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화(劫火)는 왜 일어나는가? 버섯구름형 인구피라미드를 보고
매일 그 날이 그날 같지만
그날이 그날 같은 날이다. 그래서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 또 내일이 어제 같은 매일 동일한 생활패턴이 반복된다. 물론 여기서 내일이 어제 같다라는 말은 어법상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큰 변화가 없는 생활패턴을 말하기 위함이다.
매일 동일한 생활패턴이 반복 되지만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다. 만일 똑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싫증날 것이다. 그런데 10번 보여 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고문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100번 보여준다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지 모른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라도 두 번 이상 보면 보기 싫어 진다. 왜 그럴까? 영화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 만들어진 영화는 언제 어디서 보아도 똑 같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매일 똑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삶은 왜 지루하지 않을까? 이에 대하여 ‘지겨움과 권태 허무에 빠질 겨를이 없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순환적시간관(2010-02-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가 있다. 동국대 김종욱교수의 불교tv사이트 강좌를 듣고 녹취한 것이다.
굴렁쇠굴리기
김종욱교수에 따르면 인간들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순환적시간관’을 갖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인가? 우리의 일상은 고정된 채로 있지 않음을 말한다. 그날이 그날 같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변화해 감을 말한다. 이를 굴렁쇠굴리기로 비유할 수 있다.
굴렁쇠 그 자체는 원형이다. 마치 영화필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삶은 마치 굴렁쇠가 굴러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면 굴렁쇠가 돌면서 앞으로 나아 가듯이 매일 동일한 패턴의 삶 역시 미세한 변화가 있다. 그래서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 또 내일이 어제 같은 매일 동일한 생활패턴이 반복되긴 하지만 시간에 따라 변화 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다지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순환적시간관’이라 한다.
오로지 앞만 보고
아침이 되면 눈을 뜬다. 눈을 뜨자 마자 그날 해야 할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움직인다. 일터로 달려 가서 일하다 보면 어는덧 점심시간이다. 오후일을 끝내고 나면 어둑해 진다. 이렇게 눈을 떠서 잠들기 까지 매번 똑 같은 패턴이 반복 되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간다. 뜨거운 열대야의 밤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올 때 계절이 바뀌어 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면 또 다른 계절을 맞게 된다. 그러나 하는 일 자체는 큰 변화가 없다.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10년이 감에 따라 어느 순간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번 뒤돌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 간다.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모두 ‘돈벌기선수’가 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돈 버는 일에 올인 한다. 그렇게 10년, 20년, 30년 살다 보니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20년, 30년 후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인구피라미드
오로지 돈벌기선수가 되어 살다 보면 옆을 돌아 볼 시간도 뒤돌아 볼 시간도 별로 없다. 오로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준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모으고 또 모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후자금으로 100만불 정도는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 미래는 장미빛일까?
최근 오마이tv에서 유시민님의 영상강의를 보았다. 조계종불학연구소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제목은 ‘유시민 특강 '한국사회의 현실과 국가의 역할' 전체보기’이다. 정치인에서 작가로 변신한 유시민님이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이다. 강좌에서 인상 깊게 본 장면이 있다. 그것은 ‘인구피라미드’에 대한 것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지리시간에 인구피라미드를 본적이 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도표에 따르면 연령대별 인구가 마치 피라미드처럼 분포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교과서에는 피라미드형뿐만 아니라 ‘종형’ ‘항아리형’ 등 다양한 형식의 분포도를 볼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도표를 말한다.
다양한 인구피라미드(통계청)
통계청 사이트에서 제공된 인구피라미드를 보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보았던 그대로이다. 피라미드형, 종형, 항아리형, 별형, 표주박형 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중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마 ‘종형’일 것이다
‘항아리형’도 있다. 종형에서 변형 된 것이다. 중간연령층이 볼록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선진국형이다. 아이를 덜 낳다 보니 낮은 연령대가 푹 들어가 있다. 나머지 별형이나 표주박형은 전쟁 등 특수한 환경에 따른 것이다.
