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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과 아누사야(잠재성향), 천진불사상은 외도의 견해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5. 22:07

 

 

동자승과 아누사야(잠재성향), 천진불사상은 외도의 견해

 

 

 

동자승이야기

 

불교TV사이트에서 즐겨 보는 것은 명법스님의 강좌이다. 말간 용모의 스님의 강좌를 듣다보면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 같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스님은 동자승이야기를 하였다.

 

동자승이 천진불로서 이미지가 대중화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명법스님은 만화영화 오세암을 들고 있다. 2004년도 작품으로 되어 있다. 감독은 성백엽님이다. 만화영화 오세암은 유튜브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또 하나 동자승의 이미지에 기여한 영화가 있다. ‘동승이다. 동승은 2002년도 작품으로서 감독은 주경중님이다. 유튜브에 소개 되어 있는 동승 트레일러는 다음과 같다.

 

 

 

 

A Little Monk (2002) - 동승 - Trailer

http://www.youtube.com/watch?v=mWomGS_r7Z0

 

 

 

명법스님에 따르면 오세암과 동승, 이렇게 두 가지 콘텐츠의 영향으로 동자승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 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동자승이 천진불로서 이미지로서 대중화 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어른이 되어도~”

 

동자승의 이미지는 순수함에 있다. ‘하늘색 꿈이라는 노래에서 난 어른이 되어도 하늘빛 고운 눈망울 간직하리라던 나의 꿈 어린꿈이 생각나네라는 가사가 있듯이 누구나 그 순수하였던 마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순수하고 천진무구한 마음을 명법스님은 본래의 마음이라 하였다.

 

이처럼 본래의 마음으로서 어린아이의 마음이 천진불이다. 그래서 천진불로서  동자승이미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불과 몇 십년전까지만 해도 동자승의 이미지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동자승이 보이긴 하지만 요즘처럼 천진불로서의 개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자승이미지가 확산된 것은 산업화에 따라 한두자녀 밖에 가지지 않게 됨에 따라 아이들이 대우를 받게 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 한다.

 

최근에는 동자승이미지가 캐릭터로도 등장하고 있다. 동자승 캐릭터가 들어간 상품이 판매 되는가 하면 는 연등축제나 각종 불교행사를 할 때 등장하기도 한다.

 

 

 

연등축제에서의 동자승캐릭터(2011년 연등축제)

 

 

불교역사상 최초로 동자승은?

 

동자승은 역사적으로도 존재하였다. 문수동자 등 과 같은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동자승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라훌라이다.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가 출가함으로서 불교역사상 최초로 동자승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는 라훌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열여선번째 주제가 라훌라 상윳따(S16)’이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무상의 가르침을 설하는 법문위주로 되어 있다. 맛지마니까에도 라훌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암발릿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친 경(M61)’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큰 경(M62)’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M147)’이 그것이다.

 

라훌라가 일곱살 이었을 때

 

동자승으로서의 라훌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라훌라가 일곱살 이었을 때 거짓말을 잘 하는 라훌라에게 부처님이 가르침을 준 것이 암발릿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친 경(M61)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물그릇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물그릇에 물을 조금 남겨 놓으시고 존자 라훌라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라훌라여, 너는 물그릇에 물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있느냐?

 

[라훌라]

“세존이시여, 보고 있습니다.

 

[세존]

“라훌라여,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자에게 수행자의 덕성은 이 물과 같이 적다.

 

(암발릿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친 경, M61)

 

 

 

라훌라는 나이가 어린 동자승이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것이 커다란 잘못인줄 몰랐다. 이런 라훌라에게 부처님은 물그릇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거짓말 하는 자는 부끄러워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덕성이 매우 적다고 하였다. 그래서 물그릇에 조금 남아 있는 물로 비유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물마저 버렸다. 그러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에게 수행자의 덕성은 이와 같이 버려진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부처님은 물그릇을 아예 엎어 버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에게 수행자의 덕성은 이와 같이 뒤집어엎어진다.”라고 하였다.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이 물그릇의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거짓말을 하고 음행을 하는 등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는 어떠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도 못할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은 어떤 짓이든지 서슴지 않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매우 높다. 파레토의 법칙처럼 전과를 가진 20%가 전체범죄의 80%를 저지르는 것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서슴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의 범죄행위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린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라훌라여, 네가 신체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면, 너는 그 신체적 행동에 대하여 ‘나는 신체적으로 이와 같이 행동하고자 하는데, 나의 이 신체적 행동은 스스로를 해치거나 남을 해치거나 나와 남 둘 다를 해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신체적 행동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어서 그 결과도 괴로움이고 그 과보도 괴로움이 아닐까?’라고 잘 성찰해야 안다.

