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참전기념탑을 바라보며
사는 지역에 베트남참전기념탑이 있다. 대로 네 거리 넓은 공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건립 된 것이다. 한차례 더 보수작업을 거쳐 기념탑 주변이 성역화 되었다. 그리고 기념탑 좌우로 수 백개의 달하는 참전용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명단이 전사자를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설명문에서 “참전용사들의 영명이 새겨져 있고” 라는 문구가 있어서 월남전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출신 며느리
요즘은 다문화시대이다. 길거리를 가다가 낯선 말을 종종 듣게 될 때 확실히 이제 우리나라는 다문화시대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실감한다. 또 TV에서도 ‘러브인아시아’ 같은 다문화시리즈를 연속으로 방영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아니다.
EBS에서 ‘다문화 고부열전’ 이라는 프로가 있다. 이프로를 보면 우리나라에 시집온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주로 외국며느리와 한국시어머니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알콩달콩 재미 있게 살아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의 특징을 보면 여자는 나이가 젊고 남자는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20년 가까지 차이가 난다. 남자가 40대이면 여자가 20대인 셈이다. 이 경우 시어머니가 70대로서 여자의 나이에 비하면 거의 할머니 뻘이다. 이런 고부열전에 등장하는 외국며느리의 대부분이 ‘베트남’ 출신이다.
다문화프로를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에서 신부와 한국신랑이 결혼 하는 케이스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문제점도 많다. PD 수첩 같은 고발프로에 따르면 국제결혼 사기에 대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 주고 있는 베트남신부나 베트남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모두 행복하고 훈훈한 이야기이다.
자유월남에 대한 추억
베트남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나라일까? 대부분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그것은 ‘월남전쟁’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월남파병으로 인하여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고 또한 월남특수로 인하여 경제가 부흥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파병하여 목숨걸고 싸웠던 자유월남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됨으로써 허망하게 패망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유월남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기술자로 월남에 돈 벌러 간 친척아저씨
월남에 대한 추억이 있다. 월남이 패망하기 이전에 주변에 벌어졌던 사건들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은 친척아저씨이다. 아마도 1970년 경이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본 그 친척은 기술자로서 월남에 돈벌러 갔다. 어린 아내와 어린 삼남매를 고국에 남겨 두고 돈을 벌기 위하여 머나먼 이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런데 기간이 끝나도 돌아 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일년이 가고 이년이 가도 돌아 오지 않은 것이었다.
친천아저씨가 돌아 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월남 현지에서 베트남 아가씨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래서 아이까지 낳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월남이 패망하였다. 그후로 연락이 두절 되었다.
월남패망후 수년이 지난 뒤에 그 아저씨는 한국에 왔다. 물론 혼자 돌아 왔다. 그러나 이미 가정은 파탄난 상태이었다. 현지에서 월남처녀와 결혼 하여 살았고 더구나 연락까지 두절 된 상태에서 한국에 남아 있는 아내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같이 산 것이다. 그래서 그 아저씨는 한국에 돌아 왔지만 홀로 생활하였다. 낮에는 술로 지내고 밤에는 하염없이 거리를 걷는다고 하였다.
베트남 내전(內戰)
월남은 1975년에 공산화 되었다. 그 후로 39년이 지났다. 이렇게 한세대 이상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자유월남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 월남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없다. 지금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라는 긴 이름을 가진 니라로 바뀌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거의 자본주의와 다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를 제외 하고 더 이상 이념으로 갈라서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하였다. 이 전쟁에서 베트남이 미국에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국제전이라고 하기 보다 ‘내전(內戰)’이라 한다. 왜 내전이라 한 것일까?
내전(內戰)이란?
어떤 이들은 한국전쟁도 내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전쟁과 함께 내전의 범주에 중국내전, 미국내전과 함께 한국전쟁도 내전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내전은 어떤 성격일까?
