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똥처럼 말하는 사람 오물장 같은 견해, 정의로운 삶을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26. 12:03

 

 

똥처럼 말하는 사람 오물장 같은 견해, 정의로운 삶을 위하여

 

 

세월호와 관련하여 수 많은 글을 썼다. 그리고 문화제형식의 집회에 참석하여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론만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세월호사건이 터지기 이전에는 정치나 사회현상에 대하여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선거때나 약간 관심을 가질 뿐 냉소적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세월호특별법에 대한 처리과정을 지켜 보면서 한국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문제이다.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착한 사람들만 산다면 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정부도 필요 없고 나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공권력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 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에는 악인도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선한 행위를 하지만, 또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 악행을 하기도 한다.

 

선행을 하기가 쉽지 않다. 법구경 한문게송에서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한다(dhp183)”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세 살 먹은 아이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선행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것은 매우 쉽다.

 

긍정과 부정 두 가지만 있을 뿐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에서 댓글놀이를 하는 자들이다. 이는 최근 몇 주 동안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뉴스나 인터넷게시판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인터넷뉴스를 보면 사람들의 심리가 드러난다. 이편 아니면 저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것은 글을 쓸 때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된 것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 같은 기사에 대하여 긍정적 의견과 부정적 의견으로 갈린다.

 

어떤 글이든지 두 가지 관점으로 보면 틀림 없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다. 이런 이분법은 댓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세월호와 관련된 글 역시 긍정과 부정으로 갈린다.

 

그런데 부정적 글을 보면 가학에 가깝다. 마치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맞는 자를 때리는 식이다. 마치 힘 없는 아동이나 장애인을 학대하듯이 약자를 괴롭히는 이와 같은 가학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매체에서는 실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글 쓰는 행위는 구업(口業)

 

인터넷게시판에서 가학적인 글을 수 없이 본다. 모두 익명이다. 그래서 이름이 무엇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를 몇 살 먹었는지, 어떤 사상적 배경을 가졌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등을  알 수 없다. 다만 남겨긴 글로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뉴스의 댓글이나 게시판에 남겨진 글을 보면 대부분 불선심을 자극하는 글이다. 남겨진 글로 인하여 화를 돋구는 것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안보는 것만 못하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을 보고 안보고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민감한 이슈가 발생하였을 때 댓글이나 게시판의 글을 보게 된다. 이럴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 다수가 구업을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구업이라 말로서 짓는 행위를 말하는데 대체적으로 악행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 역시 구업이다. 글로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구업의 범주에 넣는다. 이렇게 본다면 댓글놀이를 하는 자들은 매일 구업을 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똥을 싸고 달아 난 것처럼

 

댓글놀이를 하는 자들의 글은 반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이다. 가면을 쓰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고 활개를 치듯이, 익명으로 댓글놀이 하는 자들의 글을 보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자들이 남겨 놓은 글을 보면 마치 을 싸고 달아 난 것처럼 보인다.

 

시골의 똥냄새

 

번잡한 도시에서만 생활하다가 도시 밖으로 나갈 때가 있다. 이 때 차창밖에는 농촌의 한가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어느 지역을 지날 때 후각을 자극할 때가 있다. 바람을 타고 날라온 똥 냄새이다. 대게 축산농가를 지날 때이다. 소나 돼지 등을 대량사육하는 곳을 지날 때면 어김 없이 나는 냄새이다. 그런 냄새에 대하여 어떤 이는 구수하다라고 하여 낭만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똥 냄새는 불쾌한 것이다. 특히 사람 똥이 그렇다.

 

아무리 작은 양의 똥일지라도

 

사람들이 누는 똥은 냄새가 지독하다. 이는 사람들이 잡식성이기 때문이다. 풀만 먹는 자라는 가축들과 달리 사람들은 못 먹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먹는 잡식성이기 때문에 누는 똥 역시 다양한 냄새를 풍긴다.

 

가축의 똥과 달리 사람의 똥은 역겹다. 그래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것이 사람똥이다. 이런 똥 덩이가 옷에 묻었을 경우 어떨까? 아무리 작은 양의 똥일지라도 악취를 풍길 것이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인터넷에서 가면을 쓰고 댓글놀이 하는 자들의 글은 똥이나 다름 없다. 반도적이고 반인륜적인 글은 악취나는 똥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는 다음과 같이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Tayo'me bhikkhave puggalā santo savijjamānā lokasmi. Katame tayo: gūthabhāī pupphabhāī madhubhāī.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발견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세 종류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똥처럼 말하는 사람, 꽃처럼 말하는 사람, 꿀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pupphabhāīsutta-꽃처럼 말하는 자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28, 전재성님역)

 

 

앙굿따라니까야는 법수(法數)’별로 분류 되어 있다. 하나부터 시작하여 열 두 개의 법수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법수가 유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법수별로 분류되어 있다 보니 교리적인 체계는 보이지 않는다

 

숫자 3과 관련 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Tikanipata’이다. 꽃처럼 말하는 자의 경역시 숫자 3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똥처럼 말하는 사람(gūthabhāī), 꽃처럼 말하는 사람(pupphabhāī), 꿀처럼 말하는 사람(madhubhāī) 이렇게 세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소개 하고 있다.

