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무불상(無佛像)의 시대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24. 22:38

 

무불상(無佛像)의 시대로

 

 

 

마네킹을 진열해 놓은 것처럼

 

불교의 상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불교의 상징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불상(佛像)이다. 그래서 절에 가면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에 참배 하는 것이 불자들의 기본적인 예의이다.

 

이렇게 불상이 불교의 상징처럼 되다 보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 여러가지 이름의 불상이 있다. 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갖가지 보살상 역시 많다. 이뿐만이 아니다. 절의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 절을 수호하는 신장상 등 수 없이 많은 상이 있다. 또 천불전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으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마치 마네킹을 진열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절에 가면 사람의 형상을 한 수없이 많은 불상, 보살상, 신장상 등을 만난다. 이런 형상 앞에는 반드시 불전함또는 복전함이라 쓰여 있는 통을 볼 수 있다. 이런 통에 불자들은 돈을 넣고 자신의 소원을 빈다. 그리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오체투지를 한다. 이것이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신행방법이다.

 

수 많은 불상이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모두 다르다. 기계로 찍어 낸 불상의 경우 생긴 모습이 똑같다. 천불전에 모셔져 있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보면 한결같이 똑 같은 모습인데 하나의 금형()’에서 찍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본존불로 모셔진 불상의 상호는 모두 다 다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본래 상호는 어떻게 생겼을까?

 

검은 얼굴의 예수

 

TV에서 즐겨 보는 프로가 있다. EBS세계테마기행이 그것이다. 최근 본 것 중에 모험의 땅, 필리핀이 있다. 2부에 검은 예수의 기적, 블랙나사렛 축제가 있는데 수백만명이 열광한다. 그런데 필리핀 최대의 축제에서 검은 얼굴을 한 예수가 등장한다.

 

 

 

검은 예수의 기적, 블랙나사렛 축제 (EBS세계테마기행’)

 

 

 

 

 

 

 

 

 

Black-Nazarene

 

 

 

 

검은 얼굴을 한 예수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까지 예수의 얼굴은 백인형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검은 예수상은 1606년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멕시코에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항구에 들어 올 때  배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타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상 만큼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얼굴이 새까맟게 타버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블랙 나사렛’이라 불리웠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블랙나사렛축제라 한다.

 

황갈색의 과달루페 성모마리아상

 

기독교에서 성모마리아의 이미지가 있다. 역시 백인 여자의 얼굴이다. 그러나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마리아 (Virgen de Guadalupe) ‘상을 보면 백인이 아니다. 피부색은 인디오들처럼 거므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이 검은색이 특징이다.

 

 

 

과달루페 성모상(Virgen de Guadalupe)

1531년 멕시코시티에서 발현

 

 

 

검은얼굴의 예수와 황갈색 피부의 성모마리아상은 스페인의 식민지이었던 나라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혼합주의로 본다. 지역의 토속신과 가톨릭이 융합하여 혼합주의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느 나라 불상이 가장 아름다울까?

 

예수의 모습이 나라마다 다르듯이 불상의 모습 역시 나라 마다 다르다. 그러나 불상을 보면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경전에 표현 된 32상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래서 육계가 있고 귀가 긴 것등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나라 마다 형상이 다른 것은 해당국가의 문화와 전통이 스며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 불상이 가장 아름다울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상은 무엇일까? 단연 석굴암 본존불을 들 수 있다. 8세기 중엽에 조성 되었고 높이가 3미터26센티미터에 달한다. 현재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라 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석굴암 본존불은 한국을 대표하는 불상이라 볼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

 

 

 

중국을 대표하는 불상은 어떤 것일까? 수 많은 중국불상이 있지만 용문석굴 봉선사동에 있는 노사나불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인 672년에서 675년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되어 있다. 석굴암 보다는 약 80년 가량 앞선다. 높이는 17미터에 달한다. 상호는 상호는 원만하고 약간 미소를 띠고 있고,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살아 생동하는 듯하다.

 

 

 

용문석굴 봉선사 대불(노사나불)

 

 

 

일본을 대표하는 불상은 어떤 것일까? 불교국가인 일본에도 수 많은 불상이 있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불상은 토다이지(동대사)’에 있는 대불일 것이다. 토다이지 대불은 철로 만들어진 철불로서 높이가 14.7미터로 거대하다. 원래 대불은 752년 경 건립되었다고 한다. 석굴암의 본존불 조성시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헤이안시대인 12세기 말에 병화에 소실 되었다고 한다. 현재 보는 대불은 그 때 당시 보다 축소된 형태로 에도시대인 18세기에 재건 된 것이라 한다.