내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게 말하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또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정치권력의 획득을 둘러싸고 같은 나라 안에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 무력투쟁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한다. 내란이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 내전의 범주로서 ‘캄보디아 내전이나 르완다 내전과 같은 정부군과 반군과의 전투뿐 아니라, 미국 남북 전쟁, 중국 국공 내전, 한국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도 넓은 범위에서 내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래서 내전의 범주 안에 한국전쟁도 포함시킨 것이다.
정당한 쪽과 정당하지 않은 쪽의 전쟁
그러나 좀 더 다른 해석이 있다. 한국전쟁은 내전에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EBS 현대사 특강에서 허동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시빌워(Civil War)에요.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내전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에요. 이 내전이라고 했을 때는요 가치판단이 들어 갑니다. 정당한 쪽이 있고 그렇지 못한 쪽이 있어요.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정당한 쪽은 어디죠? 노예제 해방을 외친 북부이죠. 베트남 전쟁이 베트남 사람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 주기 위한 전쟁 이었는가? 이것이 ‘정통주의’이에요. 그렇지 않고 불란서를 대신해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가 국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들어갔다는 것이 ‘수정주의’이에요.
이 수정주의 시각으로 보면 베트남 전쟁의 원형 이게 6.25전쟁입니다. 그러니까 6.25전쟁에서 정당한 쪽은 내전쪽으로 볼 때는 계급해방전쟁인데, 민족해방전쟁을 했다고 얘기 되는 김일성쪽이 정당한 쪽이고 이승만은 제국주의 국가의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되는 거에요.
근데 요즘 정설은 무어냐 하면 국제전이라는 거에요. 왜 그렇게 되냐?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면, 스탈린이 한 말이 나온 거에요.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한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서 모택동 결재 받고 한 전쟁이다 이게 요즘 시각이에요. 그렇게 되면 민족내부의 정당성을 가린 내전이 아닌 거에요. 국제전이고 좀 더 적확하게 이야기 하면 대리전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허동윤교수,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4강- 다시 보는 6.25전쟁, EBS 2014-02-20)
허동윤 교수에 따르면 내전은 정당한 쪽과 정당하지 않은 쪽의 전쟁이라 한다.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미국의 ‘남북전쟁’이라는 것이다. 노예제폐지로 링컨이 당선되자 이에 반발한 남부의 여러주가 연합하여 반발한 것이다. 그래서 정당한 쪽은 북부라는 것이다. 이렇게 내전은 정당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확연하게 갈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내전의 양상에 대하여 ‘정통주의’라 하였다.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
그런데 내전의 양상에 ‘수정주의’라는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수정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당한 쪽은 남쪽 베트남이다. 외세를 끌어 들이긴 하였지만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주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쪽은 북베트남이다. 이는 제국주의 사주를 받아 성립된 꼭두각시 정권과의 전쟁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 내전의 경우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 패했다. 그리고 남베트남은 패망하여 사라졌다. 그렇다면 베트남 내전의 경우 정당한 쪽은 북베트남이 되고 정당하지 않은 쪽은 남베트남과 미국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어떤 범주에 들어갈까?
소련이 해체 되기 이전까지 한국전쟁에 대하여 베트남 전쟁과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고 한다. 수정주의적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비밀문서가 공개 되었는데 스탈린의 지시로 6.25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동윤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하여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으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EBS자막에서는 “내전이 아닌 국제전이자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던 6.25전쟁”이라고 소개 하고 있다.
허동윤교수의 EBS특강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한다. 미소의 대리전이자 국제전이라는 것이다. 이는 남측의 경우 미국을 비롯한 UN군이 참전하였고, 북측의 경우 소련의 사주와 중국이 참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전시대에 미소의 이념대결의 산물로서 한국전쟁을 바라 본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의 경우 내전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당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분명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베트남 전쟁은 이데올로기에 따른 이념전쟁이라기 보다 베트남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외세로부터 베트남민족을 해방시키기위한 민족해방전쟁에 더 가까운 것이다.
