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계행을 지키기 힘들면, 출가와 환속을 여섯 번 반복한 찟따핫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3. 15:35

 

계행을 지키기 힘들면, 출가와 환속을 여섯 번 반복한 찟따핫따

 

 

 

조회수가 급증하였는데

 

최근 블로그 조회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는 특정한 글의 조회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2013년 작성된 적광스님에 대한 글이다.

 

2013 8월 적광스님에 대한 폭행이 있었다. 적광스님은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우정공원에서 조계종의 문제점을 폭로하기 위한 선언문을 낭독하려 하였다. 종단의 고질적인 문제인 스님들의 도박과 일련의 비리를 폭로 하려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안 호법부 스님들이 강제연행 하였다. 관련보도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납치와 감금과 린치가 가해졌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이건 아닙니다” 적광스님의 절규와 강제환속(2013-08-23)’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조계종에 대하여 희망을 버렸다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

 

 

이번 사태를 지켜 보면서 한 시대가 끝나 가고 있음을 느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개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조계종이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21일 발생한 납치, 감금, 린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계종에 대하여 희망을 버렸다. 이번 납치, 감금, 린치 사건은 작년 승려도박 사건 보다 더 엄청난 사건으로서 조계종의 몰락을 가속화 시킬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은처, 도박, 횡령, 성폭행 등으로 얼룩진 한국불교가 추락하고 있음을 말한다. 적광스님이 끌려 가면서 “이건 아닙니다”라는 절규가 마치 한국불교의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다.

 

(진흙속의연꽃, “이건 아닙니다” 적광스님의 절규와 강제환속(2013-08-23))

 

 

글에서 조계종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고 하였다. 한국불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온갖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조계종을 버렸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현 조계종에 대하여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정이 되지 않는 집단

 

조계종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정이 되지 않는 집단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조계종이라는 집단을 알면 알수록 요지경이다. 차마 입게 담기 힘든 은처, 도박, 횡령, 폭행 등이 다반사로 일어 나는 곳이 조계종의 승가집단이다. 물론 일부에 한한다. 비록 일부라고 하지만 스님들의 일탈은 전체스님들을 욕먹게 하기 때문에 조계종이라는 종단 전체가 부패집단으로 몰리는 것이다.

 

어디서 유입된 것일까?

 

적광스님폭행사건과 관련된 글의 조회수는 최근 4일간58,000회에 달한다. 유입을 보니 특별한 징후는 포착되지 않는다. 일년 전의 글이라서 블로그메인뉴스에 올라 간 것도 아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조회가 이루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방문자의 연령대가 3040이라는 점에서 SNS를 통해서 유입되는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적광스님 폭행사건 이야기는 한국불교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글을 일년전에 올렸는데 현재 이슈가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자괴감을 느낀다. 좋지도 않은 일에 조회수가 급증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왜 출가하셨습니까?”

 

최근 스님들의 일탈행위를 보면서 출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세상을 등진 자들이 출가자들이 범계행위를 밥먹듯이 하는 것을 보면 세상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세상사람들 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세상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집단이 승가인 것처럼 보인다.

 

스님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알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왜 출가 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방송 대담프로에 출연한 스님들에게 항상 빠지지 않는 질문 중의 하나가 스님은 왜 출가하셨습니까?”라는 말이다. 이렇게 사회자가 물어 볼 때 스님들은 무어라 답할까?

 

출가이유에 대한 스님들의 답변은 모두 다르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열 명의 스님이 있다면 열 명의 출가이유가 다 있다.  어떤 이유로 출가 하였건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었다면 비구로서 살아 가야 한다. 비구 되려면 삼생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어렵게 비구가 되어서 속인들의 지탄이 대상이 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봉주의 팟케스트 방송 전국구가 있다. 주로 정치적 이슈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승가의 비리에 대한 방송이 시작 되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계종단이 스스로 개혁을 못하자 외부의 힘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막행막식을 일삼는 일부 권승들의 행태가 이제는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듯 하다. 이럴 때 묻는 말이 아마 스님은 왜 출가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일 것이다.

 

왜 재가불자들을 대략난감하게 만드는가?

 

스님들의 범계행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재가불자들에게 돌아 간다. 다종교사회에서 불자들은 티종교인과 함께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누군가 너의 종교는 왜 그모양이냐?”라고 하였을 때 불자들은 어떻게 답해야 할까? 참으로 난감한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렇게 대략난감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계행이 엉망인 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진다.

