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부처님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1. 12:06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부처님의 가르침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오랜 만에 산길을 걸었다. 산길을 걸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힐링이 된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근심어린 마음도 산길을 걷자 마자 금새 누그러 드는 것을 보면 숲속이야말로 최고의 마음치유장소라 본다. 여기에 하나 더 하면 햇볕이다.

 

햇볕을 받을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당시 저항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시 중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시인은 햇살에 대하여 온몸과 대비 하여 표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라고 표현하였다.

 

온몸에 햇살을 받으면 살맛이 난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태양빛을 직접 접촉하기 때문이다. 햇빛의 생명에너지가 그대로 내 몸에 전달 되었을 때 삶의 활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을 초입의 햇볕은 매우 강렬하다. 너무 강렬해서 따가울 정도이다. 이렇게 강렬한 햇볕과 숲이 어우러지면 살맛이 난다. 숲속에 들어 옴에 따라 세상사의 근심과 걱정을 놓아 버리고 강렬한 햇볕으로 인하여 열기를 느낄 때 자연스럽게 힐링이 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운동이라 한다. 방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와서 걸으라는 것이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어 몸에 활력을 불어 넣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햇볕이다. 햇볕도 안드는 곳에 하루 종일 있으면 마치 식물이 시들어 가듯이 점점 우울해지지만, 일단 밖으로 나오면 기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강렬한 햇살을 받으면 기분이 금방 전환 된다. 그래서 우울하거나 기분이 쳐져 있을 때 걸으면서 햇볕을 보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숲길을 걷는 것이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삶의 활력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숲이 주는 생명력이다.

 

초가을에 마주 치는 것들

 

늘 다니는 산길이 있다. 대로 하나만 건너면 관악산으로 연결 되는 산길이다. 산길을 걸어가면 늘 보던 것들과 마주 친다. 9월초 초가을에 마주 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열매이다.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산길에서 보는 작은 텃밭에서는 결실의 산물인 열매가 기세 좋게 커나가고 있다. 기괴하게 구부러진 가지와 마치 작은 축구공을 연상케 하는 호박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 하다.

 

 

 

 

 

 

 

기품이 있는 들에 핀 국화

 

산길을 걷다 보면 가을에 피는 꽃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가을의 꽃이라 볼 수 있는 들국화를 보면 기품이 있어 보인다.

 

 

 

 

 

탐스런 것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가을이다. 이는 초원에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하늘은 높고 곡식이 익어 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에는 곡식만 익어 가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열매도 익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열매를 볼 때 마다 늘 느끼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매우 탐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꽃이 필 때와 또 다르다.

 

꽃이 피면 모두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라고 말하면서 쳐다 본다. 그러나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커나갈 때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열매가 어느 정도 커서 탐스런 모습을 보일 때 그제서야 다시 한번 쳐다 보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왜 유실수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것이 감나무이다. 농촌이건 도시이건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나무를 선호하는 것은 그 열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도로에 유실수를 심자고 한다. 이왕 나무를 심을 바에 열매 있는 나무를 심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로에는 유실수가 수도 없이 많이 심어져 있다. 은행나무가 대표적이다.

 

은행나무에는 열매가 열린다. 그것도 암나무에서이다. 그래서 은행나무가 있지만 모두 열매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열매가 두드러진 나무는 꽃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은행나무꽃을 보지 못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나무를 바라 보는 두 개의 시각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꽃이고 또 하나는 열매이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관상용 꽃나무를 심고, 열매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감나무와 같은 유실수를 심을 것이다. 이렇게 꽃이냐 열매냐의 차이로 선택이 달라진다.

 

나무를 심는다면 꽃도 보고 열매도 따는 나무가 가장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대하여 우리나라 속담으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일 것이다. 꽃도 보고 열매도 따는 대표적인 나무가 배나무이다. 배꽃의 경우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잎이 나기 때문에 벚꽃과 유사하다. 그러나 벚꽃의 경우 열매는 보잘 것 없다. 반면 배나무는 엄청나게 큰 열매를 맺어 대표적인 님도 보고 뽕도 따는나무에 해당된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감나무이다. 그러나 감꽃을 보기는 쉽지 않다. 잎사귀가 먼저 나고 이어서 꽃이 피기 때문이다. 그런 꽃도 매우 작아 잎사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실하는 것을 보면 마음을 풍성하게 해준다. 마치 바이블에서 시작은 미미 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을 연상케 해 주는 것 같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일단 피면 어떤 식으로든지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본다면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을 상기 시켜 주는 것 같다.

