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디까, 왁깔리, 찬나, 세 빅쿠는 왜 자살하였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덤덤하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받아 들이기에 따라 다르다. 세월호참사로 숨진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 하지만 반대로 유병언의 죽음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덤덤한 것이 이를 말한다.
무간(無間)에 대하여
죽음과 관련하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죽고 싶지 않아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부류이다. 전자가 영원주의자라면 후자는 허무주의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모두 배격한다. ‘절대유’와 ‘절대무’는 연기법적으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하여 한쪽문을 열고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태어남에 대하여 열린문으로 들어 오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무간(無間)으로 설명된다.
하나의 벽이 있는데 문이 하나이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가면 죽음이고,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태어남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간격이 없다. 죽음 이후에 일정기간 머무는 중유(中有)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한 생각이 일어 났다가 사라지고 연이어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죽음과 태어남에 간격이 없다고 하여 무간(無間)이라 한다.
불사(不死:atama)에 대하여
태어남이 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은 운명과도 같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아라한이다.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kamma:業)’를 하지 짓지 않았을 때 태어남도 없고 죽음이 없다. 그래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불사(不死:atama)라 한다. 유아견을 갖지 않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다시는 죽고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보인다. 그 중에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Catunnaṃ ariyasaccānaṃ
yathābhūtaṃ adassanā,
Saṃsaraṃ dīghamaddhānaṃ
tāsu tāsveva jātisu.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ṃ mūlaṃ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전재성님역)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네 가지 진리는 모두 ‘괴로움’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히 아는 것도 진리이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아는 것도 진리이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하여 알았다면 다음 단계는 괴로움에서 벗어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말한다. 이렇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고 실천하였을 때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과 함께 윤회도 종식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이름의 찬나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청정한 삶이다. 이를 ‘브라흐마짜리야’라 한다. 성적교섭없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출가하는 것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게 되면 모든 것을 놓게 되므로 무소유가 실현된다. 무소유가 되어야만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게 되어 청정이 실현된다. 이렇게 청정한 삶을 살아 통찰지혜가 생겨나면 아라한이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선정과 통찰로서 아라한이 된 제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살로서 아라한이 된 이야기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 이야기가 ‘찬나의 경(S35.87)’이다.
초기경전에서 찬나라는 이름은 여럿 있다. 그 중에 하나 마부 찬나이다. 부처님이 유성출가하였을 때 말을 몰고 간 마부 찬나를 말한다. 이 마부 찬나에 대한 이야기는 ‘찬나의 경(S22.90)’에 실려 있다. 그러나 자살하여 아라한이 된 또 다른 찬나의 이야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찬나빅쿠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병에 걸린 찬나는
찬나에 대한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 ‘찬나의 경(S35.87)’과 맛지마니까야 ‘찬나에 대한 가르침의 경(M144)’에 실려 있다. 내용은 거의 같다. 두 경 모두 찬나와 사리뿟따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찬나는 왜 자살하게 되었을까?
경에 따르면 찬나빅쿠는 중병에 걸렸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찬나]
“벗이여 싸리뿟따여, 나는 참아내고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나의 고통은 증가할 뿐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눈에 띄게 증가하고 줄어들지 않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나는 자결하려 합니다.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Channovāda sutta -찬나에 대한 가르침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4, 전재성님역)
중병에 걸린 찬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하려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괴로운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날카로운 칼끝으로 머리를 쪼개는 것 같이” 라든가, “가죽끈으로 머리를 조이는 것처럼”라든가 “도살용 칼로 배를 자르는 것처럼” 등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자결하지 마십시요” “사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찬나는 ‘자살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상윳따니까야와 맞지마니까야의 표현
이 부분과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와 맞지마니까야의 표현이 약간 다르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내 용 |
비 고 |
상윳따니까야 |
그러나 벗이여, 나는 오랜 세월 기꺼이 싫증냄이 없이 스승을 모셨습니다. 벗이여, 그것은 제자의 도리입니다. 기꺼이 싫증냄이 없이 스승을 모셨다면, 수행승 찬나가 칼로 자결한다고 해서 비난 받을 수 없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와 같이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주십시요. (S35.87) |
비난 받을 수 없음 |
맞지마니까야 |
벗이여 싸리뿟따여, 저는 오랜 세월 스승을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모셨습니다. 왜냐하면, 벗이여 싸리뿟따여, 제자가 오랜 세월 스승을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모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수행승 찬나가 허물없이 자결할 것이다.’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M144) |
허물없이 자결할 것 |
두 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스승의 사랑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내용이 약간 다르다. 상윳따에서는 “자결한다고 해서 비난 받을 수 없습니다(S35.87)”이라 하였고, 맛지마에서는 “허물없이 자결할 것이다(M144)”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비난’과 ‘허물’이다. 이에 대하여 빠알리어 원문을 찾아 보았다.
