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병아리비유와 앙굴리말라
내 새끼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데
최근 놀라운 뉴스를 보았다. 그것은 세월호유가족들이 경찰들에게 끌려 가면서 실신하였다는 소식이다. “내새끼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며 길거리에서 비오는 날 길거리에서 하루밤을 꼬박 셀 정도로 절실한 것이었으나 일종의 폭력이라 볼 수 있는 공권력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국가가 이들을 보호해 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공권력을 행사하여 실신하게 만든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도전드라마 초반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정도전이 나주로 귀양가서 현지 주민들과 대화 하는 내용이다. 정도전은 개성이 있는 북쪽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라 걱정을 한다. 이를 본 농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왜놈이든 뙈놈이든 누구든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가 이 땅의 주인으로 들어 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주인만 바뀔 뿐 자신들의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편안하게만 해 주면 어느 누가 들어 와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을 잘 보호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의 주인인 것이다.
세월호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이제 거의 다 투사가 되었다. 그래서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 밤새워 거리에서 보낸다. 그럼에도 이 땅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불온시할 뿐이다.
기득권자가 되면 모두 다 이렇게 되는 것일까?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 국민의 사대의무를 충실히 한 국민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마구 학대한다면 정도전 드라마처럼 “우리에게는 왜놈이든 뙈놈이든 누구든 상관없습니다”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세상의 파괴
지난주 토요일 세월호 국민휴가 마지막날 광화문광장에 갔었다. 그 자리에 한달 가까이 단식하고 있는 유민이 아빠를 보았다. 한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생수하나로 버티고 있다고 하였다. 그 때 유민이 아빠는 “이곳 광화문에서 죽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여 보았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내고 그 딸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무엇이 무섭고 두려운지 결사적으로 유가족들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것도 모자라 불온한 집단의 사주를 받는 것처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목숨이 다 할 때 까지 단식하려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단식을 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이 세상과 단절을 뜻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다.
자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느 블로그에서 자살충동에 대한 글을 읽었다. 사업실패로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하고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생각만 하였다는 사람의 글이다. 글에 따르면 컴퓨터의 ‘딜리트(del)’키를 누르면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하였다.
자살을 생각할 때는 오로지 이 세상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 따르면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존재에 대한 갈애와 함께 극단에 속한다. 몸의 파괴와 함께 정신도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극단적 견해는 절대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절대무는 절대로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무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이는 절대로 존재한다는 절대유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조건에 따라 발생되고 소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이 남아 있는 한 절대무와 절대유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딜리트 키를 누르면 깨끗이 제거 되듯이 세상과 작별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뒤집어 생각하면 자살을 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과 이 세상이 파괴 되는 것 두 가지라 볼 수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을 자기 위하여 눈을 감으면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일어난다. 눈이 떠지기 때문에 마치 부활한 것처럼 다시 세상이 시작 된다. 이렇게 끊임 없이 눈을 ‘감았다’ ‘떳다’ 하면서 일생을 보내게 되는데 그때 마다 ‘죽었다’ ‘부활했다’ 하는 듯 하며, 또 한편으로 세상이 파괴 ‘되었다’ ‘생겨났다’ 하는 착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눈을 감은 다음에 다시는 눈을 뜨지 않으면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그런데 역으로 눈을 감았다고 눈을 뜨지 않는 것은 세상이 파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마 자살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을 혐오하여 이 세상을 파괴하고픈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기 위하여 눈을 감았다고 볼 수도 있다.
불교에서 세상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에서 세상은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산하대지산천초목의 ‘기세간(器世間)’이다. 이런 세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 하였고 내가 죽고 나서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이런 세상은 나에게 있어서 ‘객관적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세상을 초기불교 용어로 ‘오까사로까(okasa-loka)’라 한다. 이런 기세간에서 사람들은 살아 간다. 이런 세상을 중생으로서의 세상이라 한다. 불교용어로서 ‘삿따로까(satta-loka)’라 한다. 이처럼 ‘오까사로까(okasa-loka)’와 ‘삿따로까(satta-loka)’ 두 가지에 대하여 객관적인 세상이라 말할 수 있다.
객관적인 세상에서 나는 객관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갠지스 강의 모래알 처럼 객관적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주관적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전문술어로 ‘상카라로까 (sankata-loka)’라 한다. 이를 ‘형성된 세상’이라 하는데 모든 ‘유위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성되었다는 말인가?
눈을 뜨면 사물이 보인다. 귀를 기울이면 소리가 들린다. 이처럼 각감기관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있다. 눈, 귀, 코 등 각감기관이 형상, 소리, 냄새 등 감각대상과 접촉 하였을 때 하나의 인식이 일어나는데, 그 인식이 일아남에 따라 세상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형성된 세상인 ‘상까따로까(sankata-loka)’이다.
상까따로까는 주관적 세상이다. 오로지 인식되고 분별되어야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형성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세상이 파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에 따라 이 세상이 생겨났다가 파괴되기를 수 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을 바라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그것은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이다. 종교로 따진 다면 유일신교는 객관적 세계관에 해당되고 불교는 주관적 세계관에 해당된다.
