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월호유가족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3. 11:50

 

세월호유가족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차분한 아침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아침에는 보통 차로 이동한다. 그러나 폭우가 아니기 때문에 우산을 쓰고 걸어 가기로 하였다.

 

사무실로 향하여 걸어 가면서 이것저것 생각한다. 주로 그날의 쓸거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날의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생각해내고 전체적인 시나리오을 구성한다는 것은 이제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래서 사무실까지 걸어 가는 20여분 동안은 매우 귀중한 시간이다.

 

가을에 비가 오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대지에 생기를 불어 넣는 봄비와 달리 가을비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그렇다. 강렬한 햇빛으로 곡식이 익어 가야 할 때에 비가 오면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가을비는 봄비와 달리 반갑지 않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것이 반갑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세월호유가족들의 농성장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벌써 몇 일 째 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보내고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흘러내라는 비를 맞아야 하고 또 추위를 견디어 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반갑지 않다.

 

마치 대통령의 손을 잡고 하소연 하는 듯

 

어제 유가족들의 삼보일배’하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보았다. 인터넷으로 생중계 되는 사이트(FactTV Korea Live) 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해도 꿈쩍도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새로운 시도라 보여진다.

 

수십명의 유가족들이 북소리에 맞추어 절을 한다. 그러나 절을 받아 주는 사람들은 경찰들이다. 어떤 이는 절을 할 때 두손바닥을 위로 향한다. 아마 불자 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큰 절하는 식으로 절한다.

 

절을 하지 않고 서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개신교나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같다. 그럼에도 함께 참여 하여 북소리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비록 삼보일배라는 불교형식을 도입하기는 하였지만 유족들이 바라는 목적은 똑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기가 애처러웠다. 경찰들에게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어느 어머니가 절규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는 경찰들 앞에 주저 앉았다. 앞에는 여경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어머니는 여경의 손을 붙잡고 서럽게 울면서 하소연 한다. 그러자 여경은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 이런 장면이 마치 대통령의 손을 잡고 하소연 하는 듯 보였다. 이런 장면이 꽤 오랫 동안 지속 되었다.

 

눈물이 그칠 날 없는 사람들

 

유가족들의 눈에 눈물이 그칠 날이 없다. 세월호참사 100일 째 되던 날 서울광장 문화제 참석한 이래 유가족 들이 눈물 흘리는 것을 많이 보았다. 참사 이래 지금까지 흘린 눈물의 양은 엄청 날 것이다.

 

 

 

 

이렇게 눈물을 보내고 있는 유가족들을 볼 때 마다 초기경전의 문구가 떠 올려 진다. 그것은 눈물의 경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윤회하며 흘린 눈물의 양은?

 

부처님이 이렇게 윤회하며 흘린 눈물의 양에 대하여 사대양에 비유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은 저희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S15.3)”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대양은 태평양 등의 사대양이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사대양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대양이 있어서 사대양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우주적 스케일이다.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이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 것은 사대양의 물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눈물을 말할까?

 

우리는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전하고 윤회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전하고 윤회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 무명(avijjā)’갈애(tahā)’를 들 수 있다.

 

눈물의 경(S15.3)에 따르면 우리가 윤회하는 요인으로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무명에 덥힌다는 말이 ‘avijjānīvaraāna이다. 이는 ‘avijjā(무명)+nīvaraāna(속박)’의 복합어이다. 이렇게 무명에 덮혀 있다는 것은 과거의 요인이다. 과거의 요인으로 이렇게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래 역시 윤회할 것이라 한다. 왜 윤회하게 될까? 그것은 갈애에 속박(tahāsayojanāna)’이라는 말로 설명 될 수 있다. 이는 tahāsayojanāna‘tahā(갈애)+sayojanāna(결박)’의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갈애는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에 윤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무명에 덮혀서 이 자리에 있게 되었고, 또 갈애에 속박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미래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존재는 끊임없이 유전하고 윤회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Anamataggoya bhikkhave, sasāro. Pubbāko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āna sattāna tahāsayojanāna sandhāvata sasarata. S15.3)”라 하였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최초의 원인을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이다. 창조주가 있어서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을 창조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시작이다.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종말론이 있다.

