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지금 철학하자는 건가? 불자들이 믿는 종교로서 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9. 19:05

 

 

지금 철학하자는 건가? 불자들이 믿는 종교로서 불교

 

 

 

글을 쓸 때는 폭풍처럼

 

글을 쓸 때는 폭풍처럼 쓴다. 이른 아침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머리 속에 구상해 놓은 시나리오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 그러다 보면 옆을 돌아 볼 시간도 없이 몰입하게 된다. 아마 이런 경우를 글쓰기삼매라 해야 할까?

 

글이 완성되고 난 후 인터넷에 올리면 한숨 돌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너무 에너지를 소비 하였기 때문에 휴식을 하여야 한다. 그럴 경우 밖으로 나간다. 빌딩 바로 뒤에 동네공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몇 십분 보내게 된다.

 

공원에는 여러 구루의 나무가 있다. 모니터만 바라보다 나무를 바라보면 눈의 피로가 풀린다. 또 공원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그러나 평일 어린이 놀이터에는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자그마한 동네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저사람은 죽는 것이 소원이래요

 

한가한 동네공원에 노인 두 분이 벤치에 앉아 있다. 겉으로 보기에 90세 가까이 보인다. 두 분이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잘 차려입었지만 너무 나이가 들어서인지 힘이 없어 보였다. 어느 할아버지가 어느 할머니를 향하여 저사람은 죽는 것이 소원이래요라고 말한다. 할머니를 보니 등이 구부러져 있고 지팡이에 의지 하고 있지만 매우 정정해 보인다. 다른 노인이 말하기를 “94세래요라 한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동네공원에서 어린이들은 보이지 않고 노인들만 보인다. 이렇게 노인들이 많다보니 분위기가 쳐져 보인다. 마치 죽음을 앞둔 것처럼 표정도 그다지 밝지 않다. 이런 노인들을 볼 때 누구에게나 닥칠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형편없이 늙어 버린 노인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 지나치기 쉽다.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에는 절실히 다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천사라 하였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노인을 보았을 때 천사 보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의 이야기

 

부처님은 천안을 가졌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 넘는 하늘 눈으로 죽거나 태어나고 비천하거나 존귀하고, 아름답거나 추하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모든 뭇삶을 본다.(M130)”라 하였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는 자는 선처에 나고, 악행을 하면 악처에 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악처에 난 자들과 관련하여 천사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야마왕의 면전에 섰을 때

 

맛지마니까야에 천사의 경(M130)’이 있다. 다섯 가지 천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천사의 경고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늙음에 대한 것이 있다.

 

경에 따르면 야마왕이 여보게, 그대는 세상에서 두 번째 천사가 나타난 곳을 보지 못했는가?(M130)”라고 묻는다. 악업으로 죄악을 지은 자가 지옥의 야마왕 면전에 섰을 때이다. 이때 어느 뭇삶은 대왕이여,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삶의 과정에서 수 없이 보아 왔음에도 두 번째 천사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자 야마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마왕]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태어나 팔십이나 구십이나 백세가 되어 늙고, 허리가 서까래처럼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몸을 떨며 걷고, 병들고, 젊음을 잃고,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사지가 얼룩이 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Devadūta sutta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두 번째 천사는 늙은이이다. 백세 가까이 된 사람들은 신체적 기능이 다하여 왜소하고 초라해 보인다. 마치 자동차가 수명이 다하여 낡아 빠진 것처럼 늙음 역시 폐차 일보 직전처럼 비참하기 그지 없다.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서?

 

형편없이 늙어버린 노인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무관한 것일까? 만일 나와 무관한 남의 일로 보았다면 이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때 노인은 천사에 해당되고, 형편없이 늙어 버린 모습을 보는 것은 천사의 경고에 해당된다.

