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북한과 중국은 왜 끈끈한 관계일까? 지금은 역사공부 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22. 13:18

 

 

북한과 중국은 왜 끈끈한 관계일까? 지금은 역사공부 할 때

 

 

 

보난자(bonanza)로 해달라고

 

통일대박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취임후 일년 만에 처음 열린 기자 회견에서 대통령이 통일이 되면 대박이다 라는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명하복의 공무원들은 그 동안 사용하지 않던 통일이라는 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대박을 터뜨릴지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대박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도 될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대박(大舶)’이라는 말은 큰 배,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설명되어 있다. 대박이 큰 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사전을 통해서 안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박은 큰 것 한방을 뜻한다. 그래서 주로 주식시장이나 경마장, 또는 도박장 등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대박이라는 말은 사행심을 조장하는 곳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부터 이제 대박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언급한 대박에 대한 영어표현은 무엇일까?

 

최근 뉴스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대박에 대한 영어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까지 도박장 용어인 잭팟(jackpot)’으로 사용하였으나, ‘광맥의 개발, 거대한 부의 원천을 의미하는 보난자(bonanza)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누구나 통일을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통일의 노래도 있다. 그러나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나오고 난 이후 인터넷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대박~”으로 패러디 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통일이 우리 뜻대로 쉽게 되지 않음을 말한다. 한반도를 둘러 싼 지정적, 역사적 요인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말한다.

 

허동현 교수의 현대사특강을 듣고

 

사람들은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특히 남북으로 분단된 원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근 EBS에서 특강을 들었다. 허동현 교수가 진행한 한국 현대사 특강이다.

 

 

 

허동현 교수의 현대사특강, EBS

 

 

강연을 들어 보니 이제 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인터넷검색으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강연을 통하여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다. 교과서 실리지 않은 역사적 사실  두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첫 번째 이야기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이다. 전세계적으로 유일하다. 그것도 이데올로기가 달라 분단 되어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하동현 교수는 EBS특강에서 일제가 죄값을 받아 분단되어야 하나 대신 우리가 일제의 죄값을 치루었어요.”라고 말하였다. 일본이 분단 되었어야 하나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 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복은 달콤 하다기 보다 쓰디쓰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8선을 누가 그었을까?

 

스탈린이 마음 만 먹었으면

 

특강에 따르면 이제까지는 미국이 분단을 주도 했다는 것이 통설이라 한다. 이는 8 14일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미국이 소련에게 분할점령해서 일본국을 무장해제시키자고 제안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그 다음날 스탈린이 OK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단지 제안을 해 본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를 스탈린이 선뜻 받아 들인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분단의 비극이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스탈린이 미국의 분할제안을 받아 들인 것일까?

 

사실 스탈린이 마음 만 먹었으면 남북한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그때 당시 1000키로 떨어진 오키나와와 주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다음날 두만강을 건넜다.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 온 것은 9 18일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혹카이도 북부를 얻기 위하여 남한과 맞바꾸자고

 

그렇다면 왜 스탈린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일까? 이것이 미스테리이다. 그런데 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허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혹카이도의 반쪽, 사할린과 혹카이도 사이의 해협을 미국의 감시를 안받고 나올 수 있어요. 그것을 얻어 낼려고 미국이 38선으로 나누어 무장해제를 하자는 제안을 받아 들인 거에요.”

 

(허동현 교수,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3강- 광복, 분단, 대한민국.., EBS 2014-02-13)

 

 

소련이 미국의 분할점령요구를 받아 들인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라 한다. 소련이 혹카이도 북부를 얻기 위하여 38선 이남에 대하여 미국의 점령을 허용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월 18일 한반도에 들어 오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사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45 9 12일부터 열린 런던외상회담이라 한다. 특강에 따르면 이 회담으로 사실상 한반도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고 한다.

 

런던외상회담은 승전국들이 전후 세계질서에 대하여 논의한 회담이라 한다. 하지만 말이 세계질서이지 사실상 전리품을 나누어 갖는 회담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중에 한반도와 관련된 것이 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두 가지 제안을 하였다고 한다. 대륙을 지배한 육군국이었던 소련에게 있어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필요 하였는데, 리비아의 항구도시 트리폴리홋카이도 북반부통치권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런 제안을 거부한다. 지중해와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전에는 미국과 소련이 연합국으로서 싸웠으나 승전국이 되면서 이제는 서로 적대시하게 된 것이다.