기괴한 형태의 인구피라미드
유시민님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충격적인 인구피라미드가 발표 되었다. 교과서에서 본 적이 없는 괴이한 형태의 인구피라미드이다. 2060년도 한국의 인구피라미드 형태라 한다. 스크린캡쳐한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
2060년 한국의 연령대별 인구분포도
2060년도 연령대별인구분포도이다. 지금으로부터 46년 후에 발생할 일이다. 그런데 분포도를 보면 기괴한 모습이다. 마치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듯 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2060년도의 인구에서 80세가 가장 많다. 80세라면 오래 전에 은퇴하여 생산활동을 하지 못하는 노인이다. 모아 놓은 재산이라도 있으면 다행일지 모르지만 대부분 국가의 도움에 의존해야 할 나이이다. 더구나 늙어 감에 따라 각종 병에 걸릴 가능성도 매우 높은 나이이다.
그림에서 60세 이상 80세까지 피크를 이룬다. 그런데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와 40대는 60-80대와 비교하여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더 비관적인 것은 20대 이하 이다. 20대이하의 인구는 60-80대와 비교하여 1/3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2060년도는 초고령화사회이다. 노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젊은 층이 급감한 모습이다. 그래서 기괴한 그림이 만들어 진 것이다.
2060년도의 기괴한 인구피라미드에 대하여 유시민님은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그림이지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버섯구름’이다.
버섯구름이란?
버섯구름이 있다. 사전에 따르면 ‘핵폭탄이 터진 직후에 생기는 버섯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를 ‘atomic cloud’또는 ‘Mushroom cloud’ 라 한다. 1945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사진: 위키백과
원자폭탄이 터지면 버섯모양을 한다. 구름의 상층부가 버섯의 머리부분에 해당되고 그룸의 하층부는 버섯의 줄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마치 버섯이 핀 것처럼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것이 버섯구름이다.
버섯구름은 원자폭탄이 터질 때만 보는 것은 아니다. 화산이 폭발할 때도 버섯구름을 볼 수 있다.
사진: 위키백과
화산이 폭발할 때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든다. 상층부가 넓고 하층부가 얇은 것이 특징이다.
버섯구름은 핵폭발이나 화산폭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이 났을 때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산불이나 큰 건물에서 불이 났을 때도 버섯구름 형태의 구름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버섯구름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라지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인구피라미드는?
이 시대의 인구피라미드는 어떤 모양일까? 통계청사이트에서 제공된 그림을 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인구피라미드 그림을 보면 더 이상 피라미드형태가 아니다. 종형도 항아리형도 아니다. 중간이 늘어나 있는 마름모꼴이라 볼 수 있다.
마름모꼴에서 가장 많은 연령대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40대와 50대가 가장 많다. 예를 들어 50대의 경우 거의 90만명 가량이다. 그러나 10살 이하의 인구구성비를 보면 약 45만명 가량으로 40-50대와 비교하여 거의 ‘반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기형적인 인구구성비가 불과 삼사십년만 지나면 버섯구름형태를 띨 것이라 한다.
폭발을 상징하는 버섯구름
버섯구름은 ‘핵폭발’을 상징한다. 또 ‘화산폭발’의 모습이다.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인구구성은 핵폭탄이 폭발하는 것처럼,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결국 폭발하고 말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미래는 결코 장미빛이 아니다. 미래에는 젊은 세대가 노인들을 인당 둘 또는 셋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올것이기 때문이다.
인구피라미드의 극적인 변화
인구피라미드를 보면 1960년대부터 극적인 변화를 보인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변화를 보면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인구피라미드 추이
표를 보면 1960년도의 연령대별 인구성비는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이다. 이런 형태가 가능한 것은 베이비붐의 영향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부터 1964년까지를 일반적으로 베이비붐세대로 본다. 1960년의 경우 베이비붐시대의 중간에 위치 해 있으므로 안정적인 피라미드형 인구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인 1970년이 되면 종형으로 바뀌고, 1980년이 되면 항아리형으로, 그리고 2014년 현재 마름모꼴로 변화 되었다.
