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설법을 할 것인가? 차제설법과 방편설법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 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 같다. 유럽의 중세시대의 경우 바이블이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성직자들만이 읽고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불경도 승려들만 읽고 볼 수 있었다. 글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전해 주는 말만 믿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성직자들의 권위만 높아 갔다.
요즘은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시대이다. 어려운 한자어로 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이라도 읽을 수 있는 우리말로 된 니까야번역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수십권에 달하는 매우 방대한 규모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경전이다.
이렇게 부처님 원음을 접하다 보니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게 되었다. 교리에 대하여 알고 가르침의 본질에 대하여 알게 되자 그와 반비례 하여 성직자의 권위는 점차로 떨어지게 되었다.
부처님 말씀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경전상에서 부처님 말씀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학자들이다. 공부를 많이 하여 박사학위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이 사회의 오피니언리더라 볼 수 있는 교수들은 공공연하게 경전을 부정한다. 경전에 쓰여 있는 말이 모두 다 부처님의 말일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교수는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부처님 말씀(불경에서 그렇다고 주장하는)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과(에) 부합하고 위배되지 않으므로 옳은 것이다.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1, 사량분별과 연기법, 불교닷컴 2014-08-11)
과학자인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검증된 교리는 옳은 것이라 한다. 이런 논리라면 초기경전에서 묘사 되어 있는 하늘사람(데와따), 하늘아들(데와뿟따), 하느님(브라흐마), 제석천, 악마(마라)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부처님은 그들 보다 더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거나 굴복시킨다.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고?
초월적 존재나 신화적 이야기가 등장하였다고 하여 모조리 낡고 쓸모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강병균 교수는 ‘그렇다’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래된 것이면 무조건 옳다는 법이 있는가? 예를 들어 늙은 사람은 배우자로서는 인기가 없다. 늙은 오이도 인기가 없다. 늙은 미나리는 정말 인기가 없다. 그러므로 오래된 책에 쓰인 것이라고 해서 교조적으로 무조건 믿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1, 사량분별과 연기법, 불교닷컴 2014-08-11)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강병균교수에 따르면 오래 된 것이라 하여 권위가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오해라 한다. 오히려 오래 된 것일수록 모순과 허점이 많아 폐기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에 쓰인 것이라고 해서 교조적으로 무조건 믿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라고 단언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한번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빠알리니까야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의심 없이 수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광신자들이라는 말인가?
과학적으로 검증 된 것만 믿자는 것인가?
강병균교수 견해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전승되어 온 초기경전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더구나 요즘 같이 과학이 발달한 21세기 문명의 시대에 소달구지 끌던 시대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초기경전에 대하여 ‘한구절도 틀림 없다’는 식으로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고 선언 하였다.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든가 “교조적으로 무조건 믿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라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선별해서 믿자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과학적으로 검증 된 것만 믿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것 빼고 저것 빼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초월적 존재나 신화적이야기가 전혀 들어 가지 않은 무미건조한 교리에 대한 것만 남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미담마교학이 될 것이다.
니까야는 틀림 없는 부처님가르침이다
초기불교를 접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2009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접하였으니 이제 5년 되었다. 그러나 매일 4-5시간 가량 글을 쓰면서 초기경전을 열어 보았기 때문에 누적된 시간으로 따진다면 꽤 된다.
구입한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법구경과 숫따니빠따 등 일부 쿳다까니까야를 마치 소설 읽듯이 처음부처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부분을 읽는 식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페이지마다 수 많은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노랑메모리펜’칠이다. 경전에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은 불경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노랑메모리펜으로 대체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초기경전 도처에 노랑메모리펜칠로 가득하다.
초기경전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보면 볼수록 더욱 더 믿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초월적 이야기, 신화적 내용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자주 열어 보게 되었는데 보면 볼수록 느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니까야에 쓰여져 있는 내용이 틀림 없는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일관성’이다. 어느 경전이든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은 단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 불교의 가장 바탕이 되는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서 벗어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처럼 삼법인의 바탕하에 불교의 근본교리라 볼 수 있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의 가르침이 펼쳐져 있다.
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상호보완적’이다. 이는 니까야에서 중복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법구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 디가니까야나 상윳따니까야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왜 그런 게송이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초기경전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마치 그믈처럼 서로 연결 되어 있어서 접하면 접할수록 틀림 없는 사실로 인정된다. 그런데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고 주정하니 어이 없을 따름이다.
방편설법과 비방편설법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 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초심자에게는 ‘시계생천’등의 가르침을 먼저 가르치고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를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 한다. 중생의 기질이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는 수 많은 비유가 등장한다. 또 수 많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수 많은 신화와 전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내친다면 이는 하나만 알고 여럿은 모르는 것과 같다. 더구나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 대어 미신이나 망상으로 취급한다면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과 다름 없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방편’으로 설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방편이란 무엇일까?
