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이 그의 눈앞에”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보면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사람들은 누구나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생존하기 위해서는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 태어 났다. 그래서 수 만가지 직업이 생겨 났고 늙어 죽을 때 까지 하는 일에 매달리는지 모른다.
매일 다니는 거리를 지나다 보면 ‘족발집’이 있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젊은 청년과 중년 아주머니가 열심히 족발을 썰고 있다. 이렇게 사시사철 매년 이렇게 일하는 모습을 지나다니며 본다. 과연 ‘족발썰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일까 아니면 수단일까?’ 라고 의문해 본다.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보면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매우 드믈 것이라 본다. 대부분 그날 그날 먹고 살기에 바쁠 뿐 인생의 목적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수행자들이다. 그것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빅쿠들’이다.
빅쿠라 불리우는 부처님제자들은 목표가 뚜렸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이라는 뚜렸한 목표가 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야 겠다는 마음 까지 버리며 살아 갈 것이다. 이처럼 열반을 목표로 산다는 것은 결국 부처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르침대로 실천하고자 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퇴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불퇴전’의 각오로 다시 도전한다. 이렇게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다다를지 모른다. 법구경 32번이 바로 퇴전과 불퇴전에 대한 게송이다.
Appamādarato bhikkhu, 압빠마다라또 빅쿠
pamāde bhayadassivā, 빠마데 바야닷시 와
Abhabbo parihāṇāya, 아밥보 빠리하나야
nibbāṇasseva santike 닙바낫세와 산띠께.
(Dhp32)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은
퇴전할 수 없으니
열반이 그의 눈앞에 있다.
(Dhp32, 전재성님역)
いそしむことを楽しみ、
放逸に恐れをいだく修行僧は、
堕落するはずはなく、
すでにニルヴァーナの近くにいる。
(Dhp32, 中村元역)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수행자는
어느새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러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Dhp32,법정스님역)
守戒福致喜 수계복치희
犯戒有懼心 범계유구심
能斷三界漏 능단삼계루
此乃近泥洹 차내근니원
(Dhp32,한역)
마음 집중 수행을 기뻐하고
게으름과 무관심을 두려워하는 빅쿠는
뒤로 물러서지 않아
닙바나에 가까워진다.
(Dhp32, 거해스님역)
The monk delighting in heedfulness,
seeing danger in heedlessness
— incapable of falling back —
stands right on the verge
of Unbinding.
(Dhp32, Thanissaro Bhikkhu)
이 게송에서 키워드는 ‘parihāṇā’이다. 이 용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퇴전’이라 번역하였다. 퇴전(退轉)이란 무슨 뜻일까? 인터넷국어사전에 따르면 “부처를 믿는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림, 파산하여 살림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감”이라고 풀이가 되어 있다. 첫 번째 뜻으로 보아 퇴전이라는 말이 불교용어임을 알 수 있다.
아라한의 삶 그 자체는?
퇴전이라는 뜻의 빠알리어 ‘parihāṇā’에 대하여 영역을 보면 ‘falling back’이라 되어 있다. 뒤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다 더 이상 진전이 없자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하지메는 ‘堕落する’라 하여 ‘타락한다’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parihāṇā’라는 말은 더 이상 수행의 진전이 없어서 뒤로 후퇴하거나 다른 길로 들어섬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퇴전할 수 없으니”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불퇴전’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bhabbo parihāṇāya : DhpA.I.285에 따르면, 항상 깨어있어, 방일하지 않는 수행승은 멈춤[止: 사마타]와 통찰[觀: 위빠사나]의 수행과정이나 길(magga)과 경지(phala)에서 멀어질 수가 없다.
(성전협 581번 각주, 전재성님)
Abhabbo parihāṇāya는 “퇴전할 수 없으니”로 번역된다. 퇴전하지 않는 자는 항상 깨어 있는 자이다.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에 결국 열반을 성취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도와 과를 성취하여 마침내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수행은 완성될 것이다. 이 상태를 아라한이라 한다.
아라한의 삶은 어떤 것일까? 아마 행복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남은 생은 ‘축복’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라한은 지금은 물론 미래에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즐거운 느낌을 뜻하는 행복이 아니다. 아라한이 된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라한의 삶은 살아서는 ‘유여열반(saupadisesanibbana)’이고 죽어서는 ‘무여열반(anupadisesanibbana)’이라 한다. 따라서 불퇴전의 마음으로 수행하면 “열반이 그의 눈앞에 있다.(nibbāṇasseva santike)”라 하였다.