 

(암발릿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친 경, M61)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욕설을 하였을 때 과연 상대방이 의도한 대로 타격을 입을까? 만일 상대방이 욕설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욕설한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스스로 해친다고 하였다.

 

저에게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숫따니빠따에도 라훌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라훌라경(Sn2.11)’이 그것이다. 이 경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어린 라훌라가 수행자여, 저에게 유산을 물려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까삘라왓뚜에 갔었을 때 일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사리뿟따에게 라훌라를 출가시키라고 명했다. 부처님은 왜 라훌라를 출가시켰을까?

 

경에서 부처님은 어린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장면이 있다. 

 

 

Cīvare piṇḍapāte ca

paccaye sayanāsane,
Etesu ta
ha mā kāsi

mā loka punarāgami.

 

의복과 얻은 음식과

필수 의약과 침구와 깔개,

이런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stn339)

 

(Rāhulasutta-라훌라의 경, 숫따니빠따 Sn2.11,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 가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경의 내용에 따르면 의복이나 음식, 와좌구 등에 욕심을 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그러나 다음 게송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Savuto pātimokkhasmi

indriyesu ca ñcasu,
Sati k
āyagatātyatthu

nibbidā bahulo bhava.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stn340)

 

(Rāhulasutta-라훌라의 경, 숫따니빠따 Sn2.11,전재성님역)

 

 

게송에서는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라고 당부 하고 있다. 이전 게송에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라 하였는데, 그것 보다 강도가 훨씬 더 높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아주 싫어 하여 떠나라하였다.

 

여기서 아주 싫어 하여라고 번역된 것은 ‘nibbidā’에 대한 것이다. Nibbidā‘aversion; disgust; weariness’의 뜻으로 구역질 나도록 싫은 것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 厭離(염리), 厭惡(염오)’라 한다.

 

눈꼽만큼도 미련을 갖지 않아야

 

이렇게 토할 듯이 싫어 하는 마음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Sati kāyagatātyatthu)”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설명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nibbidā bahulo bhava : Prj.II.343에 따르면,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실망해서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자각을 가져라라는 뜻이다.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라는 말은 윤회에서 벗어나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본다.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이 구역질 나도록 싫어 졌을 때 가능할 것이다.

 

만일 세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 미련을 대상으로 하여 다시 재생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눈꼽만큼도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까무라 하지메는 となれ라 하였다. 이는 간절히 세상을 싫어 하고 혐오하는 자가 되어라의 뜻이다. 법정스님은 참으로 세상을 지겹게 생각하라라고 번역하였다.

 

라훌라에게 준 최대의 유산은?

 

부처님은 철모르는 어린 라훌라에게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나도록 수행하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유산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이다.

 

어린 라훌라에게 부처님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두손을 모으고 유산을 주십시요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말한 것은 누가 시켜서 일 것이다. 아마도 야소다라 부인이 시켰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라훌라를 출가시키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왜 출가시킨 이유는 유산을 주기 위해서이다. 바르고 원만한 위없는 깨달음,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물려 줄 것이라고는 깨달음에 대하여 알려 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라훌라를 출가 시켰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윤회를 종식시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stn339)” 라든가,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stn340”와 같은 가르침을 준 것이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가르침을 준 것이 라훌라에게 준 최대의 유산이었다.

 

동자승삭발행사

 

이렇게 본다면 불교역사상 최초의 동자승은 라훌라존자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자승이 순진무구하다거나 천진불로서의 이미지로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초기경에서 오늘날 회자 되는 천진불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명법스님에 따르면 동자승이 천진불로서 이미지가 확립 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오세암이나 동승과 같은 콘텐츠가 등장함에 따라 동자승 캐릭터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어 천진무구함과 동시에 천진불로서 이미지가 확립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결과이어서일까 요즘은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종단에서는 동자승삭발행사를 갖기도 한다.

