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인간세상이 천상보다 공덕행과 수행에 적합한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8. 15:52

 

 

왜 인간세상이 천상보다 공덕행과 수행에 적합한가?

 

 

 

천상은 정말 있을까? 죽어서 돌아 온 사람들이 없기에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은 천국이나 극락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자신의 종교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한다. 아무도 가서 본 사람들이 없기에 그렇게 말하는지 모른다. 이른바 종교장사를 하는 것이다.

 

천상에 수명이 있는 이유는?

 

초기경전에는 천상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더구나 불교적 세계관이라 하여 천상도표까지 등장한다. 천상도표에 따르면 모두 26개의 천상이 있다. 욕계6, 색계16, 무색계4천 이렇게 26천이다. 그런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수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천상도표를 보면 가장 아래 천상인 사천왕천의 경우 수명이 500천상년으로서 인간으로 따지면 9백만년을 산다. 가장 높은 비상비비상처천의 경우 무려 84천겁을 산다.

 

불교적 세계관을 보면 31개의 세상이 있다. 가장 아래의 지옥에서부터 가장 높은 천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31개의 세상이 있는데,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곳은 천상 밖에 없다. 나머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이렇게 다섯 세상은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 왜 수명이 정해지지 않았을까? 이유는 업대로살기 때문이다. 업대로 산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언제 받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6개에 달하는 천상의 경우 수명이 정해져 있다. 이는 천상에 태어날 만한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상의 존재는 수()와 복()이 보장 되어서 복대로’ ‘수명대로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복과 수명을 바란다. 그러나 천상의 존재를 제외하고 복과 수명이 보장 되지 않는다. 지금 복대로 살지만 언제 어떻게 복이 다할지 모르고, 지금 수명대로 살고 있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복과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천상을 동경하는지 모른다. 그런 천상은 과연 실재할까?

 

천상은 실재할까?

 

아직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기에 천상이 실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죽어서 천상이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천상이 있다고 믿는다. 특히 불교에서 그렇다.

 

불교의 천상은 영원하지 않다. 그런 천상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천국도 아니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즐거움만 있는 극락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불교천상에는 수명이 있다는 것이다수명대로 사는 천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천상의 존재도 윤회한다. 비록 천상에서 사는 존재들이 복대로 수명대로 오래 살지만, 복이 다하고 수명이 다하면 죽어서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은 확실시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

 

환희동산(nandanavane)에서

 

천상이 실재하는 이유 한가지를 더 든다면 초기경전이다. 초기경전에는 천상과 천상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 나기 때문이다. 때로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사람]

영예로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 (S1.11)

 

 

 

 

 

상윳따니까야 1권에는 하늘사람, 하늘아들, 제석천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한다. 그래서 이들과 부처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처님의 탁월한 가르침이 드러난다.

 

경에서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삼십삼천이라 하여 초기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천상이다. 그러나 26개의 천상중에서 아래에서 두번째 천상에 위치한다. 수명은 1000천상년으로서 인간수명으로 따지면 3600만년을 산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삼십삼천은 즐거움만 가득한 곳으로 묘사 되어 있다. 바로 그곳이 환희동산이다.

 

게송에 따르면 환희동산(nandanavane)이 등장한다. 그런데 삼십삼천에 사는 존재의 말에 따르면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의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천상의 행복에 비하면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상은 수행하기에 적합할까?

 

환희동산은 어떤 곳일까? 상윳따니까야 요정의 경(S1.46)이 있다.  어느 빅쿠가 수행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풍병에 걸려 죽었다. 아마 뇌졸증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빅쿠는 너무 갑작스럽게 죽어서 자신이 죽은지도 몰랐다. 눈을 떠 보니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이라는 것이다.