퇴전과 관련하여 ‘찬나의 경(S22.90)’에서
퇴전과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 흥미 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찬나의 경(S22.90)’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Atha kho āyasmato channassa etadahosi: mayhampi kho etaṃ evaṃ hoti: "rūpaṃ aniccaṃ, vedanā aniccā, saññā aniccā, saṃkhārā aniccā, viññāṇaṃ aniccaṃ, rūpaṃ anantā, vedanā anattā, saññā anattā, saṃkhārā anattā, viññāṇaṃ anattā, sabbe saṃ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ti.
Atha ca pana me sabbasaṃkhāra samathe sabbūpadhipaṭinissagge taṇhakkhaye virāge nirodhe nibbāne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ādhimuccatiparitassanā upādānaṃ uppajjati, paccudāvattati mānasaṃ, atha kho carahi me attāti, na kho panevaṃ dhammaṃ passato hoti "ko nu kho me tathā dhammaṃ deseyya yathāhaṃ dhammaṃ passeyya"nti.
[찬나]
“나도 역시 이처럼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다’ 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파괴, 사라짐, 소멸, 열반에 뛰어들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안주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대신에 동요와 집착이 생겨나 나의 마음은 퇴전하여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자에게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누가 내게 가르침을 베풀 것인가?”
(Channa sutta -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찬나의 경’은 부처님의 마부이었던 ‘찬나장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찬나는 부처님과 한날 한시에 태어나 위대한 ‘유성출가’의 날에 함께 하였다. 이후 부처님 앞에 출가 하였는데 자만심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나의 부처님, 나의 가르침”이라 하면서 무례하고 악의적이어서 청정한 수행승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대고 그들과 충돌한 수행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가 누군데!”
찬나는 부처님의 유성출가도 자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였는데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도 우습게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나는 주인께서 왕성을 떠나실 때 그분과 함께 숲으로 갔었지. 바로 그때 오직 나만이 주인님의 친구였을 뿐 그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사리뿟따라든가 마하목갈라나 등이 ‘우리야말로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다.’ 라고 뽐내며 뜰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꼴이라니. 쯧쯧…”
이처럼 아상과 자만에 가득찬 찬나는 출가한지 사십년이 넘었어도 성자의 흐름에도 들지 못하였다. 그것은 ‘유신견’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데!”라며 안하무인격의 찬나에게 있어서 유신견이 남아 있는 한 결코 흐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마하빠리닙나나경(D16)에 따르면 부처님은 마지막 유언에서 찬나에 대하여 침묵으로 대처할 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아난다여, 수행승 찬나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수행승들은 그에게 이야기하거나 충고하거나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D16)”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묵빈대처에 대한 것이지만 요즘말로 하면 ‘왕따’를 말한다.
안하무인격의 찬나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왕따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찬나에게 따듯하게 대해 준 이가 아난다존자이었다. 그래서 찬나의 경에서는 아난다존자와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책상도 괴로워할까?
경에서 찬나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에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다.(sabbe saṃ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ti)”라고 말하였다. 왜 찬나는 일체개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않을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abbe saṃ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ti : Srp.II.318에서 붓다고싸는 ‘모든 수행승들이 그를 가르치면서 왜 무상의 특징과 무아의 특징만을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은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고는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道]도 괴롭고 경지[果位]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365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말썽꾸러기 찬나에게 괴로움의 특징에 대하여 알려 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부처님가르침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에게 일체개고를 알려 주었을 때 ‘모든 것이 괴롭다’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도 괴롭다고 하였을 때 책상도 물질이기 때문에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오해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만 알려 주었기 때문에 찬나는 경에서와 같이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만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atha kho carahi me attāti)”
이처럼 무상과 무아의 특징만 알고 있는 찬나는 초조한 것 같다. 다른 수행자들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국의 경지에 들어섰음에도 자신은 아직까지 흐름의 경지에도 들어서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주 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때 경에서는 퇴전하는 마음에 대하여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atha kho carahi me attāti)”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퇴전하는 마음은 다름 아닌 ‘나를 찾는 수행’이다.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나를 찾다 보면 결국 ‘존재의 근원’을 찾게 될 것이다. 나를 지금 여기 있게 한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궁극적 실재는 어떤 것일 것?
