띳사와 멧떼이야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공통점과 다른점은?
주석적 번역의 예
초기경전을 보면 종종 숫따니빠따의 문구를 인용한 경을 볼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중간의 경(A6.61)’에 그런 내용이 있다.
부처님이 한때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 미가다야에 계실 때 장로수행승들이 모여서 논의를 하였다. 이때 어느 장로수행승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vuttamadaṃ āvuso bhagavatā pārāyane metteyyapañhe:
"So ubhante viditvāna
majjhe mantā na lippati
Taṃ brūmi mavāpurisoti
so, dha sibbanimaccagā"
[장로 수행승]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숫타니파타의 피안으로 가는 길에서 멧떼이야의 질문에 이와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는 양극단을 곧바로 알아
지혜롭게 중간에도 때묻지 않네.
나는 그를 위대한 님이라 부르니
그는 세상에서 침모를 뛰어넘네.’
(Majjhesuttaṃ -중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61, 전재성님역)
전재성님역에서 ‘숫타니파타’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원문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 대신 ‘pārāyane metteyyapañhe’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pārāya는 숫따니빠따의 제5품의 이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번역문에서 ‘숫타니파타’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은 원문에 없는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찾아 보니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 「멧떼야의 질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번역 되어 있다. 역시 원문에 없는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부처님의 원음 중의 원음 4품과 5품
사부니까야에서 숫따니빠따의 문구를 인용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그것은 숫따니빠따가 매우 고층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숫따니빠따의 4품(Aṭṭhaka Vagga)과 5품(Pārāyana Vagga)의 경우 부처님 부처님의 원음 중의 원음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재세시에 사리뿟따존자가 이 두 품에 대한 주석을 하였는데 그것이 ‘닛데사’이다. 이 닛데사는 쿳다까니까야에 속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숫따니빠따의 4품과 5품은 이미 부처님 제세시에 제자들이 암송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논의 할 때 숫따니빠따를 인용하고 있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경에 등장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부처님이 “싸리뿟따여, ‘피인으로 가는 길’에서 아지따의 질문 가운데 이와 같은 시가 있다. (S12:31)”라고 제5품을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띳사와 멧떼이야의 인연담
숫따니빠따 제5품의 제목은 ‘피안으로 가는 길’이다. 피안이라는 뜻의 pārāyana는 ‘final aim’의 뜻으로 최종목적지 즉, ‘열반’을 뜻한다. 그렇다면 열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학인들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세 번째의 경이 학인 ‘띳사 멧떼이야 질문의 경(Tissametetayyasutta, Sn5.3)’이다. 이는 띳사와 멧떼이야가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이 앙굿따라니까야에 언급되어 있다.
띳사와 멧떼이야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Metteyyapañhe : Prj.II.535에 따르면, 세존께서 싸밧티에 계실 때에 띳사와 멧떼이야라는 두 친구가 싸밧티에 왔다가 저녁 무렵 많은 사람들이 제따바나(Jetavana)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묻자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제따바나의 부처님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듣고 승단에 들어 갔다.
멧떼이야는 그의 친교사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 피부에 대한 다섯 가지 명상수행을 닦아 친교사와 함께 아라한이 되었다. 반면에 띳사는 싸밧티에서 세존을 만나 가르침을 들으며 지냈는데, 속가의 큰 형이 죽자 집으로 돌아 갔다가 친지들이 설득을 해서 재가의 생활로 돌아 왔다.
나중에 멧떼이야가 우안거가 지나자 부처님과 함께 긴 여행을 하다가 띳사의 마을에 들렀다. 멧떼이야는 ‘세존이시여, 이 마을에 저의 재가의 친구가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잠시 기다려주십시요’라고 말하고는 띳사를 만나 그를 데리고 부처님께 다시 왔다.
이때에 멧떼이야가가 띳사를 위해 부처님께 질문하면서 이경이 시작 된다. 이 경을 듣고 띳사는 진리에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가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다.
(앙굿따라니까야 6권 250번 각주, 전재성님)
띳사와 멧떼이야의 인연담을 보면 매우 익숙하다. 그것은 두 친구의 상반된 행로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두 친구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이제 까지 듣거나 보아서 알고 있었던 불교이야기가 사실은 초기경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야기는 신라시대 성덕왕 시대 설화이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다.
