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교는 축복의 종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7. 16:36

 

불교는 축복의 종교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here and now)’라는 말이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괴롭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마음을 집중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면 현법열반론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강조하다 보면

 

부처님이 경계하신 62가지 사견 중에 현법열반론(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즐거운 삶을 살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현법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diṭṭhadhamma라 한다. ‘(dhamma)을 보았다(diṭṭha)’라는 뜻이다. 지금 여기서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라는 뜻으로서 현법(現法) 또는 견법(見法)이라 한다. 그런데 딧따담마라는 말은 현생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이는 문장에서 과거나 미래에 대한 말이 나올 때 이다. 이처럼 diṭṭhadhamma라는 말은 지금여기또는 현세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지금 여기를 강조하면 현법열반론이 된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졌을 때 그렇다. 흔히 말하는 행복론이 현법열반론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라는 말의 뜻과 매우 관계가 깊다.

 

빠알리어로 수카(sukha)‘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의 뜻이다. 즐거운, 행복, 쾌락 등으로 번역된다. 한자어로는 즐길 락()’자로 표현된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여기에서 행복론을 강조하면 부처님이 경계하신 62가지 사견에 빠지기 쉽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즐겨라고 말씀 하신 적이 없다. 지금 여기에서 또는 현세를 즐겨라라고 말하는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Atīta nānvāgameyya,             아띠땅 난와가메이야

nappaikakhe anāgata;          납빠띠깐케 아나가땅

yadatīta pahīna ta,         야다띠땅 빠히낭 땅

appattañca anāgata.             압빳딴짜 아나가땅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Paccuppannañca yo dhamma,       빳쭙빤냔짜 요 담망

tattha tattha vipassati;         땃타 땃타 위빳사띠

asahīra asakuppa,          아상히랑 아상꾹빵

ta vidvā manubrūhaye.           땅 위드와 마누브루하예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 131, 전재성역)

 

 

 

Buddha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 즐겨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지금 여기서 관찰하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Paccuppannañca yo dhamma tattha tattha vipassati, M131)”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이 정견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이 있다.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주장하는 자들은 더 이상 과거나 내세를 생각하지 말자고말한다. 특히 알 수 없는 내세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것이다. 아직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없기에 내세가 있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 한다. 심지어 죽어서 내세가 있는지 알아 보고 오라고 말하는 단멸론자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윤회를 부정하게 된다. 그런 단멸론자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행복이라는 말이다.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이 말은 누구나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과 똑 같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에서 오로지 행복만 강조하며 행복론을 펼친다면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현법열반론자가 되기 쉽다. 그래서일까 요즘 세상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TV에서도 먹거리 프로 등 욕망을 부추기는 무수한 프로를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의 흐름대로 지금 이순간을 즐기고 한평생 즐겁게 살다가 잘 죽으면 그만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대신에 지금 이순간을 관찰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법구경에서도

 

지금 이순간을 관찰하라라는 말은 법구경에서도 볼 수 있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Muñca pure muñca pacchato,
Majjhe muñca bhavassa p
āragū,
Sabbattha vimuttam
ānaso
Na puna j
ātijara upehisi.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서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에서도 벗어나라.

존재의 피안에 도달하여 마음이 일체에서 벗어나면,

그대는 결코 다시 태어남과 늙음에 다가가지 않는다. (Dhp348, 전재성님역)

 

 

과거에서 벗어나라(Muñca pure)”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과거의 존재의 다발과 관련된 애착, 소망, 소유, 망상, 집착, 갈애에서 벗어나라라는 뜻이다.(DhpA.IV63)”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후회하고 한탄하고 회한을 갖는 것은 정신적 고통만을 야기 할 뿐이다. 따라서 마음이 과거에 가 있는 것은 일종의 갈애이고 집착이다.

 

미래에서도 벗어나라(muñca pacchato)”라는 말은 미래의 존재의 다발과 관련된 애착, 소망, 소유, 망상, 집착, 갈애에서 벗어나라라는 뜻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근심하거나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것은 불선업만 야기할 뿐이다. 따라서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이것 역시 갈애이고 집착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그 가운데에서도 벗어나라(Majjhe muñca)”라 하였다. 여기서 가운데를 뜻하는 말이 Majjhe이다. 이는 Majjha의 형태로서 ‘[m.] the middle; the waist. (adj.), middle’의 뜻이다. 중간을 뜻한다.

 

이 게송을 보면  마치 금강경에서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말을 접하는 것 같다.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가?”

