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모든 집착을 지혜의 불로 태워서 다시 생겨날 수 없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11. 18:49

 

모든 집착을 지혜의 불로 태워서 다시 생겨날 수 없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들

 

흔히 순리대로 산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순리란 무리가 없는 순조로운 이치나 도리를 뜻한다. 따라서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긍정의 뜻이다. 그런데 흐름대로 산다라는 말도 있다. 이때 흐름은 마치 물이 흘러 가는 것처럼 유연한 것을 말한다. 마치 교통흐름이 좋다고 하듯이 한방향으로 별탈 없이 잘 흘러 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은 순리대로 산다기 보다 대부분 흐름대로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 역시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다. 누군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 고액의 영어과외를 시키면 따라 한다든지, 땅투기를 하면 따라서 함께 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는 장관후보자의 청문회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결 같이 이중계약서를 작성하고, 위장전입을 하는 등 수법이 비슷하다. 이런 것 역시 흐름에 따라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흐름에 따라 가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흐름을 거슬로 올라 간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따라 내려 가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지으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라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들이 있다.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불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라고 말씀 하셨다. 청정한 삶을 사는 자는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사는 자이고, 탐진치로 사는 자는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법구경 31번 게송은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반대로 하였을 때 어떤 결과에 이를까?

 

 

Appamādarato bhikkhu,      압빠마다라또 빅쿠

pamāde bhayadassivā,       빠마데 바야닷시 와
Sa
yojana au-thūla  상요자낭 아눙 툴랑

aha aggī va gacchati.   다항 악기와 갓차띠

 

(Dhp31)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은

작거나 거친 결박을

불태우듯 태워 없앤다.

 

(Dhp31, 전재성님역)

 

 

いそしむことをしみ

放逸に恐れをいだく修行僧は、

微細なものでも粗大なものでも全て心のわずらいを、

きつくしながらむ 燃える火のように。

(Dhp31, 中村元역)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수행자는

크고 작은 온갖 속박을

불같이 태우면서 나아간다

 

(Dhp31, 법정스님역)

 

 

比丘謹愼樂 비구근신락

放逸多憂愆 방일다우건

結使所纏裏 결사소전리

爲火燒已盡 위화소이진

 

(Dhp31, 한역)

 

 

마음 집중 수행을 기뻐하고

게으름과 무관심을 두려워하는 빅쿠는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고 향상 발전한다,

마치 불길이 크고 작은 것들을 모두 태워 버리듯이.

 

(Dhp31, 거해스님역)

 

 

The monk delighting in heedfulness,

seeing danger in heedlessness,

advances like a fire,

burning fetters

       great & small.

 

(Dhp31, Thanissaro Bhikkhu )

 

 

 

 

이 게송에서 말하고자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번째 구절의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pamāde bhayadassivā)”일 것이다. 여기서 왜 두려움을 본다고 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방일하고 알아차림이 없어 지옥에 태어나게 되는 등의 두려움을 본다라고 되어 있다. 게으르고 흐리멍덩하게 살면 그 결과는 지옥행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일한 것은 지옥 등과 같은 악처에 태어나는 근본원인이 되기 때문이라 한다.

 

방일하면 악처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지만 방일하지 않음은 결박에서 벗어나는 원인이 된다. 이에 대하여 작거나 거친 결박을 태워 없앤다고 하였다. 여기서 결박은 무엇을 말할까?

 

윤회의 고통에 묶고 윤회에 가라앉게 하는

 

결박은 빠알리어 Sayojana의 번역어이다. 상요자나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心のわずらい라 하여 마음의 번뇌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법정스님은 속박으로, 거해스님은 수행의 장애, 타닛사로 빅쿠는 fetters라 하여 족쇄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연번역서를 보면 족쇄로 되어 있다.

 

상요자나에 대하여 결박, 속박, 장애, 족쇄 등 다양한 번역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요자나에 대한 PTS P-E dictionary에 따르면 ‘bond, fetter’로 되어 있다. 특히 사람을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어 두는 것에 대하여 족쇄(fetter)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쇠스랑으로 되어 있어서 발을 묶어 꼼짝 못하게 하는 족쇄의 의미가 매우 강함을 알 수 있다.

