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암기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왜 외워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3. 12:17

 

 

암기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왜 외워야 하는가?

 

 

 

불자의 충분조건과 필요조건

 

불자에도 종류가 있다. 무뉘만 불자인 사람, 정서적 불자인 사람, 기도만 하는 불자, 참선수행하는 불자 등 그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불자인지 아닌지 가르는 기준은 수계를 하였는지의 여부로 가를 수 있을 것이다.

 

수계를 한다는 것은 불자가 됨을 말한다. 수계하면서 연비를 하고 법명을 받으면 정식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불자가 되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마하나마경에서 마하나마가 “세존이시여, 어떻게 재가신도가 됩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이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S55.37, A8:25)”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오계준수 하는 것이 불자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충분조건이라면 오계준수는 필요조건이라 볼 수 있다. 오계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자가 되면 오로지 불법승 삼보에 믿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다른 것에 의존 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법승 삼보 가운데 가장 현실적으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가르침(dhamma)’이다. 그런 가르침인 경전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접할 수 있다.

 

머리 속에 집어 넣어야

 

경전에는 부처님 말씀이 가득 실려 있다. 경전을 여는 순간 부처님과 만나는 것이다. 이런 경전을 연다는 것은 부처님과 가르침, 이렇게 이보(二寶)와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경전을 많이 사 놓았어도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부니까야를 구입하면 책장에 가득한데 열어 보지 않으면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 하였다. 책장에 꼽혀 있는 초기경전을 열어 보지 않으면 구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열어 보았을 때 그 책은 보배가 된다. 그런데 보배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전을 열어 보았를 때만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외워서 머리속에 집어 넣으면 보배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과 가르침이 자신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경전은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다. 소설처럼 한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 보다 보면 외게 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경전은 외워야 가치가 있다. 특히 가르침을 짧은 구절로 요약된 게송은 외위기 쉽도록 구성되어 있다. 가르침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게송으로 요약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르침에 대한 핵심, 요즘 말로 엑기스만 모아 놓아 것이 법구경이다.

 

법구경은 423개의 아름다운 게송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주옥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구족계를 받으려면 필수적으로 법구경을 다 외운다고 한다.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이

 

음식은 씹어야 맛이 나고 경전은 독송해야 맛이 난다. 더 맛이 나게 하려면 외워야 한다. 그러나 외운다고 해서 가르침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을 실천해야 내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Bahum-pi ce sahita bhāsamāno,   바훔 삐 쩨 사히땅 바사마노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나 딲까로 호띠 나로 빠맛또
Gopo va g
āvo gaaya paresa,   고뽀 가워 가나양 빠레상
Na bh
āgavā sāmaññassa hoti.      나 바가와 사만냣사 호띠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 (dhp19)

 

 

법구경 19번 게송을 보면 외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단지 경전을 외는 것으로 그친다면 남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남의 소를 세는 사람은 다름아닌 고용인을 말한다.

 

오너와 고용인의 차이

 

회사에는 사장과 직원이 있다. 사장은 회사를 소유하고 있어서 오너(Owner)라 한다. 회사가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원은 월급생활자들로서, 요즘말로 월급쟁이이기 때문에 고용인에 지나지 않는다.

 

월급쟁이들은 회사에 그다지 충성을 하지 않는다. 시간 되면 퇴근 하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철저하게 쉰다. 그러나 오너의 입장에서 본다면 직원들이 더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해주길 바라고 주말에도 나와서 일해 주기를 바란다. 직원들이 자신의 마음처럼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회사가 자신의 것도 아닌데 굳이 늦게 까지 남아 일하고 더구나 주말근무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사장과 직원의 차이다.

 

진리의 맛은 어떤 것일까?

 

남의 소를 세는 목동은 요즘말로 하면 고용인이다. 낮에 소를 돌보는 목동은 아침에 일찍이 소들을 맡아서 저녁에 그들을 세고 하루의 임금을 받고 주인에게 돌려 준다. 그러나 목동은 우유 등 유제품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경전을 단지 외우는 것에 그친다면 진리의 맛을 모른다. 그런 진리의 맛은 어떤 것일까?

 

게송에서는 많은 경전을 외워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목동이 소의 숫자만 셀 뿐이지 소로부터 얻어지는 우유나 버터 등 유제품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DhpA.I.158에 따르면, 이들이 소의 주인으로서 유제품을 즐기는 진리탐구의 참여자가 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계행을 지키고, 경전을 배웠지만,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새김을 잃고 사는 수행승에게 말한 것이다.