 

법구경 38번 게송

 

출가 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자로서 삶을 살아야 된다는 보장이 없다. 계를 지키기 힘들면 환속해서 재가의 삶을 살면 되기 때문이다. 출가의 삶이 힘들면 재가의 삶으로 되돌아 가면 그만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38번과 39번의 인연담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법구경 38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Anavaṭṭhitacittassa        아나왓티찟땃사

saddhamma avijānato,     삿담망 아위자나또
Paripalavapas
ādassa        빠리빨라와빠사닷사

paññā na paripūrati.       빤냐 나 빠리뿌라띠.

 

 

마음이 안정을 잃어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지혜가 원만하게 완성되지 못한다.

 

(Dhp38, 전재성님역)

 

 

安住することなく、

しいらず、

信念されたならば、

さとりの智慧うからず。

 

(Dhp38, 中村元)

 

心無在息  심무재식

亦不知法  역부지법

迷於世事  미어세사

無有正智  무유정지

 

(Dhp38, )

 

 

For a person of unsteady mind,

not knowing true Dhamma,

       serenity

       set        adrift:

discernment doesn't grow full.

 

(Dhp38, Thanissaro Bhikkhu)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자, 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는 지혜가 완성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출가하여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출가와 환속을 여섯 번 반복한 찟따핫따

 

신출가(身出家)라는 말이 있다. 몸만 출가 하였다는 말이다. 마음은 재가의 머물로 있는 출가를 뜻한다. 이런 신출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38번과 39번 게송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인연담 찟따핫따와 관련된 이야기(Cittahatthattheravatthu)’가 그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05-308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숲에 계실 때 장로 찟따핫따와 관련된 이야기(Cittahatthattheravatthu)이다.

 

한 고귀한 가문의 자제였던 찟따핫따가 황소를 읽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 갔다. 정오쯤 되어서 황소를 찾았으나 허기와 갈증에 지쳐 고귀한 수행승에게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승원으로 들어가서 수행승들에게 인사를 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마침 수행승들에게 남은 음식이 있어서 젊은이가 허기에 지쳐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에게 여기 음식이 있으니 가져다 드시오.’라고 말했다. 그래는 그는 필요한 만큼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손을 씻은 뒤에 수행승들에게 절하고 존자들이여, 오늘 어떤 집에 초대받아 갑니까?’라고 물었다. ‘재가의 신도여, 아닙니다. 수행승들은 언제나 이렇게 음식을 먹습니다.’

 

그는 나는 아무리 열심히 밤낮으로 일해도 맛있는 쌀죽을 먹기는 힘들다. 이 수행승들은 그들의 말에 의하면 언제나 이렇게 먹는다. 더 이상 재가자로 남을 필요가 있는가? 나도 수행승이 되자.’라고 생각하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승단으로 출가했다.

 

그러나 수행승으로 그는 구족계를 받고 크고 작은 의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승단에 보시 되는 많은 음식을 먹고 살이 찌자 왜 내가 탁발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고는 다시 환속했다.

 

그는 가사 일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몸이 쇠약해졌다. 그는 내가 왜 이고통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고 다시 수행승이 되었다. 그는 수행승이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불만족하게 되어 환속했다. 그는 며칠 지나지 않아 재가의 생활에도 불만족하게 되어 다시 수행승이 되었다. 이렇게 여섯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임신한 아내가 침을 흘리며 코를 골고 입을 벌리고 부풀어 오른 시체처럼 자는 것을 보고 마침내 속세의 삶을 혐오하게 되어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났다.

 

장모가 같은 집에 살았는데, 그녀는 사위가 다시 가사를 입고 떠나자 잠자는 딸을 깨워 네 남편이 네가 잠자는 모습을 보고 혐오를 느껴 다시 떠나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딸은 어머니, 비키세요, 그가 떠나건 말건 상관없어요. 며칠 안에 다시 돌아올거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승원으로 돌아 오는 길에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고 마지막으로 출가하고 나서 오래지 않아 거룩한 경지를 성취한 뒤에는 다시는 환속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이 이러한 찟따핫따에 대하여 말이 많자 수행승들이여, 나의 아들은 마음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올바른 가르침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가고오고 했지만 지금은 공덕과 악행을 모두 버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마음이 안정을 잃어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지혜가 원만하게 완성되지 못한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 공덕과 악행을 떠난 깨어 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라고 가르쳤다.

 

(법구경 Dhp38-39인연담, 찟따핫따와 관련된 이야기(Cittahatthattheravatthu), 전재성님역)

 

 

인연담에 따르면 출가와 환속을 무려 여섯번이나 반복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출가이유는 단지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출가 하였다는 사실이다. 먹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다.