 

10가지 결박이 있는데

 

존재로 하여금 윤회의 고통에 묶고 윤회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 족쇄(결박)이다. 이런 결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10가지로 보고 있다. 이를 열거 하면 다음과 같다.

 

 

1)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2) 회의적 의심(vicikicchā)

3)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o)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acchando)

5) 분노(vyāpādo)

6)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rūparāgo)

7)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o)

8) 자만(māno)

9) 흥분(uddhacca)

10) 무명(avijjā)

 

 

이 열 가지 결박은 네 쌍으로 된 여덟이 되는 무리와 관계된다.

 

표로 만들어 보면

 

10가지 결박에 대하여 표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결박

 

흐름에 드는 길을 가는 님

sotāpanna

한번 돌아 오는 님

sakadāgāmi

돌아 오지 않는 님

anāgāmi

거룩한 님

arahatta

10가지결박

 

 

 

 

 

 

10

가지

 

 

1. 개체가 있다는 견해

(sakkāyadiṭṭhi)

풀림

 

풀림

 

풀림

 

풀림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결박

2.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sīlabbataparāmāso)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acchando)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5. 분노

(vyāpādo)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6.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rūparāgo)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결박

7.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arūparāgo)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8. 자만

(māno)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9. 흥분

(uddhacc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10. 무명

(avijjā)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탐진치(번뇌)

소멸안됨

소멸과정

소멸

 

삼분도

견도

(見道)

수도

(修道)

무학도

(無學道)

 

수행의 시작

수행의 과정

수행의 완성

 

 

 

표를 보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이(수다원)’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 풀렸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다원의 경우 본격적인 수행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탐진치를 소멸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사다함과 아나함이다. 아라한의 경우 열 가지 결박이 모두 풀려 수행이 완성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얼마나 번뇌가 남아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자신이 잘 알기 때문에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불이 일어날 수 없도록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이 열 가지 상요자나이다. 상요자나를 족쇄로 본다면 칼로 끊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요자나는 기본적으로 탐진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불태우듯 태워 없앤다 (aha aggī va gacchati)”라 하였다. 탐욕이라는 마음의 불, 성냄이라는 마음의 불,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의 불은 태워 없애는 것이라 하였다.

 

태운다는 것은 연료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불은 연료가 본질이므로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그 연료를 태워 없앤다. 그래서 다시 불이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DhpA.I.282)”라고 설명되어 있다.

 

자가발전 되는 탐욕의 연료, 분노의 연료, 어리석음의 연료

 

불은 연료가 공급이 되어야 지속적으로 타오를 수 있다. 만일 연료가 바닥 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불이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탐진치는 존재의 연료와 같다.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탐욕의 연료는 증가하기 때문이다. 분노하면 분노 할수역시 분노의 연료는 증가한다.

 

이렇게 탐욕과 분노의 연료가 가득 쌓여 있으면 잘 탈 것이다. 일생동안 탐욕으로 성냄으로 산 사람들은 그 연료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런 연료가 있기 때문에 불은 계속 타올라 세세생생 윤회한다.

 

윤회를 종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연료를 공급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가발전 되는 탐욕의 연료, 분노의 연료, 어리석음의 연료가 바닥 났을 때 불은 꺼져 버릴 것이다.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꺼진 불로 묘사 되어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stn235)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그 분의 마음은 참으로 해탈되었네.(S6:15)

 

 

이처럼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은 꺼진 불로 묘사 되고 있다. 연료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집착을 지혜의 불로 태워서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산불이 나면 나무이건 집이건 남김 없이 집어 삼킨다. 그리고 주변에는 잿더미만 남는다. 인연담에 따르면 산불난 광경을 본 수행승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불이 퍼져 나가면서 모든 크고 작은 땔감을 태워 없애듯, 고귀한 길에 대한 지혜의 불로 크고 작은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애며 명상수행을 해야겠다.”

Fire

 

 

이런 광경을 본 부처님은 수행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행승이여, 그렇다. 불이 크고 작은 모든 땔감을 태워버리듯, 이러한 뭇삶의 안에 일어나는 미세하거나 거친 모든 집착을 지혜의 불로 태워서 다시 생겨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산불이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듯이, 부처님은 지혜의 불로 번뇌의 불을 태울 것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은

작거나 거친 결박을

불태우듯 태워 없앤다.(Dhp31)

 

 

 

2014-07-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