 

(각주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전재성님)

 

 

남의 소를 봐주는 목동은 소의 숫자만 셀 뿐이다.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소가 아니기 때문에 소에서 나오는 유제품을 즐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경전을 외우는 것에 그친다면 역시 유제품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경전을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다름 아닌 수행을 말한다. 수행을 통하여 선정에 들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였을 때 (magga)’(phala)’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넘겨 받은 소들로부터 유제품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침을 실천하였을 때 ()’를 이루어 열매()’를 맺어야 함을 말한다.

 

공부의 의무와 통찰의 의무

 

게송에서는 경전외우기 보다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는 게송의 인연담을 보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인연담에 따르면 공부의 의무통찰의 의무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무것을 말할까? 공부의 의무는 다름 아닌 경전을 배우고 외우는 것을 말한다. 통찰의 의무는 실천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인연담에 따르면 두 의무에 대하여 대조적인 길을 가는 수행자를 소개 하고 있다. 한 수행자는 공부의 의무를 중요시하여 오로지 경전을 배우고 독송하고 외우는 일에 전념한다. 또 한 수행자는 경전외우기 보다 바로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 이렇게 각자 다른 의무를 수행한 결과 두 수행자는 각자 최고의 지위에 올라 섰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이 두 가지 의무 중에 어느 것을 더 높이 평가하였을까?

 

부처님은 공부의 의무를 다한 수행자에게 첫번째 선정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 이어서 두번째 선정을 비롯하여 여덟 가지 성취와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에 대해서도 묻자 역시 막힘 없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흐름에 드는 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통찰의 의무를 다한 수행자는 대답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찬사를 보냈다. 부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든 수행자가 통찰의 의무를 다한 것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지만 모든 경전의 말씀을 외운 수행자에게는 찬사의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한다. 설령 그가 사부니까야를 단 한 단어도 빠짐 없이 모조리 다 외웠다고 할지라도 통찰수행을 하지 않아 도와 과를 이루지 못하였다면 남의 소를 세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경전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게송과 인연담에 따르면 부처님은 통찰수행을 강조하였다. 가르침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었을 때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경전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가르침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외는 것부터 시작 된다. 특히 부처님 당시에는 더 그랬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요즘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이유

 

부처님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필기구가 없었다. 오로지 들어서 아는 것 뿐이었다. 누군가 법문을 하였을 때 노트와 필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잘 귀담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들은 내용을 기억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들은 내용을 기억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억한 가르침을 꺼내서 보고 또 보고 하는 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수행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라 본다. 부처님이 법문할 때 모두 주의 집중하여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초기경전에 보인다.

 

맛지마니까야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M77)’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일찍이 수행자 고따마가 수백 명의 대중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그 때에 그의 한 제자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그의 동료수행자가 무릎으로 살짝 건드리며, ‘존자여, 조용히 하라. 존자여, 시끄럽게 하지 말라. 우리의 스승이신 세존께서 가르침을 설하신다.’라고 말했다. 수행자 고따마는 수백 명의 대중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면, 그 때에 수행자 고따마의 제자들은 기침 소리나 헛기침 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 대중들은 ‘세존께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설하면, 우리들은 그것을 경청할 것이다.’라고 기대감으로 넘쳐 있었다.

 

(Mahāsakuludāyi sutta-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77,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수백명이 모인 대중 앞에서 가르침을 설하는 장면이다. 누군가 헛기침을 하였을 때 옆에 사람이 시끄럽게 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수백명의 대중이 헛기침 하나 없이 부처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세존께서 수백 명의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면, 세존의 제자들은 소란을 피우지 않고 기침소리도내지 않습니다.(M89”라 하였다.

 

가능한 많이 기억하려고

 

이처럼 수백명의 대중이 기침소리 하나 없었다. 그런 분위기라면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에 집중하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기억으로 설명된다.

 

부처님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노트도 없고 필기도 없었다. 더구나 검색만 하면 무엇이든지 찾아 낼 수 있는 인터넷도 없었다. 오로지 말씀을 잘 귀담아 듣고 기억하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나온다. 다음과 같은 아난다의 말이 있다.

 

 

[아난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 세상에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쌓아나가는 수행승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도 착하고, 중간도 착하고, 끝도 착하고,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추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청정한 삶을 설하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기억하고 언어로써 습득하고 정신으로 탐구하고 견해로써 통찰했습니다. 그는 잠재적인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부대중에게 원활하고 유창한 언어로써 가르침을 말합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러한 수행승이 이 고씽가쌀라 숲을 밝힐 수 있습니다.