 

먹기 위해 출가

 

먹기 위해서 출가 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는 한국불교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옛날 보리고개를 넘기기 힘들었던 시절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절에 보냈다는 식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또 보호자 없는 아이들이 절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렇게 본다면 절은 일종의 고아원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집이 없으면 절에 맡긴 것이다.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어려서 절에서 자란 아이들이 청소년기가 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절 밖으로 나간다고 한다. 자발적 출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절에 남아서 스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흔히 동진출가라 한다. 우리나라 종단 지도부에 있는 스님들 중 상당수는 동진출가라 한다.

 

미성년자가 어떤 연유로 절에 맡겨 졌을 때 동진출가자가 된다. 역사적으로 경허스님도 동진출가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절에 맡겨졌다고 볼 수 있다. 경허스님이 경기도 의왕시 소재의 청계사에 맡겨진 것은 9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절에 맡겨진 것이다.

 

절에 맡겨진 이유는 생계 때문이다. 먹고 살기 힘들 때 하나라도 입을 덜기 위하여 절에 맡겨진 것이다. 이처럼 생계를 이유로 절에 맡겨져 아이가 자랐을 때 이는 자발적 출가가 아니다. 그래서 청소년기 이후가 되면 대부분 환속하게 된다.

 

그럼에도 절에 남아 있는 경우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스님,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스님, 춤을 잘 추는 무용스님, 음식을 잘 만드는 스님 등 세상에서도 그다지 큰 가치를 부여 하지 않는 일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출가와 환속을 반복하여도

 

찟따핫따는 단지 먹는 것 때문에 출가하였다. 출가이유가 먹는 것에서 기인하다보니 쉽게 환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연담에 따르면 승단에서 바라이죄는 짓지 않았다. 단지 계행을 지켜 낼 자신이 없었고 뚜렷한 목표가 없어서 환속한 것이다.

 

계행을 지키기 힘들고 출가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재가의 삶으로 돌아 가면 된다. 재가의 삶을 살다가 다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살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와 환속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출가하였을 때 바라이죄를 지으면 안된다. 바라이죄를 지으면 영원히 승단에서 추방되기 때문이다.

 

반승반속(半僧半俗)인자들

 

계를 지키기 힘들면 계를 반납하면 된다. 머리를 기르고 재가의 삶으로 돌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구족계를 받은 자가 마치 재가자처럼 살아 간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승반속이 있다. 반은 승이고 반은 속인 자를 말한다. 겉으로는 비구 같이 보이지만 들여다 보면 속인의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비구라 할 수도 없고 속인이라 볼 수도 없다. 이렇게 이중생활하는 자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한국불교에도 반승반승이 있다. 몸은 출가하였지만 마음은 재가의 삶에 머무는 자들이다. 그래서일까 음주, 폭행, 도박, 은처 등 범계행위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일부 권승들의 행태가 그렇다. 그런 반승반속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계행이 나쁜 사람은 나쁜 계행 때문에

 

(1)신들과 인간들이 불쾌하게 여긴다.

(2)동료 수행자들의 훈도를 받을 수 없다.

(3)나쁜 계행을 비난할 때 괴로워한다.

(4)계를 지닌 이를 찬탄할 때 후회한다.

(5)그 나쁜 계행으로 인해 대마로 만든 옷처럼 추하다.

 

계행이 나쁜 사람의 견해를 따라 행하는 이들은

 

(1)오랫동안 처참한 곳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2)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4)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과 속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5)비구라고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6)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인 것처럼 항상 동요한다.

(7)마치 죽은 시체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처럼 그와 함께 살 수 없다.

(8)비록 배움 등의 덕을 가졌더라도 동료 수행자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나니

마치 화장터의 불이 바라문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9)수승한 법을 증득할 수 없나니 마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0)정법에 대해 희망이 없나니 마치 천민의 아들이 왕위에 희망이 없는 것과 같다.

(11)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 불의 무더기의 가르침(火聚經, A.iv.128-34)에서 설한 그런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1장 계, 154, 대림스님역)

 

계행이 엉망인 자들은

 

나쁜 계행과 나쁜 계행을 하는 이들에 대하여 16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여러 해 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숫따니빠따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부정한 자는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stn279)”에서도 나타난다.

 

측간이라 불리우는 변소에서 똥을 싸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똥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래서 측간에서 나오는 냄새가 사방에 퍼진다. 그런 이유로 측간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행이 나쁜 반승반속의 행위는 똥이 가득 찬 측간과도 같다. 그래서 악취를 풍긴다.

