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느님도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존재, 바까하느님을 굴복시킨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14. 17:31

 

하느님도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존재, 바까하느님을 굴복시킨 부처님

 

 

 

작년 이맘 때 쯤

 

작년 이맘 때 쯤이다. 평소 지나가는 길목에 오동나무가 보였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 넓은 잎사귀를 특징으로 하는 오동나무가 도저히 자라지 못할 환경에서 마치 불쑥 솟아 나오듯이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보였다.

 

 

 

2013 7 27일 촬영

 

 

 

오동나무가 기세 좋게 자라고 있는 곳은 땅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콘크리트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만 이루어져 있는 건물 모서리에 기적처럼 오동나무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 일부로 심어 놓은 것 같지는 않다. 밑둥을 보니 저절로 솟아 나온 것 같다.

 

 

 

 

 

 

일년이 지난 후에 보니

 

일년이 지났다. 금일 다시 그곳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작년 이맘 때쯤 기세 좋게 올라 가던 오동나무가 이번에는 사람키를 넘어 훌쩍 자라 버린 것이다. 불과 일년만에 몰라보게 변한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서 괄목상대(刮目相對)하다고 할까?

 

괄목상대라는 말이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는 뜻으로,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향상된 것을 이르는 말을 뜻하지만 훌쩍 자란 오동나무를 보니 눈을 비비고 볼 정도이다. 더구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일년전에 고개를 삐죽내민 모습하고는 다르다. 이제 완전히 땅에 뿌리박은 것 같다.

 

 

 

 

2014 7 14일 촬영

 

 

 

온통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삭막하기만 곳에서 기세 좋게 뻗어 나가는 오동나무를 보았을 때 일종의 청량감을 느낀다. 이렇게 악조건 아래에서 산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흙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저렇게 뿌리내리며 살아 갈 수 있을까? 다시 밑둥 부분을 보았다.

 

 

 

 

 

밑둥을 보니 매우 굵어졌다. 일년전과 비교할 때 그 굵기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다. 그런데 주변을 자세히 보니 아스팔트가 일어나 있다. 나무가 자라면서 아스팔트를 부순 것이다. 아스팔트를 부수고 생명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아스팔트를 부수고 생명이 우뚝

 

오동나무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서 우뚝 서 있다. 누군가 심지 않았음에도 어떤 연유로 하여 싹이 텃는지 알 수 없지만 일년만에 다시 보는 오동나무는 마치 왕자처럼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생명력 넘치는 오동나무에서 활력을 본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흐름은 다름 아닌 엔트로피를 말한다.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

 

닫혀진 계 내에서 에너지의 총화는 일정하다. 그런데 에너지의 흐름은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한다는 것이다. 마치 비이커에 잉크 방울을 떨어 뜨리면 얼마 가지 않아 잉크가 확산되어 더 이상 잉크로서의 모습을 잃어 버리듯이 자연현상은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향하는 것이 본질이다. 바로 이것이 엔트로피법칙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너지듯이 내버려 두면 헐어지고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육을 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면 불량학생으로 되는 것도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 되고, 관리가 되지 않은 기업은 도산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도 역시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다. 이처럼 모든 현상은 질서에 무질서로 이동하는 것이 속성이다.

 

나무가 무성해지는 이유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아파트 가격은 치솟는다. 그러나 10, 20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파트는 낡아 간다. 아무리 관리를 잘 해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에 심어 놓았던 작은 나무는 정반대이다. 작은 나무는 10, 20년이 지남에 따라 우람한 거목으로 성장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생물인 아파트 단지는 시간이 낡아지기 때문에 질서에 무질서로 이동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반면에 주변의 나무는 시간이 갈수록 무성해진다. 이는 질서가 유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것이 네겐트로피이다. 이는 생명이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질서가 유지 된다. 이는 마치 엔트로피법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가 자라는 것 역시 전형적인 네겐트로피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관리가 잘 된 회사가 번영하는 것 역시 네겐트로피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것이 네겐트로피이다.