 

사랑을 하면 자식이 생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듯이 사랑을 하면 자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자식이 생겨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랑만 할 뿐 자식이 없이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꽃만 피고 열매가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단지 꽃구경 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실속이 없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랑만 할 뿐 자식이 없다면 역시 실속이 없는 것과 같다.

 

사랑의 열매인 아이를 갖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까? 연령에 따른 인구분포도가 항아리형이 될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미래세대가 점점 줄어 들게 되어 국력은 쇠퇴 할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의 희망이다. 그런 아이들은 사랑의 결실이다. 서로 사랑하여 생명과도 같은 자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식을 잃어 버린 어미의 마음은 어떠할까?

 

부모의 마음은?

 

세월호참사로 자식을 잃어 버린 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어떻게 떼죽음을 당하였는지 궁금하여 알고자 한다. 그래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10일이 넘도록 노숙하며 대통령을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여성대통령은 만나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가족이 없다. 한번도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자식도 없다. 이렇게 대통령은 가정도 자식도 없다. 그래서일까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눈물로 호소한다.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자비(慈悲)’에 호소 하는 것이다. 자비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다지 자비롭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면으로 본다면 매우 냉정해 보인다. 냉정하다 못해 무자비(無慈悲)’하게 보인다.

 

만일 대통령이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세월호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의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가정도 없고 자녀도 없는 대통령을 두고 있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사랑을 하면 아이가 생겨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가르침에서도 적용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 magga)’(, phala)’이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라고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와 사쌍팔배(四雙八輩)

 

도를 이룬다는 것은 꽃이 핀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여 이를 실천하였을 때 마치 꽃이 피는 것과 같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이 순리이듯이, 도를 이루면 또한 과보를 얻는다. 마치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과 같다. 대학에서 학사나 석사, 또는 박사과정을 공부 하면 그에 대한 결과로서 학사나 석사, 또는 박사학위가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도를 닦다 보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하였을 때 도()에 대하여 막가(magga)라 하고, ()에 대하여 팔라(phala)라 한다. 그래서 도과에 대하여 막가-팔라라 한다. 이 때 빠알리어 팔라(phala)’라는 말은 열매(fruit)’를 뜻한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를 닦으면 역시 열매를 맺는다. 그런 열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을 근거로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도를 닦아

열매를 맺는다

비고

1

첫 번째 도의 지혜

예류도의 지혜

첫 번째 성자

2

첫 번째 과의 지혜

예류과의 증득

두 번째 성자

3

두 번째 도의 지혜

일래자의 지혜

세 번째 성자

4

두 번째 과의 지혜

일래자의 증득

네 번째 성자

5

세 번째 도의 지혜

불환자의 지혜

다섯 번째 성자

6

세 번째 과의 지혜

불환자의 증득

여섯 번째 성자

7

네 번째 도의 지혜

아라한의 지혜

일곱 번째 성자

8

네 번째 과의 지혜

아라한의 증득

여덟 번째 성자

 

 

표를 보면 네 가지도와 네 가지 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향사과(四向四果)라 한다. 그리고 도와 과 네 쌍으로 여덟 성자가 있다. 이를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성자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대하여 얻은 과보에 대하여 사향사과라 하고  또는 이를 실천한 자에 대하여 사쌍팔배의 성자라 한다.

 

도의 인식과정과 과의 증득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도는 무엇이고 과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Ariyaphalarasānubhavananti na kevalañca kilesaviddhasanaññeva, ariyaphalarasānubhavanampi paññābhāvanāya ānisaso. Ariyaphalanti hi sotāpattiphalādi sāmaññaphala vuccati. Tassa dvīhākārehi rasānubhavana hoti. Maggavīthiyañca phalasamāpattivasena ca pavattiya. Tatrāssa maggavīthiya pavatti dassitāyeva.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B. The Taste of the Noble Fruit]

the “noble fruit.” Its taste is experienced in two ways, that is to say, in its occurrence in the cognitive series of the path, and in its occurrence in the attainment of fruition. Of these, only its occurrence in the cognitive series of the path has been shown (XXII.3f.)