 

계행이 엉망인 반승반속들이 승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 올까? 음주, 폭행, 도박, 은처 등이 난무 할 것이다. 현재 조계종 권승들의 모습이 그렇다. 그런 권승들은 똥으로 가득찬 똥구덩이와 같다. 그리고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와 같다. 승에서나 속에서나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승반속에게 공양하는 자들이 있다.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가사를 걸쳤다고 하여 부처님 모시듯이 대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그래서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 하였다.

 

세상에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다

 

인연담에 따르면 찟따핫따는 출가와 환속을 여섯 번 하였다. 마지막으로 출가하게 된 것은 혐오감을 느껴서라 하였다. 그래서 가사를 입고 승원으로 가는 도중에 세상에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다.”라고 인식하였을 때 흐름에 든 자(예류자, 수다원)가 되었다고 하였다.

 

찟따핫따의 일곱 번째 출가에서 무상과 괴로움에 대하여 통찰하였다. 그래서 예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연담에 따르면 무아에 대한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무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이루어 졌을 때라 볼 수 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꼰단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표현된 대목과 일치한다.

 

한번 형성된 것은 반드시 사라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 만으로도 수다원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 하다. 그래서 흐름에 든 자라 하였다.

 

무아의 가르침은 아라한 되는 가르침

 

그렇다면 거룩한 경지(아라한과)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아를 통찰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 이어 무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 되었을 때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22:59)”라는 질문하였다. 이에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문답식으로 무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오비구는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무아의 가르침은 아라한 되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무상, , 무아순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 , 무아로 요약된다. 이렇게 순서가 있는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장 먼저 무상의 가르침을 설하고 이어서 괴로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불교임을 증명하는 삼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순서를 바꾸어 제법무아, 일체개고, 제행무상순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특히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자부 하는 사람이 순서를 뒤바꾸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 있어서 삼법인은 항상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순서이다.

 

법구경 39번게송

 

찟따핫따는 마침내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였다.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재가로 환속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에 대한 게송이 법구경 39번게송이다.

 

 

Anavassutacittassa         아나와쑤따찟땃사

ananvāhatacetaso,          아난와하따쩨따소

Puññapāpapahīassa        뿐냐빠빠빠히낫사

natthi jāgarato bhaya.   낫티 자가라또 바양.

 

마음에 번뇌가 없고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

공덕과 악행을 떠난

깨어 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

 

(Dhp39, 전재성님역)

 

 

깨어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natthi jāgarato bhaya)” 고 하였다. 여기서 깨어 있는 자jāgarata의 번역어이다. Jāgarata에서 Jāgara‘awake; vigilant; watchful, 不眠, 警寤의 뜻이다. 그래서 Jāgarata깨어 있는 자로 번역되었다.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ざめている라 하여 눈 뜬 자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깨어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이유

 

게송에서 깨어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natthi jāgarato bhaya : DhpA.I.309에 따르면, 그가 깨어 있는 자라 불리는 이유는 다섯 가지 깨어 있음의 고리 즉,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잠을 자건 깨어있건 번뇌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까닭에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네 가지 길을 통해 추방된 것들이 다시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번뇌가 그를 쫒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흐름에 드는 길에 의해서 추방된 번뇌로 돌아 갈 수가 없고, 마찬가지로 한번 돌아는 길, 돌아오지 않는 길, 거룩한 길에 의해서 추방된 번뇌로 돌아 갈수가 없다.

 

(법구경 620번 각주, 전재성님)

 

 

깨어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라 하였을 때 두려움은 번뇌를 말한다. 찟따핫따가 임신한 처의 혐오스런 모습을 보고 출가하였지만 다시 환속하게 않게 된 것은 감각적 욕망의 번뇌가 약화 되었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이 극복 되지 않는 한

 

먹을 것을 탐하는 등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 휩싸이면 지혜가 완성되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다. 만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지혜가 채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수행의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미세한 물질계(색계)의 지혜나 비물질계(무색계)의 지혜, 더 나아가 출세간적 지혜도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감각적 욕망이다.