 

환희동산에는 아름다운 천상의 미녀가 시중을 들고 있다. 이를 본 빅쿠는 부처님 면전에 나타나서 나는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고행을 한 것이 아니라 아라한과를 증득하기 위해서 수행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 (S1.46)” 라고 말한다. 빅쿠는 환희동산에서 벗어나고픈 것이다. 윤회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빅쿠에게 환희동산은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은 확실히 수행하기에 접합한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감각적 쾌락만을 만족시키는 곳이라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빅쿠는 환희동산에서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죽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은 사람들

 

인간세상에서도 천상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먹고 살 걱정을 안하는 부류들이라 볼 수 있다. 한평생 먹고 살 충분한 재산이 있다거나 늙어 죽을 때 까지 큰 연금혜택을 받는 자들도 해당된다. 이런 자들의 생활을 보면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서 지금 사는 세상이 바로 천상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무언가 애써 노력해서 이루려하지 않는다. 다만 가지고 있는 부와 지위와 권리를 최대한 즐기려 한다. 마치 부동산졸부가 오늘은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라고 고민하는 것과 같고,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없을까?”하고 즐길거리를 찾는 것과 같다.

 

천상락을 누리는 인간들은 죽기 싫어 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천상과도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죽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늙어 병들어 죽을 수 밖에 없다. 또는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이전에 지은 행위에 따라 업대로 살기 때문에 인간은 수명이 보장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즐거움만 누리다가 죽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몹시도 아쉬울 것이다.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 지위를 가져 가지 못하는 것도 큰 아쉬움일 것이다. 다만 가가져 가는 것이 있다면 그런 재산과 지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행위(kamma)’일 것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업()만 잔뜩 짊어 지고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천신이 죽음에 이를 때 나타나는 현상 다섯 가지

 

사람이 임종에 이르면 나타나는 징조가 있다고 한다. 아비담마에 임종순간에 업과 업의 표상,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이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태어날 곳의 표상을 보았을 때 그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그런데 인간만이 죽음의 징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천신들도 죽음이 가까워 질 때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dā bhikkhave devo devakāyā cavanadhammo hoti, pañcassa pubbanimittāni pātubhavanti: mālā milāyanti, vatthāni kilissanti, kacchehi sedā muccanti, kāye dubbaṇṇiya okkamati, sake devo devāsane nābhiramatī

 

[세존]

수행승들이여, 천신이 자신의 하늘 몸에서 죽을 때, 그에게 다섯 가지 징조가 나타난다. 그의 화환이 시들고, 그의 의복이 바래고, 그의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르고, 그의 몸이 추악해지고, 자신의 하늘보좌에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

 

(Pubbanimittasutta -징조의 경, 여시어경 83, 전재성님역)

 

 

복과 수명대로 사는 천신의 최후에 대한 것이다. 온갖 즐거움만 있는 곳에서 행복하게 수명대로 산 천신의 최후는 비참하다. 마치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의 최후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인간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화환이 시든다.(mālā milāyanti)

2) 의복이 바랜다.(vatthāni kilissanti)

3)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른다.(kacchehi sedā muccanti)

4) 몸이 추악해진다. (kāye dubbaṇṇiya okkamati)

5) 하늘보좌에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sake devo devāsane nābhiramatī)

 

 

천신의 최후에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까? 이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처럼 늙어 병들어 가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화환이 시들고 의복이 바래고 몸이 추악해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과 유사하다. 그런데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른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겨드랑이와 땀을 키워드로 검색하여 보았다. 공통적으로 냄새와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겨드랑이에서 땀이 난다는 것은 냄새를 유발하는데 이를 액취증이라 한다. 그 중에 암내도 있다. 이처럼 겨드랑이에서 땀내가 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매우 불쾌감을 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신에게 땀이 흐른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꽃이 시들고, 옷이 바래고, 냄새가 나고, 몸이 추악해지고,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천신이 죽을 때 나타나는 징조라 한다. 이런 징조가 나타나면 동료천신들은 이 천신은 죽을 것이다라고 알며, “존자여, 좋은 곳으로 가라. 좋은 곳으로 가서 행복의 성취하라. 행복의 성취해서, 안착하라.(It83)”라고 고무한다고 한다. 그 좋은 곳은 어디일까?