 

대마를 잡기 위하여 버리는 돌, 사석(死石)

 

소련의 제안은 거부 된다. 그러자 소련은 북쪽에 단독정부수립을 지령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최근 밝혀 진 것이라 한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극비문서가 공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래에는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 있고 이승만에 있다고 보았으나 문서가 공개 되면서 남북 분단이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처럼 한반도의 운명이 강대국의 전리품처럼 전락한 것에 대하여 허동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혹카이도 반쪽 그거 하고 교환될 가치밖에 남들에게 안보였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미소 두나라가 바둑을 두고 있다고 보세요. 바둑을 두다 보면 대마를 잡기 위하여 버리는 돌이 있어요. 사석! 그게 우리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허동현 교수,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3강- 광복, 분단, 대한민국.., EBS 2014-02-13)

 

 

허동현 교수에 따르면 분단 당시 한반도는 사석(死石)’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원이 없는 38선 이남은 혹카이도 북부 정도의 지정학적 가치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분할점령제안을 받아 들인 것이다. 이것이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첫 번째 이야기이다.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두 번째 이야기

 

허동현 교수는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두 번째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북한과 중국의 특수 관계이다. 비록 허교수가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강연을 들어 보니 역사교과서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알려 주지 않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과 중국은 그토록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왜 북한과 중국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까?

 

종종 TV를 보면 북한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 된 것이다. 과거 북한 지도자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서로 포옹하며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는 보통이상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정부수립과 북한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허동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46년 사월에 국공내전이 터진 거에요. 처음에는 팔로군이 이겼어요. 국민당군의 주력은 운남성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미국이 수송기로 이송을 해 주었어요.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받은 군대와 붙으니까 팔로군은 기본적으로 농민군이 주력이에요 상대가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처음에 졌어요. 그래 쫒겨 간거에요. 하얼빈 북쪽으로 쫒겨 가고 대부분 주력은 어디로 갔느냐? 북한으로 넘어 옵니다.

 

그때 북한은 팔로군의 중국공산군의 후방기지가 되고, 보급기지가 되고, 중국내전 때 또한 병참기지 역할까지 한거에요. 거기서 훈련받고, 재교육받고 해가지고 다시 밀고 올라갔어요. 그런데 중국국민당군이 부패 해가지고 상대가 못되는 거에요. 그래서 쫒겨 가기 시작한 거에요.

 

(허동현 교수,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3강- 광복, 분단, 대한민국.., EBS 2014-02-13)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런 사실은 역사교과서에서도 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들어 본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중국에서 내전이 발생하였을 때 북한이 중국공산당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놀랍다. 더구나 보급기지가 되고, 병참기지가 되어 힘을 비축한 다음에 부패한 국민당군을 몰아 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정부수립에 있어서 북한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정부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북한

 

이 부분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였다.

 

 

국공내전기간 북한의 개입과 지원 

 

국공내전에서 만주는 양측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곳이었고 결국 만주에서의 승패가 전쟁 전체의 승부를 갈랐다, 라고 평합니다. 당시 만주에는 30년대이후 일본이 건설한 막대한 공업시설이 있었고 만주의 공업력, 전력, 철도는 중국 전체를 합한 것의 몇배에 달했습니다.(43년 기준으로 전체 석탄생산량의 49.5%, 제철은 87.5%, 강재 93%, 시멘트 66%, 전력 72%, 철도의 50%)  

 

모택동은 45 6 11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동북이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토대를 확보한 셈이고, 우리의 승리는 결정된 것이다."라고 연설하였고, 장개석 역시 "동북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 "우리가 동북을 탈취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화된 국가로 발전하기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주를 놓고 양자의 갈등과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모택동은 만주에 20명에 달하는 중앙위원을 비롯해 간부 2만명과 최정예 병력 20만명을 투입합니다. 장개석 역시 "동북행영 정치위원회" "동북보안사령부"를 설치하여 웅식휘를 행영주임으로, 두율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열하성을 통해 최정예를 자랑하는 미식 기계화사단을 비롯해 13 7천명을 투입합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죠

 