 

한번 돌아는 길(일래)과 돌아오지 않는 길(불환)

 

감각적 욕망의 극복은 흐름에 든 길(예류), 한번 돌아는 길(일래), 돌아오지 않는 길(불환), 거룩한 길(아라한) 순으로 이렇게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만일 찟따핫따가 한번 돌아 오는 길(일래)’의 지혜에 머물렀다면 전처에게 돌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돌아 간다고 해서 일래라 하였을지 모른다. 일래과는 아직까지 미세하나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길(불환)’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불환자의 단계에 이르면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뿌리 뽑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 갈래야 돌아 갈 수 없다. 이는 한번 추방된 번뇌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환이라 하였는지 모른다.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라한과로 완성된다. 거룩한 자가 되었을 때 그에게는 더 이상 번뇌가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거룩한 님, 즉 아라한의 삶은 어떤 것일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공덕과 악행을 떠난(Puññapāpapahīassa)”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Puññapāpapahīassa: DhpA.I.309에 따르면, 네 번째 길인 거룩한 길(아라한향)을 통해서 공덕이나 악행을 모두 끊은 자를 말한다. Sdk.26에 따르면, 거룩한 길을 통해서 미래의 재생의 원인이 되는 공덕과 악행을 모두 부순 자를 말한다.

 

(법구경 619번 각주, 전재성님)

 

 

아라한이 공덕(puñña)을 짓지 않는 이유는 재생의 원인을 가져 오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선업을 지으면 선업의 과보로 좋은 곳에 태어 나지만 선업을 짓지 않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다음 생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고 하여 아라한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행위를 하긴 하되 과보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위의 마음에 대하여 아미담마에서는 무인작용심(kiriya-citta)’이라 한다.

 

무인작용심(kiriya-citta)이란 무엇인가?

 

무인작용심은 문자 그대로 원인 없이 작용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제 속에 욕망의 괴물이…”성폭행 시대에, 불교적 해법과 무인작용심(2010-07-0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선심(善心), 불선심(不善心), 과보심(果報心),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이들 마음을 다시 세밀하게 분류 하면 89가지나 된다. 여기에 출세간의 마음을 좀더 세분하여 출세간의 선(5)의 마음을 추가하면 121가지 마음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말할 때 세간의 마음(욕계, 색계, 무색계)과 출세간의 마음(선의 마음을 제외)을 합한 89가지 마음으로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89가지 마음이 오로지 한 순간에 단 하나의 마음만 나온 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선한 마음인데, 동시에 불선한 마음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선심, 불선심, 과보심, 무인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 마음 중에 무인작용심에 대하여 부처님의 마음또는 아라한의 마음이라 한다. 왜 이런 명칭을 붙였을까?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경우 과거 전생에서부터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과 번뇌를 소멸 시켜 왔다. 따라서 대상을 보았을 때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作用心)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 원인이 없이 작용하는 마음(無因作用心)’이다.

 

무인작용심은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생산해 내지 않는다. 그래서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의 다시태어남의 원인이 되는 공덕행(puñña)도 하지 않고 악행(pāpa)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설령 아라한이 선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는다. 단지 선행을 하는 것으로 그칠 뿐 갈애로 발전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아라한은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다. 이는 자취 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

 

 

 

Bird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 자유롭다.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걸림 없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라한이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에 대하여 하늘을 나는 새또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으로 비유된다법구경에서는 번뇌 다한 아라한에 대하여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들의 자취는 찾기 어렵다. (Dhp93)”라고 하였다.

 

계행을 지키기 힘들면

 

법구경 인연담에서 찟따핫따는 무려 여섯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반복하였다. 일곱 번 째 출가에서 다시는 집으로 되돌아 오지 않았다. 이렇게 찟따핫따가 출가와 환속을 거듭한 이유는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찟따핫따는 처음에 맛 있는 것을 먹을 욕심으로 출가 하였다. 식탐으로 인한 출가는 출가이유가 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출가 하게 된 것은 전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서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을 통찰 하였다. 그 결과 흐름에 든 자가 되었다. 이렇게 한번 흐름에 들어 가자 이후에는 흐름대로 따르게 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거룩한 님, 아라한이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식탐 등 감각적 욕망이 극복 되지 않은 채 출가 한다는 것은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 가는 요인이 된다. 그럼에도 승단에 계속 남아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님들의 일탈과 막행막식에 대한 소식이 종종들린다. 이런 추문이 교계내에 그치지 않고 세상사람들 속으로 퍼져 나간다. 세상사람들이 승가의 추문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이는 불교망신에 해당된다그 피해는 고스란히 불자들에게 돌아 간다. 다종교사회에서 불자들은 세상사람들과 부딪치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망나니 행동을 하는 스님들은 하루 속히 환속해야 할 것이다. 술이 마시고 싶으면 재가로 되돌아 마음껏 마시면 될 것이다. 도박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승복을 벗고 하면 될 것이다. 처를 갖고 싶다면 머리를 기르며 살면 될 것이다. 계행을 지키기 힘들면 지금 당장 비구계를 반납하고 재가의 삶으로 돌아 가야 할 것이다.

 

 

2014-10-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