 

마치 폐차를 앞둔 차 처럼 형편없이 늙어 버린 노인을 보았을 때 그냥 지나친다면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생의 천사, 노의 천사, 사의 천사를 보내 경고를 하였음에도 나와 관련 없다 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일삼다가 야마왕에 섰을 때 무어라 말할까? 이에 대하여 어느 뭇삶은 야마왕에게 대왕이여, 저는 방일하였습니다라고 후회한다. 후회한다고 하여 자신이 지은 죄가 용서될까?

 

다섯 천사가 있는데

 

천사의 경에 따르면 모두 다섯 종류의 천사가 등장한다. 그런 천사는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것이다. 이 다섯 천사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다섯 천사

내용(M1300

 

1

갓난아이

 

‘이보게, 인간 가운데 갓난아이가 침대에서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하고 누워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태어남()

2

노인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태어나 팔십이나 구십이나 백세가 되어 늙고, 허리가 서까래처럼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몸을 떨며 걷고, 병들고, 젊음을 잃고,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사지가 얼룩이 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늙음()

3

병자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중태이고,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앉혀 주어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병듦()

4

범죄자

 

‘이보게, 왕들이 인간 가운데 도둑이나 범죄자를 잡으면 갖가지 형벌로 다스리는 것, 즉 채찍으로 때리고,… 산 채로 꼬챙이에 끼워 죽이고, 칼로 머리를 잘라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형벌(26가지)

5

죽은자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되어서 부풀게 되고 푸르게 되고 고름이 생겨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죽음()

 

 

다섯 천사를 보면 다름 아닌 생노병사에 대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에 나오는 사고(四苦)를 말한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 된 것이 형벌의 고통이다. 그런데 형벌의 고통은 마치 지옥고와 같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모두 26가지 형벌을 소개 하고 있다. 그 중에 일부를 보면 “…뜨거운 기름에 끓여 죽이고, 개에 먹히게 해서 죽이고, 산 채로 꼬챙이에 끼워 죽이고, 칼로 머리를 잘라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M130”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지옥고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나 다름 없다.

 

왜 천사(天使)라 하였을까?

 

표를 보면 고통을 겪는 자들은 갓난아이, 노인, 병자, 범죄자, 죽은자이다. 그런데 이들을 천사(天使)’라 하였다. 여기서 천사라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Devadūta’를 번역한 것이다.

 

Devadūta‘Deva(deity) +dūta(a messenger)’의 뜻으로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m.] gods' messenger’의 뜻이다. ‘신의 전령사라는 뜻이다.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가 천사인 것이다.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다. 여기에 하나 더하여 형벌이 있다. 그래서 갖난아이의 모습으로, 늙은이의 모습으로, 병자의 모습으로, 범죄자의 모습으로, 죽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한다. 늙음이나 병듦이나 죽음이 아직 자신에게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는 그대가 스스로

 

자신에게 닥치지 않으면 남들의 불행에 무관심하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젊음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그대의 악한 행위는 그대의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나 자매나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친척이나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악한 행위는 그대가 스스로 행한 것이다. 그대가 그 과보를 겪어야한다.(M130)”라 하였다. 그런 과보는 어떤 것일까?

 

대지옥에 대한 게송

 

천사의 경에 따르면 천사의 경고를 무시한 자는 지옥고를 겪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지옥고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옥 중의 지옥인 대지옥이 있다. 대지옥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Catukkaṇṇo catudvāro vibhanto bhāgaso mito,
Ayop
ākārapariyanto ayasā paikujjito.
Tassa ayomay
ā bhūmi jalitā tejasā yutā,
Samant
ā yojanasata pharitvā tiṭṭhati sabbadā

 

대지옥은 사각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변에 세워진 네 문이 있고

철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쇠 지붕으로 덮여 있다.

 

그 바닥도 쇠로 되어 있는데

작열할 때까지 데워진다.

그 경계가 백 요자나에 이르며,

어느 때나 존속한다.”