객관적 세계는 존재론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주관적 세계관은 철저하게 인식론을 근거로 한다. 그것은 접촉에 따른 세상의 발생이다. 이는 초기경에서 세상의 발생의 원리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세계의 발생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 세계의 발생이다. (S12.44)”라고 정의 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세계관은 접촉에 따른 인식론 내지 분별론임에 틀림 없다. 이는 다름 아닌 주관적 세계관이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도 있다
주관적 세계관에 따르면 눈을 감는 것은 세상이 파괴 되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아도 세상이 파괴 되는 것이고, 잠을 자기 위하여 눈을 감는 것도 세상이 파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죽음에 이르러 눈을 감는 것은 이 세상의 완전한 파괴에 해당될 것이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인식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이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있게 된다. 그래서 접촉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야 세상 역시 발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날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 한 마음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파괴하고픈 마음으로 자살을 하였어도 마음이 일어날 조건이 되어 있다면 재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싫어도 다시 재생해야 한다. 특히 자살하여 세상을 파괴하려 하는 경우 그 순간 악하고 불선한 마음을 가졌을 경우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지막 마음에 대한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한 세상이 다시 발생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싫어서 아무리 숨고 싶어도 삼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파괴할 수 있을까?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있다. 데미안에서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미안)
새가 알에서 부화하여 알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하여 ‘세상에 나온다’라 하지 않고 ‘한세계를 파괴한다’고 표현하였다. 왜 이런 표현을 하였을까?
소설 데미안의 모티브는 맛지마니까야라 한다. 이에 대하여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미안과 맛지마 니까야(2012-05-18)’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맛지마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독일의 ‘칼 오이겐 노이만’에 의해서이다. 우리나라 보다 백년 빠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 전파 측면에서 본다면 독일이 백년 앞선 선진국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그 때 당시 청년 헤르만 헤세가 보았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젊은 시절 불경을 읽고 감화를 받아 데미안(1916년)과 싯다르타(1922년)를 출간하였다고 한다.
병아리비유를 보면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데미안은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병아리비유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한존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한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아리를 둘러 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에 대하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세계로 비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에서 병아리의 비유를 어떻게 들었을까? 이 부분에 대한 경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Seyyathāpi bhikkhave kukkuṭiyā aṇḍāni aṭṭha vā dasa va dvādasa vā, tānassu kukkuṭiyā sammā adhisayitāni, sammā pariseditāni, sammā paribhāvitāni, kiñcāpi tassā kukkuṭiyā na evaṃ icchā uppajjeyya: aho vatime kukkuṭapotakā pādanakhasikhāya vā mukhatuṇḍakena vā aṇḍakosaṃ padāletvā sotthinā abhinibbhijjeyyunti. Atha kho bhabbāva te kukkuṭa potakā pādanakhasikhāya vā mukhatuṇḍakena vā aṇḍakosaṃ padāletvā sotthinā abhinibbhijjituṃ. Evameva kho bhikkhave evaṃ ussoḷhī pannarasaṅgasamannāgato bhikkhu bhabbo sambodhāya, bhabbo abhinibbhidāya, bhabbo anuttarassa yogakkhemassa adhigamāyāti.
[세존]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암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의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
(Cetokhilasutta-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바로 이 대목이 헤르만 헤세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병아리비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병아리비유를 보면 철저하게 병아리가 혼자서 알을 깨고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동기(啐啄同機)와 다른 것이다.
줄탁동기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선종(禪宗)의 공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로지 홀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암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할 뿐 알을 깨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이 병아리비유를 들어서 말씀 하신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남이 깨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조건이 열다섯 가지라 하였다. 그 열다섯 가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의 버림, 다섯 가지 속박의 버림, 다섯 가지 신통의 기초를 말한다.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병아리의 비유는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 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맛지마니까야 ‘학인의 경(M53)’에서도 보여지고 상윳따니까야 도끼자루 비유의 경(S22.101)’에서도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위와 같은 문장이 들어 간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도끼자루 비유의 경(S22.101)’에서는 병아리 비유가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품지 못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지 못하면, 올바로 부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닭은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부화시키고 싶어도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부화시킬 수 없다.