 

(영역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함: 오염원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과의 맛을 체험하는 것도 통찰지수행으로 얻는 이익이다. 성스러운 과란 예류과 등 사문의 과를 말한다. 이 맛을 두 가지로 체험한다. 즉 도의 인식과정과 과의 증득 에서 생길 때 [체험한다.] 이 가운데서 도의 인식과정에서 성스러운 과가 생기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XXII. 15-17)

 

(청정도론 23 3, 대림스님역)

 

 

도와 과에 대하여 인식과정증득으로 보았다. 도는 인식과정으로 보고 과는 증득으로 본 것이다. 도를 닦아 가는 과정에서 얻게 지혜를 도의 인식과정(Maggavīthiyañca: the cognitive series of the path)라 본 것이고, 인식과정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 과의 증득(Phalasamāpattivasena: the attainment of fruition)’으로 본 것이다.

 

도의 인식과정과 과의 증득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Maggavīthiyañca phalasamāpattivasena ca pavattiya.”에 대한 번역어이다. 여기서 Maggavīthiyañca‘Magga()+vīthi()’의 형태이다. 똑 같이 -이라는 뜻이지만, 뒤의 길은 PCED194에 따르면 ‘vīthicitta’ 형태로서 ‘process of cognition’이 된다. 따라서 Maggavīthi인식의 과정에 이르는 길이 된다. 이는 도를 닦음으로 인하여 지혜가 생겨남을 뜻한다. Phalasamāpattivasena‘Phala()+samāpatti(증득)’의 합성이다. 열매를 뜻하는 팔라에 대하여 증득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과의 증득이라 한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꽃은 보기에 아름답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않으면 보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마치 사랑만 할 뿐 자식이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열매는 자식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도를 닦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도를 닦는 것으로 그친다면 열매 를 맺지 않는 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으면 결과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과의 증득(Phalasamāpatti)이다. 이런 과의 증득은 도를 닦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도를 닦아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을 때, 열매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맛으로 알 수 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어 보아야 그 맛을 알 수 있듯이 과의 증득 역시 경험 해 보아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런 맛은 어떤 것일 것?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이득(benefit)으로 표현 하였다.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D2)’에 따르면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대왕이여, 예를 들어, 산꼭대기에 맑고 고요하고 청정한 호수가 있는데, 그 곳에 눈 있는 자가 언덕에 서서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호수는 맑고 고요하고 청정하다. 이곳에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마음이 삼매에 들거나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마음의 번뇌를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이게 하여,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궁극의 앎이 일어나며,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압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또 다른,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입니다.

 

대왕이여, 이것과는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은 없습니다.

 

(Sāmaññaphala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궁극적으로 윤회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어 더 이상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살아 더 이상 번뇌가 일어 나지 않게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된다. 이것이 아라한선언이다. 선불교식으로 말하면 오도송이다.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 자신에게 얼마나 번뇌가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이렇게 본다면 도를 닦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찌꺼기 처럼 남아 있는 탐욕, 성냄 등 오염원을 제거해 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 자체가 도를 닦는 것이고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다면 도만 닦는다고 하여 무조건 열매를 맺을까?

 

나는 누구인가?”

 

흔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 하지만 도도 도 나름이다. 도라는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나를 찾는 수행이다.

 

어떤 스님의 출가이유를 들어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으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존재의 근원을 찾아 출가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나는 어디서 왔을까?”라든가.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의문하며 평생 도를 닦는다. 하지만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쓸데 없는 일에 정신을 기울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찾는 수행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생겨난 번뇌는 더욱 증가한다.(M2)”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연기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연기적 사고를 해야 하는 이유

 

내가 여기 이자리에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라고 의문하며 무한소급해 올라 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다. 왜 그런가? 결국 존재의 근원또는 궁극적 실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인에 모든 것이 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유일신교의 교리이다. 그 하나의 원인에 대하여 창조주, 하느님, 브라흐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다. 마하야나와 젠부디즘에서는 불성, 참나, 본래면목 등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연기적 사고를 하면 존재의 근원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전 행위의 결과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무명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다. 이전 과거의 원인으로 인하여 현재의 결과로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몰라서 여기에 이렇게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몹시 궁금해 한다. 대부분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 한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불안해 한다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찾게 될 것이다.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 해당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 하는 것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사고 해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연기적 사고를 말한다. 그래서 연기적으로 말하면 깨달은 사람이고, 연기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연기법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래가 불안하여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 하였을 때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를 찾아 나선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미래의 나는 현재의 원인으로 결정 되기 때문이다. 그 미래의 나를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 그 갈애가 원인이 되어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어디서 왔을까?”라며 존재의 근원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어디로 갈까?”라며 불안해 하며 궁극적 실재를 찾을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면 쓸데 없는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이전의 무명으로 인하여 내가 여기에 있게 되었고, 현재의 갈애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나가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순관과 역관을 함께 설한 이유는?