1)
taṃ anupavajjaṃ channo bhikkhu satthaṃ āharissatīti
수행승 찬나가 칼로 자결한다고 해서 비난 받을 수 없습니다.(S35.87)
2)
anupavajjaṃ channo bhikkhu satthaṃ āharissatī'ti
수행승 찬나가 허물없이 자결할 것이다.(M144)
빠알리원문을 찾아 보니 같은 내용이다. 같은 빠알리구문에 대하여 비난과 허물이라는 단어를 써서 달리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구문에서 키워드는 ‘anupavajjaṃ’이다. 이는 ‘blameless’의 뜻이다. 그래서 “비난 받을 수 없습니다”와 “허물없이”라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자살을 말한다. 죽는 순간 아라한이 되어 다시 태어남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칼로 목을 베어 자살한 찬나
찬나는 결국 자살하였다. 어떻게 자살하였을까? 경에서는 “자결할 것이다 (satthaṃ āharissatī)”라 하였다. 여기서 satthaṃ은 ‘A weapon, sword; iron, steel’의 뜻으로 ‘칼’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칼을 든다’라고 볼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찬나는 칼로 목을 베어 자살한 것으로 설명한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 제자가 자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찬나의 경에 따르면 중병에 따른 극심한 통증이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자살 하는 것과 다르다.
일반사람들은 주로 마음의 번뇌에 따라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생활고이든, 수사에 따른 압박이든, 또 다른 고민거리에 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행승에게 마음의 번뇌로 자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은 어떤 이유로 자살하는 것일까?
세 빅쿠의 자살
초기경전에서 빅쿠의 자살에 대한 경은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고디까의 경, 왁깔리의 경, 찬나의 경이다. 그렇다면 이 세 경에서 자살 요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구 분 |
내 용 |
자살요인 |
고디까의 경 (S4.23) |
“이제 나는 여섯 번이나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 (S4.23) |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따른 퇴전 |
왁깔리의 경 (S22.87) |
그 때 존자 박깔리는 도공의 집에 있으면서 병이 들어 괴로워 했는데 아주 중병이었다.( S22.87) |
중병 |
찬나의 경 (S35.87) |
“나는 참아내고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S35.87) |
중병 |
일시적이라도 해탈의 상태에 진입한 자의 자살을 허용
‘고디까의 경(S4.23)’에서 고디까빅쿠는 완전히 해탈하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일시적 해탈에 머물렀다. 그러기를 무려 여섯 번 퇴전과 불퇴전을 반복하였다. 그런데 여섯 번째로 퇴전하였을 때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각주에 따르면 “고디까는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을 얻은 상태이므로 그 마음에 의한 해탈상태에서 죽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상태에 진입하자마자 자살을 생각한 것이다.(S4.23, 1121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고디까까 여섯 번째 퇴전한 다음 다시 불퇴전의 마음으로 일곱 번째 일시적 해탈을 이룬 그 순간 자결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와 같은 자결에 대하여 부처님은 인정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은 오로지 일시적이라도 해탈의 상태에 진입한 자의 자살을 허용했다.(M144, 2552번 각주)”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일시적 해탈을 이룬 상태에서는 허용한 것이다.
고디까의 경우처럼 일시적 해탈에 따라 자살하는 경우 현상을 알아차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라 한다.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세존]
“지혜로운 이들은
이처럼 삶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네.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S4.23)
이와 같은 부처님 말씀을 보충하듯이 경에서는 마라가 고디까의 의식(viññāṇa)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찾지 못한다. 만일 마라가 고디까의 의식, 즉 ‘재생연결식’을 발견하였다면 완전한 열반에 들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왁깔리는 왜 마음의 가책을 느꼈을까?