 

 

 

토다이지(동대사)철불

 

 

한중일 삼국의 불상을 보면 어쩐지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태국의 불상은 태국사람 형상을 한 것이고, 스리랑카의 불상은 역시 그쪽 사람들 모습이 형상화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수 많은 불상을 보면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불상이고, 또 하나는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있는 불상이다.

 

석굴암의 경우 눈을 감고 명상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눈을 감고 명상하는 불상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이와 같이 눈을 아래로 내려 뜬 모습 보다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면 거룩해 보인다. 그래서 절로 우러러 보이고 신심이 나는 것 같다. 그런 면에 있어서 석굴암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 보이는 불상

 

눈을 감고 명상하는 불상이 스리랑카에도 있다. 비록 사진으로 보는 것이지만 명상속의 부처님상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 보인다. 폴론나루와 (polonnaruva)의 불상이 그것이다.

 

 

 

 

폴론나루와 (polonnaruva) 불상

출처: Akkakado 빅쿠의 포토스트림

 

 

 

폴론나루와는 스리랑카의 중세시대에 해당되는 11~12세기의  싱할라 왕조의 수도이었다고 한다. 명상하는 부처님상은 갈위하라(Gal Vihara)’에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갈위하라는 스리랑카의 고대도시인 폴론나루와에 있는데 부처상이 조각된 암반사원(a rock temple) 이라 한다. 암반에는 큰좌상(a large seated figure), 동굴안에 있는 작은 좌상(smaller seated figure), 그리고 입상(standing figure)과 와상(reclining figure) 이렇게 네 개의 조각상이 있다고 한다. 이 중 위 사진은 큰좌상(a large seated figure)이다. 특징은 눈을 감고 명상하는 모습이다.

 

 

 

폴론나루와 (polonnaruva) 불상

출처: Akkakado 빅쿠의 포토스트림

 

 

 

 

 

 

미남형은 아니지만

 

폴론나루와의 명상하는 부처님상을 보면 거룩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다지 미남형은 아니다. 스리랑카 특유의 이미지를 가진 불상으로 본다. 불상에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있듯이 이 명상속의 붓다를 보면 스리랑카 불상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폴론나루와 (polonnaruva) 불상

출처: Akkakado 빅쿠의 포토스트림

 

 

 

무불상(無佛像)시대가 있었는데

 

하나의 잘 만들어진 불교음악이 신심을 고취시키듯이 하나의 잘 만들어진 불상 역시 신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 불상이 아마 명상하는 모습의 부처님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라고 한 적이 없다. 다만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사리가 모셔져 있는 스투파나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그리고 족적을 상징하는 보륜등이었다. 이렇게 부처님 사후 오백년이 지나도록 불상은 없었다. 이를 역사적으로 무불상(無佛像)시대라 한다.

 

그렇다면 왜 불상이 출현 하지 않았을까? 이는 불상만드는 것에 대하여 신성모독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은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엄두를 내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모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경우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 될 때 까지 초창기에는 예수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예수를 상징할 수 있는 그림 정도만 허용 되었을 뿐 초상화 등을 만드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불교 역시 초창기에 부처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 다만 후대로 내려 가면서 부처님 그분을 닮고자 하여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대승불교가 흥기할 시점에서부터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불상을 만들지 않고 단지 부처님의 근본 정신만을 계승한 시기이었기 때문에 ‘무불상시대’라 한다.

 

상품화된 불상

 

지금은 불상시대이다. 그래서 온갖 불상으로 넘쳐난다. 그리고 불상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된다. 어느 절에 가든지 똑 같은 모양의 불상이 이를 말해 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불상모습으로 상품화된 것이다.

 

 

 

천불전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불사이다. 항상 볼 수 있는 기와불사 외에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천불(千佛)’불사이다. 천개의 불상을 조성하여 천사람에게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람이 천부처님을 천일동안 새로 모시게 될 천인,천불,천일 불사에 가족구성원 모두가 동참합시다.”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천불불사 내용을 보면 일불당 수십만원 한다. 일불당 오십뭔 한다면 천불이면 5억원이 된다. 그래서 천개의 불상은 천개의 불사자 이름을 갖게 된다. 이렇게 불상이 상품화 되다 보니 시주자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마치 한 개의 수십만원 짜리 상품으로 보이는 것이다. 만약 지금 부처님이 이런 광경을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부처님이 허용한 것은

 