이 작품은 부득과 박박의 성불을 통하여 당시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한 여인에 대한 부득과 박박의 태도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데, 박박은 자신의 수도 정진을 위해 여인을 배척하는 반면, 부득은 계율을 깨고 그 여인을 절 안으로 받아들여 해산을 돕고 목욕까지 시킨다. 결국 먼저 성불을 하는 것은 부득이다. 이로써 불교의 진정한 정신은 계율에 집착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자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부득이 수도 생활을 하는 박박에게까지 도움을 주어 함께 성불을 한다는 면에서 불교의 자비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두 친구의 이야기를 보면 숫따니빠따의 멧떼이야와 띳사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 가는 멧떼이야는 달달박박과 유사하고, 도중에 재가의 삶을 살아 가는 띳사는 노힐부득과 비슷하다. 그러나 결말은 정반대이다.
결말이 정반대인 이유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 가는 멧떼이야가 재가의 삶을 살고 있는 띳사를 구원하고 있다. 그러나 계율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도를 행하는 노힐부득이 게율을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달달박박을 구원한다. 이렇게 내용이 정반대인 이유는 무엇일까?
대승보살사상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보살의 삶을 살고자 한다. 반면 초기불교사상은 열반을 성취하여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차이가 출가자와 재가자의 삶의 방식에서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름 |
구 분 |
수행 |
구원 |
사상 |
멧떼이야 |
출가의 삶 |
아라한이 됨 |
구원자 |
초기불교가르침 |
띳사 |
도중 재가의 삶 |
|
구원받는자 |
|
달달박박 |
계율집착 |
|
구원받는자 |
|
노힐부득 |
계율비집착 |
성불함 |
구원자 |
대승보살사상 |
초기불교에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출자가자가 재가자를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대승보살사상의 경우 계율을 어기고 보살도를 실천한 자가 출가자를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번역자의 서로 다른 번역
출가의 멧떼이야는 재가의 띳사에게 피안으로 가는 길을 유도한다. 숫따니빠따의 ‘학인 띳싸 멧떼이야 질문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존자 띳싸 멧떼이야]
“ 이 세상에서 누가 만족합니까?
누가 동요하지 않는 자입니까?
누가 양극단을 곧바로 알아
지혜롭게 중간에도 때 묻지 않는 자입니까?
누구를 위대한 님이라고 부릅니까?
이 세상에서 피륙을 뛰어넘은 자는 누구입니까?”
[세존]
“멧떼이야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도 청정한 삶을 지키며,
갈애를 떠나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성찰하여 열반에 든 수행자,
그에게는 동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양극단을 곧바로 알아,
지혜롭게 중간에도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그를 나는 위대한 님이라 부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욕망의 피륙을 뛰어넘어 있습니다.”
(Tissametetayyasutta- 학인 띳싸 멧떼이야 질문의 경, 숫따니빠따 Sn5.2, 전재성님역)
출가자 멧떼이야와 재가자 띳사가 부처님에게 “이 세상에서 피륙을 뛰어넘은 자는 누구입니까? (idha sibbanī maccagā)”라고 질문한다. 여기서 ‘피륙’이라는 ‘sibbanīm’이다. 각주에 따르면 ‘꿰메다(sibbati)’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주석에 따르면 ‘sibbanīm’은 갈애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숫따니빠따 2344번 각주에 따르면 전재성님은 ‘sibbanīm’에 대하여 “침모(재봉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각주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출간된 앙굿따라니까야 중간의 경 252번 각주에서는 이 말을 뒤집는다. ‘sibbanīm’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ibbanīm : ‘꿰메다(sibbati)’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Ndd.2.276에 따르면, 갈애(tanha)를 의미한다. 숫타니파타와는 달리 여기서는 피륙이 아니라 Lba III.61의 번역인 침모(여자 재봉사)를 선택한다.