‘왁깔리의 경(S22.87)’에서 왁깔리는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부처님이 문병을 간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대는 참아낼 만한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왁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참아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중병에 걸려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므로 자살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대가 계행을 실천하는데 자신을 욕되게 한 적이 있는가?”라고 물어 본다. 이에 왁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을 실천하는데 욕되게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왁깔리는 청정하게 살았음을 말한다. 다만 중병에 걸려서 움직일 기운도 없어서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왁깔리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마음의 가책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물어 보자 답한 것이다. 이처럼 계행도 잘 지키고 청정한 삶을 산 수행자에게 어떤 마음의 가책이 있었을까? 그것은 너무나 유명한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Alaṃ vakkali. Kiṃ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dhammaṃ hi vakkali, passanto maṃ passati. Maṃ passanto dhammaṃ passati.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Vakkali sutta-박깔리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금강경에서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를 떠 오르게 한다. 금강경 26분에 실려 있는 문구로서 “만약 육신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는 볼 수 없으리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금강경의 오리지널 버전이 마치 초기경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S22:87)”라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왁깔리에게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만일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아름다운 얼굴만 쳐다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선생님은 “왜 학생은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지요?”라고 주의를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왁깔리도 부처님의 얼굴과 목소리에 반하여 얼굴만 쳐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왁깔리가 계행을 철저하게 지키고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수행자이었을지라도 바로 이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왁깔리에게 “그대에게 어떠한 가책이 있고 어떠한 후회가 있단 말인가?(S22.87)”라고 물어 본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을 설한 이유는?
부처님은 왁깔리의 병상에서 ‘무아의 가르침’을 알려 준다. 무아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으로 알려져 있다. 오비구에게 무아의 설법을 하였을 때 모두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다섯명의 경(Pañcavaggiya sutta: 無我相經, S22.59)’에 정형화 되어 실려 있다. 그렇다면 병상의 왁깔리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시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왁깔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경에 따르면 왁깔리가 자결하였을 때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왁깔리는 아마도 확신이 섰었던 같다. 중병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쇠역한 몸을 이끌고 이씨길리 산 중턱에 올라 간 것이다. 집안에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을 통하여 “박깔리여 두려워 말라, 그대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전하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왁깔리의 자살을 허용한 것이다. 왁깔리가 자살하여도 다시는 재생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왁깔리는 칼로 자결하였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이씨길리 산 중턱에서 왁깔리의 모습을 보았다. 경에서는 “어깨를 구부리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머리를 오른쪽으로 구부린 것이라 한다. 고귀한 제자들이 대부분 오른쪽으로 죽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고개를 어떻게 돌리는지 따라 죽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훌륭한 아들 박깔리는 시설된 의식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S22.87)”라고 말씀 하셨다.
임종순간에 대한 법문
찬나의 경(S35.87)은 왁깔리의 경과 유사하다. 중병으로 자결 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대화상대가 다르다. 왁깔리의 경에서는 부처님이 등장하지만, 찬나의 경에사는 ‘사리뿟따’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찬나가 자살하기 직전에 사리뿟따의 동생인 마하쭌다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nissitassa calitaṃ,anissitassa calitaṃ natthi, calite asati passaddhi hoti, passaddhiyā sati nati-1 na hoti, natiyā asati āgatigati na hoti, āgatigatiyā asati cutupapāto na hoti, cutupapāte asati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벗이여 찬나여, 그러므로 그 세존의 가르침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십시요. 집착하면 동요가 있으며, 집착하지 않으면 동요가 없고 동요가 없으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성향이 사라지고 성향이 사라지면 왕래가 사라지고 왕래가 사라지면 죽어 태어남이 사라지게 되고 태어남이 사라지게 되면 이 언덕과 저 언덕과 양자 사이의 세계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괴로움의 끝입니다.
(Channasutta-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87, 전재성님역)
임종순간에 대한 법문이라 볼 수 있다. 임종을 맞이한 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집착하면 동요가 있으며(nissitassa calitaṃ)”라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집착(nissitassa)’한다는 것은 “갈애-아만-사견”에 집착하는 것으로 설명 되어 있다. 갈애-아만-사견이 남아 있는 한 재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종순간에 집착이 없으면 동요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동요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고요해질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니 마음에 일어나지 않아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마음이 일어나야 세상이 일어나는데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적멸한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게 되었을 때 경에서는 “왕래가 사라지고”라 하였다. 여기서 왕래라는 말은 ‘āgatigati’의 번역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결생에 의해서 오고 죽음에 의해서 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 말은 “죽어 태어남(cutupapāto)”과 같은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죽음에 의해서 죽고 태어남에 의해서 재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치 벽에 문이 하나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죽음이고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 오면 태어남과 같은 말이다. 이 모두가 갈애에 따른 집착에서 기인한다.