디스커버리(Discovery)채널에서 본 베트남전쟁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다. 제목은 인도차이나 컬러로 보는 어느 민족의 전쟁(Indochine a people’s war)으로 2편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Then the Americans came)’이다.
이 동영상은 디스커버리(Discovery)채널에서 만든 것으로서 Best of Discovery라 소개 되어 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뜻이다. 그런데 이 동영상을 보면서 매우 부끄럽고 창피한 장면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만행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증언을 하고 있기 떄문이다.
지엠대통령의 가혹한 통치
다큐는 1962년부터 시작 된다. 남베트남 지엠(또는 디엠, 吳廷琰, Ngo Dinh Diem)대통령이 가혹한 통치를 하던 시기이다. 이때 지엠정권의 반종교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탄압을 받았다. 베트남에서 불교탄압과 관련하여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문수스님과 틱 쿠앙 둑(Thinch Quang Duc)스님의 소신공양, (2010-06-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자료에 따르면 지엠은 1954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다가 1963년 암살되었다. 또 지엠은 친미주의자로서 가톨릭신자이었고, 가톨릭의 편애 때문에 불교도를 탄압하고, 박해하고, 투옥 하는 가 하면 처형하기 까지 한 반 불교적 인물이다. 이유는 불교가 공산주의를 부추긴다는 명목이었다.
'틱 쿠앙 둑’'스님1897~1963의 분신
고 딘 디엠 정권의 불교탄압에 항의 하여 분신함.
베트콩(Viet Cong)의 유래
다큐에 따르면 1962년부터 북쪽공산정부에서는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 하였다. 반군들은 자체작으로 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는데 베트남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베트남 공산(Viet Nam Cong San)’이라고 하였다. 이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Vietnamese Communists)’의 군대라는 뜻이다. 이를 줄여서 일명 ‘베트콩(Viet Cong)’이라 하였다. 베트콩은 북베트남 군대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1950년대말~1975) 및 미국 군대와 전쟁을 치른(1960년대초~1973) 게릴라 군대를 지칭한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승리를 자신했어요” 미국은 언제부터 베트남전에 개입하였을까? 프로에 따르면 처음에는 고문관과 남베트남군 훈련 돕는 특수군도 파견하여 개입이 시작 되었다고 한다. 이런 미국의 개입에 대하여 다큐에서는 ‘디엔비엔푸’전투에서 승리한 참전용사의 증언을 들려 준다. “소규모 인원으로 프랑스와 싸웠어요. 늘 무기가 부족했죠. 주민들이 직접 총을 제작 했습니다. 그렇게 구식 총과 대나무 창을 사용했죠. 그래도 우린 프랑스군을 이겼습니다. . . 미군이 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승리를 자신했어요. “ (어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전쟁 민족의 전쟁이야기 2부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 디엔비엔푸전투는 1954년 프랑스와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하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떠났다. 이 전투에 참전한 참전용사는 미군이 들어 왔을 때 승리를 자신하였다고 하였다. 구식무기로도 프랑스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아무리 신식무기로 무장한 미국이 들어 온다고 해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본격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 된 것은 1965년 부터이다. 이때 사이공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발 하였는데 미국이 다낭의 공군기지를 엄호 하기 위하여 최초로 미 해병 3천5백명이 차이나비치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당시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으로 설명 되고 있다. 남베트남에서는 군사 쿠데타로 지엠대통령이 암살 되고 군사정권 들어섰기 때문이다. 또 케네디가 저격 되어 존슨이 그 뒤를 이어 받았지만 점차 위기로 빠져 든 것이다. 베트콩은 미군 기지를 공격하자 이에 맞서 미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 사이공에서는 폭동까지 일어났다. 사이공에서 조차 베트콩을 동정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이공 주민들은 패배주의 빠졌다고 한다. 지엠보다 더 부패한 군사정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사정권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한 것이다. 또 사이공주민들은 미국세력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한세기 넘게 지배해 왔던 프랑스도 결국 항복 하였는데 문화와 언어가 다른 미국이 공산세력을 당해내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남베트남 주민은 패배주의에 빠졌는데, 그 결과 정부군의 치안이 유지 된 곳은 도시만 가능하였고 외곽은 모두 베트콩이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부패와 경찰의 학대가 극에 달하자 수도인 사이공에서 조차 베트콩을 동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콩이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된 1965년도의 상황이다.
