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뇌가 아니라 심장인가?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5. 12:20

 

 

왜 뇌가 아니라 심장인가?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법구경 37번 게송은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 게송에서 키워드는 동굴(guhā)이다. 그래서 마음은 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 동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Dūragama ekacara      두랑가망 에까짜랑

asarīra guhāsaya,      아사리랑 구하사양
Ye citta
saññam-essanti 예 찟땅 산냥 엣산띠

mokkhanti Mārabandhanā.    목칸띠 마라반다나.

 

(dhp37, cittavagga)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

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 있는,

마음을 제어 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 나리라.

 

(dhp37, 전재성님역)

 

 

心は遠くに行き、り動き、

形体なく、胸のの洞窟にひそんでいる。

この心を制する人は、

死の束縛から逃れるであろう。

(dhp37, 中村元역)

 

 

홀로 멀리 가며

자취도 없이 가슴 속에 숨어든

이 마음을 억제하는 사람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리라

 

(dhp37, 법정스님)

 

 

獨行遠逝 독행원서

覆藏無形. 복장무형

損意近道 손의근도

魔繫乃解. 마계내해

 

(dhp37, )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고 홀로 움직이며

물질이 아니면서도 물질 속에 숨는다.

누구든 마음을 잘 다스리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리.

 

(dhp37, 거해스님역)

 

 

Wandering far,

going alone,

bodiless,

lying in a cave:

       the mind.

Those who restrain it:

       from Mara's bonds

       they'll be freed.

 

(dhp37, Thanissaro Bhikkhu)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동굴과 관련된 말이 “asarīra guhāsaya이다. 이에 대한 번역을 보면 약간씩 다르다.  전재성님은 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 있는이라 하여 원어 그대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보면 形体なく、洞窟にひそんでいる이라 하여 형체는 없고, 마음 깊은 동굴에 숨어 있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마음이 가슴()에 있음을 말한다. 이 때 가슴은 무엇을 의미할까? 심장을 말하는 것일까?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중역한 법정스님역을 보면 가슴 속에 숨어든이라 하여 마음이 마치 심장에 있는 듯한 암시를 주고 있다.

 

거해스님역을 보면 물질 속에 숨는다라 하여 의역을 빠알리원문과 동떨어진 번역을 하였다. 빠알리 원문에는 동굴이라는 뜻의 guhā를 사용하였으나 이를 몸이라는 물질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서울에 있으나 마음은 부산에 있는 경우

 

게송에서 마음은 멀리 미치는 것(Dūragama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ūragama : DhpA.I.304에 따르면, 방향등으로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거미가 거미줄을 친 것 못지 않게, 멀리 있는 대상을 파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 미친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 605번 각주, 전재성님)

 

 

마음이 미치는 곳은 동서남북사유상하 어느 곳이든지 가능함을 말한다. 그것도 매우 멀리 미치고 있음을 말한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해운대해수욕장에 가 있다면 마음은 부산에 가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 확장해 보면 유럽 어느나라의 관광지일 수도 있고 저 우주 너머 까지 미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멀리 미치는 것(Dūragamaṃ)’이라 하였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게송에서 마음은 홀로 움직이는 것(ekacaraṃ)이라 하였다. ekacara ekacara+aṃ’형태이다. Ekacara‘one who lives alone’의 뜻으로 홀로 사는 자의 의미이다. ekacara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ekacara: DhpA.I.304에 따르면, 일곱 여덟 마음들이 황화수의 꽃다발이 묶인 것처럼 결코 한 순간에 모두 일어날 수는 없다. 일어나는 순간에 마음은 단독적으로(ekaka) 일어난다.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에 상속되는 마음이 단독적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그 의식인 마음은 홀로 움직인다.