 

(Mahāgosigasutta-고씽가 법문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2, 전재성님역)

 

 

아난다존자가 사리뿟따존자에게 한 말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모두 기억해서 저장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런데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다는 아난다는 고씽가 숲에 모인 부처님의 제자들을 칭찬하고 있다.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기억하는 것에 대한 찬탄이다. 이처럼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법문을 가능한 많이 기억하려고 노력하였다.

 

부처님도 강조 하신 기억

 

부처님도 기억을 강조 하였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Katamañca bhikkhave satibala: idha bhikkhave ariyasāvat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 vuccati bhikkhave satibala.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

 

(Balavitthatasutta -힘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4, 전재성님역)

 

 

이 경과 동일한 내용이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S48.10)’에도 실려 있다. 이는 오력중에 ‘염력(satibala)’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satinepakkena samannāgato)’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사띠(sati)’의 강력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였다.

 

기억이 지혜와 결합되었을 때

 

경에서 최상의 기억과 분별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satinepakkena’를 번역한 것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이라 하였다.

 

Satinepakkena‘Satinepakka + ena’로 분리 된다. Satinepakka는 다시 ‘Sati+nepakka’로 분리 할 수 있다. Sati새김또는 마음챙김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Sati의 제일의 뜻은 기억이다. 이는 빠알리어 사전 PCED194에 따르면 ‘memory; mindfulness’로 되어 있어서 ‘memory(기억)’이 제일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이를 마인드풀니스의 의미인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였다.

 

Nepakkaprudence의 뜻이다. Prudence신중, 현명함, 조심성의 뜻이다. 한자로서는 俊敏, , 로 번역되어 있다. 이렇게 NepakkaSati와 결합하여 Satinepakka가 되는데 이에 대하여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atinepakkena samannāgato : Srp.III. 234에 따르면, ‘여기서 분별을 갖춤은 총혜인데 지혜를 언급하는 것이다. 왜 새김을 말하면서 지혜를 언급하는가? 새김의 강력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는 강력한 새김이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혜와 결합되면 강력한 힘을 갖지만 분리되면 그렇지 못하다. 지혜와 결합된 새김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각주, 전재성님)

 

 

성전협 각주에 따르면 오력에서 언급된 사띠는 단순한 사띠가 아니라 한다. 그것은 지혜와 결합된 사띠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혜를 뜻하는 Nepakka와 기억을 뜻하는 sati가 결합되어 satinepakkena라 하였는데, 이는 지혜와 결합된 기억을 뜻한다. 이처럼 지혜와 기억이 구족 되었을 때 알아차림의 힘이 강력해질 것이라 하였다.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해야 하는 대상

 

아직도 논란 중인 것이 번역어 사띠(sati)’이다. 사띠에 대한 번역어로서 새김, 마음챙김, 마음집중, 알아차림 등 다양한 번역어가 소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띠의 제일의 뜻은 기억(memory)’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의미가 보이지 않은 번역어는 정확한 말이라 볼 수 없다.

 

왜 기억이 중요할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 본다. 지금과 달리 부처님 당시에는 종이도 없고 필기구도 없고 더구나 인터넷검색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오로지 의지할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가급적이면 기억하려고 노력하였다.

 

제자들은 들은 내용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또 되새기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띠번역어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 하고 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에 기억이라는 뜻이 전혀 들어 가 있지 않다. 물론 마음챙김에대한 별도의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챙김이라는 말 자체에는 기억이라는 뜻이 전혀 없는 것이다.

 

또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매우 비불교적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챙겨야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행무상이라 하여 마음 역시 무상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다.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함에도 이를 챙겨야 한다는 뜻의 마음챙김번역어는 아마도 두가지 이유라도 보여진다. 하나는 영어의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마음챙김이라 하여 사전적으로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화두챙김이라는 말이 있듯이 선가의 영향을 받아 마음을 챙겨야 할 대상으로 보아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새김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당위성

 

사띠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새김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한 것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5권 해제글에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새김의 힘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는 데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법문은 일반적으로 팔정도에서 정의되는 것과는 다른 정의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새김이 마음챙김이 아니라 새김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5권 해제글, 전재성님)

 

 

전재성님에 따르면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띠 본래의 의미인 기억(memory)’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말을 사용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말 새김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런 새김은 기억을 되새기는 의미도 있을 뿐만 아니라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통찰하는 의미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기억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만일 기억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삶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이다. 바로 이전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아 가지 못할 것이다.

