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30. 21:22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

 

 

 

왜 모두 얼굴이 다를까?

 

이 세상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 쌍둥이라고 하여도 자세히 보면 다른 면이 있다. 이렇게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당연히 성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얼굴을 다르게 태어나듯이 성향 또한 모두 다르게 형성된다. 이에 대하여 업의 작용으로 본다. 이와 같은 업의 작용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mmasakkā mā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ā.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

 

 

업은 행위(Action)’를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깜마(kamma)라 한다. 행위에 의하여 농부도 되고 기술자가 되듯이 행위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된다. 그래서 경에서는 업을 소유하는 자, 상속하는 자, 친지로 하는 자, 의지처로 하는 자라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면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라 하였다. 이 말은 바라문청년 수바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Ko nu kho gotama hetu ko paccayo, yena manussāna yeva sata manussabhūtāna dissanti hinappaītatāni., M135)”라고 물어 본 것에 대한 답변이다. 이렇게 본다면 빈부귀천 등이 생겨 나는 이유가 업의 작용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업의 따라 얼굴이나 성향, 귀하고 천한 것이 결정 되는 것에 대하여 세속적인 정견이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생긴 대로 논다” “꼴값한다

 

흔히 생긴 대로 논다거나 꼴값한다라고 말한다. 얼굴이 생긴 대로 성향 또한 따라간다는 말이다. 특히 꼴값이라 하였을 때 이는 얼굴값을 말한다. 그래서 생긴 대로 논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성향 또한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생긴 모습이 평생 가듯이 성향 또한 평생 간다는 것이다. 얼굴이 도중에 바뀌지 않듯이 성향 역시 도중에 바뀌지 않고 평생 가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서 형성된 얼굴과 성향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한번 형성된 성향은

 

한번 형성된 성향은 고쳐지기 힘들다. 마음을 다 잡았느니 새사람이 되었느니 개과천선하였느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한번 형성된 성향이 바뀐다는 것은 도중에 얼굴이 바뀌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성향은 전적으로 행위에 대한 산물이다. 이전에 자신이 지은 행위가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귀하게 보이고, 또 어떤 사람은 천하게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민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둔하다. 이렇게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한다는 것

 

천차만별의 세계에서 나의 마음과 똑 같은 마음을 갖는 자를 보기 힘들다. 그러나 나 보다 우월한 자가 있고 동등한 자가 있고 열등한 자가 있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래서 가급적 나 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을 사귀라고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를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리석은 자를 교화하여 나의 수준에 맞추어야 할까? 만일 응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경우 법구경에 따르면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 하리라.(dhp61)”라 하였다. 여기서 길은 도를 닦는데 있어서 길도 될 수 있으나 인생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생길을 가는데 있어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견해에 파묻혀 산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지지 않은 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 견해는 삿된견해이기 쉽다. 예를 들어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유아견에 바탕을 둔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보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 이렇게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탐욕이다. 그렇다고 모두 자신의 뜻대로 될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성질 낼 것이다. 이것이 성냄이다. 좋으면 끌어 당기고 싫으면 밀쳐 낸다. 이런 행위 자체가 업으로서 태어남을 가져 오기 때문에 어리석음으로 본다. 이처럼 세상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 간다.

 

탐진치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세상사람들은 탐진치로 살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부처님가르침이 얼마나 먹혀 들어 갈까? 그래서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나서 망설였다. 이는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S6.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법은 지혜 있는 자들 즉,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힘들것이라 본 것이다.

 

부처님은 어렵게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었을 때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S6.1)”라 하신 것이다. 유아견에 사로 잡혀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주어도 쇠 귀에 경읽기이고 마이동풍이라 피곤할 것이라  본 것이다.