 

그러나 창조주를 부정하는 불교에서는 시작과 끝을 상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시작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교수는 찍는 점이 시작점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순환적시간관에 따른 것이다. 마치 굴렁쇠가 굴로 가듯이 시작도 끝도 없는 원형의 순환적 시간관에서 찍는 점이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교의 시간관은 무시무종(無始無終)’임을 뜻한다.

 

불교의 시관관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런 무시무종의 시간관을 잘 표현 한 말이 있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라 하였다.

 

정형구에서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Anamataggoya, sasāro)”라 하였다. 여기서 시작을 알 수 없다라는 말이 ‘anamatagga’이다.  Anamatagga라는 말은 ‘anu+na+mata+agga’로 분해 될 수 있다. 여기서 anuna 는 부정을 뜻하며 ana의 형태가 되어 이중부정이 된다. Matamaññati의 과거분사형으로서 ‘know; understand’의 뜻이다. Agga‘the highest; the top-most. (m.), the end; the top’의 뜻으로 꼭대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복합어 “anamatagga”라는 말을 직역한다면  시작이 알려지지 않은또는 끝을 알 수 없는뜻이 된다. 그러나 PCED에 따르면 ‘one whose beginning is unknown’라 설명 되어 있다. “시작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anamatagga’ 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시작을 알 수 없는이라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도 역시 그 시작을 알 수 없는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도 without discoverable beginning.”라고 번역함으서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라든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의문한다면 우문(愚問)’에 해당된다.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우리들은 무명에 덮혀서 여기 있게 된 것이고, 갈애에 속박 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이에 대하여 CDB에서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Anamataggo 'ya bhikkhave sasaro. Spk resolves anamatagga into anu amatagga, explaining:

 

"Even if it should be pursued by knowledge for a hundred or a thousand years, it would be with unthought-of beginning, with unknown beginning (vassasata vassasahassa ñāena anugantvā pi amataggo aviditaggo). It wouldn't be possible to know its beginning from here or from there; the meaning is that it is without a delimiting first or last point.

 

sasara is the uninterruptedly occurring succession of the aggregates, etc. (khandhadina avicchinnappavatta paipai)."

 

The BHS equivalent of anamatagga is anavaragra (e.g., at Mvu I 34,7), "without lower or upper limit." For various explanations, see CPD, s.v. an-amat'-agga.

 

(CDB 254번 각주, 빅쿠보디)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다.’Anamataggo 'ya sasaro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여기서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옮겨지는 anamataggaanu+amatagga로 분석한 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년이나 천년을 지혜āa)로써 추구한다 하더라도(anugantvā) 그 시작을 생각하지 못하고(amata-agga) 그 시작을 알지 못한다(avidita-agga)는 말이다. 여기로부터 혹은 저기로부터 시작(agga)을 알 수 없다는 말인데, 시작점과 마지막점의 한계를 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윤회(sasara)란 무더기[] 등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가는 연속이다. (khandhadina avicchinnappavatta paipai)”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2 477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각주를 보면 용어사용과 순서 등에 이어서 빅쿠보디의 각주와 거의 유사한다.

 

주석에 따르면 윤회는 시작점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시작점을 가정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렇게 시작점을 알 수 없다면 끝점도 역시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는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윤회는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없다. 다만 현재 있는 곳이 시작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순환적시간관에서 찍는 곳이 시작점이 되듯이 지금 여기 서 있는 곳이 시작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윤회라면 윤회는 영원히 계속 될 수밖에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끊임 없이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흘린 눈물의 양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Etadeva bhikkhave, bahutara ya vo iminā dīghena addhunā sandhāvata sasarata amanāpasampayogā manāpavippayogā kandantāna rudantāna assu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Assusutta-눈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이는 빠알리어 ‘amanāpasampayogā’manāpavippayogā’에 대한 것이다.

 

amanāpasampayogāamanāpa+sampayoga의 형태이다. Amanāpadetesful의 뜻으로 우리말로 미워하는, 지긋지긋한의 의미이다. Sampayoga‘union; association; connection’의 뜻으로 결합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amanāpasampayogā’미워하는 것과의 만남이라는 뜻이 된다.

