려들의 글은 항상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수십 명이 댓글로 안부를 묻습니다. 일일이 댓글을 달아주는 중생의 이익을 생각해서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몇몇 스님의 보리행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읽어보면 대개는 인사말이나 친분을 과시하는 말들입니다. 대체 왜 이러냐고요? 이런 땡중들은 SNS 특히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페이스북이 수행의 장이 아닌 영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이스북 친구 즉 페친이 손님이기에 한명씩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주고 있습니다. 정말 일이 없나 봅니다. 종일 웹이든 모바일이든 페이스북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택과 집중을 잘하듯이 수행했다면 벌써 성불했을 것입니다. 울고 불며 어머니도 버리고 애인도 다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이 스님이 됐다는 아픔 즉 아상(
我相)만 못 버린 줄 알았습니다. 속세의 장삿속은 전혀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말법시대가 맞긴 맞나 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하도겸 칼럼]SNS 페이스북을 점령한 스님들…, 뉴시스 2014-02-24)

 

 

컬럼 전문을 올렸다. 이른 바 ‘땡중’시리즈이다. 막행막식을 일삼는 스님에 대하여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땡중’이라 지칭한 것이다. 모두 네 부류의 땡중 사례가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네 번째것을 보면 땡중의 활동무대는 SNS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페이스북이 수행의 장이 아닌 영업장이라고 하였다. 이런 땡중들은 일이 없는지 하루 종일 인터넷이나 모바일에 죽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성스럽게 댓글을 달아 주며 “차나 한 잔 하러 오라고 유도한다는 것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임에도

 

기사에 따르면 컬럼니스트는 독실한 불교신자이다. 또 명상교실에서 지도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신자인 컬럼니스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사에 따르면 컬럼을 통해 사회와 종교계의 자성과 쇄신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컬럼에서 뜻을 분명히 하고 강조하는 의미에서 중놈’ ‘땡중과 같은 표현을 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승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아예 글을 쓰지 못하도록 조계종의 이름으로 소속 되어 있는 해당기관으로 공문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에서

 

 또 조계종에서는 조계종 기관지라 볼 수 있는 불교신문에서 불교비하 칼럼을 쓴 하도겸 씨에 대하여 서면경고 기사를 게제 하였다. 이 기사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박정규 조계종 홍보팀장은 “지난 13일 국립민속박물관으로부터 국가공무원으로서의 품위 유지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해 향후 유사한 사례가 발생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할 것을 내용으로 서면경고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며 “재발 방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칼럼을 예의주시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불교비하 칼럼 하도겸 씨 ‘서면경고’, 불교신문 2014-02-20)

 

 

불교신문에 따르면 영 통신사 뉴시스에 불교를 비하하는 칼럼을 게재해 물의를 빚은 하도겸 씨가 근무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한다.  그리고 공식으로 재발방지를 위한 공문을 발송하였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컬럼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조계종의 조치에 컬럼니스트는 발한다. 그래서 불교포커스 기사에 따르면, 컬럼니스트는  “내용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일부 표현만을 들어 불교를 매도하고 스님들을 비하했다는 왜곡적인 기사를 내리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불교신문에 대하여 명예훼손 혐으로 고소 하였다고 하였다.

 

승가모독 vs 표현의 자유

 

한 불자의 컬럼이 이슈가 되고 있다. 잘못된 스님들의 행태에 대하여 비판 한 것에 대하여 조계종에서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된 이유는 중놈’ ‘땡중이라는 표현이다. 컬럼니스트는 이에 대하여 스님같지 스님, 막행막식하는 스님에 대한 표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에 대하여 조계종에서는 승가모독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불교의 현실을 고발하는 한 컬럼니스트의 입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고 하였다. 컬럼니스트는 중앙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요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호법부니 홍보팀 등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은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불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스님들 얘기 좀 잘 써달라는 부탁이다. 의도는 잘 알겠는데 글을 좀 부드럽게 써달라는 것이다. 사실도 맞고 의도도 좋은 것인지 알겠다면 그냥 부드럽게 봐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직장으로 찾아가겠으니 한번 만나자고 한다.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얼마 전에는 “도가 지나치지 않으냐!”고 다짜고짜 따지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가? 뭐가? 도를 넘어선 것인가 물었더니, ‘중놈’이나 ‘땡중’이라는 표현이 그렇다고 한다. 지금 승려를 중놈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조선 시대에는 중놈이라고 불렀다고 했을 뿐이다. 그때를 잊지 말고 기억해서 다시금 그런 시대의 아픔을 겪지 말자는 의도였다.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도 아닌 손톱에 낀 때만 보고 있다. 모든 승려를 ‘땡중’이라고 한 것도 아니며 나쁜 짓 하는 조계종의 일부 승려를 사전적 의미로 ‘땡중’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게 마음에 걸린다면 왜 걸렸는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도 도를 넘었다고 따지기부터 한다. 거꾸로 나쁜 짓 하는 승려를 뭐라고 해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하도겸 칼럼]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조계종, 중앙일보 2014-01-27)

 

 

이 글은 컬럼의 일부이다. 컬럼에서 글쓴이는 중놈과 땡중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말미에 스님같지 않은 스님, 막행막식을 일삼는 스님에 대하여 무어라 불러야 하느냐고 묻는다. 알면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중님’ ‘가짜중이라 하면

 

여기 못된스님이 있다. 그런 스님에 대해서는 굳이 님자를 붙여 스님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승려로서 지켜야할 계율을 지키지 않고 막행막식을 일삼는 스님이 있다. 역시 이런 스님에 대하여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님자를 붙여 스님이라고 불러 주어야 할까 그렇다면 이런 스님에 대하여 어떻게 불러야 할까? 굳이 이름을 붙여 준다면 중놈에 대해서는 ‘중이라 하고, ‘땡중에 대해서는 가짜중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글로서 정화불사를

 

컬럼니스트는 중앙일보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은 “승려들의 명예와 위의를 훼손케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바른 수행하는 스님들의 위상을 드날리게 하기 위한 정화불사”라 하였다. 글을 통하여 승가의 잘못된 행태에 대하여 지적하고 고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중놈’이나 ‘땡중’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하여 이를 꼬투리로 하여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치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은 비판에 대하여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것일까?

 

 

 

2014-0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