 

금강경 일체동관분(18)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런데 금강경 해설서나 설명하는 사람들은 떡장수 할매 이야기를 한다. 할매가 금강경에 달통한 주금강이라는 사람에게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했는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시대의 대강백이라 불리우는 무비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거기는 현재심도 불가득이라 그럤어요. 현재심도 찾을 길이 없다 왜냐하면 현재라고 할 때 이미 그것은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초를 쪼개 가지고 마이크로 초로 쪼개놓고 우리가 보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다. 라고 할 때 이미 그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립니까? 백 만분의 일초 정도로 우리가 쪼개놓고 보면은 말 한마디 하는 순간에 예를 들어서 보통 우리 시간단위로 일초 이 초 하는 것이 백 만분의 일초로 나눠놓고 보면은 그 얼마나 길고 긴 시간입니까?

 

 그러니까 현재심도 불가득이다. 현재심도 어디서 잡을 수가 없고 찾을 길이 없다. 그렇게 까지 경전에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제스님은 그런 의미보다는 즉시현금 지금이라고 하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순간 이 사실 이것이 완전무결한 존재다. 이 외 달리 치장을 하고 장엄을 하고 무슨 꾸미고 하는 그런 것은 여기서 도대체 해당이 되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으로直是現今(직시현금) 更無時節(갱무시절)’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구절의 뜻만 우리가 참 제대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해할 수가 있고, 그것은 곧 선사상을 다 이해하는 것이 되고 불교의 지름길을 가는 것이고 진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저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무비큰스님의 임제록 강의중에서)

 

 

무비스님에 따르면 현재라는 시점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여기라고 말하는 순간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여기에 점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비스님은 임제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순간 이 사실 이것이 완전무결한 존재다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법구경의 주석과는 내용이 다르다.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의 오리지널 버전은 법구경의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서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에서도 벗어나라. (Muñca pure muñca pacchato, Majjhe muñca bhavassa pāragū,Dhp348)”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법구경에서 그 가운데에서도 벗어나라.”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용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설명문과 똑 같다. 현재의 존재의 다발과 관련된 애착, 소망, 소유, 망상, 집착, 갈애에서 벗어나라라는 뜻이다.(DhpA.IV63)”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금강경해설서를 보면 아이러니컬한 물음은 공양에 대한 승가의 외경을 드러낸 표현이 된다.(정각스님)”라거나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순간 이 사실 이것이 완전무결한 존재다(무비슴님)”라는 등 알쏭달쏭한말들만 보인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지금 여기 또는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려 한다면 이는 갈애와 집착일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 즐거운 느낌을 갖는 자는 그 느낌에 갈애를 일으켜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 되기를 바란다. 반면 지금 괴로운 자는 괴로운 느낌에 그쳐서 즐거운 느낌을 갖고자 갈애를 일으킨다. 이처럼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애는 행복에 대한 갈애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Dukkhī sukha patthayati, sukhī bhiyyopi icchati;

Upekkhā pana santattā, sukhamicceva bhāsitā.

Tahāya paccayā tasmā, honti tissopi vedanā;

Vedanāpaccayā tahā, iti vuttā mahesinā.

Vedanāpaccayā cāpi, yasmā nānusaya vinā;

Hoti tasmā na sā hoti, brāhmaassa vusīmatoti.

 

(빠알리 청정도론 원문)

 

 

A man in pain for pleasure longs,

And finding pleasure, longs for more;

The peace of equanimity

Is counted pleasure too; therefore

The Greatest Sage announced the law

“With feeling as condition, craving,”

Since all three feelings thus can be

Conditions for all kinds of craving.

Though feeling is condition, still

Without inherent tendency

No craving can arise, and so

From this the perfect saint is free

 

(영역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평온은 고요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설하셨다

이 세 가지 느낌은 갈애의 조건이기 때문에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대성인께서 설하셨다

느낌을 조건하지만 잠재성향이 없이는 갈애가 없다

그러므로 청정범행을 닦은 범천에게는 그것이 없다

 

(청정도론 제 17 238 , 대림스님역)

 

 

이 게송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 행복(즐거움)에 대한 갈애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괴로운 자는 괴로움이 그쳐 행복을 원하고, 지금 여기서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는 갈애가 일어난 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느낌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번역비교를 해보니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게송은 5세기 붓다고사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이는 게송에서 ‘vuttā mahesinā라는 구문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마헤시(mahesi)‘the great sage’의 뜻으로 대현자의 의미이다. 이 구문에 대하여 빅쿠냐나몰리는 “The Greatest Sage announced”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대성인께서 설하셨다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붓다고사가 십이연기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라는 절에서 갈애를 설명하였는데 그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게송으로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에서 오역이 보인다.