부처님은 결코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라고 말씀 하지 않았다. 또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소원성취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부처님은 열반후에 탑묘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허용하였다. 그것도 깊은 산속이 아니라 사람들이 몰려 사는 대로의 사거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전륜왕의 유체에 대처하듯, 여래의 유체에 대처하고 큰 사거리에 여래의 탑묘를 조성해야 한다. (D16-112)”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허용한 것은 탑묘의 조성이다. 이는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 있는 스투파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 사후 오백년간 무불상시대에 스투파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탑묘가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사리분배에 대한 이야기

 

부처님이 열반한 후 화장을 하였다. 화장을 하고 나니 유체라 볼 수 있는 사리가 나왔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는 사리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처님의 유언대로 사리를 분배 받아 큰 탑묘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분배과정에서 다툼이 생겼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uantu bhonto mama ekavākya1
Amh
āka buddho ahu khantivādo.
Na hi s
ādhu'ya uttamapuggalassa
Sar
īrabhāge siyā sampahāro.


Sabbeva bhonto sahit
ā samaggā
Sammodam
ānā karomaṭṭhabhāge.
Vitth
ārikā hontu disāsu thūpā
Bah
ū janā cakkhumato pasannā

 

[도나]

존자들이여, 내 한 말씀 들어보십시오.

우리 부처님은 인욕을 설하는 님입니다.

최상의 참사람이신 분의 사리분배에

다툼이 생겨나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존자들이여, 모두 함께 화합하여

기뻐하며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사방에 탑묘를 널리 세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눈 있는 님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141, 전재성님역)

 

 

도나가 읊은 게송이다. 주석에 따르면 도나(doa)는 바라문 출신이라 한다. 부처님의 사리분배를 놓고 분쟁을 잘 조정한 것으로 설명 되어 있다. 그런데 도나라는 말은 기증자를 뜻하는 영어 ‘donor’와 유사하다. 그러나 빠알리 doa‘a measure of capacity; 1/8th’의 뜻이다.

 

사람 이름 doa가 기증자를 뜻하는 donor와 유사한 것은 빠알리어가 영어와 함께 인도-유럽어족계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너라 하였을 때 기증자를 떠 올리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바라문 도나는 분배조정 역할을 맡고 있다.

 

사리에 대하여 분배하고 조정역할을 맡은 도나는 여덟으로 나누어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그리고 사방에 탑묘를 널리 세워야한다고 말하고 많은 사람이 눈 있는 님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기를 바래서 하는 말이다.

 

부처님은 탑묘를 만들어 대로의 사거리에 세우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붐비는 저자거리같은 곳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원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도나는 게송에서  많은 사람이 눈 있는 님에게 청정한 믿음을 낼 수 있도록 사방에 탑묘를 널리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숯이라도 가져 가십시요

 

경에서는 여덟 개의 탑묘에 대한 위치가 나온다. 라자가하, 베쌀리, 까삘라왓뚜, 알라깝빠, 라마가마, 베타디빠, 빠바, 꾸씨나라라 이렇게 여덟 개의 시에 사리가 안치된 탑묘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추가로 두 곳이 더 있다. 바라문 도나가 사리를 담은 그릇으로 탑묘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모리야족도 탑묘를 세웠는데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하고 있다.

 

 

"Natthi bhagavato sārīrāna bhāgo, vibhattāna bhagavato sārīrāni, ito agāra harathā"

 

[바라문 도나]

세존의 사리 가운데 분배할 것이 없습니다. 세존의 사리는 모두 분배했습니다. 여기서 숯이라도 가져 가십시요.”

 

(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141, 전재성님역)

 

 

더 이상 가져 갈 사리가 없게 되자 숯이라도 가져 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숯은 화장용 장작더미의 (agāra)’을 말한다. 이렇게 숯을 가져다가 탑묘를 세웠는데 경에서는 열번째라 하였다.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존경받는 부처님의 본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D30)’에서는 보통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고 오로지 전륜성왕이나 부처에게서만 볼 수 있는 32가지 특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각국 불상에서는 이런 32상이 반영된 불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상의 상호를 보면 그 나라의 민족의 얼굴과 유사하다. 중국불상은 중국인의 얼굴을 닮았고, 태국불상은 태국사람을 닮았다. 이렇게 다르다 보니 어느 불상의 상호가 부처님의 본래 얼굴인지 알 수 없다.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경이 있다. 아상가교수의 강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뿍꾸사띠(Pukkusati)라는 젊은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고행을 하며 방랑하는 종교 전통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을 찾아 뵙고 싶어서 부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 여행을 하려면 몇 주 또는 몇 달씩 걸렸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함께 이 마을 저 마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옹기장이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옹기를 말리는 넓은 곳에서 종교인들이 잠을 자곤 했습니다. 부처님도 제자들과 그곳에서 밤을 지내셨습니다.