 

결국 엔트로피법칙의 지배하에

 

대체적으로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엔트로피법칙과 역행한다. 무질서로 향하는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다는 것은 엔트로피법칙에서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영원히 지배를 받지 않은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어느 것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결말이 있듯이,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생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여 유지하지만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때 죽는 다는 것은 엔트로피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엔트로피는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기 때문에 늙어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질서가 유지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현상을 유지 시켜 주는 네겐트로피는 한시적이다.

 

지금 오동나무가 그 악조건 하에서 아무리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법칙을 거부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엔트로피법칙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악조건 하에서 기세좋게 뻗어 나가는 오동나무에서 강인한 생명을 본다. 그런 오동나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활력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런 오동나무에서 무상을 본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무지막지한 엔트로피법칙의 지배하에 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법칙과 제행무상

 

엔트로피법칙은 불교의 제행무상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무상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생겨난 이상 결국 소멸 되고 말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고 꼰단냐가 이해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한다. 대표적으로 바까브라흐마(Baka-Brahma)’를 들 수 있다.

 

망상가형 하느님 바까(Baka)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가 있었다.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에서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 대상으로 숭배 되고 있는 최고신이 있었다. 이를 브라흐마(Brahma)’라 한다. 한문으로는 범천이라 하는데, 전재성님은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바까라는 하느님이 있었다. 그는 망상가형 하느님이다. 왜 망상가일까?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의 경(M49)’이 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바까하느님의 잘못된 견해에 지적하고 있다. 바까하느님은 이것은 항상하고 이것은 견고하고 이것은 영원하고 이것은 홀로 완전하고 이것은 불멸이고 이것은 참으로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으니 따라서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은 없다. (M49)”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까하느님은 무상--무아에 대하여 --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부처님은 바까하느님의 처소로 방문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욱까타 촌의 쑤바가 숲 커다란 쌀라 나무 아래서 사라져 그 하느님 나라에 나타났다. (M49)”라고 표현 되어 있다.

 

하느님은 어떤 능력의 소유자일까?

 

경에서는 바까하느님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우리말로 하느님이라 명칭을 붙였으니 그에 걸 맞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에서 악마 빠삐만이 나타나 바까하느님에 대하여 간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하느님은 어떤 능력의 소유자일까? 내용은 다음과 같다.

 

 

Eso hi bhikkhu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jitā2 vasī pitā bhūtabhavyāna.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Brahmanimantanikasutta- 하느님의 초대의 경, 맛지마니까야 M49, 전재성님역)

 

 

마라가 소개한 하느님의 소개를 보면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주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 창조주의 특징이 12가지로 열거 되어 있다. 이런 수식어는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도 소개 되어 있다. 경에서는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창조주나 유일신이라 일컬어지는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창조주도 심심해 할까?

 

그런데 브라흐마잘라경(D1)에 따르면 창조주는 심심하였나 보다. 무료와 권태를 참지 못해서일까 경에서는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바램이어서인지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D1)”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창조주가 뭇삶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경에서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창조하지 않았으면서도 창주주 행세를 하는

 

창조주가 뭇삶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단지 창조주라 불리우는 자가 먼저 이세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중에 이세상에 오게 된 자들은 먼저 온 자가 자신들을 창조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나중에 태어난 한 뭇삶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와 같이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디가브라흐마잘라경(D1)에서 묘사된 창조주는 부분적영원주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되어 있다. 자아와 세계가 부분적으로 영원하고 부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는 삿된 견해가 부분적 영원주의이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의 경(M49)에서도 영원주의가 소개 되어 있다. 이번에는 바까하느님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영원주의나 부분적영원주의는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없는 삿된 견해이다. 더구나 창조하지 않았으면서도 창주주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하느님의 정체는 무엇일까?