 

(법구경 606번 각주, 전재성님)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할 수 없음을 말한다.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처리 할 수 없음을 뜻한다. 기적소리가 크게 나지만 다른 일에 몰두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차가 지나 갔는지 알 수 없듯이 한순간에 한가지 일을 처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이때 조건발생함에 따른 마음의 상속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한순간이라는 시간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포말비유의 경(S22.95)에 따르면 빗방울이 떨어질 때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물거품은 하나의 물방울로 생겨났다가 오래지 않아 사라진다. 그 기간에 대하여 손가락 튕기는 것으로 비유 된다. 엄지와 중지를 마찰시켜 하고 소리내는 것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에 십만억의 느낌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S22.59, 384번 각주)”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한순간에 일어나는 생각은 무수히 많은 것이다. 이럴 경우 마치 소프트웨어 메인루틴에서 인터럽트가 걸려 서브루틴을 실행하고 되돌아 오는 것 같다. 다시 메인루틴으로 되돌아 왔을 때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 가지만 인터럽트가 걸린 만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처리 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감정조절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미운 사람이 있어서 증오의 감정이 일어 났다면 그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일부로 다른 대상에 마음을 가져 가는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대상에 관심을 보이면 증오의 감정은 사라진다. 그런데 수행처에서는 호흡으로 되돌아 오라고 한다. 호흡에 마음을 두고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 하다 보면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말한다.

 

사리()의 원형 사리라(Sarīra)

 

게송에서 마음에는 신체가 없다(asarīraṃ)’ 고 하였다. asarīra asarīra+aṃ’ 형태이다. Asarīrasarīra의 부정형이다. Sarīra‘the body’의 뜻으로 신체를 의미한다. 화장하고 남은 신체의 일부를 사리()’라고 하는데 바로 이 빠알리어 사리라(Sarīra)를 음역한 것이다.

 

마음에는 신체가 없다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푸른 색 등과 같은 색깔의 구별도 없다. 그래서 비신체적이라 부른다. (DhpA.I.304)”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음은 비물질이기 때문이다.

 

동굴에 숨어 있다고 하였는데

 

비물질은 마음은 우리의 몸 어느 곳에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동굴에 숨어 있다(guhāsayaṃ)라고 하였다. Guhāsaya‘guhā(동굴)+āsaya(依所)’의 형태이다. 그래서 guhāsaya 동굴에 의지하는 것의 뜻이 된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guhāsaya: DhpA.I.304에 따르면, 동굴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위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신체의 동굴을 말하는데, 마음은 심장물질(hadayarupa)에 의존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동굴에 숨어 있는 존재로 표현된다. Sds.II.475;III.536에 따르면, 마음은 심장토대의 물질로 심장물질에 의존해서 일어난다.

 

(법구경 608번 각주, 전재성님)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명색이라 한다. 여기서 색은 몸을 말하고, 명은 수상행식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색수상행식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임을 알 수 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다. 그래서 서로 의존한다. 이런 의존 관계는 눈,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안식은 눈을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식은 귀를 의지 하여 일어난다. 만일 눈이 없다면 안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일까?

 

법구경에 따르면 마음은 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 있는 것(asarīra guhāsayaṃ)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동굴은 주석에 따르면 심장(hadaya)을 뜻한다. 그래서 동굴에 숨어 있는 것(guhāsayaṃ)이라 하였는데, 이는 심장을 토대로 한다는 말이다.

 

마음이 심장에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고?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현대의 뇌과학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불교닷컴에 기고한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는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심장에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했으며 지금도 인도인들은 대부분이 그리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량분별이다.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1, 불교닷컴 2014-08-11)

 

 

수학을 전공하는 과학자 강병균 교수에 따르면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 하였다.

 

강병균교수가 말한 G스팟은?

 

그렇다면 마음은 뇌를 토대로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강병균 교수는 또 다른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고 하였다.