 

우연히 뿍꾸사띠도 그곳에 와서 같은 방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부처님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날 밤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요. 사람들은 누워 있었고 부처님은 어둠 속에서 그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자신은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전부 이야기하였습니다. 물론 부처님은 그 젊은이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지는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과 젊은이와의 대화는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설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의례적인 설법이 아니라 대화가 점진적으로 설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뿍꾸사띠는 자신이 대화하는 상대가 부처님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아상가 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제1 부처님의 생애, 불교tv 2007-12-27)

 

 

이것은 이전에 올렸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유행승뿍꾸사띠(Pukkusati) 에피소드에 실려 있다. 뿍꾸사띠 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에 실려 있다. 아상가 교수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범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처님 모습

 

뿍꾸사띠는 밤에 우연히 대화한 상대가 부처님인 줄 몰랐다. 자신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부처님에 대하여 설법을 듣기 이전까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32상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면 뿍꾸사띠는 금방 알아채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설법을 듣고서 비로서 부처님임을 눈치 채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참으로 스승께서 나에게 오셨다! 참으로 바른 길로 잘 가신 분께서 나에게 오셨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께서 나에게 오셨다!(M140)”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확신이 들자 뿍꾸사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어리석은 자처럼, 멍텅구리처럼, 악한 자처럼 제가 세존에 대하여 생각하건대 ‘벗이여’라고 말을 건넨 것은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에는 삼가도록 하겠사오니 세존께서는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hātuvibhaga sutta-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0:35, 님역)

 

 

유행자 뿍꾸사띠는 부처님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움막에서 대화를  나눈 이가 부처님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벗이여(bhante)”고 말했던 것이다. 이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모습이 범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2상이라는 신체적 특징이 있지만 어두컴컴한 밤에 보았을 때 쉽게 드러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 어떤 것에도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건만

 

불자들은 불상에 의존한다. 절에 가서 불상 앞에서 삼배를 올리고 자신의 소원을 바라고 또 기도한다. 하지만 절에 있는 불상은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흙으로 나무로, 또는 쇠붙이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조각품이다.

 

그럼에도 불상에 예배를 하는 것은 그 분의 가르침(담마) 때문이다. 그러나 불상 그 자체에 예배한다면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전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Dhammadīpā dhammasaraā anaññasaraā.

Attadīpāna bhikkhave, viharata attasaraāna anaññasaraāna dhammadīpāna dhammasaraāna anaññasaraāna, yoniyeva upaparikkhitabbā1- "kiñjātik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Kipahotik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다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Attadīpa sutta-자신을 섬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4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대신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 (Attadīpāna attasaraāna)”라 하였고,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 (dhammadīpāna dhammasaraāna)”로 하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자귀의 법귀의에 따르면 부처의 형상을 한 불상 그 자체를 경배하는 것은 부처님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설령 불상에 대하여 경배하는 것이 가르침을 경배하는 것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근기는 다양하므로 오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상의 출현은 부처님 가르침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84천 탑을 건립한 이유

 

불상이 출현하게 된 것은 부처님 사후 오백년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탑묘는 허용 되었다. 그래서 사리가 안치 되어 있는 탑묘 중심으로 사원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불상이 아니라 탑묘나 보리수, 보륜처럼 부처님과 부처님의 행적과 관계된 것이었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은 무려 84천개나 되는 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디빠왕사마하왕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소까왕은 비구 승가를 초대하여 공양한 후에 왕은 매우 심오하고 잘 설해진 담마의 구분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존자님, 태양의 후예[사꺄족의 부처님을 말함]께서 가르치신 담마에 구분이 있습니까?...”

 

“…인간 가운데 훌륭하신 스승께서 말씀 하신 가르침은 아홉 앙가(Anga)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전체 84천 가지의 가르침이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태양의 후예에 의해 잘 설해졌습니다. 그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고, 보약과 같은 훌륭하고 중요한 위없는 진리를 부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비구승가의 이런 말을 들은 후에 왕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그의 마음속에서 지혜의 마음이 일어나서 왕실의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체 8만4천 가지의 소중한 가르침이 가장 빼어난 부처님에 의해 설해졌다. 나는 한 개 한 개의 가르침을 존경하기 때문에 8만 4천개의 승원을 짓겠다.”

 

왕은 거의 매 도시마다 한 개의 승원을 지었다. 3년 안에 승원의 건축을 마친 후에 7일간의 봉헌의 축제를 열었다.