 

브라만교에서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창조주 등 12가지 수식어를 붙여서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아버지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M49)’ 또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D1)’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브라흐마)는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라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다. 또 스스로 영원한 자라 하지만 이는 자신의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하느님의 전생에 대하여 알려 준다.

 

바까하느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 가지 전생이야기를 들려 준다. 먼저 첫 번째 전생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존]

하느님이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 곳에서 사라져서 이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대는 여기서 오래 동안 살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잊혀져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것을 알고 또한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또한 봅니다. 하느님이여, 이와 같이 곧바로 아는 것에 관한 한, 그대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합니까?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훌륭합니다.

 

(Brahmanimantanikasutta- 하느님의 초대의 경, 맛지마니까야 M49, 전재성님역)

 

 

경에서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bhassarā)’라 하였다. 이는 세상도표에 따르면 색계 이선천광음천(光音天)’을 말한다. 그런데 경에서 그대는 그 곳에서 사라져서 이곳에 나타난 것입니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과거전생을 잊어 버린 하느님

 

각주에 따르면 바까하느님의 현재 위치는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mahā-brahma)’이다. 이는 한자어로 대범천(大梵天)’을 말한다. 대범천은 색계 초선천이므로 바까하느님은 강등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DN.1에 따르면, ‘위대한 하느님(大梵天)’은 자신이 최상의 창조신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가 파괴된 뒤에 다시 시작할 때 위대한 공덕을 지닌 자가 먼저 새로 생겨난 하느님세계에 태어난다. 그 다음에 다른 존재들이 그 하느님세계에 태어난다. 이것이 위대한 하느님으로 하여금 자신이 창조신이고 그들의 지배자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M49 856번 각주, 전재성님)

 

 

이는 주석의 내용이다. 주석가들이 경의 문구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하느님은 커다란 착각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덕이 다하여 높은 천상인 광음천(색계2선천)에서 대범천(색계초선천)으로 강등 되어 떨어 졌음에도 조물주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의 과거전생을 모두 다 잊어 버렸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고 동시에 세상 역시 영원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부처님에 깨우쳐 주고 있다.

 

하느님도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존재

 

부처님이 바까하느님에게 알려 준 것은 전생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까하느님 역시 윤회 할 수 밖에 없는 뭇삶과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바까브라흐마에게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삿된 견해를 가지고 되고 더구나 창조주행세를 한 것은 전생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부터 시작하여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위대한 경지로 얻은 신들의 하느님 세계’ 순으로 알려 준다. 이에 대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천 상

구 분

수명

 

탁월한 과보로 얻은 신들의 하느님 세계

(veha-pphalā)

광과천(廣果天)

색계4선천

500

바까하느님

4전생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subhakihā)

변정천(遍淨天)

색계 3선천

64

바까하느님

3전생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bhassarā)

 

무량광천(無量光天)

색계 2선천

 

 

8

바까하느님

2전생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mahā-brahma)

 

대범천(大梵天)

1

바까하느님

현재위치

 

 

 

경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든 것이다. 표를 보면 바까하느님 위치는 대범천이다. 대범천은 세상도표에 따르면 색계초선천이다. 수명은 1겁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 우주관에 따르면 겁화가 일어나 우주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데, 그 성주괴공이 일어나는 기간을 일겁으로 본다. 그런데 이전의 전생과 비교하면 1겁은 매우 짧은 기간이다.

 

계속 강등되는 하느님

 