(Vāsijaṭopama sutta-도끼자루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01,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오로지 ‘도끼자루 비유의 경(S22.101)’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전 비유와 다르다. 그것은 병아리의 부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부화할 때는 적절한 온도를 유지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미 닭이 품어 주는데, 이런 품어 주는 행위에 대하여 수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닦아야 하는가? 경에 따르면 네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 네 가지 정근(사정근), 네 가지 신통의 기초(사신통), 다섯 가지 능력(오력), 다섯 가지 힘(오력),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칠각지),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37조도품을 말한다. 알을 부화하기 위하여 품는 것처럼 수행자는 37조품을 닦아야 함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도끼자루 비유의 경(S22.101)’ 에서 본 병아리의 비유는 크게 두 가지의 교훈이 있다. 첫 번째는 병아리알을 부화 하기 위해서는 잘 품어 주어야 하듯이 37가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이용한 수행을 하여야 함을 말한다. 두 번째는 부화된 병아리는 홀로 알을 깨고 나오듯이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 역시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가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여 깨달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은 알을 품는 것과 같고, 깨닫는 것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린 듯 하였을 때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듯 수행자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픔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였을 때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소설가 박범신은 어렸을 적 소설을 하루 밤만에 읽고 난 다음날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때 느낌에 대하여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린 듯하다고 하였다. 마치 비갠후에 무지게 뜨는 하늘과 땅을 본듯한 느낌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수행자들로 부터도 듣는다. 열반을 체험하였을 때 새롭게 태어 난 듯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눌라 스님은 음성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무엇이 일어 났는지 자기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뭔가 일어 났는지는 모르는데 거기서 깨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것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는 겁입니다. 마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다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16단계 및 도와과, http://cafe.daum.net/kalyanamitta)
열반체험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청정해져 순수에 이르렀을 때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마치 비갠후에 하늘과 땅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 것 모든 것이 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본 것처럼 새로워 보이고 친근하고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청정한 마음 상태가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듯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병아리가 부화할 때 스스로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 이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태어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 태어남’이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한번 더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이 괴롭다고 하여 자살함으로서 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함으로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거듭 태어남에 대한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앙굴리말라경이 바로 그것이다. 앙굴리말라경에서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Tena hi tvaṃ aṅgilimāla, yena sā itthi itthināparaṃ tenupasaṅkama. Upasaṅkamitvā taṃ itthiṃ evaṃ vadehi: yatohaṃ bhagini, ariyāya jātiyā jāto nābhijānāmi sañcicca pāṇaṃ jīvitā voropetā. Tena saccena sotthi te hotu sotthi gabbhassā'ti.
[세존]
“앙굴리말라여,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싸왓띠로 가라. 가서 그 부인에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라.”
(앙굴리말라경-Aṅ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연쇄 살인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교화로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탁발을 하던 어느 날 어떤 부인이 난산을 하여 불구가 된 아이를 보았다. 그래서 예전의 살인마이었던 앙굴리말라는 “오! 뭇 삶들은 얼마나 괴로운가? 참으로 뭇 삶들은 얼마나 괴로운가?”라고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일어 났다.
주석에 따르면 여인이 앙굴리말라를 보고 난산하여 불구자를 낳은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앙굴라말라는 예전의 연쇄살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앙굴리말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여인이 앙굴리말라에 대한 분노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굴리말라에게 “자매여,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앙굴리말라는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존이시여, 저는 의도적으로 뭇삶들의 생명을 빼앗았는데, 저보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라고 앙굴리말라에게 거듭말한다. 이에 앙굴리말라는 여인을 찾아가 부처님이 전한 말씀을 그대로 말한다.
Upasaṅkamitvā taṃ itthiṃ evaṃ vadehi: yatohaṃ bhagini, ariyāya jātiyā jāto nābhijānāmi sañcicca pāṇaṃ jīvitā voropetā.
[앙굴리말라]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내가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함으로 당신이 잘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랍니다.”
(앙굴리말라경-Aṅ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앙굴리말라는 왜 부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대로 말을 전하였을까? 이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ariyāya jātiyā jāto)”라는 말에 답이 있다. 앙굴리말라는 거듭태어난 것이다. 어떻게 거듭태어났을까?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감으로서 예전의 살인마가 아니다. 머리를 깍고 탁발하며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수행자이다. 그런 앙굴리말라에게 부처님은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라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고귀한 태어남’은 ‘ariyāya jāti’를 뜻한다. ‘성스런 태어남’이란 뜻이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성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 성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ariyāya jātiyā jāto)”라고 말하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예전의 살인마 앙굴리말라가 아니다. 현재의 앙굴리말라는 성자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병아리가 알껍질을 스스로 힘으로 깨고 나왔듯이 앙굴리말라는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고 현재의 몸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런 앙굴리말라는 열심히 수행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경에서는 “마침내 존자 앙굴리말라는 거룩한 분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Aññataro ca kho panāyasmā aṅgulimālo arahataṃ )”라고 표현이 되어 있다.
“거듭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있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일 것?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후자이다. 이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한번 태어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 가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희로애락을 겪는다.
그런데 지금 괴롭다고 하여 자살한다면 이 세상도 파괴 되는 것일까?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이는 ‘비존재의 갈애’에 지나지 않는다. ‘몸이 파괴 되어 마음도 죽는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아라한이 되어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kamma, 업)를 짓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연기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런데 그런 세계는 악처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자살하는 순간의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대상으로 태어날 곳이 결정되는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으로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맛지마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에 언급되어 있는 병아리부화의 비유이다. 이 비유를 모티브로 하여 헤르만 헤세가 소설 데미안을 썼는데, 데미안의 한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내용이 병아리 비유를 잘 설명해 준다.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려면 자살이 아니라 수행을 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수행을 하여 마침내 깨달았을 때 세계는 파괴 된다. 그 세계는 물론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하였을 때 거듭 태어난다고 한다. 죽어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몸과 마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예를 앙굴리말라경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연쇄 살인마 앙굴리말라도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라고 말한 것이다.
한세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거듭 태어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거듭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듭태어남이란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닫는 것이다”라고.
22014-08-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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