(앙굿따라니까야 6권 252번 각주, 전재성님)
입장이 바뀐 이유로서 ‘Lba III.61’의 번역을 들고 있다. 그래서 Sibbanīm번역에 대하여 피륙이 아니라 ‘침모’로 바뀌었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여자재봉사를 뜻하는 침모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말을 이해하려면 게송에서 언급된 양극단에 대하여 알아야한다.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게송에 따르면 양극단이라는 말이 나온다. 피안으로 가는 길은 양극단을 알아 때묻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때묻지 않는 것은 청정한 삶을 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도 청정한 삶을 지키며 (Kāmesu brahmacariyavā, stn1041)”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청정한 삶(brahmacariya)’은 감각적 쾌락을 극복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성적교섭을 삼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4장 ‘띳사멧떼이야경(Sn4.7)’에서 “여태까지는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수레가 길을 벗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비속한 자라 부릅니다.(stn816)”라고 말씀 하셨다. 마치 출가의 생활을 접고 재가의 생활로 돌아간 띳사를 향해 말하는 것 같다. 피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가장 첫 번째 조건이 성적교섭을 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양극단
부처님은 게송에서 양극단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 양극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중간의 경에서는 수행승들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양극단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
양극단의 내용 |
1 |
“벗들이여, 접촉이 첫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발생이 두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입니다.” |
2 |
“벗들이여, 과거가 첫 번째 극단이고, 미래가두 번째 극단이고, 현재가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입니다.” |
3 |
“벗들이여, 행복이 첫 번째 극단이고, 고통이두 번째 극단이고, 고통도 행복도 없는 것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입니다.” |
4 |
“벗들이여, 명칭이 첫 번째 극단이고, 물질이두 번째 극단이고, 의식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입니다.” |
5 |
“벗들이여, 여섯 가지 내적 감역이 첫 번째 극단이고, 여섯 가지 외적 감역이 두 번째 극단이고, 의식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입니다.” |
6 |
벗들이여, 개체가 첫 번째 극단이고, 개체의 발생이 두 번째 극단이고, 개체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입니다.” |
Majjhesuttaṃ -중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61
No |
첫 번째 극단 |
두 번째 극단 |
중간 |
1 |
접촉 |
접촉의 발생 |
접촉의 소멸 |
2 |
과거 |
미래 |
현재 |
3 |
행복 |
고통 |
고통도 행복도 없는 것 |
4 |
명칭 |
물질 |
의식 |
5 |
여섯 가지 내적 감역 |
여섯 가지 외적 감역 |
의식 |
6 |
개체 |
개체의 발생 |
개체의 소멸 |
여섯 명의 수행승이 여섯 가지 견해를 말하였다. 이렇게 여섯 가지 이므로 앙굿따라니까야 ‘여섯의 모음(Chakkanipāta)’에 포함 시켰을 것이다.
여자재봉사 침모의 뜻은?
여섯 가지 양극단에서 공통적으로 언급 되어 있는 내용이 있다. 이는 경에서 “갈애가 양극단을 꿰매서 이러이러한 존재를 생겨나게 합니다.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라는 말이다. 여기서 꿰메다라는 말이 sibbati이다. 누가 꿰메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침모(sibbanīm)’이다. 침모를 뜻하는 sibbanīm 은 ‘꿰매다라’는 뜻의 sibbati에서 유래 하였으므로 침모는 이 헝겁과 저 헝겁을 서로 꿰매는 역할을 하는 ‘여자재봉사’를 뜻한다.
경에 따르면 양극단을 꿰매면 ‘존재’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극단을 꿰매는 것에 대하여 ‘갈애’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갈애와 침모는 사실상 ‘동의어’가 된다. 갈애가 의인화 된 것이 침모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업으로서 존재 즉, ‘업유’는 갈애에 기인하고 있다. 십이연기정형구에 따르면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존재의 발생은 갈애를 조건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양극단은?
그렇다면 여섯 가지 양극단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는 것일까? 그래서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누가 잘 말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이에 부처님은 “그는 양극단을 곧바로 알아 지혜롭게 중간에도 때묻지 않네. 나는 그를 위대한 님이라 부르니 그는 세상에서 침모를 뛰어넘네.”라고 게송을 읊으신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Phasso kho bhikkhave eko anto, phassasamudayo dutiyo anto. Phassanirodho majjhe. Taṇhā sibbanī.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 Ettāvatā kho bhikkhave bhikkhu abhiññeyyaṃ abhijānāti, pariññeyyaṃ parijānāti. Abhiññeyyaṃ abhijānanto pariññeyyaṃ parijānanto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 antakaro hotī, 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접촉이 첫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발생이 두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이다. 갈애가 양극단을 꿰매서 이러이러한 존재를 생겨나게 한다. 벗들이여,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안다.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고,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아서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Majjhesuttaṃ -중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61, 전재성님역)
번역어에서 실수가 있다. 그것은 “벗들이여”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지칭할 때는 “bhikkhave”라 하여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된다. 제자들끼리 호칭할 때는 “āvuso”라 하여 “벗들이여”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번역어에서 “벗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초불연에서는 “비구들이여”라고 하여 제대로 번역하였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 말한 여섯 가지 양극단에 대한 견해 중에 첫 번째 것에 대하여 손을 들어 주었다. 그것은 접촉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첫 번째 양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왜 접촉(phassa)인가?