바까하느님의 전생을 보면 광과천부터 시작 된다. 색계4선천에 있는 천상이다. 아마도 선정수행의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500겁을 살았다. 우주가 500번 생겼다 깨졌다를 반복하는 오랜 기간이다. 그러다 공덕이 다하여 아래로 떨어 졌는데 그곳이 변정천이다. 변정천은 색계3선천을 말한다. 그곳의 수명은 64겁이다. 그곳에서 살다가 수명이 다 되어 떨어 진 곳이 무량광천이다. 무량광천은 색계2선천으로 수명은 8겁이다. 이렇게 계속 아래로 떨어지다가 대범천에 오게 된 것이다. 대범천은 색계초선천으로 수명은 1겁이다. 이렇게 바까하느님은 계속 강등되어 아래 천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런데 재수가 좋았는지 대범천에 떨어지자 오로지 자신 밖에 없었다. 1겁을 주기로 성주괴공하는 우주에서 마침 성겁의 시기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브라흐마잘라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 때 어떤 뭇삶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D1)”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혼자 지내다가 심심하였던지 말벗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오 다른 뭇삶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불만을 갖고 동요를 일으킨다.(D1)”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러자 마침 자신의 살 던 곳에 태어난 자가 하나 둘 나타 나기 시작 하였다. 공덕이 다하여 바로 위 천상에서 떨어진 자들도 있을 것이고, 공덕을 쌓아 아래 세상에서 올라 온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온 존재들이 그곳에서 태어나 보니 자신 보다 먼저 와 있는 존재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존재가 이 세상과 자신을 있게 한 창조주로 여기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착각하게 된다. 어떤 착각일까? 이는 브라흐마잘라경에서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그럼에도 이후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성립된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

 

바까브라흐마는 색계초선천으로서 1겁 밖에 살지 못하는 대범천의 지위로 떨어졌다. 이전 생과 비교하여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기간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모두 다 잊어 버렸다. 더구나 뒤 늦게 자신의 새상에 온 존재들은 자신을 창조주로 떠 받들고 있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가 생겼고 모든 것은 불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삿된 견해를 가진 바까하느님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참으로 그대 하느님 바까는 무명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그대 하느님 바까는 무명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고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고 말하고 홀로 완전하지 않은 것을 홀로 완전하다고 말하고 불멸이 아닌 것을 불멸의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생겨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고 윤회하는 것을 두고 그것에 대하여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것과는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이 있는데도, 그것과는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Brahmanimantanikasutta- 하느님의 초대의 경, 맛지마니까야 M49, 전재성님역)

 

 

부처님에 따르면 바까브라흐마 역시 뭇삶들과 다르지 않게 윤회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1겁을 살며 창조주 행세를 하지만 수명이 다하였을 때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얀마 속담에는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창조주행세를 하는 바까하느님이 수명과 공덕이 다하였을 때 윤회할 수 밖에 없는데, 삿된 견해를 가지고 공덕도 쌓지 않았다면 사람도 아닌 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음을 말한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 하느님

 

초기경전에서 보는 바까브라흐마는 망상가형이다. 고작 1겁을 살면서도 자신의 전생을 다 잊어 버리고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믿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창조주로여기고 따르는 존재들도 있다. 그래서 더욱 더 기고만장한 것이다.

 

부처님은 망상가형 하느님을 어떻게 교화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신통으로 제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상--무아에 대하여 상--아로 굳게 믿고 있는 하느님에 대하여 더 이상 말로서 설명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세존]

, 땅은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물은 물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불은 불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바람은 바람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존재는 존재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신들은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창조주는 창조주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빛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빛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위대한 경지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위대한 경지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승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승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모든 것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Brahmanimantanikasutta- 하느님의 초대의 경, 맛지마니까야 M49, 전재성님역)

 

 

이렇게 설명 해 주었음에도 바까브라흐마는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것 같다. 부처님은 경험되지 않은 것은 진실이 아님을 말씀 하시고 있다. 경에서는 하느님이여,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 곧바로 알고 모든 것이 모든 것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M49)”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경험이라 하였는데 브라흐마잘라경에서는 접촉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 가운데 영원주의자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네 가지 근거를 통해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접촉 없이 그것을 인식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D1)”라 하였다.

