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장로가 되는 네 가지 원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4. 12:03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장로가 되는 네 가지 원리

 

 

 

내 말을 듣지 않아요

 

EBS달라졌어요라는 프로가 있다. 주로 가족간에 갈등에 대한 치유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부모가 달라졌어요’ ‘부부가 달라졌어요’ ‘고부가 달라졌어요’ ‘가족이 달라졌어요이렇게 네 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이 중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 하는 것이 부부에 대한 것이다.

 

부부가 달라졌어요프로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 가는 위기의 부부들에 대한 것이다. 프로 초반에는 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도 피터지게 싸우는 듯한 모습이다. 이때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내 말을 듣지 않아요라는 불만 섞인 말이다. 내 말일 듣지 않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이다.

 

상대방에 지배력을 행사 하려 할 때

 

내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싸운다. 상대방이 내 뜻대로 따라준다면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결코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그런 상대방에게 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고 하여 잔소리를 하고 화를 낸다면 상대방은 더욱 더 반발할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감정싸움이 폭언으로 바뀌고 급기야 물건까지 던지게 된다. 더 발전 되면 폭행으로 이어진다. 더욱 더 진행 되면 격분하여 살인까지 저지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은 결코 내 뜻대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방을 내 뜻대로 하려는 시도는 포기해야 한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하여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대방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님에도 마치 내 것처럼 지배력을 행사하려 할 때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Mameva kata maññantū

gihī pabbajitā ubho,
Mameva ativas
ā assu

kiccākiccesu kismici,
Iti b
ālassa sakappo

icchā māno ca vaḍḍhati.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

오로지 내가 행한 것이다.’라고 여기고

어떤 일이든 해야 할 일이나 하면 안 될 일도

오로지 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생각하니

그에게 욕망과 자만이 늘어만 간다. (Dhp74,전재성님역)

 

 

빠알리게송에서 세 번째 문구에 ‘Mameva ativasā assu’가 있다. 이 문구에 대한 번역이 오로지 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이다. 나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나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뜻은 무엇을 말할까?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Mameva ativasā assu: DhpA.II.78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재가자나 출가자가 모두 오로지 나의 지배 아래 두리라. 해야 할 일은 모두 크고 작건 간에 승원을 위 수레, 자귀, 도끼와 같은 것을 마련하는 일에서 죽을 끓이는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의 잡다한 일이 모두 하나하나 나의 지배아래 행해져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745번 각주, 전재성님)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자는 모든 일에 간섭하는 자이다.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중대한 것 까지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뜻대로 상대방에게 지배력을 행사 하려는 것은 욕망에 속한다. 욕망은 거머쥐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결코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없음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화를 낸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성냄으로 살아간다.

 

욕망으로 살고 성냄으로 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이다. 이처럼 욕망으로, 성냄으로, 어리석음으로 살아 가는 것이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 게송에서는 어리석은 자에게 욕망과 자만이 늘어만 간다. (icchā māno ca vaḍḍhati)”라 하였다.

 

지고는 못살아!”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내 마음대로 하려 하기 때문에 거머쥐려는 특징이 있어서 욕망에 살고, 내 뜻대로 안되었을 때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성냄으로 산다. ㄱ런데 게송에서는 욕망과 자만이 늘어만 간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왜 자만(māna)’이 늘어난다고 하였을까? 대체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과 자만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여기 개성이 강한 사람이 있다. 개성이 강하면 대체로 주관이 뚜렸하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면 대게 지기 싫어 한다. 지고는 못사는 것이다. 그래서 지고는 못살아!”라고 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상대방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부모자식간의 갈등, 직장에서 상사와 갈등은 강한 개성과 뚜렷한 주관 그리고 지고는 못사는 심리가 발동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심리의 밑바탕에는 자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홉 가지 자만이 있는데

 

자만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상대방에게 우월의식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자만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깨뜨린다. 이는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Samoti attānamanupaneyya Hino na maññetha visasi vāpi, Sn4.5)”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자만은 우월감 뿐만 아니라 동등감, 심지어 열등감도 자만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부간, 고부간 등의 갈등의 이면에는 세 가지 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논서에 따르면 자만은 모두 아홉 가지가 있다. 이를 영문과 함께 표기 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탁월한 자보다 낫다.

Being sup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better.

 

2) 나는 탁월한 자와 동등하다.

Being sup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equal.

 

3) 나는 탁월한 자보다 못하다.

Being sup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worse.

 

4) 나는 동등한 자보다 낫다.

Being equal to others, one thinks, I am better.

 

5) 나는 동등한 자와 동등하다.

Being equal to others, one thinks, I am equal.

 

6) 나는 동등한 자보다 못하다.

Being equal to others, one thinks, I am worse.

 

7) 나는 열등한 자보다 낫다.

Being inf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better.

 

8) 나는 열등한 자와 동등하다.

Being inf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equal.

 

9) 나는 열등한 자보다 못하다.

Being inf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worse.