서서히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런데 집착하지 동요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고요에 이르렀을 때 “죽어 태어남이 사라지게 되고 태어남이 사라지게 되면 이 언덕과 저 언덕과 양자 사이의 세계가 사라지게 된다.(S35.87)”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끝입니다 “라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찬나는 중병에 걸렸다. 그러나 빅쿠로서 계행을 지키고 청정한 삶을 살았다. 다만 중병으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처럼 제자들이 중병에 걸려서 자결하려 할 때 부처님은 허용하였다. 그러나 죽어서 다시 재생한다면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생하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 것임을 확신하였을 때 자살을 허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세 개의 경에서 자살한 빅쿠들이 모두 다시 태어남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찬나의 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병으로 인하여 너무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에 압도당하여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갈애, 자만, 견해에 의존하면 동요하게 되고 찬나는 고통을 참아 낼 수 없으므로, 그에게는 ‘나는 고통 속에 있다. 고통은 나의 것이다.’와 같은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요가 있다.(Srp.II.372, S35.87 144번 각주)”라고 설명 되어 있다.
너무 고통스럽다고 하여 “아이고 아파 죽겠네!”하며 죽는 소리하면 범부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일지라도 “아이고 아파!”까지는 말할 수 있어도 “죽겠네!”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아라한이나 부처도 범부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지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는 고통을 당하면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 하여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두 방의 화살을 맞지만, 부처님 제자들은 “아이고 아파!”로 그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에 따른 화살을 한방만 맞게 된다. 바로 이것이 범부와 현자와의 차이 일 것이다.
찬나는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중병에 들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찬나에게 있어서 목에 칼이 들어 온 순간 ‘이 고통은 나의 것이다’라는 갈애가 일어나 지 않고 다만 지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칼로 자결했다(satthaṃ āharissatī)”라는 구절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satthaṃ āharissatī : Pps.V.83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 순간의 죽음의 두려움이 그를 덮치고 미래의 다시 태어남의 징조가 나타났다. 자신이 아직 범부임을 깨닫고 일어나서 통찰을 계발했다. 조건지어진 것들의 형성에 대해 분명히 알고 그는 숨을 거두기 전에 거룩한 경지에 도달했다.
(맛지마니까야 M144 2557번 각주, 전재성님)
칼로 자결한 순간에 대한 것이다. 칼로 자신의 목을 스스로 찔렀을 때 아픔과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프다’는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경우 ‘유아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징조를 보았다고 하였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범부가 임종에 이르면 ‘업’과 ‘업의 표상’과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표상이 일어나면 이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사리뿟따로 부터 무아의 가르침을 받았던 찬나는 찬나는 곧바로 자신이 범부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서서히 죽어 갈 때 현상에 대하여 통찰하였다. 그것은 형성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이라 하였다.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 순간 통찰의 지혜를 얻어 거룩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이는 아라한의 경지를 말한다. 죽는 순간 죽음을 지켜 보면서 통찰지를 얻어 아라한이 된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를 성취한 자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따라서 찬나는 자결함으로서 동시에 두 가지를 성취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라한의 경지와 완전한 열반이다. 이렇게 한 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한 자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atthaṃ āharissatī : Srp.II.373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는 자결했다. 그는 숨통을 끊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두려움이 그를 덮쳤고 운명을 알렸다. 그는 자신의 범부상태를 인식하고 재빨리 통찰하여 모든 형성된 것을 극복하고 거룩한 경지[아라한과]에 들어 이승과 갈애를 같이 멸한자(samasīsaṁ)로서 열반에 들었다.
(상윳따니까야 S35.87 145번 각주, 전재성님)
이 각주를 보면 맛지마니까야 각주와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 같은 찬나의 경이지만 니까야가 다름으로 인하여 주석의 내용도 약간 다르다. 가장 다른 부분이 사마시시에 대한 설명이다. 맛지마니까야 아라한이 되어 이승과 갈애를 같이 멸한 자라 하여 사마시삼이라 하였다.