 

세 종류의 사람을 보면 마치 마카로니웨스턴 영화에서 ‘The bad(악한 자)’ ‘The ugly(추한 자)’ ‘The good(선한 자)’가 연상된다. 그러나 두 개는 맞지만 하나는 다르다.

 

똥처럼 말하는 사람이란?

 

경에서 분류한 똥처럼 말하는 사람은 어떤 스타일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puggalo gūthabhāī: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sabhaggato vā parisaggato vā ñātimajjhagato vā pūgamajjhagato vā rājakulamajjhagato vā abhinīto sakkhipuṭṭho "ehambho purisa ya jānāsi, ta vadehī"ti. So ajāna vā āha "jānāmī" ti, jāna vā āha "na jānāmī" ti, apassa vā āha, "passāmī"ti. Passa vā āha, "na passāmī"ti. Iti attahetu vā parahetu vā āmisakiñcikkhahetu vā sampajānamusā bhāsitā hoti. Aya vuccati bhikkhave puggalo gūthabhāī.

 

수행승들이여, 누가 똥처럼 말하는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공회 가운데서나 군중가운데서나 친족 가운데서나 조합원 가운데서나 법정가운데서나 증인으로 소환되어, ‘이 사람아, 와서 자네가 말해 보게!’라고 추궁받으면, 그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거나,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이 똥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pupphabhāīsutta-꽃처럼 말하는 자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28, 전재성님역)

 

 

똥처럼 말하는 자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말한다. 그래서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자신을 위해,  혹은 2)타인을 위해,  또는 3)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라 하였다. 마치 요즘 종편채널을 보는 것 같다.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종편채널을 보면 일방적이다. 특히 이 땅의 가장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에게 매우 가혹하게 대한다. 특히 세월호와 관련하여 그렇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에 표현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보수기득권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자신들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득권층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다고 보니 강자에게는 관대하고 약자에는 한없이 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하이에나와 같다. 그런 종편의 행태는 악취나는 것이다. 그래서 똥처럼 말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The bad(악한 자)’‘The ugly(추한 자)’

 

똥처럼 말하는 자들은 주로 보수기득권층에서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불법, 탈법, 불로소득으로 이루어진 부와 지위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부류에  철없는 노인들의 보수단체, 벌레 보다 못한 반인륜적인 일베가 있다.

 

이렇게 기득권자, 그리고 기득권자를 대변하는 종편, 그리고 철부지 노인들과 패륜의 일베 등이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쏟아 내는 말은 한결 같이 악취가 풍긴다는 것이다. 경에서처럼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거나,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똥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마카로니 웨스턴식으로 말하면 ‘The bad(악한 자)’‘The ugly(추한 자)’ 라 볼 수 있.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경에서는 꽃처럼 말하는 사람 꿀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똥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세 종류의 사람

   

  

똥처럼 말하는 사람

(gūthabhāī)

1)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거나,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

2)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 하는 자

1)악한 자

2)거짓말 하는 자

(The bad)

꽃처럼 말하는 사람

(pupphabhāī)

2)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알면 ‘안다’고 말하며, 보지 못했다면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

2)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

1)정직한 자

2)거짓말 하지 않는 자

(The good)

꿀처럼 말하는 사람

(madhubhāī)

거친 말을 버리고 거친 말을 삼가는 자

온화하고 듣기에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고 상냥하게 말하는 자

 지혜 있는 자

 

 

표를 보면 똥처럼 말하는 사람은 마카로니 웨스턴식으로 ‘The bad(악한자)’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여 악취가 나는 자들이다. ‘꽃처럼 말하는 사람‘The good (선한자)’이다. 정직한 자를 말한다. 그래서 꽃 본 듯이 가까이 하고 싶은 자이다.

 

꽃보다 꿀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꿀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왜 꿀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달콤하기 때문이다. 꽃은 눈으로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꿀은 맛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오감이 동원 된다. 이렇게 본다면 꽃보다 꿀이다. 그런 꿀과 같은 사람은 거친 말을 삼가는 자, 상냥하게 말하는 자이다.