부처님이 이렇게 접촉(phassa)을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존재는 결국 접촉에서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 과거나 미래, 행복과 고통 등을 이야기 하지만 접촉이 없이는 성립 될 수 없다. 그래서 “접촉이 첫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발생이 두 번째 극단이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 양극단을 연결하는 것은 갈애라는 침모(여자 재봉사)이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업으로서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십이연기법이다.
부처님이 접촉을 강조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이는 세상의 발생원리를 접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교도의 경에서 사리뿟따존자가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부처님에게 배운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싸리뿟따]
벗이여, 세존께서는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면, 세존께서 말씀대로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세존을 잘못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는 대로 설명하는 것이고, 그대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Aññatitthiyasuttaṃ-이교도경, 상윳따니까야S12:24, 전재성님역)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접촉을 연유로 하여 일어난다. 접촉 없이는 행복이나 고통 등 어떤 것도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희론이나 망상도 접촉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꿀과자의 경(M17)에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라 하였다. 이렇게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도 “수행승들이여, 접촉이 없이 그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모든 것은 접촉에서
이처럼 모든 것은 접촉에서 출발한다. 양극단을 꿰매는 역할을 하는 갈애 역시 접촉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접촉이 첫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발생이 두 번째 극단이고, 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침모이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Mrp. III. 403에 따르면, 접촉은 접촉을 통해 생겨난 자신의 존재[몸]을 의미하고, 접촉의 발생은 자신의 존재에 이루어진 업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미래의 존재를 말하고, 접촉의 소멸은 열반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 6권 254번 각주, 전재성님)
양극단은 접촉과 접촉의 발생이다. 이런 양극단을 이어주는 것은 갈애이다. 그런데 접촉의 소멸이 중간이라 하였다. 더 이상 접촉이 일어 나지 않는 다는 것은 존재로서 태어남이 없다는 말이다. 바로 그 상태가 열반이라 하였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부처님은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안다. (abhiññeyyaṃ abhijānāti, pariññeyyaṃ parijānāti)”라 하였다.
‘곧바로 알아야 한다(abhiññeyya)’는 뜻은?
부처님은 곧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무엇을 곧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일 것?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M49)’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곧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 있는데, 이것들은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Mahāsaḷāyatanika suttaṃ -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즉, ‘오취온’을 말한다. 오온에 집착하였을 때 존재로서 태어남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곧바로 알았다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닦아야 할 것이다. 또 실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버려야 할 것은 무명과 존재에 대한 갈애이고, 닦아야 할 것은 멈춤과 통찰이고, 실현해야 할 것은 명지와 해탈이다.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pariññeyya)’는 뜻은?
부처님은 곧바로 알되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완전하게 안다는 말이 ‘pariññeyya’이다. 이는 ‘what should be known accurately’의 뜻으로 ‘철저하게 안다’는 뜻이다.
곧바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집착의 산물이라는 것, 즉 오취온이라는 것을 말하지만 ‘완전하게 안다’ 또는 ‘철저하게 안다’는 뜻의 pariññeyya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이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S.III,26’를 들고 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ā ca bhikkhave, pariññā: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Ayaṃ vuccati bhikkhave pariññāti.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완전한 앎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을 부수고, 성냄을 부수고, 어리석음을 부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완전한 앎이라고 한다.
(Pariññā sutta -완전한 앎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23, 전재성님역)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부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이와 같은 완전한 앎으로 열반을 본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뜻의 ‘pariññeyya’는 탐진치가 부수어진 상태, 즉 열반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아서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깨달은 자가 되려면
이렇게 완전하게 알았을 때 부처님은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한 자는 ‘깨달은 자’즉, 붓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ṃ;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ṃ pahīnaṃ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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