흔히 부처님의 8만4천법문에 대하여 ‘방편설’이라 한다. 이렇게 부처님이 방편으로 가르침을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기질과 성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 이렇게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방편설과 반대되는 말이 있다. 그것을 ‘대법(對法)’이라 한다. 이는 ‘아비담마’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다. 이 대법에 대하여 법을 체계화한 궁극적이고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승법(勝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비담마는 초심자에게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비담마교설은 듣거나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근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교설에 대하여 비방편설, 또는 비대기설법(nip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교설은 크게 방편설과 비방편설로 나뉠 수 있다. 방편설은 중생의 기질과 근기를 고려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비유와 신화와 전설 등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방편설의 경우 중생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가가 배제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내밀어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든가 “교조적으로 무조건 믿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무지를 폭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방편설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 실려 있다. 맛지마니까야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한 경(M59)’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방편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이다.
Evaṃ pariyāyadesite kho ānanda mayā dhamme ye aññamaññassa subhāsitaṃ sulapitaṃ na samanujānissanti, na samanumaññissanti, na samanumodissanti, tesametaṃ pāṭikaṅkhaṃ: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ṃ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issanti. Evaṃ pariyāya desito kho ānanda mayā dhammo. Evaṃ pariyāya desite kho ānanda mayā dhamme ye aññamaññassa subhāsitaṃ sulapitaṃ samanujānissanti, samanumaññissanti, samanumodissanti, tesametaṃ pāṭikaṅkhaṃ: samaggā sammodamānā 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 aññamaññaṃ piyacakkhūhi sampassantā viharissantīti.
[세존]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다른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말다툼하고 언쟁을 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를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고, 인정하고, 그것에 기뻐한다면, 그들에게는 조화로움, 기뻐함, 평화로움, 물과 우유 같은 화합이 생겨나고, 서로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Bahuvedaniya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59,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건축가 빤짜깡가와 존자 우다인이 느낌에 대하여 서로 다툰다. 이런 논쟁을 듣던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자 위와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방편으로 설명한 선정삼매의 즐거움
경에서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하여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라는 말이 ‘pariyāyadesite’이다. 이는 pariyāya(method) +desita (shown) 의 형태이다. 방법이나 순서 등을 보여 줌으로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느낌에 대하여 서로 다투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방편으로 설한다.
Yo kho ānanda evaṃ vadeyya: etaparamaṃ sattā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Idamassa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이 뭇 삶이 체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어떠한 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즐거움이다.
(Bahuvedaniya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59,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초선정에 대한 설명이다. 초선정에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행복에 대하여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방편으로서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최상의 희열과 행복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 ‘그것이 뭇 삶이 체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 즐거움이 바로 선정삼매에서 경험하는 희열과 행복이라는 것이다.
산에서 홀로 사는 수행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세상사람들은 세속에서 인생삼락이니 하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재미라도 있는데 심산유곡에서 홀로 사는 수행자에게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 가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이 말하기를 수행자들에게는 세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이 있다고 하였다. 선정삼매에 들었을 때 그 희열과 행복은 세속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행복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한 경’에 따르면 부처님도 똑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다. 세상에서는 기분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유발하고 흥분을 야기하는,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 청각에 야기되는 소리, 후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냄새 미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맛, 촉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감촉이 있지만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정삼매의 즐거움이라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방편으로서 선정삼매를 설명하였다.
설법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방편이라 하였다. 이는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자들의 기질과 성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방식으로 팔만사천가지의 근기를 가진 뭇삶들에게 가르침을 펼쳤을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우다인의 경(A5.159)’에서 “아난다여,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쉽지 않다.”라고 말씀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다.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Pariyāyadassāvī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ā. Anuddayataṃ paṭi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Na āmisantaro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Attānaṃ ca paraṃ ca anupaha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세존]
아난다여, 사람은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자비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재물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자신과 타인을 해침이 없이 설법을 하겠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Udāyīsutta- 우다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59,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다섯 가지 내용은 부처님의 설법방법이기도 하지만 전도하려는 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차제설법(次第說法)이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 하였다. 여기서 ‘순서에 맞게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차제설법’이다. 차제설법이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 MN.56; DN.3에 따르면, 보시를 설한 다음에 계행을 설하고 계행을 설한 다음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고, 다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윤리적인 것보다 수승한 수행적 관점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A5.159, 375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아직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신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르침부터 설한 것이다. 그것이 보시와 지계이다. 그래서 이웃에 봉사하고 도덕적 삶을 사는 자는 천상에 태어 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계생천의 가르침은 어느 종교나 어느 전통에서나 기본덕목이다. 반드시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행복론이 종교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담론인 것과 똑 같다.