이런 기형적인 연령대별 구성비는 1960년으년부터 백년이 되는 해인 2060년이 되면 마치 원자폭탄이 폭발하듯이 화산이 분출하듯이 버섯구름모양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2060년의 인구피라미드는 사실상 ‘재앙’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종말론을 암시 하는 듯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다만 ‘변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제행무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한다. 아니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애써 피하려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눈이나 귀 등 오감으로 즐길거리를 끊임 없이 찾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stn576)”라 하였고, 또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stn577)”라 하였다. 한번 형성된 것은 결국 파괴로 끝남을 말한다. 이런 원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적용된다.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유일신교이다. 하나의 원인으로 이 세상이 시작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론이다.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론에 기반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종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창조론이 있다면 당연히 종말론이 있어야 한다. 유일신교에서도 역시 종말론이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게 마련이다.
미래의 인구피라미드 구조를 보면 마치 종말론이 연상된다. 핵폭발로 모든 것이 파괴 되어 버리듯이 버섯구름 모양의 인구피라미드는 종말론을 암시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유일신교에만 있는 것일까?
불교의 종말론
불교에도 종말론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A7.66)’에 따르면 우주의 종말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뜨거운 여름날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른다. 그래서 단 한시간만이라도 태양빛에 노출되면 피부가 빨갛게 타고 만다. 그런데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더 나아가 일곱개의 태양이 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Hoti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ighassa addhuno accayena sattamo suriyo pātubhavati. sattamassa bhikkhave suriyassa pātubhāvā ayañca mahāpaṭhavī sineru ca pabbatarājā ādippanti, pajjalanti, ekajālā bhavanti. Imissā ca bhikkhave, mahāpaṭhaviyā sinerussa ca pabbatarājassa jhāyamānānaṃ ḍayhamānānaṃ aggi vātena khittā yāva brahmalokāpi gacchanti. 5
Sinerussa ca bhikkhave, pabbatarājassa jhāyamānassa ḍayhamānassa vinassamānassa mahatā tejokhandhena abhibhūtassa yojanasatikānipi kūṭāni palujjanti, dviyojanasatikānipi kūṭāni palujjanti, tiyojanasatikānipi kūṭāni palujjanti, catuyojanasatikānipi kūṭāni palujjanti, pañcayojanasatikānipi kuṭāni palujjanti.
Imissā ca bhikkhave, mahāpaṭhaviyā sinerussa ca pabbatarājassa jhāyamānānaṃ ḍayhamānānaṃ neva chārikā paññāyati1 na masī seyyathāpi bhikkhave, sappissa vā telassa vā jhāyamānassa ḍayhamānassa neva chārikā paññāyati na masi, evameva kho bhikkhave, imissā ca mahā paṭhaviyā sinerussa ca pabbatarājassa jhāyamānānaṃ ḍayhamānānaṃ neva chārikā paññāyati na masī.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오랜 기간이 경과되면 언젠가 한번은 일곱 번째의 태양이 나타나는 때가 닥친다. 수행승들이여, 일곱 번째의 태양이 나타나면, 이 대지는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온통 불꽃에 휩싸인다.
수행승들이여, 이 대지가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연소되면서 불꽃이 바람에 날려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도달한다. 수행승들이여, 산의 제왕 수미산과 더불어 불이 붙고, 불타오르고, 연소되고 파괴되면서 커다란 불더미에 제압되어 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이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삼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사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되고, 오백 요자나 크기의 봉우리도 괴멸된다.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 수미산이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인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
(Sattasuriyuggamana sutta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6,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하늘에 일곱개의 태양이 떠 오르면 우주가 파괴된다고 하였다. 그 범위가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도달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느님의 세계는 ‘brahmalokā’를 말한다. ‘범천’이라고 한다. 이는 ‘색계초선천’이다. 그래서 우주의 종말이 오면 색계초선천까지 파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파괴 되는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완전히 파괴 되어 ‘무(無)’가 됨을 뜻한다.