만주를 놓고 양자간의 치열한 쟁탈전은 단순히 중국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소는 물론이고 남북한 역시 무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주를 어느쪽이 차지하는가는 남북한 공히 국가안보에서 중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만약 만주를 국부군측이 차지한다면 북한은 양면에서 포위당하는 셈이고 반대로 공산군이 승리한다면 남한이 포위되는 것이었죠특히 북한은 만주에서의 승패가 자신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양측의 전투 상황을 민감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죠

 

따라서 김일성은 "조선혁명의 입장에서 조선은 동북지방이 장개석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결단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이승만도 "중국이 공산주의 진영에 굴복하게 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발언합니다. 북한의 관변언론지인 "민주주의"에서는 "미국은 해로와 공로를 통해 수십만명의 국민당군을 만주로 수송하여 중국의 내란을 부추기고 중국문제에 간섭하고 있다"라며 맹비난을 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동시기 심각한 내부 혼란으로 제코가 석자이던 이승만이 장개석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였지만김일성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빨리 정권을 공고화할 수 있었던 북한은 국공내전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중공측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만주에는 중일전쟁 당시부터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던 팔로군계열의 동북민주연군을 비롯해 십만이 넘는 좌파계열의 각종 민간 무장세력이 있었고 이들중에는 만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도 대거 포함되어 국부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김무정, 박효삼, 박일우 등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인데 동북에서의 전투과정에서 이들은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48년 심양전투 이후에는 김웅, 방호산의 제1지대는 인민해방군 제166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인원수도 12000명에 달하는 정규사단이었습니다. , 3지대는 제164사단 491여단에 편입되었고 박일우, 이익성의 제5지대는 제156사단과 제141사단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약 140만명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국공내전시기 공산측에 참전한 조선인은 총 62,942명에 달하였으며 이는 전체의  5%에 달하는 숫자였습니다. 이들의 참전은 만주에서 중공측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임표의 제4야전군 산하에서 만주부터 저 남쪽 해남도 공략에까지 투입되었다가 국공내전 말기에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김책이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이들의 귀환을 요구함으로서 49년 중순부터 북한으로 귀환하여 북한군의 중핵이 되었으며 이후 남침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국공내전 초반 만주에서는 압도적인 국부군의 공격으로 공산군은 도처에서 연패를 당하고 북만주의 중소국경까지 밀려나갑니다. 또한 남만주에서도 압록강, 두만강 인근까지 밀립니다. 따라서 국부군과 북한 경비대간의 충돌도 여러차례 있었는데,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46~47 5월까지 국부군은 16차례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었으며 17차례 사격을 가했다고 합니다쌍방의 교전으로 국부군 6명이 전사하고 북한측은 4명 전사, 10명이 부상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북한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어쨌든 만주에서의 내전이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시 공산측은 만주에서 전략적 상황이 불리하자 공산당 동북국은 북한을 남만주작전을 지원하는 후방기지로서 이용할 것을 방침으로 결정합니다. 1946년 봄 동북민주연군 부총사령관인 주보중은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을 만나 북한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김일성은 전력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7월에는 평양에 조선주재 동북국 판사처를 설치하여 부상자 후송, 전략물자의 이전남만주와 북만주간의 교통, 통신선 확보, 각종 물자 구입 등을 추진하게 됩니다또 남포, 신의주, 만포, 나진에 4개의 분판사처가 설치됩니다. 이 판사처는 그동안 아무 체계없이 마구잡이로 접촉하던 양측의 혼란을 정리하였고 국공내전 말기인 48년말 요심전역의 승리로 만주를 공산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더이상 북한의 지원이 필요없게 되자 2 7개월만인 49 2월 폐쇄됩니다

 

1946년 가을에 남만주일대에 대한 국부군의 대규모 토벌전으로 임표의 동북민주연군이 연전연패를 당하자 단동과 통화에서 철수하면서 18천여명의 부상자, 후방지원 인원과 2만여톤의 전략물자을 북한으로 철수시킵니다. 이들에 대한 치료와 지원은 신생 북한정권으로서는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으나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총력을 기울여 이들을 지원합니다

 