미국의 반공 정책에 동참한 국가들
이런 와중에 미국의 반공 정책에 동참한 다른 국가들도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프로에서는 태국, 뉴질랜드, 호주, 대한민국이라 하였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베트남내전에 한국군을 파병한 것은 최초의 일이라 한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당시 파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내에서 여론 악화에 기인한 것이라 한다. 전세계적으로 반전 열풍이 불고 대규모 군대파병이 어렵게 되자 우방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한국정부는 6·25전쟁 당시 자유우방의 지원을 상기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지원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는 1954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4만 8,000여 명 주둔에 총34만명 파병
최초로 한국군이 파병된 때가 1964년이라 한다. 이 때 병원병력과 태권도 교관 등 비전투부대가 파병되었다. 그러나 1965년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천명이 파병되면서 본격화 되었다. 이어 같은 해 전투부대인 해병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연이어 파병 되었다. 또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가 파병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군 파병은 8년 동안 총34만명이라 한다. 일년에 4만가량이 베트남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파병숫자가 많다 보니 갖가지 무용담이나 일화가 많다. 그래서 월남에서 무공을 세웠던 이야기, 월남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에 대하여 들을 기회가 많았다. 친척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1번도로 이야기
친척 중에 월남에 갔다 온 사람이 있었다.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지만 항렬로 따져서 조카뻘이다. 그러나 나이는 훨씬 많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그 친척은 군인신분으로 월남에 갔지만 병과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1번도로 이야기를 많이 해서 길을 닦는 공병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1번도로는 어떤 것일까? 월남 1번 도로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검색에 해보니 베트남 1번 도로는 남북으로 길게 연결된 대동맥과도 같은 것이다. 중국 국경인 흐우응히꾸만에서 남쪽 끝 남깐 까지 그 길이가 무려 2300키로 미터에 달한다. 경유지로서 하노이, 다낭, 호치민시가 있다.
1번도로 검색 결과 ‘오작교작전’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67년 3월 8일부터 4월 18일 까지 오작교 작전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7년 3월 8일 ~ 4월 18일 베트남 푸옌 성에서 맹호부대, 백마부대 예하 대대들이 벌인 협공 작전으로 베트콩 831명이 사망한 작전을 말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아마 베트남 전쟁당시 한국군으로서는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작전이라 보여진다.
하얀 아오아이를 입은 여자들을 보면
친척에게 주로 들은 말은 ‘1번 도로’와 ‘아오자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월남 이야기 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이“일번도로를 따라 작전나갈 때마다 아래가 터진 하얀 아오아이를 입은 여자들을 보면 그렇게 이쁠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늘 아오자이에 대한 추억을 늘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 소재로 하여 글을 쓴 것이 ‘아오자이의 추억과 베트남 불교’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아오자이는 어떤 것일까?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오자이는 ‘아오 다이(Ao dai)’로 명명되어 있다. 아오다이는 여성들에게 일상화된 베트남의 민속의상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아오다이는 판탈롱(즈봉)위에 사제복 스타일의 실크옷을 몸에 꽉 맞도록 입는 것( tight-fitting silk tunic)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
아오다이(ao dai)
출처 : 영문판위키피디아 Ao dai
이런 아오다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리패션에 영감을 받아 Cát Tường과 하노이대학과 연계된 다른 디자이너들에 의하여 현대의상으로서 ngũ thân 으로 다시 디자인 되었다고 한다. 이후 업데이트된 아오다이는 1950년대 국민의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사이공의 디자이너들에 의하여 몸에 붙는 버전이 만들어짐으로서 오늘날 베트남 여성들에게 보는 것 같은 아오다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디스커버리채널의 다큐에서도 아오자이를 입은 모습이 등장한다. 1965년 사이공의 거리에서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은 다음 사진과 같다.