 

(Devadūta sutta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대지옥은 사방이 모두 로 되어 있다. 이는 쇠가 달구어질 때 극심한 고통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대지옥에서는 동쪽의 벽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서쪽의 벽에 부딪친다….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M130)”라 하였다. 이쪽으로 가도 괴롭고 저쪽에 가도 괴롭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다. 차라리 죽어 버리면 지옥의 고통이 끝날 것이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다고 하였다.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지옥에서는 왜 죽을 수 없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So tattha dukkhā tippā kaukā vedanā vedeti.

Na ca tāva kāla karoti. Yāva na ta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

 

(Devadūta sutta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Niraya

 

 

이 구절은 모든 지옥고에 적용되고 있는 정형구이다. 마치 노래가사의 후렴구처럼 지옥고를 설명한 다음에 반드시 들어 간다.

 

지옥에서는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 (Na ca tāva kāla karoti. Yāva na taṃ)라 하였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곳이 지옥이다. 인간세상에서는 살기 힘들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 그만이지만, 지옥에서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악업에 대한 과보를 다 할 때 까지 결코 지옥문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섯 대지옥이 있는데

 

천사의 경에 소개된 대지옥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았다.

 

 

No

대지옥

표현(M130)

  

1

대지옥

mahāniraya

사각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변에 세워진 네 문이 있고

철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쇠 지붕으로 덮여 있다.

그 바닥도 쇠로 되어 있는데 작열할 때까지 데워진다.

그 경계가 백 요자나에 이르며, 어느 때나 존속한다.”

 

2

똥이 가득 찬 대지옥

mahanto gūthaniraya

많은 바늘이 솟아난 입을 가진 동물이 그의 가죽을 자르고, 가죽을 자르고 나서 피부도 자르고, 피부를 자르고 나서 살도 자르고, 살을 자르고 나서 근육도 자르고, 근육을 자르고 나서 뼈도 자르고 뼈를 자르고 나서 골수를 먹는다.”

대분뇨지옥

3

숯불이 시뻘겋게 달궈진 대지옥

mahanto kukkulaniraya

-

대열지옥

4

커다란

가시나무 숲

mahanta simbalīvana

그 가시나무는 높이가 일 요자나이고 가시가 십육 손가락 크기이고 뜨겁고 불타고 작열한다. 그는 그 나무를 오르고 내린다.”

대연면수지옥

5

커다란

칼잎나무 숲

mahanta asipattavana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그의 손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수족을 자르고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르고 귀와 코를 자른다.”

대검엽지옥

6

커다란 잿물이 흐르는 강

mahatī khārodikā nadī

흐름을 따라 운반되기도 하고 흐름을 거슬러 운반되기도 하고 흐름을 따르고 흐름을 거슬러 운반되기도 한다.”

대회화지옥

(베라따니강)

 

 

 

 

Niraya

 

 

경에 소개된 대지옥은 여섯 곳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지옥에서 받는 고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해 놓은 장면이 있다.

 

대지옥의 끔찍한 장면

 

경에서는 묘사된 대지옥은 끔찍하다. 다음과 같은 끔찍한 장면이다.

 

 

수행승들이여, 지옥의 옥졸들은 이와 같이 묻는다. ‘이 사람아,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존자여, 나는 목이 마릅니다.’ 수행승들이여, 지옥의 옥졸들은 뜨겁고 불타고 시뻘겋게 달궈진 쇠막대로 그 입을 벌리고, 뜨겁고 불타고 시뻘겋게 달궈진 청동을 그 입에 집어넣는다. 그것은 입술도 태우고 입도 태우고 목구멍도 태우고 가슴도 태우고 대장도 태우고 소장도 태우고 항문으로 나온다.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

 

(Devadūta sutta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배가 고프다고 하면 옥졸들이 시뻘건 쇠막대를 입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 목이 마르다허면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역시 시뻘건 쇠막대를 입에 넣는다. 그것도 목구멍부터 넣어 가슴, 창자 등을 태워 버린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악업이 다 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고 또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 대지옥이라 한다.