 

 

이제 과학의 발달로 뇌와 의식의 비밀이 풀리고 있다. 종교인들이 민망할 정도로 그 비밀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다. 임사체험, 유체이탈, 황홀경, 비전, 그리고 신비적 합일 등이 인정사정없이 해체된다. 뇌의 특정부분을 전기적으로 자극함으로써 그런 체험을 만들어낼 수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자극을 받으면신의 임재신과의 합일을 느끼게 만드는 뇌부위도 있다는 보고도 있다. (그 부위는神點 God spot’이라 불리며 뇌 여러 곳에 존재한다. 특히 측두엽이 중요하다. 종교적인 엑스터시가측두엽간질 발작이라는 수그러들지 않는 설이 있다. 간질환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 발작 중에 느끼는 환희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더없이 황홀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youtube에 들어가면, 황홀감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리 증언하는 간질환자를 볼 수 있다. 멀쩡하고 순박하고 착하게 생긴 미국 젊은이이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0, 불교닷컴 2014-08-04)

 

 

강병균교수는 ‘G스팟이야기를 한다. G스팟이라는 말은 위키백과에 따르면 여성의 질의 일부분으로, 자극을 받을 경우 높은 수준의 성적 각성과 강렬한 오르가슴을 일으킬 수 있는 성감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처럼 외설의 대명사와 같은 용어인 ‘G스팟에 대하여 ‘God spot’이라 하였다. 마치 여성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여 강렬한 오르가슴을 일으키는 것처럼, 뇌의 특정부위를 자극하면  임사체험, 유체이탈, 황홀경, 비전, 그리고 신비적 합일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강병균교수의 주장대로라면

 

강병균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미래의 사람들은 명상을 할 필요가 없다. 수술대 위에 누워서 뇌의 측두엽을 자극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자극부위가 ‘G스팟(God spot, 神點)’이라 한다. 그런데 뇌를 자극하면 매우 황홀하다고 한다. 이는 질을 자극하여 오르가슴에 이르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이렇게 현대의 뇌고학자들은 뇌를 이용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모든 것은 뇌에 있다고 보고 있다.

 

부처님은 마음은 동굴에 숨어 있는 것(asarīra guhāsayaṃ)”이라 하였다. 주석에서는 이을 마음의 심장토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 어디에도 마음이 뇌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 없는 망상이고,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 인도인들의 무지에 기인하는 것일까?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여러 차례 올렸는데 그 중 마음은 뇌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재생연결식과 심장토대의 마음을 보면(2009-06-16)’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글은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에 실려 있는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마음의 심장토대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법문하였다.

 

 

「발취론」은 몸의 어느 특정 기관이나 부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논서에 따른다면 몸의 어느 특정부위가 마음의 토대 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며 아마도 그것은 심장이나 머리의 어떤 부위일 것입니다. 마음을 심장에 위치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머리를 그 육체적 토대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paicca-samuppāda-십이연기, 35. 마노의 문[意門]과 식()의 관계)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마음이 일어나듯이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다.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사유할 때 역시 사유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어난 마음은 몸의 어느 곳을 의지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가들은 심장이 모든 정신활동의 토대가 된다라고 하였다.

 

주석가들은 많고 많은 몸 중에서 하필이면 심장에 토대를 둔다고 하였을까? 뇌에 토대를 둔다고 할 수 있음에도 굳이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한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발취론에서는 어느 특정부위를 명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심장이 될 수도 있고 뇌가 될 수도 있다고도 보는 것이다. 또 몸 전체에 대하여 토대를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굳이 신체의 부위를 지목하라고 한다면 심장이라 한다. 왜 뇌가 아니라 심장인가?

 

왜 뇌가 아니라 심장인가?

 

오늘날 뇌 과학자들이 심장토대설에 의문하는 것은 심장수술에 기인하는 영향도 있다. 병든 심장을 제거하고 대용물로 바꾸어 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심장토대설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대체된 심장이라 할지라도 심장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심장토대설은 여전히 유용하다.