46년에 국부군이 심양, 장춘을 점령하고 주요 철도와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서 중공군은 남만주와 북만주로 분리된채 여러 해방구들이 고립됩니다. 따라서 중공측은 물자는 물론 병력 이동도 불가능하게 되어 국부군측에 의해 각개격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북한을 통로로 활용함으로서 이런 전략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열거한다면, 북한은 일제시대 일본군이 남겨둔 열차 2천대분의 군수물자를 유무상으로 중공군에게 제공하였고, 47년에는 북한-중공간에 "중국동북물자북조선통과협정서"가 체결되어 47 10 25일부터 1년간 나진, 웅기항을 통해 총 1,435 4천톤의 물자를 중공으로 수송키로 합니다. 또한 국부군에 의해 고립된 만주내 여러 해방구에 대해서 북한은 남만주, 북만주를 연결하는 이동로로서 인력은 물론 식량과 석탄, 의약품, 소금, 각종 공업품에 대해서 48년 한해동안만도 30만톤이상을 수송하였습니다여기에는 420톤의 화약, 200톤의 초산, 15만쌍의 고무신 등도 있었는데 고무신은 김일성이 직접 북한의 모든 신발공장에 명령하여 생산토록 하였습니다. 이 물자들은 만주만이 아니라 이후 화북과 화동, 화남 등의 전역에서도 사용됩니다

 

당시 중공측의 북한내 교통로는 두가지로육상교통로는 안동(단둥)->신의주->남양->도문으로 연결하는 선과 통화->집안->만포->도문을 연결하였고 해상교통로는 대련->남포, 나진을 연결하였습니다. 특히 해상교통로는 산해관이남의 중공 중앙과 만주를 연결함으로서 만주에서 고립된 중공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연결로였습니다.

 

국부군 제184사단 3,800여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개석은 즉시 명령을 내려 이들을 토벌하였는데 토벌군에게 쫓긴 이들 반란군은 조중국경까지 쫓겨갑니다. 김일성은 북한군 제2사단장 강신태에게 명령하여 이들이 북한내로 들어오도록 조치합니다따라서 전멸직전에 몰렸던 이들은 안전한 북한으로 들어와 한숨 돌린후 부대를 정돈하여 다시 싸울 수 있게 됩니다

 

당시 우리정부의 공보처에서 발간한 "소련군정 시말"에서는 "1947 11월부터 다수의 화물열차들이 자동차, 고사포, 야포, 기관총 등 무기를 운송하고 있으며 그 수송량은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자동차로 운송한 물량도 적지 않다. 또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중공군 지원을 위해 군의를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없자 각도에서 20명씩 차출하여 교육후 중공으로 파견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공측 역시 북한의 지원 댓가로 5만톤의 식량을 제공합니다. 이는 당시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북한에게는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습니다이렇듯 국공내전기간 쌍방은 매우 가까워졌고 북한은 중공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철저히 해주었습니다.  

 

한편으로, 사실 이런 북한의 지원은 김일성 단독으로 결정했다기 보다 소련의 협조와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8 12 26일에야 소련군은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북한 주재 소련군과 소련 고문들은 북한의 중공측 지원에 적극 동의하였고 연해주에서 북한을 거쳐 북만주의 해방구로 대량의 일본군 무기와 탄약, 식량, 의약품 등을 제공하였습니다. 만주에서 중공의 승리는 이들의 지원없이는 실상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물론 국부군측도 미국의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이런 물적 지원외에 정규군을 파견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개입하였을까이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북한이 최소 10만여명의 병력을 만주로 파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또 당시 국민당정권 부주석이었던 손과도 "소련이 동북에서 10만이상의 북한군을 파견하여 공공연히 참전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여기에 미정보부에서도 1946년 가을부터 소련군에게 훈련받은 북한군이 기차와 트럭을 통해 만주에 투입되고 있으며 그 숫자는 함경남북도에서만 3만명이상이며 평안남북도에서도 숫자미상의 인원이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이 정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나 근거가 뒷받침된 것이 아닌 단지 추측에 의한 것이며 단지 북한에 입북한 중공군의 이동을 착각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선 당시 북한은 그와 같은 대병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고 만약 몇만에 달하는 북한 정규군이 압록강을 도강했다면 틀림없이 국부군과 충돌했을 것인데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 소련측 문서에서도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다는 어떤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북한이 실제로 병력을 파견했다면 중공측이 굳이 이를 숨길 이유가 없음에도 어떤 기록이나 문서, 회고록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49년 미국이 발표한 "중국백서"에서도 북한군의 참전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설령 중공군에 포함되어 "지원군"의 형태로 참전한 이들이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정규군을 파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어쨌든, 만주를 놓고 국공 양측의 치열한 전투에서 북한의 직간접적인 개입은 중공측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런 북한의 지원이 1년뒤 벌어지는 한국전쟁에서 모택동이 참전을 결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국공내전에서의 북한의 역할은 한국전쟁과도 뗄 수 없는 것임에도 그다지 관심사가 되지 못한채 대부분의 관련 서적에서도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 주요 참고문헌 