 

인터넷 댓글이나 게시판에는 똥처럼 말하는 사람은 넘쳐난다. 그러나 꽃처럼 말하는 사람은 보기가 드믈다. ‘꿀처럼 말하는 사람은 더욱 더 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게시판에는 늘 악취가 진동한다.

 

초단위로 올려진 글을 보면

 

인터넷에서 똥처럼 말하는 사람은 마치 똥을 싸 놓고 달아 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차를 긋고 줄행랑 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똥과 같은 글을 보면 악취가 풍긴다. 그런데 똥을 한 번 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 저곳이 온통 똥천지이다. 이는 댓글열어보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가면을 쓰고 글을 올리는 자의 댓글에는 악취가 진동한다. 그런데 다른댓글보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클릭하면 동일 필명의 수없이 많은 다른 댓글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올린 시간을 보면 거의 초분단위이다. 상당수는 똑 같은 내용이다. 아마 하루 종일 댓글달기 놀이를 즐기는 자들 같다.

 

댓글놀이를 즐기며 악담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 상당수가 알바로 의심된다. 이는 초분단위로 올려진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론 조작을 위하여 돈을 받아 가며 일을 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이렇게 매순간 올려진 글을 모으면 그 수를 해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똥과 같은 같은 글이 모이고 모이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Guthakūpo yathā assa

samapuṇṇo gaavassiko,
Yo ca evarūpo assa

dubbisodho hi sāgao.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부정한 자는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stn279)

 

(Dhammacariyasutta-정의로운 삶의 경, 숫따니빠따 Sn2.6, 전재성님역)

 

 

옛날 변소를 보면

 

요즘은 대부분 수세식화장실을 사용한다. 그러나 불과 삼사십년전만 하더라도 변소를 이용하였다. 구덩이를 크게 판 다음 널판지를 올려 놓고 그 위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다. 이때 변이 바닥에 떨어질 때 똥물이 튀기도 한다.

 

변소에 똥이 가득 차면 똥을 퍼내야 한다. 그 때 똥차가 등장한다. 호수를 이용하여 똥을 퍼내는 것이다. 이 때 똥냄새가 천지를 진동한다. 일년에 몇 차례 이런 똥냄새를 맡아야 했다.

 

변소를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시골이나 산중에 있는 사찰에 가면 볼 수 있다. 그런 변소의 특징은 시간이 지날수록 똥구덩이에 똥이 쌓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똥으로 가득하게 되어 악취가 진동한다. 악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무리 적은 양의 똥일지라도 그것은 악취를 풍긴다. 그런 똥이 쌓이고 쌓이면 근처에 가지도 못할 것이다. 악행도 마찬가지이다.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부정한 자는 깨끗해지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고.’고 하여

 

똥과 같은 악행에 대하여 법구경에도 유사한 게송이 있다. 

 

 

Māpamaññetha pāpassa

na ma ta āgamissati.
Udabindunip
ātena

udakumbho pi pūrati,
P
ūrati bālo pāpassa,

thokathokam-pi ācina.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고.’고 하여

악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어리석은 자는 조금씩 모은 악으로 가득찬다. (dhp121, 전재성님역)

 

 

도공이 만든 항아리는 비가 올 때에 열어 두면, 빗방울이 떨어져 점차적으로 물로 가득 찰 것이다. 마찬 가지로 어리석은 자의 악행도 모아 놓으면 악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들은 왜 악행을 서슴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초분단위로 댓글을 다는 자들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마치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 맞은 자를 때리는 듯한 가학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일처럼 보는 것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고.’고 하여 (na ma ta āgamissati)”라는 말로 표현 되어 있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교통사고 등으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세월호로 희생당한 사람들 역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통사고도 교통사고 나름이다. 사고가 났지만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제도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점을 고치지 않는다면 희생자들은 억울한 죽음이 된다. 그야말로 재수 없게 죽었다라거나 죽은 놈만 억울하지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억울한 죽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제2, 3의 세월호사건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족들과 국민들이 재발방지를 위한 법을 만들고자 한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 언어폭력을 일삼고 있는 자들은 약자를 괴롭히는 패륜을 자행하고 있다. 왜 그들은 반도덕일까? 그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만은 그런 일이 닥칠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매번 똥을 싸고 달아 나듯이 악플로서 악행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악행의 열매가 익기 전 까지는

 

똥이 쌓이면 똥구덩이에 가득하게 된다. 악행도 쌓으면 악으로 가득하게 된다. 하지만 악행의 열매가 익기 이전 까지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이전의 선행으로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라도 행운이 다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악행에 대한 과보이다. 똥으로 가득찬 똥구덩이와 같은 악행이다.