 

왜 인간세상이 수행하기에 적합한가?

 

천신들은 죽어서 어디에서 태어날까? 대부분 자신이 살았던 세상 보다 못한 곳에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공덕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에서처럼 미녀와 악기에 둘러싸여 감각적 쾌락만 즐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덕행도 수행도 할 만한 환경이 못 된다.

 

죽음을 앞둔 천신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공덕행도 수행도 하지 않은 천신이 갈만한 곳은 어디일까? 경에서 따르면 다음과 같다.

 

 

Manussatta kho bhikkhu devāna sugatigamanasakhāta. Ya manussabhūto samāno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saddha pailabhati, ida kho pana bhikkhave devāna suladdhalābhasakhāta.

 

수행승이여, 인간의 상태가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수행승이여, 인간으로 있으면서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믿음을 성취한다면, 그것이 천신들의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Pubbanimittasutta -징조의 경, 여시어경 83, 전재성님역)

 

 

부처님에 따르면 인간세상이 좋은 곳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세상만이 공덕행과 수행하기에 좋음을 말한다. 천상의 경우 즐거움만 있어서 수행하기 힘들고, 반면 지옥 등 악처는 너무 괴로워서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공덕행과 수행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의 상태가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

 

복과 수명이 다한 천신은 죽음에 이르러 다섯 가지 징조를 보인다. 이런 징조가 보였을 때 동료천신들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Imāya anukampāya

devā deva yadā vidū,
Cavanta
anumodanti

ehi deva punappunan”-ti.

 

천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 때에,

천신들은 이러한 연민을 통해서

함께 기쁘게 맞이한다.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라고.”

 

(Pubbanimittasutta -징조의 경, 여시어경 83, 전재성님역) 

 

 

동료천신들은 죽어 가는 천신에게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세상에 태어나 공덕행을 하여 그 과보로 다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세상이 확실하게 공덕행을 쌓기에 적합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

 

누구나 착하고 건전하게 살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천상의 존재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모를 수 있다. 단지 착하게 살아서 천상에 태어났지만 수명이 다 되면 다시 윤회해야 한다. 그런데 천상의 수명은 길기 때문에 전생을 잊어 버릴 수 있다. 그럴 경우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에 대하여 사자의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Yepi te bhikkhave, devā dīghayukā vaṇṇavanto sukhabahulā uccesu vimānesu ciraṭṭhitikā, tepi tathāgatassa dhammadesana sutvā yebhuyyena bhaya santāsa savega āpajjanti. Aniccāva kira bho maya samānā niccamhāti amaññimha, addhuvāva kira bho maya samānā dhuvambhāti amaññimha, maya'pi kira bho aniccā addhuvā asassatā sakkāyapariyāpannāti.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Sīha sutta -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재성님역)

 

 

수명대로 사는 천신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보인 반응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bhaya santāsa savega)으로 표현 된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사자는 짐승의 왕이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대부분 짐승들은 두려워 한다. 경에서는 짐승의 왕인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할 때 천신들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질 것이라 하였다.

 

왜 두려워 하는가?

 

여기서 두려움(bhaya)이라 한 것은 천신들의 착각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바까의 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망상가형의 하느님 바까는 자신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삿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아와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자의 경에서 천신들도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라는 식으로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왜 전율하는가?

 

두려움 다음에 이어진 것이 전율(santāsa)이다. 두려워서 벌벌떠는 현상이다. 왜 벌벌 떨었을까? 그것은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상에서 천상락을 누리고 있지만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고, 죽는 다면 공덕행을 하지 않아 아래세상으로 떨어 질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 공포에 떠는 것이다. 이렇게 두려움과 전율이 일어난 것은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기 떄문이디.

 

 

Yepi dīghāyukā devā

vaṇṇavanto yasassino
Bh
ītā santāsamāpādu

sīhassevitare migā.