 

치매환자의 경우 바로 이전의 행위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할 수 있는 뇌가 파괴 되어 더 이상 저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 전의 일은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치매가 진행 될수록 점차 오래된 것도 잊어져 간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시작하여 점차 먼기억 순으로 잊혀져 가는 것이다. 그러다 자식도 못알아 본다. 말기에 이르면 자신도 못알아 본다고 한다.

 

건망증이 있다. 건망증과 치매는 어떻게 다를까? TV에서 전문의의 설명에 따르면 건망증의 경우 기억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만 기억한 것을 꺼내 올 때 장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스불을 켜 놓고 외출하였다가 갑자기 , 가스불!”하고 기억이 떠 오르는 것이다. 이처럼 저장하는 것은 문제 없으나 꺼내 올 때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 건망증이다. 그러나 치매는 아예 저장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방금전에 한 행위나 말을 기억할 수 없다.

 

가르침을 저장하고 다시 되새기는 행위

 

만일 부처님 제자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저장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르침을 한쪽 귀로 듣고 바로 또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수백명의 제자들이 숨을 죽이며 가르침을 모두 경청하고 있는데 그 주옥 같은 가르침이 단지 한번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결코 지혜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뇌의 기억장치가 이상 없다면 가급적 가르침을 머리속에 저장하여 놓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저장된 가르침을 잊어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처럼 가르침을 저장하고 다시 되새기는 행위가 사띠라 본다. 그래서 사띠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띠 번역어 중에 최상은 새김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공부는 외우는 것에서부터

 

기억을 해야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억을 극대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외우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한글을 익힐 때도 외워야 한다. 또 구구단을 외워야 산수를 할 수도 있다. 영어 알파벳을 외워야 영어를 할 수 있고, 수학도 중요한 공식은 외워야 한다. 이렇게 모든 학문은 외는 것부터 출발한다.

 

십년 걸려 이해 할 것을 일주일 동안 외면

 

외우기와 관련하여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다. 뇌과학자로 잘 알려진 박문호박사의 강연에 대한 것이다. 박문호 박사는 뇌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복잡한 도면을 보여 주고 있다. 너무 얽히고 설켜 있어서 이해하기 매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박문호 박사는 2012년 전통불교문화원 강의에서 실은 브레인이 이것 보다 백배 이상 더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가장 간단하게 축약한 것이 이 연결입니다. 2005년도에 리스만이라는 기억을 삼십년동안 연구한 사람이 만든 도표입니다.(불교와 뇌과학1)”라 하였다.

 

 

 

 

 

 

도표를 보니 매우 복잡하다. 도표만 이해하면 뇌의 구조는 물론 그 동안 베일에 쌓였던 뇌의 비밀까지 알 듯 하다. 하지만 박문호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합니다. 스님들이 좋아 반야심경에서도 색수상행식이 나오고 온갖 것들이 나오는데 그러면 과학이 요즘 이렇게 힘이 세다는데 그러면 마음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그래서  제가 이 도표 하나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무어냐고 백날 질문하지 말고 저 도표를 이해 하시면 되요. 그런데 이것들을 이해 하려면 십년걸려요. 근데 잘 들으세요. 이 도표를 암기 할려면 일주일이면 되요.

 

(불교와 뇌과학박문호 20120807 01, 박문호 박사)

 

 

요즘은 과학의 시대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하여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밀려 한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 윤회, 내생, 육도 등 불교에서 말하는 사실에 대하여 과학의 잣대를 대려 하는 것이다.

 

뇌과학도 일종의 과학이다. 의식, 마음 등 정신현상에 대하여 뇌과학으로 접근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반발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뇌과학을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그렇게 힘이 세냐?”든가,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마음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이에 대하여 박문호 박사는 뇌에 대한 복잡한 도표를 보면서 이 도표를 보면 정신현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표를 이해 하는데 있어서 십년가량 걸릴 것이라 한다. 십년간 도표를 보고 공부를 하면 뇌와 정신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빨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외면 된다는 것이다. 도표를 외는데 있어서 일주일 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도표를 한번 외워 놓으면 십년 동안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강력한 힘, 염력(念力, satibala)

 

박문호 박사는 십년 걸려 이해 할 것을 일주일 동안 외면 된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기억의 힘이다. 오력에서 말하는 ‘염력(satibala)’을 말한다. 기억(sati)과 지혜(Nepakka) 결합 되면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를 염력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 (A5.14, S48.10)”라 하였다.