종교다원주의자이자 기독교신학자들은 정상론을 말한다. 진리는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이 여럿이라고 한다. 그래서 궁극적 실재는 하나 임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을 나열 해 보면 “그리스도, 도(道), 천(天), 태극, 공(空),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無),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참나, 본래불, 비로자나” 가 될 것이다.
조건들을 성찰하지 않았을 때
찬나빅쿠는 왜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atha kho carahi me attāti)”라며 퇴전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tha kho carahi me attāti : Srp.II.318에 따르면, 장로는 조건들을 성찰하지 않고 통찰에 대한 명상을 시작했다. 그의 허약한 통찰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제거할 수 없었다. 형성들이 그에게 공(공)으로 드러나자 ‘나는 단멸하고 파괴될 것이다.’라는 허무주의자의 혼란이 생겨났다.
(366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보면 나를 찾는 수행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려 주는 것 같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디서 왔을까?”라고 의문하며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을 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허무주의자’가 될 것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조건들을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건이라 하면 연기법에서 ‘조건(paticca)’을 뜻한다. 왜 조건이 중요한가? 그것은 연기라는 말자체가 ‘조건’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가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인데, 여기서 빠띳짜(paticca)가 ‘조건’ 이라는 뜻이고, 사뭅빠다(samuppada)가 ‘함께 일어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빠띳짜사뭅빠다는 ‘조건발생’을 뜻한다. 조건발생을 한자어로 ‘연기(緣起)’라 한다. 그래서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원인이나 조건 없이 스스로 생겨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조건발생함을 말한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며 존재의 근원을 찾는다면 이는 조건성찰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조건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조건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연기법에 어긋난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며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을 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다. 찬나가 퇴전하게 되었을 때 그런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가 찬나에게 가르침을 알려 주려 하는 것이다.
왜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인가?
찬나는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왕따를 당하였다. 부처님이 침묵으로 대처할 것을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찬나를 구원한 이가 아난다존자이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찬나를 위로 하며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조건발생을 특징으로 하는 연기법 중에서 ‘깟짜야나곳따경(S12.15)’을 알려 주었다.
깟짜야나곳따경(S12.15)이 또 초기경전에서 언급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마치 숫따니빠따의 특정한 경이 다른 경에서 인용 되었을 때 매우 고층으로 인정되듯이, 깟짜야나곳따경이 찬나의 경에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이 경의 가치를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아난다는 “벗이여, 찬나여, 나는 직접 수행승 깟짜야나를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S22.90)”이라고 말하며 찬나에게 깟짜야나곳따의 경을 일러 준다.
아난다가 찬나에게 깟짜야나곳따의 경을 들려 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의 가르침부터 알려 주기 위함이다. 조건발생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명상하였을 때 공관에 빠져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찬나가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atha kho carahi me attāti)”라며 퇴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들은 깟짜야나곳따의 경을 알려 준다.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Kaccāyanagottasutta-깟짜야나곳따경,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경에서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하였다. 이것이 찬나빅쿠에게 필요로 한 말이라 본다. 조건성찰 없이 명상을 하였을 때 퇴전에 퇴전을 거듭하다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하게 될 것이고 결국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이 그의 눈앞에”
어느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으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은 결코 바람직 하지 않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분명히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 16가지 의문에 대하여 번뇌만 야기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나를 찾는 수행은 부처님제자라면 해서는 안될 수행이 되고 만다. 이처럼 금하는 이유는 조건발생에 따른 성찰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수행은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하면 할수록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자 되기 쉽다. 나를 찾는다 하여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게 되고 이는 절대로 존재한다는 ‘절대유’가 되고 말아 영원주의자가 되고 만다. 반면 나를 찾는다 하여 역시 존재의 근원을 찾다보면 공관에 빠져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절대무’가 되어 결국 허무주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깟짜야냐곳따의 경에서 보듯이 절대유나 절대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조건에 따라 법이 소멸되는 것으로 보아 절대유는 성립되지 않아 영원주의는 논파되고, 조건에 따라 법이 발생되는 것을 보고서 절대무는 성립되지 않아 허무주의는 논파된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하며 명상하는 것은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은 나를 찾아서 떠날 것이 아니라 열반을 향해야 한다. 그래서 삶의 목표를 열반으로 정해 놓고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하는 과정에서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할 것이다. 그럼에도 차츰 앞으로 나아 간다면 “열반이 그의 눈앞에(Dhp32)” 있을 것이다.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은
퇴전할 수 없으니
열반이 그의 눈앞에 있다.(Dhp32)
201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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