“베트남에서 한국 군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죠”
청룡부대나 맹호부대와 같은 전투부대 소속들은 전투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큐 프로에서는 놀랍게도 한국군의 끔찍한 ‘행위’에 대한 증언을 들려 주었다. 다큐에서 “어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전쟁 민족의 전쟁이야기” 라는 제목이 암시 하듯이 베트남 민족주의 입장에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라 보여 준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당시 시안슝 마을 주민인 ‘레이반기’증언자는 “베트남에서 한국 군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죠”라고 입을 뗀후 다음과 같이 있는 그대로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 마을과 공항사이에 한국청룡부대가 있었죠. 저는 베트콩 대장이었어요....제 아내는 ....그들은....”
(베트콩대장 레이반기의 증언, 어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전쟁 민족의 전쟁이야기 2부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차마 다 올릴 수 없어서 점점점(...)으로 처리 하였다. 이제까지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적나라게 증언한 것이다. 이런 증언을 들을 때 먼저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이 든다. 비록 월남 파병으로 인하여 자유월남을 지키고 국위를 선양하고 외화를 벌어 들여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늘진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증언을 싣는 것은 참전용사에 대하여 폄하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오작교 작전으로 베트콩 베트콩 831명을 사살하여 전과를 세운 것에 대하여 공적으로 높이 평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증언처럼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이어지는 증언은 더욱 더 구체적이고 공포스럽다. 훼에서 11Km 떨어진 티탕 마을 ‘응오티다오’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낮에는 미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해방군이 마을을 점령했죠. 전 한쪽 눈과 왼쪽 팔을 전쟁중에 잃었어요. 미군과 한국군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군인까지 ....”
(‘응오티다오’의 증언, 어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전쟁 민족의 전쟁이야기 2부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위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꼭꼭 가두어 놓고 절대 꺼내지 않는다. 역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에도 숨기도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위 증언과 같은 내용이다. 월남에서 전과가 우리에는 빛나는 공적이 되지만 반대로 월남사람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끔찍한 비극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전세계인들이 보는 디스커버리채널이다. 그것도 Best of Discovery라 하여 가장 잘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
반복적인 원한을 품으면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다큐 프로에서 어느 베트남 장교 고옌팻레이의 증언에 따르면 “증오심 없이는 싸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기 떄문이다. 동료가 죽어 나갈 때 증오심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싸울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하는데 더구나 증언자는 “죄책감도 없고 악몽도 안꾸었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증오가 증오를 낳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Dhp3)
반복적인 원한을 품으면 적의가 그 사람들에게 일어 날 때 진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에서 동료가 피를 흘리거나 죽어 나갈 때 눈이 뒤집힐 것이다. 그래서 증오의 감정이 극에 달하여 끔찍한 보복을 하게 된다. 이는 전쟁의 비극이다.
베트남 사람들을 전부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다큐에서 또 한사람의 증언이 있다. 제놋 마을의 주민 ‘퀸덧아이’의 증언이다.