 

천진불로서의 동승의 이미지는 언제부터?

 

동자승캐릭터는 순진무구와 천진불 이미지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명법스님은 이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캐릭터로 등장하는 동승의 이미지, 천진불로서의 동승의 이미지는 근대적인 현대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저희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어요.

 

(명법스님, 불교미학 산책 사찰의 미를 찾아서 (명법스님), 제19 천진불의 상징, 동자승, 불교TV 2014-04-15)

 

 

스님의 강좌에 따르면 동자승이미지가 확립 된 것은 근대적인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전에는 천진불로서 이미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초기경전에는 천진무구성의 오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비유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천진무구성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말룽끼야뿟따경에서 부처님은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어린아이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비유란 무엇일까? 부처님은 오하분결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먼저 유신견에 대하여 어린아이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Nanu mālukyaputt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iminā taruūpamena upārambhena upārambhissanti. Daharassa hi mālukyaputta kumārassa mandassa uttānaseyyakassa sakkāyotipi na hoti kuto panassa uppajjissati sakkāyadiṭṭhi. Anusetitvevassa sakkāyadiṭṭhānusayo,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존재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Mahāmālukyasutta-말룽끼야뿟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64, 전재성님역)

 

 

잠재성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아이가 순진무구해 보여도 잠재 되어 있는 성향이 있음을 말한다.

 

지금 어린아이는 의식이 형성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실체가 있다는 견해 즉, 유신견에 대하여 예를 들고 있다.

 

어린 아이가 비록 자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유신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잠재성향은 유신견 뿐만 아니라 관습이나 감각적 쾌락등도 잠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발달과 함께 잠재되어 있는 성향이 발현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섹스에 대하여 모르는 아이가

 

이처럼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에게 잠재성향이 잠재 되어 언제 표출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하고 청정한 마음을 닮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비판하였다. 지금 아이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지라도 그런 성향이 잠재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섹스에 대하여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섹스에 대한 욕망이 일어 날 수 있을까? 아이가 섹스에 대하여 모른다고 하여 섹스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섹스에 대한 욕망이 잠재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어린아이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일어날 수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M64)”라 하였다.

 

어린아이의 천진무구성을 이상으로

 

그렇다면 외도들은 왜 천진난만하고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MN78에 따르면, 유행자들 가운데는 세상에서 몸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악한 의도를 품지 않고, 악한 생활을 하지 않는 그러한 네 가지 원리를 갖춘 사람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도달하고,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복될 수 없는 수행자이다.’라는 견해가 있었고, 그들은 어린아이의 천진무구성을 이상을 삼았다. 말룽끼야뿟따는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각주, 어린아이 비유, 전재성님)

 

 

각주에서 주석을 인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재성님의 견해라 볼 수 있다. 전재성님은 맛지마니까야 수행자 만디까의 아들에 대한 경(M78)’의 문구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외도 유행자 만디까는 악한 행위만 하지 않으면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마음만 가진 다면 궁극적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외도들은 어리고 연약하고 누워있는 어린아이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도달하고,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복할 수 없는 수행자가 될 것이라 하였다(M78)”라 하였다. 이렇게 어린아이의 마음을 이상으로 삼은 것이다.

 

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

 

어린아이의 마음을 이상으로 삼는 것은 우리나라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천진불이라 하여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경전에서는 천진불사상이 외도사상이라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도 외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수행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천진불사상을 비판하였다. 왜 비판하였을까?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는 잠재된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개체라는 생각이 없ㅇ음에도 개체라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또 관습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관습이라는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수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더구나 아이에게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일어날 수 있는 경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천진불에 대한 환상을 깬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린아이가 아무리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청소년기가 되면 잠재되어 있는 성향이 발현된다. 이를 동자승 영화라 볼 수 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볼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김기덕 감독작품으로 2003년에 발표 되었다. 그러나 명법스님은 동자승이미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 영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오세암동승에 대하여 천진불로서 동자승캐릭터가 대중화 된 것이라 말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스님은 같은 동자승 영화라 볼 수 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이는 영화가 천진불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비록 동자승이 어렸을 적에는 천진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사춘기기 시작 되면서 여지없이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이가 자라서 17세 소년이 되었을 때, 산사에 동갑내기 소녀가 요양하러 들어온다. 소년의 마음에 소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차오른다. 급기야 동자승은 소녀와 한몸이 되고 만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욕망의 바다에 빠져 들어 결국 파계하고 산사를 떠나고 만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2003)’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천진불에 대한 환상을 깼다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의 천진불 환상

 

한국불교에는 천진불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래서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동자승이 탄생한다. 신도의 자녀를 선발하여 삭발하고 승복을 입혀 수계식을 봉행한다.