 

분명한 것은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뇌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대과학자들이 뇌를 중시하는 것과 다르다. 그대신 심장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마노()와 의식(意識)은 심장토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정설로 하고 있다. 이런 이론은 아비담마에서 잘 정리 되어 있다. 그렇다면 테라와다 전통에서 왜 뇌가 아니라 심장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논장의 주석서에 나와 있는 거미와 마음이 전개되는 유사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거미는 파리를 잡기 위하여 그물의 일종인 거미줄을 칩니다. 거미는 태어난 지 며칠만 지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 지 1년이 된 아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거미는 거미집의 중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줄에 걸리는 생명체는 모두 먹어치우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왕가, 즉 의식(意識)은 거처로써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거처와 그 주변을 연결하고 있는 거미집의 거미줄처럼 심장에 의해 주입된 피가 혈관을 통해서 온 몸에 퍼집니다. 그리고는 눈에 있는 형상이 심장에 있는 바왕가를 자극하면 그것은 안문(眼門) 인식과정을 통해서 안식(眼識)등으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왕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소리[]와 냄새[] 등에 대해서도 각각에 해당되는 감각기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마하시사야도, paicca-samuppāda-십이연기, 35. 마노의 문[意門]과 식()의 관계)

 

 

 

cobweb

 

 

우리 몸에서 심장은 중심부에 있다. 그런 심장은 모든 피가 모였다가 다시 내뿜는 곳이기도 하다. 이때 피는 몸의 곳곳에 뿌려진다. 신체중에서 가장 활동을 많이 하는 두뇌에도 역시 다량의 피가 뿌려진다. 이처럼 세포 깊숙히 피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마치 거미줄 처럼 우리 온 몸에 핏줄이 뻗어 있어서 피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피를 공급하기 위하여 펌프질 하는 곳이 심장이다.

 

심장 안에 있는 피를 의지해서

 

심장토대설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Manodhātumanoviññāadhātūna nissayalakkhaa hadayavatthu, tāsaññeva dhātūna ādhāraarasa, ubbahanapaccupaṭṭhāna. Hadayassa anto kāyagatāsatikathāya vuttappakāra lohita nissāya sandhāraādikiccehi bhūtehi katūpakāra utucittāhārehi upatthambhiyamāna āyunā anupāliyamāna manodhātumanoviññāadhātūnañceva tasampayuttadhammānañca vatthubhāva sādhayamāna tiṭṭhati.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The heart-basis has the characteristic of being the (material) support for the mind-element and for the mind-consciousness-element. Its function is to observe them. It is manifested as the carrying of them. It is to be found in dependence on the blood, of the kind described in the treatise on mindfulness of the body (VIII.111), inside the heart.

 

It is assisted by the primaries with their functions of upholding, etc.; it is consolidated by temperature, consciousness, and nutriment; it is maintained by life; and it serves as physical basis for the mind-element and mind-consciousnesselement,

and for the states associated with them.

 

(영역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심장토대는 마노의 요소(意界, Manodhātu)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意識界, manoviññāadhātū) 의지처가 되는 특징을 가진다. 그들에게 장소를 제공하는 역할을 가진다. 그들을 지님으로 나타난다. 심장 안에 있는 피를 의지해서 있다. 그 피의 종류에 대해서는 이미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의 주석에서 설했다.

 

그것은 받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근본물질의 도움을 받는다. 그것은 온도와 마음과 음식에 의해 지탱되고 생명기능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것은 마노의 요소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와 또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이 생기는 토대가 된다.

 

(청정도론, 14 60절 심장토대, 대림스님역)

 

 

청종도론에 따르면 마음의 의지처가 심장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매우 구체적인 설명이 보인다. 그것은 (lohita)’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심장 안에 있는 피를 의지해서 있다라 하였다. 분명히 피를 의지한다(lohita nissāya)”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온몸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피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를 토대로 한다

 

공급된 피는 눈에도, 귀에도, 코에도 공급이 된다. 만일 피가 공급이 되지 않는다면 보지도 못하고 인식도 못할 것이다. 피가 공급되기 때문에 안식이 일어나고, 이식이 일어난다. 그런 피는 다시 심장으로 모인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의 토대는 뇌라기 보다 차라리 심장에 가깝다. 물론 마음의 토대가 몸 전체라고 볼 수 있지만 특정 부위를 집어 말한다면 뇌보다 심장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의 견해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 귀[]· 코[]· 혀[]· 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노[]는 정신적인 감각장소인것이다. 그리고 감각대상이란 식()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물질적 토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眼識]는 눈[]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하고 같이하며, 이식(耳識)은 귀[], 비식(鼻識)은 코[], 설식(舌識)은 혀[], 신식(身識)은 몸[]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를 토대로 한다.