 

법을 설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럼에도 부처님이 법을 설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Addasā kho bhagavā buddhacakkhunā loka volokento satte apparajakkhe mahā rajakkhe tikkhindriye mudindriye svākāre dvākāre suviññāpaye duviññāpaye appekacce paralokavajjabhayadassāvino viharante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Brahmā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인간군상들이 있다. 속된 말로 어떤 인간군상은 부자이고 또 어떤 인간군상은 가난한 자들이다.  이밖에도 외모와 성향으로도 인간들이 구별된다. 그런데 경에서는 정신적인 능력, 외모, 학습능 등 다양하다. 이런 분류방식은 모두 업에 따른 것이다. 맛지마니까에서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하였는데, 외모나 능력 역시 업이 차별화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일관성을 갖는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누군가는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그것은 업에 따라 받아 들이는 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청련화와 홍련화, 백련화의 비유를 들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표를 만들어 보면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분

수중에 잠겨 있는

(수중에서 자람)

수면에 나와 있는

(수면에 걸쳐 있음)

수면을 벗어난

(물에 젖지 않음)

오염도

많이 오염된 뭇삶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근기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선행상

추한 모습의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학습능력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죄악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

 

 

 

 

 

 

 

 

 

연꽃 중에 수련이 있다. 주로 물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어떤 꽃을 보면 수면에 걸쳐 있는 것도 있고 수면 밖으로 완전히 나와 물에 젖어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아직 피지 않았다면 물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면을 기준으로 하여 요염도, 감각능력 등으로 구분 하였을 때 이와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연기법이 그렇다. 이는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ida hāna yadida idappaccayatā paiccasamuppādo, S6.1)”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설법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어

 

첫 번째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sattesu ca kāruññata paicca, S6.1)”라고 표현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뭇삶은 satta 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중생이라 한다. 그리고 자비심은 kāruñña (compassion)에 대한 번역어인데 연민의 뜻이다.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어 법을 설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을 불쌍하게 보았을까? 그것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견에 따라 탐진치로 살아 갈 때 윤회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삶은 결국 고통이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윤회를 종식시켜 주는 가르침을 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누군가는 알아 들을 수 있다고 보아서

 

두 번째는 누군가 알아 들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법을 설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은 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을 때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래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보았다. 1)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tikkhindriye), 2)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svākāre), 3) 가르치기 쉬운 뭇삶(suviññāpaye)을 말한다.

 

첫 번째로,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이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tikkhindriya이다. 이는 ‘tikkhi(sharp)+indriya(faculty)’의 결합어이다. 이는 감각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기 보다 감각능력을 잘 제어하는 사람이라는 뜻에 가깝다. , , 코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에 휘둘리지 않는 자를 말한다. 이 단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근기가]높은 사람이라 번역하였다. 상근기의 수행자는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두 번째로,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이라 번역된 ‘svākāra’‘being of good disposition, 善行相의 뜻이다.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라기 보다 선행을 많이 하여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자어로  선행상(善行相)’이라 하였다. 이 단어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선량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타고난 성품이 착하고 선행과 공덕을 많이 쌓은 자는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된자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가르치기 쉬운 뭇삶이다. 이는 빠알리어 ‘suviññāpaye’번역어이다. 이는 ‘su (well) +viññāpaya(accessible to instruction)’의 뜻이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자를 말한다. 교육을 많이 받은 양가집 자제나 타고난 학습능력이 있는 자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라 본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된 자들은 근기가 뛰어나고 선량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더구나 교육을 잘 받은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충분히 가르침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준비된 자들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S6.1)”이라고 묘사 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로지 현자들만이

 

부처님이 설법한다고 하여 누구나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을 받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왜 그럴까? 이는 경에서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paṇḍitavedanīyo, S6.1)”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paṇḍitavedanīya‘paṇḍita(현자)+vedanīya(받아들여지는)’의 뜻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 된 자가 아니면 이해 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펼치기를 주저한 것이다.

 

이처럼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 가르침이다. 그런데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로 올라가야(Paisotagāmi)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흐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흐름이다.

