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한문게송이 시시해 보일 때, 왜 빠알리 게송을 독송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22. 18:42

 

 

한문게송이 시시해 보일 때, 왜 빠알리 게송을 독송하는가?

 

 

 

게송읊는 스님

 

종종 스님들이 게송을 읊는 모습을 본다. 주로 명망 있는 선사들이 읊는다. 스님들이 한자어로 된 사구게를 읊는 방식은 모두 다르지만 운율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그러나 스님마다 목소리는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멋드러지게 읊는 선사가 있는가 하면 서툴게 읊는 스님도 있다.

 

선사들이 공통적으로 게송을 읊고 나면 꼭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무아미타불이다. 그래서 어느 스님이든지 게송을 읊고 나면 반드시나무아미타불한다.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로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가장 잘 읊는 스님은?

 

게송을 가장 잘 읊는 스님은 누구일까? 아마 송담스님일 것이다. 불교방송에서는  불교강좌시간에 송담스님의 음성테이프 법문을 수 년째 들려 주고 있다. 그런데 스님의 게송 읊는 목소리는 일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것은 스님만의 독특한 운율이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들려 주는 송담스님의 음성테이프 법문을 들으면, 법문이 시작 되기 전에 반드시 한자어로 된 게송을 읊는다. 그리고 법문 도중에도 읊는다. 아마 감흥에 따른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법문 도중에 읊는 스님의 게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후련하게 할 정도로 힘이 넘치고 때로 구성지기까지 하다.

 

스님은 첫 구절과 두 번째 구절은 독특한 운율에 따라 천천히 읊지만 세번째 구절에 이르러서는 목소리를 한번 비틀며 읊는다. 그리고 네 번째 구절에서는 다시 올리면서 길게 “~로구나!”라고 뽑으며 끝을 맺는다. 이때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을 한다. 그것도 매우 독특하게 ~~ ~미 타~~”하며 길게 뽑는다. 이때 신도들도 다 함께 나무아미타불 운율에 맞추어 합송한다.

 

이렇게 게송을 멋드러지게 한 수 뽑고 난 후 게송에 대한 설명을 한다. 한자어를 먼저 말하고 이어서 우리말로 해석하는 식이다. 이런 게송을 지난 수년간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한역게송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송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상윳따니까야에 게송에 대한 경이 있다. 하늘사람(devata)무엇이 시의 뼈대이고, 무엇이 시의 구절이며 무엇이 시에 의존하고 무엇이 시의 터전인가?(S1.60)”라고 묻는다. 게송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씀 하신다.

 

 

Chando nidāna gāthāna

akkharā tāsa viyañjana,
N
āmasannissitā gāthā

kavi gāthānamāsayo.

 

 

[세존]

운율이 시의 뼈대이고

음절들이 시의 구절이며

시는 명칭에 의존하고

시인이 시의 터전이네.”

 

(Kavisutta -시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0, 전재성님역)

 

 

[세존]

운율이 게송의 골격이고

음절이 게송을 만들며

명칭을 게송은 의지하고

시인이 게송의 터전이로다.”

 

(Kavisutta -시인 경, 상윳따니까야 S1.60, 각묵스님역)

 

 

 “Metre is the scaffolding of verses;

Syllables constitute their phrasing;

Verses rest on a base of names;

The poet is the abode of verse~.”

 

(Poetry, 빅쿠보디역)

 

 

게송을 빠알리어로 가타(gāthā)라 한다. 가타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로 옮겼고, 각묵스님은 전승된 한자어 그대로 게송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verse’라 하여 라는 뜻의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가타는 시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순서와 내용이 대부분 일치하는 각주

 

위 게송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상세하게 각주 하였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 ‘운율이 게송의 골격이다(Chando nidāna).’라는 것은 가얏띠(gayatti, SK. 가야뜨리(gayatri)는 베다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운율임) 등의 운율은 게송의 골격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서시부터 시작해서 이것은 무슨 운율로 되어 있는가?’라고 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2) ‘음절이 게송을 만든다(akkharā viyañjana).’라는 것은 음절(akhara)이 문구를 만들고 문구가 게송을 만들고 게송이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3) ‘게송은 명칭을 의지한다(Nāma-sannissitā gāthā).’는 것은 바다 등의 개념을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게송을 지을 때 바다나 땅과 같은 명칭을 의지하여 짓기 때문이다.