 

청정도론 빠알리 구문에서 마헤시(mahesi)와 유사한 단어가 보인다. 그것은 브라흐마낫사(brāhmaassa)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냐나몰리는 ‘the perfect saint(대성인)’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범천이라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런 차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빠알리어

빅쿠 냐나몰리역

대림스님역

  

 

마헤시

(mahesi)

The Greatest Sage

(대현자)

대성인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부처님

브라흐마낫사(brāhmaassa)

the perfect saint

(완전한 성인)

범천

잠재성향이 없이는 갈애가 없다

아라한

(제자)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고 마헤시가 말씀 하셨다는 것은 부처님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잠재성향이 없이는 갈애가 없다라 하여 브라흐마낫사가 언급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자, 즉 아라한을 뜻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대현자(The Greatest Sage)’이라 번역된 마헤시는(mahesi)부처님을 뜻하고, ‘완전한 성인(the perfect saint)’이라 번역된 브라흐마낫사(brāhmaassa)아라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느닷없이 범천이 등장한다.

 

 

브라흐마(범천)와 브라흐마나(바라문)를 구별하지 못한 오역

 

청정도론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2004년도에 출간 되었다. 니까야를 번역하기 전에 먼저 청정도론이 출간 된 것이다. 그래서 초불연의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이고 승가대학의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갖추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책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오역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본다. 그것은 번역문 마지막 구절인 청정범행을 닦은 범천에게는 그것이 없다에 있다.

 

대림스님은 번역문에서 청정범행을 닦은 자에 대하여 범천이라 하였다. 범천이라면 부처님 당시 지배종교인 브라만교의 창조신을 말한다. 그 브라만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브라흐마(brahma)’라 한다. 브라흐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하느님으로 옮겼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한역경전을 답습하여 범천(梵天)’이라 하였다.

 

문제의 구절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구 분

  

 

빠알리어

brāhmaassa vusīmatoti

brāhmaassa

냐나몰리역

the perfect saint is free

the perfect saint

대림스님역

청정범행을 닦은 범천에게는 그것이 없다

범천

 

 

 

청정도론 빠알리 원문에는 ‘brāhmaassa’라 되어 있다. 이는 ‘brāhmaa + assa’의 형태이다. 여기서 brāhmaa‘a man of the Brahman caste’의 뜻으로 브라만계급의 사람을 뜻한다. 흔히 바라문이라 번역된다. assa‘to this’ 또는 ‘atthi()’의 뜻이다. 따라서 brāhmaassa그 바라문또는 그런 바라문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brāhmaassa에 대하여 범천이라 번역하였다. 범천은 브라흐마를 뜻하며 창조신으로서 제의의 대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번역은 완전한 오역이다. 브라흐마(범천)와 브라흐마나(바라문)를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빅쿠냐나몰리는 brāhmaassa에 대하여 ‘the perfect saint’라 하여 완전한 성인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the perfect saint is free”라 하였는데 이는 완전한 성인은 자유롭다라는 뜻이다. 무엇에서 자유롭다는 것일까? 그것은 갈애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잠재성향(inherent tendency)이 없기 때문에 갈애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빠알리 원문 “brāhmaassa vusīmatoti”에서 vusīmatotivusīmant 형태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완성에 도달한또는 자재한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brāhmaassa vusīmatoti”구문은 그 바라문은 완성에 도달하였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대림스님은 청정범행을 닦은 범천에게는 그것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초기경전에서 바라문(brāhmaa)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사성계급으로서의 바라문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아라한과 동급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 하였는데, 이는 타락한 바라문 이전의 청정한 삶을 살았던 이상적 바라문을 말한다. 그런 바라문에 대하여 아라한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붓다고사의 게송에 등장하는 brāhmaassabrāhmaa(바라문)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브라흐마(brahma)를 뜻하는 범천이라고 번역한 것은 치명적인 오역임에 틀림 없다.

 

그때 그때의 조건이 생겨남에 따라서

 

청정도론의 붓다고사 게송에서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Dukkhī sukha patthayati, sukhī bhiyyopi icchati)”라 하였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빠알리어가 sukha 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수카는 행복(happy)뿐만 아니라 즐거움(pleasant), 쾌락(pleasure)으로도 번역된다. 그런데 즐거움은 느낌(vedana)’이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느낌일까 맛지마니까야 난다까의 교화의 경(M146)’에 실려 있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No heta bhante. Ta kissa hetu, 'tajja tajja bhante. Paccayā paicca tajjā tajjā vedanā uppajjanti. tajjassa tajjassa paccayassa nirodhā tajjā tajjā vedanā nirujjhantī'ti.

 

[수행녀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존자여, 그때 그때의 조건이 생겨남에 따라서 그때 그때의 느낌이 생겨나고, 그때 그때의 조건이 조건이 소멸함에 따라서 그때 그때의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난다까의 교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6, 전재성님역)

 

 

경에서 난다까는 수행녀들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주었다. 난다까가 “이와 같이 자매들이여, 누군가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이 무상한데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을 조건으로 체험하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영원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자매들이여, 그가 올바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묻자 수행녀들이 위와 같이 답한 것이다.