 

 

탁월, 동등, 열등 이렇게 세 가지에 대하여 다시 세 가지로 구분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 자만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 하는 것일까? 아홉 가지 형태의 자만(2013-11-2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아홉 가지 자만의 공통점은?

 

아홉 가지 자만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탁월한 자보다 낫다등으로 표현 된다. 영어에서도 “I am better.”라 하여 역시 (I)’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만은 항상 나는~” 또는 “I am~”라는 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주관이 뚜렷한 사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의 공통점은 지기 싫어한다. 지고는 못사는 것이다. 이처럼 지고는 못살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직장에서 갈등 역시 강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충돌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자만심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만심은 우월감도 있지만 동등감도 포함되고, 심지어 열등감도 해당된다. 그래서 잘 나가는 상대방이 있을 때 그를 깍아 내리려 하는 것도 열등감이라는 자만심이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자만심의 바탕에는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를 움켜 쥐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하여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내가 우월하다라고 생각한다. 열등할 때는 내가 열등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만심이 강한 자는 오온이 내 것이라 생각한다. 몸도 내 몸이라 하고, 느낌도 내 느낌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은 진짜 내 것일까?

 

오온은 진짜 내 것일까?

 

사람들은 색, , , , 식 오온에 대해여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지각, 나의 형성, 나의 마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부질 없는 생각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디.

 

 

Rūpa bhikkhave, anattā, rūpañca hida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 rūpa ābādhāya savatteyya, labbhetha ca rūpe eva me rūpa hotu, eva me rūpa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rūpa anattā, tasmā rūpa ābādhāya savattati. Na ca labbhati rūpe "eva me rūpa hotu, eva me rūpa mā ahos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Pañcavaggiya sutta-다섯 명의 경-무아상경, 상윳따니까야 22:59, 전재성님역)

 

 

 

 

 

 

 

 

 

빤쨔왁가야경은 부처님의 두 번째 법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비구가 이 설법을 듣고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에서 물질은 내가 아니다. (Rūpa anattā)”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물질은 물질로 구성된 몸을 말한다. 그래서 몸은 내가 아니라 하였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Rūpa anattā라 한다. 여기서 anattā에 대하여 무아(無我)’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종종 비아(非我)’라고 일컫는 이도 있다. 그러나 무아와 비아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tv에서 어느 스님은 라는 말 대신 라는 말을 사용하여 모두 로 바꾸어 쓰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anattā(무아)’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자아라고 여겨 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도에 종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괴롭고 우리의 자아가 아닌 것이다.(S22.59, 192번 각주, 전재성님)”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통제 되지 않음을 말한다. 나의 몸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오온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병이 걸려서도 안되고 늙어서도 안되어야 하지만

 

여기 군대가 있다. 그런데 어느 장수가 배신하였다. 그러면 배신한 군대에 대하여 나의 군대라 볼 수 있을까? 나의 통제가 미치지 않은 군대는 더 이상 나의 군대가 아니다. 이는 부처님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통치권을 가진 왕족의 왕은 마치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그런 것처럼, 마치 마가다 국의 비데하 비의 아들 아자따쌋뚜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영토에서 살해되어야 하는 자를 살해하고 박멸되어야 하는 자를 박멸하고 또는 추방되어야 할 자를 추방할 힘이 있습니까?(M35)”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국의 왕에게 타국의 영토에는 통제권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M35)”라고 묻는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왕이 타국의 영토에 대하여 통제권이 없듯이 몸에 대한 통제권이 없음을 말한다.

 

만일 진정으로 몸이 자신의 것이라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몸은 병이 걸려서도 안되고 늙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몸은 병들고 늙어만 간다. 이러니 어찌 몸이 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싸울 일이 없는 아라한

 

나의 의도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몸이고 느낌이고 정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온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다 보니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내가~(I am~)”라 하여 나를 앞세운다. 이처럼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만심이 생겨난다. 그래서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라한에게는 자만심이 없다.

 

아라한은 번뇌 다한 자를 말한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기 이전 가장 마지막 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자만이라 한다. 그래서 탐진치가 모두 소멸 되고 나서도 가장 나중에 제거 되는 것이 자만인 것이다.

 

자만이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오온이 내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한다든가 내가 생각한다등의 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 다한 아라한은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하여 화를 내는 행위는 아라한에게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

 

EBS에서 달라졌어요프로를 보면 부부싸움에 나이와 무관한 것 같다. 살만큼 산 부부가 머리가 하얗게 새었음에도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손자를 본 나이임에도 말싸움이 감정싸움으로 변하고 급기야 폭력으로까지 발전 되는데 이런 모습이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프로에서 컨설턴트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출연자들 보다 훨씬 아래의 나이이다. 그럼에도 마치 선생님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현상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의젓해 보이면 어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백 세가 되었더라도

 

나이가 들어서도 철부처럼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으로 나이는 들었지만 정신적 연령이 낮은 케이스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비록 나이가 들어 여든 살이나 아흔 살이나 백 세가 되었더라도 때 맞춰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지 못하고, 알맞은 말을 하지 못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지 못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지 않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를 두고 어리석은 장로라고 한다.