 

장수하는 신들은

아름답고 찬양받지만

사자 앞의 짐승처럼

두려워하고 전율하였네.”

 

(Sīha sutta -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사자후를 듣고 두려움이 일어나고 공포에 떨었음을 말한다. 장수하다 보니 영원히 살 것 처럼 여겼으나 부처님의 무상과 무아의 설법에 쇼킹상태가 된 것이다.

 

왜 감동하는가?

 

그런데 전율에 이어 감동(savega)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빠알리어 savega‘anxiety(불안); agitation(동요); religious emotion.(종교적 감정) 의 뜻이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悚懼, おそれ, 感動, 厭離心, 라 표현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savega의 의미는 감동 또는 종교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알 수 있다.

 

 

Avītivattā sakkāya

aniccā kira bho maya
Sutv
ā arahato vākya

vippamuttassa tādinoti.

 

이미 해탈하신 그와 같은

거룩한 님의 말을 경청하니

개체를 초월하지 못하여

무상한 것은 실로 우리네.”

(Sīha sutta -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는 천신들이 부처님 말씀을 경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게송에서 거룩한 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아라한(arahata)’을 말한다. 부처님을 아라한이라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십호 가운데 아라한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윤회의 종식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아라한이 되려면 가장 먼저 개체가 있다는 견해, 즉 유신견을 타파 해야 한다. 게송에서 천신들이 개체를 초월하지 못하여 무상한 것은 실로 우리네라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 말씀을 이해 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 하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두려움과 전율에서 감동으로 극적인 반전이다.

 

지혜에 의한 두려움을 체험하였을 때

 

천신들은 왜 감동하였을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아라한이 되어 윤회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bhaya santāsa savega : Srp.II.288에 따르면, 거룩한 님(아라한)에게서 이러한 자각은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체험하는 지혜에 의한 감동이지만, 다른 신들은 무상을 깨닫고는 정신적 전율로서의 두려움을 체험하고 강력한 통찰을 할 때에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을 체험한다.

 

(S22.78 245번 각주, 전재성님)

 

 

천신이 두려움과 전율과 공포를 느낀 이유는 두 가지라 한다. 하나는 몰랐을 때이고 또 하나는 알았을 때라 볼 수 있다. 천상락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 것 같던 무명의 천신들에게 무상의 설법은 두려움(bhaya)과 공포(santāsa)와 불안 (savega)을 일으키기에 충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났을 때는 정반대가 된다.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놀라움(bhaya)과 떨림(santāsa)과 감동(savega)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bhaya, santāsa, savega 이 세가지 빠알리어는 이전과 이후가 달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떨림은 몰라서 떤 것이고, 이후의 떨림은 진리를 알고 나서 떤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신들은 무상을 깨닫고는 정신적 전율로서의 두려움을 체험하고 강력한 통찰을 할 때에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을 체험한다. (Srp.II.288)”라고 하였다.

 

인간세상이 천상보다 좋은 이유

 

초기경전을 보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것은 책이나 방송 또는 인구에 회자 되는 불교관련 이야기들을 경전에서 발견하였을 때 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천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천신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화환이 시든다는 등 다섯 가지 현상에 대하여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여시어경 징조의 경(It83)’을 보면서 을 보면서 근거가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공덕행과 수행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인간세상이 좋다고 하였다. . 인간에게는 행복과 불행, 그리고 희로애락이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에 가장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티벳스님들은 죽을 때 거지라도 좋으니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발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징조의 경에서 경전적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누군가 수행하기에 천상이 더 낫다고 한다. 천상에서는 오염원이 없기 때문에 수행하기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경전적 근거를 갖지 않는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 (S1.46)”라 하여 천상이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시어경에서도 수행승이여, 인간의 상태가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It76)라 하여 인간세상이 더 낫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천상은 너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한 곳이기 때문에 공덕행도 수행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세상이야 말로 가장 공덕행과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과거에 부처님들은 모두 인간세상에서 출현하였다.

 

 

2014-08-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