“처음에는 베트남 사람들을 전부 베트콩으로 몰았어요. 한국군은 그들을.... ”
(‘퀸덧아이’의 증언, 어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전쟁 민족의 전쟁이야기 2부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
증언자에 따르면 처음 한국군이 실수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베트남 사람 모두에 대하여 ‘베트콩’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남베트남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다고 보여 진다. 남베트남의 경우 도시만 정부의 통제권역에 있었을 뿐 도시 외곽은 모두 베트콩의 통제권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 밖에 외곽에 있는 마을사람들 모두 베트콩으로 오인하고 작전을 편 것이라 보여진다. 그 결과 증언자의 말대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증오심 없이는 싸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자라도 전쟁터에서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 죄책감 없이 살륙을 하는 것은 증오심 때문일 것이다. 동료가 베트콩에 무참하게 살육당했을 때 이를 보복하는 것이다. 이는 증언자가 말한대로 “증오심 없이는 싸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 전쟁을 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는 소설로 쓰여지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결같이 전쟁에 대하여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인간성이 말살되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오밤중에 듣는 처절한 노래 “외로운 사나이가~”
베트남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술취한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이다. 그 아저씨는 밤만 되면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오밤중’에 불렀다.
잠결에 듣는 그 아저씨의 노래는 처절해 보였다. 그 때 당시 유행하였던 배호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낮은 저음으로 시작 되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주로 불렀다. 술이 잔뜩 취해 달동네 산동네라 불리우는 막다른 골목의 계단에 앉아서 부르는 배호 노래를 들으면 배호 보다 더 잘 부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젖까지 사용하여 부르는 노래 소리가 너무나 처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네사람들 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월남 갔다 와서 사람이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때 당시 그 아저씨는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항상 검은색 야전잠바를 입고 있었고 특별한 직업이 없었는지 낮이고 밤이고 항상 집에만 있었다. 네모난 얼굴에 짙은 눈썹으로 다부진 체격이지만 늘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험상굿게 생겼지만 마음씨만은 착해 보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때 보면 반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눈은 동공이 풀려져 있어서 퀭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밤만 되면 노래를 불렀다. 술이 거나 하게 취해서 그 당시 유행하던 배호 노래를 멋드러지게 부르는 것이었다. 목젖까지 이용하여 “외로운 사나이가~”라고 부를 때 매우 처절하게 들렸다. 아마도 월남에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하다.
이렇게 월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술자로 간 친척아저씨, 조카뻘 되는 친척, 그리고 배호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 아저씨 이렇게 세 가지이다.
헬기로 물을 받아 샤워하는 것을 보고
월남은 우리가 목숨걸고 지키고자 했던 땅이다. 그러나 월남은 허망하게 패망하고 말았다. 미국이 막대한 물량과 50만명이 주둔하고 수백차례 북폭을 하였음에도 월남이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다큐에서 어느 증언자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미군은 헬기로 물을 받아 샤워를 하더군요. 미국이 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 시기를 몰랐을 뿐이죠.
(번역가 ‘응웬반딘’ 의 증언 , 어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전쟁 민족의 전쟁이야기 2부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
증언자에 따르면 헬기로 목욕물을 수송해 와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 하였다고 하였다.
미국의 막대한 물량공세
세계최강의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면서 가공할 폭격을 하였다. 증언자에 따르면 1965년 존슨의 베트남 폭격 승인으로 인하여 하노이에 200번 폭격이 있었다고 한다. 전폭기로 매일 폭격하다 시피 하였는데 수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막대한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이 승리 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이데올로기 보다 외세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민족주의에 있었다고 본다. 이는 다큐프로에서 ‘호치민루트’에 대한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젊은 여인이 총을 매고 벼를 베는 장면
1968년 전쟁이 본격화 되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으로 군수물자를 공급하였다. 북폭으로 수만명이 죽어 나가고 땅은 황폐 해졌지만 엄청난 물자가 남으로 운반 된 것이다. 주로 지하기지에서 만든 것들이다. 그런데 다큐에서는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젊은 여인이 총을 매고 벼를 베고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생산방식에 의존하면서 세계최강 미국에 맞선 것이다.