 

연기적 사고를 하는 자에게 나는 누구일까?’라고 의문하며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은 맞지 않는다. 그 대신 연기에 바탕을 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은 어떤 것일까?

 

연기적 사고를 하면 청정한 삶을 지향하게 된다. 탐욕, 성냄 등 오염원을 제거하고 소멸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 자체가 연기적 사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의 역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설할 때 순관과 함께 반드시 역관도 함께 설하였다. 부처님이 연기의 순관을 설할 때는 나는 어디서 왔을까?”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반면 부처님이 연기의 역관을 설할 때는 청정한 삶에 대한 것으로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의 순관은 윤회하는 삶에 대한 것이고, 연기의 역관은 윤회를 소멸시키는 삶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굳이 나는 누구일까?”라고 의문하며 도를 닦는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꽃만 필 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고, 사랑만 할 뿐 자식이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시에 과보를 주는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는 항상 함께 한다. 그런데 과는 즉시적이라 하였다. 도를 이루었을 때 즉시적으로 결과가 나타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Imassa pana ñāassa anantara tasseva vipākabhūtāni dve tīi vā phalacittāni uppajjanti. Anantaravipākattāyeva hi lokuttarakusalāna ‘‘ samādhimānantarikaññamāhū ’’ ti (khu. pā. 6.5) ca ‘‘ dandha ānantarika pāpuāti āsavāna khayāyā ’’ ti (a. ni. 4.162) ca ādi vutta. Keci pana eka dve tīi cattāri vā phalacittānīti vadanti, ta na gahetabba.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Immediately next to that knowledge, however, there arise either two or three fruition consciousnesses, which are its result. For it is owing to this very fact that supramundane profitable [consciousness] results immediately that it is said, “And which he called the concentration with immediate result” (Sn 226), and “Sluggishly he reaches what has immediate result for the destruction of the cankers” (A II 149), and so on.

 

(영역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이 지혜 바로 다음에 그것의 결과로 둘 혹은 셋의 과의 마음들이 일어난다. 출세간의 유익한 마음들은 즉시에 과보를 주기 때문에 "즉시에 [과보를 주는] 설했다.(Sn.226)"고 하셨고 "그는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즉시에 과보를 주는[ 성스러운 도에] 천천히 도달한다.(A.ii.149)"고 설하셨다.

 

(청정도론 22 15)

 

 

청정도론은 5세기에 붓다고사가 스리링카 마하위하라(대사)에서 저술하였다. 니까야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수행지침서이기도 한 청정도론에서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니까야에 실려 있는 문구를 종종 인용한다.

 

붓다고사는 두 가지 경을 근거로 들었다. 하나는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즉시에 [과보를 주는] 설했다.(Sn.226)"이고 또 하나는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는 있는 "그는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즉시에 과보를 주는[ 성스러운 도에] 천천히 도달한다.(A.ii.149)"라는 문구이다.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청정도론에서 강조한 것은 결과의 즉시성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반드시 과보를가져 오고 그것도 즉시에(Immediately)’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즉시에 [과보를 주는] 을 설했다.(Sn.226)"라 하여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게송의 문구를 인용하였다. 게송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Ya buddhaseṭṭho parivaṇṇayī suci     양 붓다셋토 빠리완나이- 쑤찡

Samādhi mānantarikaññamāhu,             사마-디 마-난따리깐냐마-
Sam
ādhinā  tena samo na vijjati         사마-디나 떼나 사모 나 윗자띠
Idampi dhamme ratana
paīta         이담삐 담메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훌륭하신 깨달은 님께서 찬양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그 삼매와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26, 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배의 경, Sn2.1)은 테라외다 불교에서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보에 대한 찬탄과 귀의로 이루어져 있는 라따나경은 수호경이기도 하다.

 

게송에 따르면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고 하였다. 여기서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이라고 번역된 말이 빠알리어 마난따리깐냐마후(mānantarikaññamāhu’이다. 이는 ‘māna(measure) +antarika(intermediate) +añña(perfect knowledge)’의 뜻이다. 직역하면 완전한 지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청정한 삼매(suci  Samādhi)’에 들어가면 즉시에 완전한 지혜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S4.21)”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2014-09-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