1)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기원, 김경일 저 

2) 국공내전 시기 북한-중국간의 관계, 이종석 저 

3)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저 

4)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저 

5) 중국백서, 이영희 저 

6)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저 등등... 

 

 

([중국근대사] 국공내전기간 북한의 개입과 지원 )

 

 

이글은 중국근대사에 대한 것이다. 국공내전 기간 동안 북한의 개입과 지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EBS특강에서 허동현교수가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그리고 보다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국공내전에서 북한이 직간적적으로 개입 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간접적으로는 북한이 중국공산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면서 만주를 장악함에 따라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또 직접적으로는 조선인 의용군이 팔로군으로서 내전에  참전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 팔로군 출신 조선의용군은 북한군의 중핵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내전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북한군이 6.25당시 참전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밀릴 때 중공군의 개입이 있었다. 이렇게 중국이 개입한 이유는 지정학적 요인도 작용하였겠지만 허동현교수의 강연과 위 자료에 따르면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중국정부 수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북한을 돕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번 하동현 교수의 EBS역사 특강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는데

 

종편방송에서 어떤 이는 도둑같이 오는 것이 통일이라 하였다. 이는 독일통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역사특강에 따르면 이미 오래 전에 함석헌님이 한 말이라 한다. “광복은 도둑처럼 찾아 왔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통일대박론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한반도에 도둑처럼 통일이 찾아 올 수 있을까?

 

통일대박이라 한다. 이 때 대박은 영어로 잭팟(jackpot)이 아니라 ‘보난자(bonanza)’라 한다. 그런 대박은 아마도 ‘흡수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반도 주변의 지정학적 관계뿐만 아니라 역사적 관계까지 염두에 둔다면 흡수통일은 요원해 보인다. 북한 뒤에 중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허동윤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국제전쟁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사망한 숫자를 보면 한국군 및 유엔군 50만, 북한군 52만, 중공군 90만이 죽었다고 한다. 이 중에 중공군의 사망숫자에 주목한다.

 

허교수에 따르면 중국내전 당시 국민당소속도 상당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이 안가는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낸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90만명이 한국전쟁에서 죽었다라는 사실이 통일에 있어서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역사공부 할 때

 

허교수에 따르면 지정학적요인은 변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대신 요즘은 지경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경제적인 것을 말한다. 이는 G2로 부상한 중국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허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통일 될 뻔한 것을 막은 것이 누구죠? 중국이죠. 그러면 그렇지 않게끔 중국을 설득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해요. 양쪽에 다 해가 안된다는 현명한 외교전략이 필요하죠.”

 

(허동윤 교수,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4강- 다시 보는 6.25전쟁, EBS 2014-02-20)

 

 

허교수에 따르면 통일에 큰 변수가 중국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명한 외교전략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약육강식의 시대에 영원한 적도 없고 우방도 없어요. 있는 건 뭐에요. 국익이에요. 자기나라에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 우리도 마찬가지고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원한 적은 중국을 말하고, 영원한 우방은 미국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거의 통일을 이룰 뻔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더구나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소모적인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영원한 적인 것이다.

 

반면 미국은 한국이 UN의 합법적 정부로 탄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 한국전에 참전 하여 피를 흘렸다. 다시는 침략하지 못하도록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까지 체결하였다. 그 결과 한국은 60여년간 전쟁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번영하여 지금은 OECD회원국이 되었다. 이 모두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우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본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미국은 영원한 우방인 것이다.

 

그러나 국익앞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한다. 이는 과거 조선말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명한 외교전략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두 거대국가에 대하여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익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북한과의 관계 역시 국익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G2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다른 나라 보다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통일대박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그래서 허동윤 교수는 이제 국민들이 역사 공부 할 때라 하였다.

 

 

 

2014-02-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