왜 겁화(劫火)가 일어날까?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우주는 주기적으로 파괴된다고 하였다. 그것도 ‘일겁’마다 파괴 된다고 하였다. 이를 ‘겁화(劫火)’라 한다. 겁화는 세계가 파멸될 때 일어나는 큰 불을 뜻한다. 그런데 겁화는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겁마다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파괴 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겁화가 일아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Kiṃkāraṇā evaṃ loko vinassati? Akusalamūlakāraṇā. Akusalamūlesu hi ussannesu evaṃ loko vinassati. So ca kho rāge ussannatare agginā vinassati. Dose ussannatare udakena vinassati. Keci pana dose ussannatare agginā. Rāge ussannatare udakenāti vadanti. Mohe ussannatare vātena vinassati. Evaṃ vinassantopi ca nirantarameva sattavāre agginā vinassati. Aṭṭhame vāre udakena. Puna sattavāre agginā. Aṭṭhame vāre udakenāti evaṃ aṭṭhame aṭṭhame vāre vinassanto sattakkhattuṃ udakena vinassitvā puna sattavāre agginā nassati. Ettāvatā tesaṭṭhi kappā atītā honti. Etthantare udakena nassanavāraṃ sampattampi paṭibāhitvā laddhokāso vāto paripuṇṇacatusaṭṭhikappāyuke subhakiṇhe viddhaṃsento lokaṃ vināseti.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What is the reason for the world’s destruction in this way? The [three] roots of the unprofitable are the reason. When any one of the roots of the unprofitable becomes conspicuous, the world is destroyed accordingly. When greed is more conspicuous, it is destroyed by fire. When hate is more conspicuous, it is destroyed by water—though some say that it is destroyed by fire when hate is more conspicuous and by water when greed is more conspicuous. And when delusion is more conspicuous, it is destroyed by wind.
(영역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이 세계가 파괴되는가? [세 가지]해로움의 뿌리 때문이다. 해로운 뿌리들이 치성할 때 이와 같이 세계는 파괴된다. 탐욕이 치성할 때 그것은 불로 인해 파괴된다. 성냄이 치성할 때 그것은 물로 인해 파괴된다. –어떤 자들은 성냄이 치성할 때 불로 파괴되고, 탐욕이 치성할 때 물로 인해 파괴 된다고 주장한다. 어리석음이 치성할 때 그것은 바람으로 인해 파괴된다.
(청정도론 13장 64절,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 따르면 주기적으로 겁화가 일어나는 요인으로 탐진치 3독을 들고 있다. 그래서 “탐욕이 극에 달하면 불로서 세계가 파괴 된다(So ca kho rāge ussannatare agginā vinassati)”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겁화가 일어나는 원인
원인 |
수 단 |
파괴범위 |
탐욕(Dosa)이 극에 달하였을 때 |
불(aggi) |
색계초선천까지 |
성냄(Rāga)이 극에 달하였을 때 |
물(udaka) |
색계2선천까지 |
어리석음(Moha)이 극에 달하였을 때 |
바람(vāta) |
색계3선천까지 |
표를 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극에 달하였을 때 세계가 파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것이 바람이다. 이는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지혜가 없으면 색계 3선천까지 모조리 파괴 된다.
만일 핵을 보유한 지도자가 핵을 탐욕의 수단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은 핵전쟁이 일어나 모조리 파괴 될 것이다. 만일 지도자가 격노하여 핵폭탄 단추를 누르게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역시 모조리 파괴 될 것이다. 또 지혜가 무지하여 어리석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 더 많이 파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가 파괴 되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과 성냄에 어리석음이 극에 달하였을 때임을 알 수 있다.
삼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겁화는 피할 수 없다. 마치 유일신교에서 창조론이 있으면 반드시 종말론이 있듯이 이 세상이 생겨 났다면 반드시 파괴가 일어난다. 그런데 그 파괴가 ‘엔트로피법칙’에서처럼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여 ‘열평형상태’가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겁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어서 세상은 주기적으로 파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겁화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Evaṃ aniccā bhikkhave saṅkhārā, evaṃ addhuvā bhikkhave saṅkhārā, evaṃ anassāsikā bhikkhave, saṅkhārā. Yāvañcidaṃ bhikkhave alameva sabbasaṅkhāresu nibbindituṃ, alaṃ virajjituṃ, alaṃ vimuccituṃ.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 수행승들이여, 형성된 것들은 견고하지 않고, 수행승들이여, 형성된 것들은 불안정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한, 일체의 형성된 것들에서 싫어하여 떠나야 하며, 사라져야 하며, 해탈해야 한다.