 

세상의 흐름은 오욕락의 추구이다. 오감에 따른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이다. 그래서 본능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식욕과 성욕이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면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을 추구한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려면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흐름을 거슬러 간다고 하였다.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흐름에는 네 가지가 있다. 먼저 세상의 흐름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anusotagāmī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kāme ca paisevati, pāpañca kamma karoti, aya vuccati bhikkhave anusotagāmī puggalo.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따라 내려 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저지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Anusotasutta-흐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5, 전재성님역)

 

 

흐름을 따라 내려 가는 사람들은 일반사람들을 말한다. 강의 폭류에 떠밀려 속수무책으로 아래로 휩쓸려 떠 내려 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게 오욕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는 것(kāme ca paisevati)”이라 하였다. 악업을 저지르는 것(pāpañca kamma karoti” 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탐진치로 살아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사람들이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

 

그렇다면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들은 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tamo ca bhikkhave paisotagāmī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kāme na paisevati, pāpañca kamma na karoti, sahāpi dukkhena sahāpi domanassena assumukho'pi rudamāno paripuṇṇa parisuddha brahmacariya carati. Aya vuccati bhikkhave paisotagāmī puggalo.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Anusotasutta-흐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5, 전재성님역)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쉽지 않다. TV에서 자연다큐프로를 보면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 강을 올라 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수 많은 난관에 부딪친다. 강둑을 올라가기 위하여 온몸을 솟구치기 까지 한다. 거센물살을 거슬러 마침내 자신이 부화한 곳에 이르렀을 때 기진맥진해 진다. 이 때 알을 낳고 최후를 마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세상을 거슬러 갔을 때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 하는 것(paripuṇṇa parisuddha brahmacariya)”이라 하였다. 여기서 청정한 삶이라 번역된 빠알리어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이다. 이말은 ‘religious life; complete chastity’의 뜻으로 한자어로 범행(梵行)’이라 번역된다.

 

네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흐름의 경(A4.5)’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이 소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네 종류의 사람

     

 

1

흐름을 따라 내려 가는 사람

anusotagāmī puggalo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진 자

-악행을 일삼는 자

범부

2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

paisotagāmī puggalo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은자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는자

-청정한 삶을 실천하는자

예류자

3

확립되어 서 있는 사람

hitatto puggalo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부순 불환자

불환자

4

피안에 서 있는 거룩한 사람

puggalo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

번뇌를 완전히 부순자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이룬자

아라한

 

 

 

표를 보면 1번항은 일반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흐름대로 오욕락과 탐진치로 살아 가는 범부를 말한다. 2번항의 경우 범부와 달리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는 사람을 말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흐름에 든자 즉, 예류자라 볼 수 있다. 3번항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 즉,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계금취견, 그리고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소멸된 불환자를 뜻한다.

 

4번항은 아라한에 해당된다.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마저 소멸되어 번뇌가 다한 자이다. 이는 청정한 삶이 실현 되었음을 뜻한다. 번뇌가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해서는 본인이 잘 알기 때문에 청정한 삶이 실현 되는 순간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ā jāti, vusita brahmacariya, kata karaīya, nāpara itthattāyā)”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된다. 이를 아라한선언이라 한다. 이는 수행의 완성이고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피안에 도달하여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사람(puggalo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라고 표현 하였다.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세상사람들이 오욕락을 추구하며 탐진치로 살아 갈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이와 거꾸로 살아 간다. 그래서 탐진치를 소멸하는 삶, 청정한 삶을 살아 간다. 그래서일까 빅쿠들은 일반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깍고 분소의를 입고 탁발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야 청정한 삶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삶의 방식과 철저하게 거꾸로 살아 갈 때 가르침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재가의 삶을 살아가는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 가야 할까? 그것은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삶을 살아 가면 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상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고 오계준수와 십선행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탐진치의 흐름에 저항하는 삶이다. 

 

 

 

2014-08-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