사마시삼에 대하여 더 알아 보기 위하여 빅쿠보디의 CDB를 참조 하였다. S35.87에서 “칼로 자결했다(satthaṃ āharissatī)”라는 부분에 대한 각주를 보면 “He set up insight, discerned the formations, and reaching arahantship, he attained final Nibbana as a "same-header" (samasisi; see I, n. 312).(S35.87 54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번역하면 “그는 통찰하였고 형성을 식별하였다. 그리고 아라한과에 도달하였다. 그는 마침내 ‘똑 같은 머리를 가진 자’(same-header, samasisi)로서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였다.”가 된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 한다. 이 용어는 「인시설론」(人施設論, Pug.19)에 처음 나타나는 단어라 한다. 어원을 보면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isin)”의 뜻이다. 여기서 sisin은 문자적으로 ‘머리를 가진 자’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목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성위인 ‘아라한’과 ‘완전한 열반’을 말한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면 동시에 두 가지를 달성하기 때문에 이를 ‘사마시시’라 하고, 이를 이룬 자를 ‘사마시신’이라 한다. 주석서에 따르면 병이 낫거나, 자세가 끝나거나, 목숨이 다하면서 아라한과를 얻고 바로 반열반에 드는것을 사마시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디까, 왁깔리, 찬나의 경우 자결하여 죽었는데 죽음을 통찰하여 아라한이 되었고 그 결과로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으므로 사마시시가 성립 된 것으로 본다.
세 명의 빅쿠에 대하여 요약하면
이와 같은 세 명의 빅쿠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았다.
구 분 |
고디까의 경 (S4.23) |
왁깔리의 경 (S22.87) |
찬나의 경 (S35.87, M144) |
자살원인 |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따른 퇴전 |
중병 |
중병 |
자살방법 |
칼로 목을 찌름 |
칼로 목을 찌름 |
칼로 목을 찌름 |
자살장소 |
이씨길리산 중턱 검은 바위 |
이씨길리산 중턱 검은 바위 |
- |
자살전 가르친 자 |
- |
부처님 |
사리뿟따 |
자살전 가르침내용 |
- |
무아의 가르침 (예, S22.59) |
무아의 가르침 (예, S22.59) |
악마 빠삐만 |
의식을 찾으려함 |
의식을 찾으려함 |
- |
부처님 확인 |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
“훌륭한 아들 박깔리는 시설된 의식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
“수행승 찬나는 허물이 없도록 칼로 자결했다.” |
사마시시 (samasisi) |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감 |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감 |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감 |
초기경전에서 부처님 제자의 자살은 세 번 있다. 이 중에서 찬나의 경우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 두 곳에서 등장한다.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모든 경에서 자살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어떤 운명이었느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럴 경우 부처님이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때 악마 빠삐만이 등장한다. 죽음의 신이라고도 불리우는 마라가 나타나서 죽음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에 따르면 마라는 죽은 자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는 죽은 자의 의식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세 빅쿠는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의 원인이 되는 마음(윈냐나)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 빅쿠가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음을 확인 시켜 준다.
세 빅쿠는 모두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지만 죽는 순간 현상에 대한 통찰지를 얻어서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죽음과 함께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함께 동시에 두 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라한다.
부처님이 자살을 허락한 경우는?
초기경전에서 자살한 빅쿠는 고디까, 왁깔리, 찬나 이렇게 세 명이다. 고디까는일시적 해탈에 따른 퇴전으로 자살하였고, 왁깔리와 찬나는 중병으로 자살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살을 허용하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고디까, 왁깔리, 찬나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들이 탁발하다가 남의 준 것을 먹다 보면 콜레라 등 병에 걸렸을 경우가 있습니다. 경에도 있지만 치유 될 수 없는 병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부득이하게 뱀에 물린다든가 해서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결국 자결을 할 때 부처님이 허락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라한에 한해서.. 아라한이라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탐욕이 없고, 분노가 없고, 미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허락을 했어요. 조금이라도 남을 원망할 수 없는 사람은 원망할 수 없었어요. 수행이 완전한 경지에 오른 사람,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에 한해서 자살이 허용된 것이지 다른 사람은 자살할 수 없었어요.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거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부처님은 범부에게 자살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제자들 가운데 중병이 걸린자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룬 자에 한해서 허락한 것이다. 그래서 “탐욕이 없고, 분노가 없고, 미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허락을 했어요”라 한 것이다.
왜 니까야가 위대한가?
초기경전에는 자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장면은 다른 종교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승종교 경전에서도 제자들이 자살하였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왜 이렇게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까야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솔직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부처님 제자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누가 부처님을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다 덮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록에 안 남겼을 거라구요! 그런데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조작된 경전이 아닙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전재성님은 니까야의 위대성을 말한다. 불리한 사항까지 전승되어 기록 되었다는 것은 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이 틀림 없다는 것을 말한다.
2014-07-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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