(Sattasuriyuggamana sutta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6, 전재성님역)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이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저 산의 바위가 견고 해 보이지만 수 억년이 지난 후에 그 자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듯이 우주 또한 결코 견고 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는 누구일까? 경에 따르면 ‘견해를 갖춘 사람(diṭṭhapada)’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흐름에 든 님’, 즉 ‘예류자’를 말한다. 예류자가 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류자가 되기 이전에는 삼계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 그렇다면 삼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일까?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의 형성된 것들에서 싫어하여 떠나야 하며, 사라져야 하며, 해탈해야 한다.(sabbasaṅkhāresu nibbindituṃ, alaṃ virajjituṃ, alaṃ vimuccituṃ)”라 하였다. 예류자가 되면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삼계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일까?
앞으로 46년 후면 2060년이 된다. 이때 까지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이다. 그리고 베이비부머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표에 따르면 100세를 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일까? 반드시 그런 같지는 않다.
최근 EBS에서 EIDF 즉, EBS국제다큐영화제가 방영되고 있다. 대부분 방송들이 웃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프로임에 반하여 EIDF에서는 사람들이 애써 피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 ‘치매환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늙어 간다는 것은 고통이다. 특히 치매환자가 그렇다. 가장 가까운 것에서부터 기억이 하나씩 지워지다 마침내 자기자신도 몰라 보게 되었을 때 매우 비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치매환자는 점차 늘어 가는 추세라 한다. 특히 고령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치매환자 역시 늘어나는 것으로 본다.
치매환자 이야기를 보면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아무런 해놓은 일이 없이 나이만 먹은 노인을 보면 늙어 노인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게 고통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그렇다면 늙기 전에 치매로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이 온전할 때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ṇā,
Etaṃ bhayaṃ maraṇe pekkhamāno
lokāmisaṃ pajahe santipekkhoti.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상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2.19)
‘삶은 덧없다(Upanīyati)’고 하였다. 이는 휩쓸려 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is brought up to; is carried away.’라고 표현 된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세월이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 하였다.
청춘이라는 시기가 있는데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간다. 대학을 예로 든다면 연령대가 20대초중반이다. 그래서 대학은 항상 활기로 넘쳐 난다. 매년 20세의 되는 젊은이가 들어오고 또 매년 그 만한 숫자가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르는 물처럼 젊음이 유지된다. 그러나 한 때 뿐이다. 누구나 20대를 향유하지만 그 시기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라 하였다.
그런데 청춘만 우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30대도 우리를 버리고 40대도 우리를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은 차츰 우리를 버리게 된다. 그래서 늙고 병든 몸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고 젊은 시절에 돈을 벌어 놓은 것도, 학문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도, 도를 닦아 깨달은 것도 없다. 그저 마른 호수에 날게 부러진 늙은 백로와 같은 신세가 된다. 또 쏘아져 버려진 화살 같은 존재가 노인이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기 전에, 늙어 노인이 되기 전에, 치매로 기억이 상실이 되기 전에 해야 할이 무엇일까? 그것은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상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라 하였다. 지혜를 가진 자라면 모든 기득권을 내려 놓고 고요함, 즉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2014-08-29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삽베삿따바완뚜수키땃따” 원한 맺힌 자에게 (0) | 2014.09.01 |
---|---|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 (0) | 2014.08.30 |
중도와 십이연기의 관계는? 초기불교의 일곱가지 중도사상 (0) | 2014.08.21 |
띳사와 멧떼이야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공통점과 다른점은? (0) | 2014.08.18 |
“거듭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병아리비유와 앙굴리말라 (0) | 2014.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