 

(마하시사야도, paicca-samuppāda-십이연기, 113번 주석)

 

 

 

 

 

 

cardiac

 

 

안식이 일어날 때는 눈을 토대로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의식이 일어나면 신체의 특정 부위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는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심장을 토대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신체의 중심에 대하여 뇌가 아니라 심장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뇌가 멈추면 뇌사라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심장이 멈추면 완전히 죽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뇌 보다 심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심장은 피가 들어 오고 나간다. 세포 안에 있는 모든 피는 반드시 심장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심장을 통하여 뇌를 비롯하여 몸의 구석구석까지 전달 된다. 이렇게 본다면 심장은 마치 정보가 들어 오고 새로운 정보가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뇌보다 심장을 더 주목 하였을 것이다.

 

세 가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법구경 게송에서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라(mokkhanti Mārabandhanā)”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삼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악마의 영토에 대하여 삼계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삼계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십이연기로 설명된다. 주석을 참고 하여 세 가지 소용돌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세 가지 소용돌이

 

세 가지 소용돌이

십이연기

1

번뇌의 소용돌이

무명과 갈애와 집착의 윤회

2

업력의 소용돌이

형성과 행위-존재의 윤회

3

과보의 소용돌이

명색과 의식과 여섯 가지 감역과 접촉과 느낌과 재생-존재의 태어남과 늙고 죽음의 윤회

 

 

이렇게 세 가지 소용돌이가 있다. 그래서 번뇌의 소용돌이는 업력의 소용돌이를 낳고, 업력의 소용돌이는 과보의 소용돌이를 낳고, 과보의 소용돌이는 다시 번뇌의 소용돌이를 낳음으로서 끝없는 윤회가 전개 된다.

 

21세기 뇌만능주의자들은

 

흔히 하는 말 중에 마음을 열어라라는 말이 있다. 이를 영어로 “open mind”라 한다. 이때 마음을 열어라라는 말은 가슴을 열어라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두뇌를 열어라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과 가슴은 동의어라 볼 수 있다.

 

현대 뇌과학자들은 마음은 뇌의 작용에 따른 것이라 한다. 심지어 명상에서 느끼는 희열이나 행복감도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된다고 한다. 이렇게 뇌만능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한다는 초기경전의 가르침은 무시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뇌의 작용으로 본다면 자칫 유물론으로 되기 쉽다. 그런 유물론은 보시에는 공덕도 없다라든가, “몸이 무너지면 정신 또한 죽게 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등의 허무주의적 견해로 귀결 되고 말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마음이 뇌를 토대로 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한다는 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법구경에서 처럼 마음은 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 있는(asarīra guhāsaya, dhp37)”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여기서 동굴은 심장을 의미한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마음의 심장토대설이다.

 

심장토대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피의 역할이다. 피는 우리 몸 어디에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형상을 볼 수 있는 눈에도 핏줄이 거미줄 처럼 연결 되어 있어서 피가 흐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대상과 접촉하여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에 심장토대로 본 것이다.

 

심장은 순환작용을 한다. 이런 원리는 이미 옛날에도 알았다. 5세기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에 따르면 32가지 관찰 대상 중에 에 대하여 장소로써 순환하는 피는 머리털, 몸털, 이빨, 손발톱의 살이 없는 부분과 딱딱하게 마른 피부를 제외하고 정 동맥의 망을 따라 업에서 생긴 온 몸에 퍼져있다.( 8 130)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당시에도 피가 정맥과 동맥에 따라 순환 작용을 하고 있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환원하여 가르침을 재단하려 하는 자들이 있다.특히 뇌만능주의자들이 그렇다. 21세기가 문명의 시대라 하여 마치 25백년 전의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이 심장에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 한 것은 일부분만 본 것이다. 마치 빈데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것 같다.

 

 

 

2014-09-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