 

Manāpavippayogā‘manāpa+vippayoga’의 형태이다. Manāpa‘pleasing; charming’의 뜻으로 좋아하는의 의미이다. Vippayoga‘separation’의 뜻으로 분리를 말한다. 따라서 ‘Manāpavippayogā’의 뜻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을 뜻한다.

 

초전법륜경과 비교해 보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은 고통을 초래한다. 이는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S56.11)”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눈물의 경(S15.3)’에서 내용과 초전법륜경(S56.11)’에서의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 한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초기경전의 내용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작하는 기계처럼 보인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의 경(S15.3)

초전법륜경(S56.11)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怨憎會)

Amanāpasampayogā

(미워하는 것과 결합)

appiyehi sampayogo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

(愛別離)

Manāpavippayogā

(좋아하는 것과 분리)

piyehi vippayogo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표를 보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 amanāpasampayogāappiyehi sampayogo임을 알 수 있다. 단어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세월호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이는 사랑하는 자와 헤어짐(piyehi vippayogo)에 해당된다. 그 과정에서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는 괴로움이다. 그리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와 헤어짐이 고통 (piyehi vippayogo dukkho)이라고 하였다.

 

눈물의 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말이 어머니이다. 경에서는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형제, 자매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들과 딸에 이른다. 이중에서 아들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Dīgharatta vo bhikkhave, puttamaraa paccanubhūta. Etadeva bhikkhave, bahutara ya tesa vo puttamaraa paccanubhontāna amanāpasampayogā manāpavippayogā kandantāna rudantāna assu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Assusutta-눈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윤회하면서 이번 생에서 아들의 죽음만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시작도 알 수 없는 윤회의 과정 속에서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마다 비통해 하고 울부짓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또 이런 눈물의 양은 사대양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났을 때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모, 형제 , 자매, 자식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재산의 상실, 질병 등으로도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을 뜻한다.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은 반드시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산의 상실이 될 수도 있고 질병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대하여 경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내용(S15.3)

비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Amanāpasampayogā

 

1)재산의 상실(bhogavyasana)

2)질병의 비참(rogavyasana)

怨憎會苦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

Manāpavippayogā

 

1) 어머니의 죽음(mātumaraa)

2) 아버지의 죽음(pītumaraa)

3) 형제의 죽음(bhātumaraa)

4) 자매의 죽음(bhaginimaraa)

5) 아들의 죽음(puttamaraa)

6) 딸의 죽음(dhītumaraa)

7) 친지의 죽음(ñātivyasana)

愛別離苦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항목을 보면 재산의 상실질병의 비참이렇게 두 가지가 소개 되어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누군가에게 사기 당하여 모두 날려버리게 되었을 때 원통할 것이다. 이때 비탄해 하며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이때 사기꾼과 만나게 된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해당된다.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린다거나 암에 걸렸을 경우 이는 질병의 비참함에 속한다. 이런 질병은 누구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럴 경우 역시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Amanāpasampayogā)에 해당된다. 그래서 결국 고통을 초래하고 만다. 이는 고성제에서 8고 중의 하나로서 원증회고에 해당된다.

 

이들의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일까?

 

세월호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것이 부모가 될 수 있고, 형제가 될 수 있고, 자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슬픔을 느끼는 자들은 아들과 딸들을 잃은 사람들이다.

 

부모나 형제, 자매가 죽으면 산에 묻으면 그만이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살아 가야 한다. 그래서 죽는  그 순간 까지 자식을 가슴에 안고 살아 간다. 이렇게 세월호 유가족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으로 인한 고통속에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렸다.

 

그런데 유가족들은 또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내 새끼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고 하는데 경찰이 가로 막아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유가족들은 두 번 울고 있다. 한번은 사랑하는 내새끼를 잃어서 울고, 또 한번은 꽉막힌 경찰들의 벽 앞에서 울고 있다. 전자는 사랑하는 것과 헤아짐 때문에 우는 것이고, 후자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때문에 우는 것이다. 대체 이들의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일까?

 

 

 

2014-09-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