 

(우루벨라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22, 전재성님역)

 

 

여기 백살 먹은 노인이 있다. 그런데 행동하는 것을 보면 철부지 같다. 육체적 나이는 백살이지만 정신적 연령은 매우 낮음을 말한다. 이런 정신적 연령 수준은 말하는 수준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때 맞춰 말하지 못하는 것등 열 가지를 들고 있다. 이런 자에 대하여 어리석은 장로라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초년생일지라도

 

그런데 여기 나이는 어리지만 의젓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지혜가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 말씀 하셨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비록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은 인생의초년생일지라도 때 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한다면, 그를 두고 슬기로운 장로라고 한다.

 

(우루벨라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22,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모든 것이 대조 된다. 인생의 초년생, 즉 청년일지라도 때 맞춰 말하는 등 열 가지로 말한다면 그가 바로 슬기로운 장로라 하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장로라고 불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요즘 말로 표현 하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나이에 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지금 육체적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가르침을 배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숫자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산전수전 다겪고 느지막한 나이에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나이에 뭘?”이라는 말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데 있어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늦은 나이에 가르침을 접한 사람에게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명칭을 붙여 줄 수 있다.

 

나이가 어려도 어른인 이유

 

그러나 나이만 먹었을 뿐 여전히 탐진치로 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전히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내 뜻대로 모든 것을 하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긴장과 갈등이 끊임 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내 뜻대로 하려 하는 자는 내 뜻대로 하려 하다 안되면 화를 낸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나의 것, 나의 마음이라고 굳게 믿는 자는 욕망과 성냄으로 살아 간다. 그리고 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자만으로 살아 간다. 그래서 나 보다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으로 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평생을 살았을 때 과연 그를 어른(장로)라 볼 수 있을까?

 

누구나 장로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누구나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설령 나이가 어려도 어른이 될 수 있다. 이는 법구경인연담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거룩한 경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고 “한 장로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들은 보지 못했다고?

 

“세존이시여. 한 사미를 보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사미가 아니라 장로이다.

 

“세존이시여, 지나치게 작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고 장로의 자리에 앉았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 진리를 꿰뚫고 많은 사람에 대하여 불살생을 확립하면, 그를 장로라 한다.

 

(법구경 Dhp260  인연담, 전재성님역)

 

 

법구경 260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파격적이다. 20세도 되지 않은 사미에게 장로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지혜를 깨닫지 못하면 장로라 부를 수 없음을 말한다. 단지 불러 준다면 어리석은 장로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머리가 희다고 해서 장로가 아니다. 단지 나이기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이라고 불린다.(Dhp260)”라 하였다. 지혜가 없이 나이만 든 사람에게 헛되게 나이만 먹은 늙은이라는 것이다.

 

장로가 되는 네 가지 원리

 

그렇다면 어른(장로)이 될 조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장로가 되는 네 가지 원리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세상에 수행승이

 

1) 계행을 갖추고, 의무계율을 실천하고, 의무계율을 통한 제어를 수호하고,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여,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운다.

 

2) 그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모아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시키는  그 가르침을 자주 듣고, 기억하고, 언어로써 외우고, 정신으로 성찰하고, 바른 지혜로 꿰뚫는다.

 

3) 그는 보다 높은 마음과 관계되고, 현세의 삶에 유익한 네 가지 선정을 원하는대로 성취하고 힘들이지 않고 성취하고 어렵지 않게 성취한다.

 

4) 그는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장로가 되는 네 가지 원리이다.

 

(우루벨라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22, 전재성님역)

 

 

장로가 되는 원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계행을 확립하고, 가르침을 배워서 지혜를 얻고, 선정을 성취하고, 바로 현세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자를 말한다. 이런 네 가지 조건은 다름 아닌 계---해탈이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자가 장로라 하였다.

 

그를 나는 장로라고 하니

 

장로라고 하면 스승이자 동시에 어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가르침에 따르면 장로가 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 어린 사미도 장로가 되고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미에게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릴 없이 나이만 먹은 늙은이가 있다.더구나 자아의식이 강하여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욕망과 탐욕으로 한평생 살아 왔다. 이처럼 탐진치로 평생 살아온 늙은이를 어른 이라 볼 수 있을까? 이럴 때 하는 말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들뜬 마음으로 헛된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이 집중되지 못하고

장로의 지위에서 멀어지고

악한 견해를 갖는 자는

존경을 받지 못하네.

 

계행을 갖추고 학식이 있고

총명하고 자제하고

가르침에 밝아

지혜로써 의미를 통찰하고

일체의 원리에 통달하여

황무지가 없고 슬기러워

 

태어남과 죽음을 버리고

청정한 삶을 완성한 님.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 님.

그를 나는 장로라고 하니

바로 번뇌를 부순

수행승이 장로이네.”

 

(A4.22, 전재성님역)

 

 

 

2014-07-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