부처님은 시계생천의 가르침에 이어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이어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였다. 그런데 가장 나중에 가르침을 펼친 것은 수행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차제설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시를 설함
2) 계행을 설함
3)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함
4)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함
5)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함
6) 수행적 관점을 설함
이렇게 여섯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제설법은 포교현장에서 도입 되어 가르쳐야 할 필수적 항목이라 본다.
방편설법이란 무엇인가?
경에서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 (Pariyāyadassāvī kathaṃ kathessāmīti)”라 하였다. 여기서 ‘논리적인 설법 이라는 말은 ‘방편설 pariyāya-desanā)’을 말한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이 문구에 대하여 “나는 방편을 보면서 설하리라”라고 번역하였다.
이 방편설에 대한 각주를 보면 “각각의 의미와 그 각각의 원인을 보여주면서 설법하는 것이다.(Mrp.III.293)”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의미와 그 각각의 원인을 보여 주면서 설법하는 것이라 하였다. 바로 이것이 대기설법이다. 듣는 자의 기질과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 많은 예를 들고 비유를 하여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설명해 나가는 것이다.
방편을 뜻하는 빠알리어 빠리야야(pariyāya)는 ‘order; course; quality; method; figurative language; a synonym; a turn.’의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제1의 뜻이 ‘order(순서)’임이 눈에 띈다. 이는 ‘각각의 의미와 그 각각의 원인을 보여 주면서 설법하는’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pariyāya desanā(방편설)’라 하였을 때 이는 ‘instruction(설명), presentation(발표)’의 뜻이 된다.
방편설 또는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마치 ‘프리젠테이션’ 하듯이 누구나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성전협 전재성님은 ‘논리적인 설법’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방편으로 든 여러가지 사실은 사실상 논리적인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현상을 들어 설명한 것도 마치 프리젠테이션 하듯이 논리적 설명의 과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강병균교수는 과학적 상식에 입각하여 아간냐경에서 천인들의 타락에 대하여 어처구니 없는 망상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거나 “부처님 말씀(불경에서 그렇다고 주장하는)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또 극히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설법을 할 것인가?
부처님 설법방식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순서에 맞는 설법(차제설법)’과 ‘논리에 맞는 설법(방편설법)’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바탕하에서 자비설법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설법, 자타를 위한 설법으로 이어진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설법방식 |
경전문구 |
비 고 |
차제설법 |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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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설법 |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 Pariyāyadassāvī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ā |
방편설 |
자비설법 |
“나는 자비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겠다” Anuddayataṃ paṭi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
|
무대가설법 |
“나는 재물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겠다” Na āmisantaro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
법보시 |
자타이익설법 |
“나는 자신과 타인을 해침이 없이 설법을 하겠다” Attānaṃ ca paraṃ ca anupaha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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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Udāyīsutta- 우다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59,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설법방식은 부처님당시나 현재나 유효하다. 누군가 부처님 가르침을 전할 때 위와 같이 차제설법, 방편설법, 자비설법, 무대가설법, 자타이익설법 방식으로 설한다면 훌륭한 법사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 하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 전승되어 온 경전의 문구 하나하나 마다 주옥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알려 줄 사람이 없다면 전승된 경전에 의존해야 한다.
불자가 된다는 것이 불, 법, 승 삼보에 의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느니, “부처님 말씀(불경에서 그렇다고 주장하는)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과(에) 부합하고 위배되지 않으므로 옳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과 같다. 이런 말은 ‘개인적인 견해(私見)’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삿된 견해(邪見)’가 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가르침에 근거한 말이나 글은 정견(正見)이다.
불자들은 사견을 믿을 것인가 정견을 믿을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이라 하여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것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 것이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맞춤설법
부처님 가르침이 비록 2500년전에 설한 것일지라도 문명화된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감동을 준다.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사람들도 감동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부처님 가르침은 방편설에 있다. 각자 근기에 맞추어 ‘맞춤설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 도처에는 다음과 같이 방편설법을 찬탄하는 말을 볼 수 있다.
Abhikkantaṃ bho gotama abhikkantaṃ bho gotama, seyyathāpi bho gotama nikkujjitaṃ vā ukkujjeyya, paṭicchannaṃ vā vivareyya, mūḷhassa vā maggaṃ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otaṃ dhāreyya, 'cakkhumanto rūpāni dakkhinti'ti,(17) evameva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Esāhaṃ bhagavantaṃ gotam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Upāsakaṃ maṃ bhavaṃ gotamo dhāretu ajjatagge 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nti.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 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귀의문 정형구, 숫따니빠따)
경에서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evameva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방법은 ‘방편(pariyāyena)’을 뜻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방편으로서 누구나 진리를 알 수 있게 가르침을 주셨다.
2014-08-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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