 

(일아스님, 아소까,  제5편 제4절 8만4천 탑의 건립과 불적 순례)

 

 

일아스님이 지은 아소까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소까대왕이 8만4천개의 스투파를 짓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84천개의 수투파()이 건립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닌 84천 개의 승원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승원이 세워져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 하였는데, 그 가르침의 핵심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인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 하였다. 이렇게 스투파가 세워진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불상의 진수

 

지금은 불상시대이다. 이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불상 없는 사원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불상도 불상나름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눈을 감고 불상과 눈을 뜨고 있는 불상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명상과 관계 되어 있다고 본다. 눈을 감고 있는 불상은 분명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라 보여 진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있는 불상은 중생을 자비의 눈으로 바라 보고 있는 것이라 보여 진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눈을 감고 있다. 손은 항마촉지인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명상하는 부처님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은 상은 우리나라에서 석굴암 본존불이 유일할 것이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부처님상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마하야나와 달리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잘 전승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이렇게 명상속의 부처님상의 대표작이 스리랑카 폴론나루와의 부처님상이라 보여진다.

 

 

 

 

폴론나루와 (polonnaruva) 불상

출처: Akkakado 빅쿠의 포토스트림

 

 

 

스리랑카의 모든 불상이 눈을 감고 있는 명상타입은 아니지만 12세기에 만들어진 갈위하라(Gal Vihara)의 석상을 보면 불상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비록 미남형은 아니지만 두손을 앞으로 하고 지긋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 보인다. 이렇게 비록 돌덩이에 지나지 않지만 잘 조성된 불상은 신심을 일으키게 한다.

 

 

 

 

폴론나루와 (polonnaruva) 불상

출처: Akkakado 빅쿠의 포토스트림

 

 

 

불상출현을 예측하는 듯 부처님 말씀

 

하지만 부처님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원음은 아니지만 금강경에서는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 하였다. 이는 만약 육신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는 볼 수 없으리라.”라는 뜻이다. 이 구절로 본다면 불상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부처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행위로는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오리지널 버전이라 여겨지는 게송이 상윳따니까야에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la vakkali. Ki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Ma passanto dhamma passati.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박깔리의 경-Vakkali sutta,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으로 보여진다. 미래에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예배하고 소원을 비는 행위에 대하에비판이라 보여 진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은 자신의 몸과 목소리에 반한 제자에게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라고 물은 후에,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이 후에 법신불사상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어떤 형상이나 음성 등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르침을 찾는 것에 대하여 경계 하였다. 그래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부처님의 몸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흙덩이나 나무, 쇠붙이로 만들어 놓은 부처의 형상에 절하고 소원을 비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진리는 형상화 할 수 없다!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한다. 그래서 그 어떤 우상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슬람이 진출하는 어느 곳이라도 전통문화는 철저하게 파괴 된다. 심지어 자신의 조상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파괴 되기 일쑤이다.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함에 따라 인간과 동물에 대하여 형상화 하는 것은 일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표현을 금지 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식물이다. 그래서 이슬람 문양을 보면 팔메트문양이라 하여 식물무뉘를 형상화 하였다. 한가지 허용한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문자이다.

 

이슬람에서는 꾸란에 쓰여 있는 문자에 대하여 표현하는 문화가 발달하였다. 말씀이 담긴 문자를 문양으로 표현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기하학적 무뉘와 이슬람 문자가 복합된 특유의 예술품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슬람에서 우상을 금지한 것은 진리를 형상화 할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 한다.

 

 

 

중국신장성 하미 회왕묘

“알라는 세상의 유일한 신이다”라는 꾸란의 문구가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진리를 형상화 할 수 없다. 부처님이 진리의 몸이라 하였을 때 법신을 형상화 한다는 것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담마를 알아야 부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부처님을 형상화한 그 어떤 불상도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명상하는 부처님상이다. 석굴암 본존불이나 폴론나루와에 있는 갈위하라 부처님 상이다. 명상속의 부처님은 열반의 부처님을 형상화 한 것이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부처님상과 다르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무불상이다. 불상이 없었던 시절의 불교시대를 말한다. 아소까대왕이 84천 스투파를 만들어 불교를 인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전파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스투파를 중심으로 한 사원으로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불상 대신 탑 중심의 가람을 말한다.

 

무불상(無佛像)의 시대로

 

불상시대에 불상으로 넘쳐 난다. 여기 저기에 크고 작은 불상을 보면 온갖 것이 형상화 된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진리의 몸인 부처님을 형상화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후대에 사람들은 부처의 모습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품화 하고 있다. 진리의 몸인 부처님을 대량으로 찍어 내어 마치 상품처럼 거래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부처님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달가워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자들이 초기불교 경전을 접하고 부처님 원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듯이 무불상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라 본다.

 

부처님은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불상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이유라 본다.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한다면 초기불교시대처럼 무불상(無佛像)시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014-02-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