 

지옥은 실재할까?

 

지옥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죽으면 고통이 끝나버릴 것으로 생각하여 어서 죽기를 바라지만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곳이 지옥이다. 이런 지옥은 실재하는 것일까?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 kho pana aha bhikkhave, nāññassa samaassa vā brāhmaassa vā sutvā vadāmi. Api ca yadeva me sāma ñāta, sāma diṭṭha, sāma vidita tamevāha vadāmīti.

 

수행승들이여, 나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로부터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보고, 실제로 발견한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Devadūta sutta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Niraya

 

 

결론적으로 부처님은 지옥이 실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경에서 내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보고, 실제로 발견한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천사의 경에서는 대지옥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이야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로부터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라 한 것이다. 부처님이 직접 본 것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보고, 실제로 발견한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Api ca yadeva me sāma ñāta, sāma diṭṭha, sāma vidita tamevāha vadāmīti.)”라 하였다.

 

지옥은 실재한다

 

여기서 실제라 번역한 말이 사망(sāma)이다. sāma‘evenly; equally’의 뜻이다. ‘oneself; by oneself’의 뜻도 있다. 그래서 스스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번역어를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발견한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바꿀 수도 있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영역본 MDB에서“I tell you this as something that I have actually known, seen, and discovered by myself”라 되어 있다. 부처님이 실제로 알았고, 보았고, 발견한 것을 말씀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옥은 실재하는 것이다.

 

지금 불교철학하자는 건가?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경전에 묘사 되어 있는 지옥이야기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우면 지옥이라 하고 마음이 즐거우면 천상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말이다.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스님이나 학자가 많다. 보통불자들은 천상과 지옥과 같은 육도가 있고 삼계가 있어서 당연히 윤회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수행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들일수록 내생과 윤회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경전을 의심하는 회의론자들이 그렇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대부분 자신의 감각적인지와 과학적검증에 의존한다. 자신의 눈이나 귀로 확인 된 것이 아니면 못 믿는 것이다. 설령 경전에 쓰여진 부처님말씀일지로 믿지 않는다. 후대에 편집되었거나 누구나 소설을 쓴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걸러 내자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철학으로 보는 것과 같다.

 

불교가 철학적인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를 철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한다면 불교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그리고 사념처 등 근본교리로만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를 철학으로 본다면 삼계는 부정된다. 당연히 내생이나 윤회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불법승 삼보도 의미가 없다. 단지 수행자만 있을 뿐 신앙으로서 불교는 없게 된다. 이것이말로 타종교에서 바라는 것이 아닐까?

 

또 불교에 대하여 과학적 시각으로만 본다면 역시 종교로서 불교는 설자리가 없다.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초월적존재와 신비한 현상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교는 종교이다. 그것도 으뜸 가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다. 그럼에도 회의론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철학 또는 과학적 관점에서 다루려고만 한다. 대체 무엇 하자는 것인가? 지금 철학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과학하자는 것인가? 지금 장난하는가?  

 

부처님이 지옥이야기를 한 이유는?

 

삼계를 부정하는 자들은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부처님의 지옥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실제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아마 후대에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말씀 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부처님은 경에서 지옥을 생생하게 묘사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렇게 지옥을 묘사하고 다섯 명의 천사와 천사의 메시지를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겁주기 위한 것일까? 경의 말미를 보면 왜 부처님이 왜 다섯 천사이야기와 지옥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방일하네.

비속한 몸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랜 세월 슬퍼한다.

 

천사의 경고를 받고 나서야

이 세상에서 참사람들은

언제나 고귀한 가르침에

교훈을 찾고 방일하지 않는다.

 

집착에서 두려움을 보고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하고

태어남과 죽음을 부수었다.

 

안온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Devadūta sutta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2014-09-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