 

고급직종의 사람들을 보면

 

모든 공부는 외는 것부터 시작 된다고 하였다. 또 모든 학문 역시 외는 것부터 시작 된다. 그래서 암기를 잘 하는 자가 잘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오늘날 판사나 검사, 변호사, 의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시험은 암기를 얼마나 잘 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물론 이해력, 독해력 등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근본바탕은 암기에 있다. 특히 사법시험 같은 경우 교재를 거의 암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패스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의사시험 역시 암기를 잘 해야 패스할 수 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는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고급직종이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자격고시에 패스하였기 때문이다. 모두 암기를 잘한 덕분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암기한 결과일 것이다.

 

외우면 내것이 된다

 

암기는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이해하는 것은 단지 읽고 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뇌의 구조에 대한 도표를 이해한다고 하였을 때 십년 걸리지만 이를 외워 버리면 일주일만에 아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사법시험이나 의사시험 역시 이해함과 더불어 암기를 요구한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 많은 경전이 있지만 단지 이해 차원으로 그친다면 십년이 아니라 삽십년이 다 가다고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게송이라도 외워 버리면 언제 든지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에 내것이 된다.

 

이해하는 것은 내것이 아니지만 외우면 내것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외워서 지혜와 결합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사띠는 기억과 지혜를 합한 것이라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김에 따라 현상에 대한 무상, , 무아의 통찰이 일어 났을 때 이것이 바로 사띠발라(satibala, 念力, 새김의 힘)이라 하였다.

 

암기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뇌과학에 대하여 특강한 박문호 박사는 암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기하는 것에 대하여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암기를 하면 창의력이 말살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과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와 같은 정책은 정책은 잘못 된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뇌는 쓰면 쓸수록 발달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쓰면 쓸수록 발달 되는 것이 뇌라 한다. 그래서 총명해진다고 한다. 반대로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아둔해짐을 말한다. 특히 뇌과학자에 따르면 우리 뇌는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뇌내에서 뇌가 활동을 해야 뇌가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 있다는 것이다.

 

외우기 하는 것은 뇌를 활성화 시키는 것이 된다. 뇌가 활성화 되면 총명해지고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박문호 박사는 암기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라고 단언 하였다.

 

가르침에 맞게 여법하게 행하고

 

법구경 19번 게송은 경전외우는 것 보다 실천수행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목적에 대한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경전 외우기가 무익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암기외에 의존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가르침을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고 잊지 않기 위하여 되새김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 전부를 다 외운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오부니까야를 모두 한곳에 모아 놓으면 책장에 가득하다. 팔만사천에 달하는 부처님 말씀을 모두 다 외우고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일 가르침을 한평생 외우는 것에 보낸다면 한평생 외워도 극히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경전외우기에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가르침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Appam-pi ce sahita bhāsamāno,   압빰 삐 쩨 상히땅 바사마노
Dhammassa hoti anudhammac
ārī,    담맛사 호띠 아누담마짜리
R
āgañ-ca dosañ-ca pahāya moha, 라간 짜 도산 짜 빠하야 모항
Sammappaj
āno suvimuttacitto,     삼맙빠자노 수위뭇따찟또
Anup
ādiyāno idha vā hura vā,    아누빠디야노 이다 와 후랑 와
Sa bh
āgavā sāmaññassa hoti.      사 바가와 사만냣사 호띠

 

경전을 외우지 못하더라도

가르침에 맞게 여법하게 행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로 알고 잘 마음을 해탈하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집착 여의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리. (dhp20)

 

 

비록 조금 밖에 배우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가르침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그런 실천 방법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구차제정), 네 가지 청정으로 이끄는 계행, 열 세가지 두타행, 부정과 관련된 명상주제 등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외울 필요가 있는 근본가르침

 

경전은 외워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경전을 다 외울 수는 없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내용이 있다. 사성제, 십이연기, 팔정도와 같은 근본 가르침이다. 이런 근본 가르침에 대한 것은 외울 필요가 있다.

 

사성제의 네 가지 진리에 대하여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혜가 나지 않을 것이다. 또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도 못 외우면서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 가르침에 대한 것은 머리속에 암기 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기억된 가르침과 지혜가 결합되었을 때 게송에서처럼 수행자의 삶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2014-04-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