 

4) ‘시인이 게송의 터전이다(kavi gāthānam āsayo).’이라는 것은 시인(kavi)으로부터 게송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게송들의 터전(patittha)이다..”(SA.i.94~95)

 

(243번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은 운율, 음절, 명칭, 시인이 주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위 게송에 대한 성전협의 상세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주석(SA.i.94~95)을 인용하여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CDB 각주에서도 초불연각주와 유사한 설명이 보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pk:

1) Metre is the scaffolding of verses (Chando nidāna gāthāna): Metres, beginning with the griyatti, are the scaffolding of verses; for one beginning the preliminary verses first considers, "In which metre should it be?" Syllables constitute their phrasing

 

2) (akkharā tāsa viyañjana): For syllables make up words, and words make up a verse, and a verse reveals the meaning.

 

3) Verses rest on a base of names: one composing a verse composes it by relying on some name such as "the ocean" or "the earth.

 

4) " The poet is the abode where verses dwell: The abode (asaya) of verses is their support (patittha); Verses come forth from the poet, and thus he is theur support.

 

 

(CDB 120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와 초불연의 각주를 비교해 보았다. 편의상 문단을 구분하고 번호를 부여 하였다.

 

 초불연과 CDB의 각주를 보면 순서와 내용이 대부분 일치 한다. 특히 세 번째 항을 보면 빅쿠 보디가 명칭에 대하여  ‘"the ocean" or "the earth’ 라 하여 바다와 땅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초불연 세 번째 항을 보면 명칭을 예로 든 것이 바다나 땅이라 되어 있다. CDB번역서나 초불연 번역서가 모두 주석에 근거하여 각주하였다고 하나 이렇게 ‘the ocean’ ‘the earth’에 대해서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분교(九分敎)가 있는데

 

가타(게송)은 빠알리니까야를 문장형식에 따라 분류된 방식중의 하나이다. 빠알리니까야에는 게송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가지 분류 방식이 있다. 이를 한자용어로 구분교(九分敎)’라 한다.

 

구분교를 나열 하면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 이렇게 아홉 가지 이다. 그렇다면 구분교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우다나해제글과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있는 부록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었다.

 

 

No

구분교(九分敎)

   

 

1

()

Sutta

1) 부처님의 모든 대화를 기록한 것.

2) 산문으로 쓰인 경--논이 여기에 속함,

숫따니빠따의 몇몇 부분도 포함됨.

2

응송(應頌)

Geyya

1) 모든 산문과 시가 뒤섞인 것

2) 산문체 경의 뒤에 같은 내용을 다시 시로 표현함.

 

3

수기(授記)

Veyyākaraa

1) 논장 및 그와 유사한 아비담마 텍스트

2) 게송이 없는 산문체로 아비담마 같은 해설로 다른 삼장의 어디에도 분류되지 않은 경들이 있다.

 

4

게송(偈頌)

Gāthā

오로지 시로만 구성된 것

담마빠다(법구경), 테라가타(장로게), 테리가타(장로니게), 숫따니빠따의 부분

5

감흥어(感興語)

Udāna

부처님이 스스로 감탄하여 스스로 설한 것

82개의 경으로 이루어짐.

6

여시어(如是語)

Itivuttka

이와 같이 말씀 되어 졌다.’의 뜻으로 감흥어와 유사하게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음.

110개의 경으로 이루어짐.

7

전생담(前生談)

Jātaka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고 산문이야기를 수반하는 시모음집.

547개의 부처님전생이야기

8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초자연적인 상태나 힘을 다루고 있는 경전.

경이로움과 관련된 경

9

교리문답(敎理問答)

Vedalla

1) 교리문답은 어원적으로는 고양이의 눈이라는 뜻으로

팔만사천 가르침의 다발 가운데 한 단위를 말함.

2) 앎과 기쁨으로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설해진 경들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의 경전

 

 

 

부처님께서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표에서 응송(應頌)이 있다. 산문과 시가 뒤섞인 형태이다. 이런 식의 경전은 대승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법화경을 들 수 있다. 운허스님이 우리말로 번역한 법화경을 보면 산문체 이야기 다음에 부처님께서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이 정형구 다음에 산문체를 요약하는 게송이 죽 이어진다. 이렇게 산문체로 설명되고 게송으로 요약되어 뜻을 더욱 강조 되는 형태가 응송이다. 이런 응송형태의 경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순수하게 시로만 되어 있는 것이 가타(Gāthā)이다. 대표적으로 법구경을 들 수 있다. 법구경에는 모두 26 423개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품당 평균 16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외우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정수만을 모아 게송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번 외워 놓으면 평생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게성에는 한문으로 된 것과 빠알리어로 된 것이 있다.

 

칠불통계게 한문게송을 보면

 

법구경 중에 칠불통계게가 있다. 과거 일곱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여 훈계하였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諸惡莫作     제악막작

衆善奉行     중선봉행

自淨其意     자정기의

是諸佛敎     시제불교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네.