지원자들은 호치민 루트를 따라
그리고 남쪽으로 파견할 지원자를 모집한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지원자들이 호치민 루트를 따라서 남하하였다.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는 ‘산악이나 정글 지대의 작은 길들로 형성된 정교한 통로연결망’을 뜻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기간에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그리고 라오스·캄보디아 사이의 연락과 수송 등에 이용했다.”고 한다. 이런 호치민 루트를 따라 막대한 군수물자와 지원자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베트남전의 분수령 구정대공세
베트남전에서 흔히 듣는 말중에 ‘구정대공세’가 있다. 1968년 1월에 일어난 일이다. 호치민루트를 따라 내려온 북쪽지원자와 남쪽 베트콩이 구정을 기하여 대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 구정대공세로 인하여 대부분의 남베트남 도시와 미 대사관이 타격을 입었다.
다큐프로에서는 구정대공세 당시 북베트남지원자들의 활약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프로가 북베트남 입장에서 제작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데 인상적인 장면은 여자도 총을 들고 싸우는 장면이다. 심지어 포탄에 장전 하는 장면 까지 보여 준다.
그런데 다큐프로에 따르면 이 구정대공세가 베트남전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 전역에서 반전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 마음속에서는 전쟁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무의미한 전쟁에서 더 이상 젊은이들의 피를 보지 않기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정대공세를 기점으로 하여 상황은 북베트남에게 유리하게 돌아 간다. 결국 북베트남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연장전 구정대공세 이후 파리에서 회담이 열리는 등 전쟁종식을 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1969년 호치민의 사망 등으로 인하여 최초로 미군 2만5천명이 철수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소모전양상이었다. 이후 1972년 크리스마스 대폭격이 있었지만 동시에 파리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전쟁양상에 대하여 다큐에서는 ‘연장전’ 이라 하였다. 이미 큰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서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소모전을 말한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휴전회담을 하면서 서로 소모전을 벌인 것과 같은 양상이다. 그러나 이런 연장전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1973년 3월 파리조약 체결로 인하여 미군부대가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 되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입장에서는 수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40년 동안 길고 긴 내전이 종식된 것이다.
남베트남에는 군사정부가 세워졌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개칭되었다.
실상을 알고 나서
지금은 인터넷시대이다.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다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몰랐던 사실을 알 수도 있다. 특히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동영상이 그렇다. 디스커버리채널의 ‘어느 민족의 전쟁(Indochine a people’s war)’의 2편 ‘그 후 미국인들이 왔다(Then the Americans came)’도 그 중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데 디스커버리채널에서 접한 월남전 실상은 충격적이다.
특히 한국군이 저질러졌던 끔찍한 행위는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이런 사실은 공중파에서 볼 수 없고 공식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프로가 베트남민족주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국군은 다큐에서 표현 된 처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투부대의 활약상에 대하여 탁월한 전과로 보고 있고 또한 다른 나라에서 달성 하짐 못한 높은 공적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전쟁은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자들
그런데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 하여 육체적또는 정신적 피해를 입은 군인들을 말한다. 이런 사실은 수 없이 소설로 영화로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 잔혹한 전쟁의 반대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전쟁피해자들을 주변에서도 보았다. 월남에 기술자로 파견되었다가 가정이 파탄난 친척아저씨, 그리고 밤마다 술에 취해 퀭한 눈으로 배호노래를 처절하게 부르던 이웃사람이다. 이렇게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트남사람들에 대한 피해이다. 이는 고스란히 증언을 통하여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대통령의 사과
그래서일까 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된 이시대에 대통령이 베트남에 국빈자격으로 방문하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것이다. 2001년 김대중대통령은 최초로 과거에 대하여 사과발언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도 우회적 사과를 하였다. 이명박대통령은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 이들 대통령들은 모두 호치민묘소를 방문하여 참배하였다.
2013년 9월 국빈자격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호치민묘소에 참배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말은 여러모로 정치적 해석을 낳는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헌화와 참배는 행동으로 보여준, 그 자체가 강한 화해의 제스처다. (중앙일보 2013-09-10)”라고 하였다.