 

위 구문으로 알 수 있듯이 느낌은 조건발생이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조건이 생겨남에 따라서 그때 그때의 느낌이 생겨난다 (Paccayā paicca tajjā tajjā vedanā uppajjanti)”라고 하였다. 조건발생하였다면 조건소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조건이 조건이 소멸함에 따라서 그때 그때의 느낌이 소멸한다 (tajjassa tajjassa paccayassa nirodhā tajjā tajjā vedanā nirujjhantī)”라고 하였다. 이처럼 느낌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즐거움과 동의어인 행복 역시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복(즐거움) 추구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죽어도 좋아!”리며 지금 이순간은 즐겨야 되는 것이라 하고 인생 역시 즐겨야 하는 것으로 본다.

 

행복한 밥상

 

식당간판 중에 행복한 밥상이 있다.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본 간판이다. 한상 가득히 차려 놓고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처럼 먹거리를 즐기는 프로가 TV에서 빠지지 않는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거리프로가 나오는데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먹기 위하여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즐기는 것임과 동시에 행복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황제식이라도 먹구멍으로 넘어 가는 순간 으로 되어 나올 뿐이다. 다만 씹는 과정과 먹구멍으로 넘겼을 때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과거의 느낌에 지나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지금 여기를 강조하지만 결코 지금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무리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 순간 뿐이라는 것이다. 조건이 바뀌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울었다 웃었다 하듯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금강경에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하였고, 법구경에서도 과거에서 벗어나라 미래에서도 벗어나라. 그 가운데에서도 벗어나라.(Dhp348)”이라 하였을 것이다. 현재 지금 여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한다.

 

수카(행복) 보다 더 좋은 말, 망갈라(축복)

 

초기경전에서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수 도 없이 많다. 그런데 행복 보다 더 좋은 말이 있다. 그것은 축복이다. 왜 축복인가? 먼저 축복경의 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Tapo ca brahmacariyañca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짜

ariyasaccānadassana,            아리야삿짜나닷사낭
Nibb
ānasacchikiriyā ca           닙바나삿치끼리야 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7)

 

 

숫따니빠따 망갈라경(Sn2.4)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eta magalamuttama)”이라 하였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이 망갈라(magala)이다.

 

망갈라란은 말은 행복을 뜻하는 수카라는 말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망갈라(magala)의 뜻은 ‘auspicious(상서로운); royal; lucky; festive. (nt.), festivity; good omen(좋은 징조); ceremony’로 표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길상(吉祥)’으로 옮겼다.

 

망갈라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의 마지막 게송에 실려 있듯이 모든 곳에서 번영 (Sabbattha sotthi)”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뜻의 망갈라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까지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이라는 뜻의 수카 보다 축복이라는 뜻의 망갈라가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망갈라경이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시에 불자들의 수호경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부처님이 수카경이라 하지 않고 망갈라경이라 한 이유일 것이다.

 

축원하는 이유

 

법회를 하면 스님들이 축원을 해 준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까지 약속하는 것이다. 누군가 결혼을 하면 축하해 준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과 미래의 행복에 대한 축하의 말이다.

 

그런데 축복의 말은 매우 많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양하는 것도 축복이고, 술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도 축복이다. 왜 그럴까? 지금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갈라경에 따르면 수십가지의 축복사례가 등장한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이 있다. 그것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존재의 피안에 도달하여 마음이 일체에서 벗어나면, 그대는 결코 다시 태어남과 늙음에 다가가지 않는다.(Dhp348)”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이순간을 즐길 것인가 관찰할 것인가?

 

지금 여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지금 여기는 있을 수 없다. 지금 여기라고 말하는 그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을 즐겨요라는 광고 문구도 나왔을 것이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이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삶의 방식이다. 이런 세상의 흐름에서 행복론이 나온다. 심지어 즐겁게 행복하게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웰다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여기에서 즐겨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Paccuppannañca yo dhamma tattha tattha vipassati, M131)”라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관찰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즐김과 관찰의 차이가 있다.

 

지금 여기에서 즐기는 삶을 산다면 행복론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관찰하는 삶을 산다면 축복론이라 볼 수 있다. 행복론은 지금여기에서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지만, 축복론은 지금여기에서 행복은 물론 미래의 행복까지 보장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론 보다는 축복론이다.

 

불교는 축복의 종교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관찰할 것을 말씀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축복의 종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 오지 않는 미래, 그리고 현재에 매이지 않는 다면 그런 삶은 축복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지나간 일을 슬퍼하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S1.10)

 

 

 

 

2014-08-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