 

 

네 글자로 된 한자성어가 네 구절 있으므로 사구게가 된다. 이런 사구게에 대하여 덕망 높으신 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운율에 맞추어 읊는 것을 볼 수 있다.

 

칠불통계게  빠알리어 게송을 보면

 

잘 읊는 스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 시라는 것이 운율로 읽으면 노래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자어로 된 게송을 운율에 맞추어 읊으면 맛이 난다. 그렇다면 위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bbapāpassa akaraa,    삽바빠빳사 아까라낭

kusalassa upasampadā,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Sacittapariyodapana      사찟따빠리요다빠낭

eta Buddhāna' sāsana에땅 붇다나 사사낭.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 전재성님역)

 

 

 

 

 

 

빠알리어로 된 게송이다. 한문게송에서 諸惡莫作(제악막작)’에 해당되는 것이 Sabbapāpassa akaraa(삽바빠빳사 아까라낭)’ 이다. 그런데 소리를 들어 보면 맛이 다르다. 한자어는 익숙해 보이고 빠알리어는 생경해 보이기 때문이다.

 

한문독송인가 빠알리독송인가?

 

생경해 보이면 신뢰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빠알리어도 그런 것 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러나 한문역시 생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불자들이 한문으로 된 경전을 독송하지만 그 뜻을 알고 독송하는 사람은 드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문 역시 외국어나 다름없다.

 

뜻을 모르고 단지 독송용으로만 사용되는 한문경전은 뜻을 모르는 외국어를 읽는 것과 같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한문이나 빠알리어나 생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빠알리어를 독송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언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중국말로 말씀 하셨을 리 없다. 그렇게 본다면 한문독송하는 것 보다 빠알리어로 독송하는 것이 부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사용하던 언어로 독송하였을 때 부처님이 현전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노스님이 눈푸른 스님에게

 

스님들이 법문할 때 한자어로 된 문구를 구성지게 읊었다면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누군가 삽바빠빳사 아까라낭이라 읽었을 때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까? 아쉽게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이 한자어가 아니면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으로 간주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눈푸른 스님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느 노스님이 영어로 된 불경을 보고 있는 어느 외국인 스님에게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아야지 영어로 된 경전을 보아서는 깨닫지 못한다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한글화가 더딘 것 같다. 아직까지 부처님말씀은 한자어로 된 경전을 보아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같이 빠알리경전이 우리말로 번역 되어 읽혀지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볼까? 역시 깨닫기 어렵다고 말할지 모른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아야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선사들은 왜 모두 딴소리할까?

 

그러나 선사들에 따르면 한역경전 역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견성성불로 설명되는 선종에서 경전이라는 것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무리 부처님 직설이 담긴 빠알리경전이 나와도 선종에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선종에서는 경전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보고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전이 무시되기 일쑤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법문내용이 모두 다 다르다. 모두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테라와다와 비교된다.

 

테라와다 빅쿠나 법사들은 한결같이 똑 같은 말을 한다. 이유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법문을 하든 똑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선사의 법문을 들어보면 대부분 딴소리이다. 그것은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역행하고 저항하는 듯

 

이처럼 선사들은 경전을 무시하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정도로 밖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법문을 할 때 보면 문자를 쓴다. 한문게송을 멋드러지게 부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게송을 잘 읊는 스님을 보면 목소리꺽기목소리비틀기로 흐느끼듯 읊는다. 이처럼 선사의 흐느끼듯 하는 게송읊는 소리를 들으면 처량한 느낌이다. 왜 그럴까?

 

한문게송 읊는 것은 더 이상 큰 감동을 주지 않는다. 문자를 모르던 한문게송을읊으면 문자쓴다고 하여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빠알리원전을 접할 수 있는 시대에 한문게송을 읊고, 한문게송을 법문으로 활용하는 것은 점점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인다.

 

한문게송만 고집하는 스님들이 있다. 이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아직도 수백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박제화 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래서 한문게송을 흐느끼듯 구성지게 읊는 것을 보면 마치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이고, 심지어 시대에 저항하는 듯해 보인다.

 

빠알리독송에 맛을 들이면

 

빠알리어로 된 게송의 맛을 알면 한문으로 된 게송이 시시해 보인다. 이전에는 한글로 된 경전을 독송하면 맛이 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독송해야 읽는 맛이 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금강경독송회를 하면 대부분 5,149자로  된 한문경전을 읽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있다.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빠알리원전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빠알리어로 된 게송을 외우고 암송한다. 그런데 빠알리 게송을 암송하면 한문게송 못지 않게 독송하는 맛이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빠알리 독송 맛을 들이면 더 이상 한문독송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한역게송을 읊는 것을 보면 처량해 보이고, 한문게송을 이용한 글을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2014-05-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