 

접촉이라는 말과 경험이라는 말은 동의어라 볼 수 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접촉에 따라 세상이 일어나는데 이때 연기법에 따라 느낌이 발생된다. 그 느낌으로서 실재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접촉없이 감지한다고 하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실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치 기둥이라는 것이 넘어지는 집을 지탱하는 강한 조건이라 기둥이 받치지 못하면 그것은 서있지 못하는 것처럼, 접촉 또한 감지의 강한 조건이라 그것이 없이는 이러한 견해의 감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수행처에서 경행을 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처에 처음 가면 경행부터 가르쳐 준다. 왼 발 오른 발 옮길 때 마다 발다닥에 접촉 되는 감촉을 느끼라고 한다.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땅의 요소, 바람의 요소 등 사대를 느끼는 것이다. 이 느끼는 것이 감각접촉(phassa)이다.

 

이렇게 차가운지 뜨거운지 부드러운지 등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발을 이동할 때 의도와 옮기는 행위를 통하여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누가 만든 자도 없다는 것과 경험하는 자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철저하게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라 법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손을 단지 손이라는 명칭이나 이름으로 아는 개념화를 방지하고 접촉에 따른 느낌으로 알아 실재하는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느낌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만일 느낌을 이야기하지 않고 개념을 이야기 한다면 웃음거리가 된다.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바까하느님은 설명 해주어도 이해를 못한다. 이럴 경우 한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신통이다. 경에 따르면 바까하느님과 부처님과의 신통대결이 있다.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자처 하는 바까하느님은 자신이 부처님 앞에서 사라지는 신통을 보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라지지 못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사라지는 신통을 보여 주었다. 이 부분에 대한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Bhavevāha bhaya disvā

bhavañca vibhavesina,

Bhava nābhivadi kiñci

nandiñca na upādiyinti.

 

 [세존]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

 

 

부처님은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았다고 하였다.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이는 현상이 무상--무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 아는 자들은 존재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존재에 대하여 긍정하는 자들은 영원을 추구한다. 그래서 상--아로 보는 것이다.

 

진짜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이 게송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하여 놓았다.

 

 

이 시는 부처님이 사라진 것에 대한 가시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존재에 대한 환희를 제거하고, 부처님은 존재의 최상의 화현이자 세계긍정인 바까(Baka)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바까는 갈애에 묶여 있어,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넘어 그것을 포괄하는 부처님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M49 863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재성님의 견해임을 알 수 있다. 각주에 따르면 바까하느님은 존재의 화현과도 같다고 하였다. 존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반에 대하여 소멸로 보고 두려워 하는 것과 같다. 그런 바까하느님이 사라져 보이는 신통을 하겠다고 공언하였으나 결국 하지 못하였다. 만일 사라져 보이는 신통을 보여서 진짜 사라질까봐두려웠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갈애를 근본으로 하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바까하느님을 굴복시킨 부처님

 

부처님은 존재의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바까하느님 앞에서 사라지는 신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로서 부처님은 망상가형 하느님인 바까브라흐마를 굴복시켰다.

 

비록 경전상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부처님이 바까하느님을 굴복 시켰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 창조주이자 제의의 숭배의 대상인 브라흐마(하느님)을 굴복 시켰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

 

부처님은 바까하느님을 굴복시켰다. 바까하느님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이다. 그런데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부처님의 승리를 찬탄하는 게송이 있다. 자야망갈라가타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여덟 가지 승리에 대한 게송이 있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바까하느님에 대한 것이 있다. 이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Duggāha-diṭṭhi-bhujagena  sudaṭṭha-hattha    

Brahma  visuddhi-jutim-iddhi-bakābhidhāna

Ñāāgadena  vidhinā jitavā munindo           

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      

 

둑가~  딧티  부자게나 수닷타  핫탕

브라흐망  위숫디  주띰  이디  바까-비다-

--가데나  위디나-  지따와- 무닌도

 떼자사-  바와뚜    자야  망갈라-

 

청정하고 빛나고 위력 있는 하느님바까가
삿된 생각의 뱀에 손 물렸을 때,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의약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8번 게송 바까, 전재성님역)

 

 

 

 

 

2014-07-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