 

똥구덩이에서 사는 똥벌레들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똥구덩이에서 사는 똥벌레들과 같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똥벌레가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똥벌레는 ‘나는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똥벌레들을 무시한다.

 

(똥벌레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5, 전재성님역)

 

 

 

dung beetle

 

 

여기서 똥벌레는 쇠똥구리로 볼 수도 있지만 변소에 사는 구더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런 구더기의 특징은 무엇일까?

 

기어이 똥통간으로 향하는 구더기

 

구더기는 깨끗한 곳을 싫어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똥이 좋아 똥통에서 사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구더기를 위하여 깨끗한 방에 원앙금침을 깔아 주면 어떻게 될까? 기어이 똥통간으로 향하고 말 것이다.  구더기는 똥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똥통간이 있는 변소는 구더기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대부분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삿된 견해는 어떤 것일까? 아마 대부분 단멸론적 허무주의라 볼 수 있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함께 파괴되어서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 지금 여기에서 즐겁게 살다 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 추구하다 보면 결국 괘락주의로 빠지기 쉽다. 이처럼 쾌락에 기반을 둔 단멸론적 견해를 가졌을 때 인과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는 등 인과를 부정하게 된다.

 

인과를 부정하게 되면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금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들이 이에 해당된다.

 

키질하여 쌀겨를 날리듯이

 

악취나는 자들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정한 자들은 깨끗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주변에 악취 나는 자들이 있다면, 키질하여 쌀겨를 날리듯이 모두 화합하여 물리쳐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다시 한번 틀림 없음을 확인 하게 된다.

 

 

 

정의로운 삶의 경(Dhammacariyasutta)

 

 

Dhammacieya brahmacieya etadāhu vasuttama,
Pabbajitopi ce hoti ag
ārasmā anagāriya.

 

정의로운 삶, 순결한 삶,

이것을 위없는 재보라고 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stn274)

 

 

So ce mukharajātiko vihesābhirato mago,
J
īvita tassa pāpiyo raja vaḍḍheti attano.

 

만약 거친 말씨를 쓰고

남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짐승과 같다면,

그 사람의 생활은 더욱 악해지고

자신을 더러운 먼지로 오염시킬 것이다. (stn275)

 

 

Kalahābhirato bhikkhu mohadhammena āvao,
Akkhatampi na j
ānāti dhammā buddhena desita.

 

논쟁을 즐기는 수행승은

우매한 성품으로 덮여있어

깨달은 님께서 친히 설한

설법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stn276)

 

 

Vihesa bhāvitattāna avijjāya purakkhato,
Sa
kilesa na jānāti magga nirayagāmina.

 

그는 무명에 이끌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옥으로 가는 길인

번뇌를 알지 못한다. (stn277)

 

 

Vināpāta samāpanno gabbhā gabbha tamā tama,
Save t
ādisako bhikkhu pecca dukkha nigacchati.

 

참으로 이러한 수행승은

타락한 곳에 태어난다.

모태에서 모태로, 암흑에서 암흑으로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게 된다. (stn278)

 

 

Guthakūpo yathā assa samapuṇṇo gaavassiko,
Yo ca evar
ūpo assa dubbisodho hi sāgao.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

부정한 자는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 (stn279)

 

 

Ya evarūpa jānātha bhikkhavo gehanissita,
P
āpiccha pāpasakappa pāpaācāragocara.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자는, 실제로는 세속에 묶여,

악을 원하고 악한 의도를 갖는 자로서,

그의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stn280)

 

 

Sabbe samaggā hutvāna abhinibbijjayātha na,
K
āraṇḍava1 niddhamatha kasambu cāpakassatha.

 

그대들은 모두 화합해서

그러한 사람을 물리치고,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버려라. (stn281)

 

 

Tato palāpe vāhetha assamae samaamānīne,
Niddhamitv
āna pāpicche pāpaācāragocare.

 

그리하여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하는 악한 욕망에 사로잡혀있고,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그 쌀겨들을 날려버려라. (stn282)

 

 

Suddhā suddhehi savāsa kappayavho patissatā,
Tato samagg
ā nipakā dukkhassanta karissathāti.

 

청정한 자들이라면 서로 새김을 가지고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라.

그리하면 서로 화합하여 슬기롭게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리라. (stn283)

 

(Dhammacariyasutta-정의로운 삶의 경, 숫따니빠따 Sn2.6, 전재성님역)

 

 

2014-09-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