박 대통령, 호찌민 묘소 참배(중앙일보 2013-09-10)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역대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하여 호치민 묘소에 참배하였다는 것은 비록 그 행위가 정치적인 것이라 하여도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과거의 행위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진 것은 베트남 국민에게 아픔을 준 것에 대한 반성이라 볼 수 있다.
5만명의 베트남 신부
현재 우리나라에는 5만명에 달하는 베트남 신부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베트남에 대하여 ‘사돈나라’라고 하였다. 이처럼 다문화 시대에 있어서 베트남 신부가 가장 많다. 모두 사이공이 함락 된 후 태어난 세대들이다. 그런 베트남 신부의 국적은 옛날 월남이 아니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다. 이처럼 오래 전에 전쟁이 끝났음에도 한국에서는 베트남참전 기념탑이 설립 되고 있다.
용사들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 곳에도 베트남 참전 기념탑이 있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마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념탑은 2009년에 만들어졌다. 1964년부터 1973년 까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이바지 한 공로로 세운 것이라 한다. 기념탑 뒤에는 시가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들을 전선으로 떠나보낼 때
가족도 눈물을 흘렸지만
가난했던 조국은 더 가슴이 아팠노라
살아 돌아온 전우들을 맞는 기쁨보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님들 생각에
조국은 한번 더 가슴이 찢어졌노라.
그대들은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파병 용사들
그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국위선양과 경제신장의 초석이었나니,
목숨바쳐 싸워보지 않고서
어찌 섣불리 애국을 말하랴.
그대들의 충훈을 밑돌 삼아
이만한 나라가 세워진 것이노라
세월이 흘러 흘러
전우들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 기념탑이 유일한 증인으로 남을 때
님들이이야말로 진정 영웅이었노라고
역사는 거듭거듭 기록하리니
오, 피를 나눈 전우들이여,
베트남 참전 영웅들이여!
그대들의 무덤은 겨레의 품
조국은 님들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김대규 詩 이영락 書
(안양 베트남 참전 기념탑)
시에서 파병용사의 공훈에 대하여 ‘국위선양과 경제신장의 초석’이라 하였다. 월남전에서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탑을 만든 것이다.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나니
전쟁은 끝났다. 남아 있는 것은 비문 밖에 없다. 한편에서는 국위선양과 경제신장의 초석이라 하여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한다. 또 한편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전쟁은 각자 서 있는 입장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증오심 없이는 싸울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한 자는 고통속에서 잠든다.(dhp201)”와 같은 게송이 있듯이 듯이 원한은 원한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증오는 증오로 풀리지 않는다. 증오를 놓아 버렸을 때만 풀리는 것이다.
“우린 그들을 용서 했어요”
그래서일까 다큐 말미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프랑스와 전쟁중이거나 미국과 전쟁 중일 때 적들편에 선 사람들이 있었어요. 떠난 사람들 보다 남은 사람들이 더 많죠. 우린 그들을 용서 했어요.”
삶이 고되고 힘들지만 이곳이 우리들 땅이죠. 미국은 이 나라를 점령하고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화해하려고 합니다.
미국이 한 짓을 용서하고 이 나라를 재건하면서 평화를 되찾을 겁니다.
(사이공에 거주 중인 ‘구옌반드윈’의 증언)
베트남사람들은 적들편에 선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화해 하려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큐 프로에서 포로가 된 미군조종사가 있었다. 큰 덩치의 조종사를 아주 작아 보이는 베트콩이 총으로 몰고 가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데 주변의 베트콩들이 몰려 들어 폭행하려 한다. 그러자 책임자가 이를 말리면서 “우리가 미워 해야 할 것은 그들의 정책이지 포로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우리가 증오하는 것은 전쟁광들이다”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베트남사람들이 미워한 것은 ‘잘못된 미국의 정책’과 ‘전쟁광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베트남 사람의 증언으로 보았을 때 베트남전 당시 한국의 행위도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 되리라 본다.
2014-02-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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