 

이와 같은 동자승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닮기 위해서이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그 마음을 닮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자승 이미지의 각종 캐릭터가 등장하고 심지어 무욕의 노스님에 대하여 천진불같다고도 한다.

 

천진불이 외도사상인 이유

 

그러나 놀랍게도 천진불 사상은 외도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 명백히 표현 되어 있다. 두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장애들을 누구에게 이렇게 설했다고 기억하는가?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

 

1)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존재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2)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의혹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3)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관습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4)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5)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뭇 삶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뭇 삶에 대한 분노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분노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

말룽끼야뿟따여, 이들 이교도의 출가자들은 아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

 

(Mahāmālukyasutta-말룽끼야뿟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64,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어린아이가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지라도 잠재성향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 잠재성향은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도 유행자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외도들은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만일 어린아이가 정말로 탐욕, 성냄, 자만, 시기, 질투 등이 없이 태어난다면 외도의 천진불사상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장애가 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잠재 되어 있을 뿐이다.

 

잠재된 것에 대하여 아누사야(ānusaya)’라 한다. 성전협에서는 이를 경향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잠재성향으로 번역하였다. ‘아누사야(ānusaya)’에 대하여 영어로는  ‘[m.] proclivity; a dormant disposition’라 되어 있고, 한자 사전에서는 隨眠, 煩惱라 되어 있다. ‘성향, 기질또는 휴면중인 기질이라는 뜻이다. 지금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는 잠재된 성향을 말한다.

일곱가지로 분류되는 잠재성향

 

아누사야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2)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

3) 적의(분노)의 잠재성향

4) 자만의 잠재성향

5) 사견의 잠재성향

6) 의심의 잠재성향

7) 무명의 잠재성향

 

 

흔히 한 성격하게 생겼다라는 말이 있다. 얌전하게 보이는 사람이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아주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또 착하고 온순해 보이는 사람이 고집을 부리면 대책에 안서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숨겨진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아누사야(ānusaya)’라 한다.

 

그런데 아비담마의 분류에 따르면 일곱가지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탐진치가 들어가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탐진치는 타고나면서 있는 것이 된다. 어린아이라 하여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재 되어 있어서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면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잠재되어 있던 성향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누구나 어린시절을 떠 올리며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자 한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어린아이는 탐욕, 성냄, 의심 등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다만 잠재 되어 있을 뿐 조건만 맞으면 발현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도들은 어린아이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오염원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착한 행동만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이상적인 마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말룽끼야뿟따에게 부처님이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아기의 비유로서 그대를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라고 물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말룽끼야뿟따는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진불은 외도의 견해

 

맛지마니까야에는 천진불사상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경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건축사여, 수행자 만디까의 아들인 유행자 욱가하마나가 말한 것이 그와 같다면,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가 착하고 건전한 것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에 도달하고,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복할 수 없는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1)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신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움직일 뿐, 어떻게 신체로 악한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2)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언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울어댈 뿐, 어떻게 악한 언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3)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의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뾰루퉁할 뿐, 어떻게 악한 의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4)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어미젖을 구할 뿐, 어떻게 악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건축사여, 이와 같이 수행자 만디까의 아들인 유행자 욱가하마나가 말한 것이 그와 같다면,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가 착하고 건전한 것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에 도달하고,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복할 수 없는 수행자일 것입니다.

 

(Samaamaṇḍikā sutta-수행자 만디까의 아들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78, 전재성님역)

 

 

 

어린아이가 티없이 맑고 순수하고 천진무구하다고 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음으로 인하여 최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어린아이에게 어떤 오염원도 발견할 수 없다면 어린아이가 번뇌다한 아라한 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번뇌가 소멸된 것이 아니다.  다만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과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외도들은 번뇌를 소멸하는 것 대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행위로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아 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어린아이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천진불사상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며 외도의 견해라는 사실이다.

 

 

2014-04-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