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조사스님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마하야나와 젠부디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12. 14:46

 

 

조사스님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마하야나와 젠부디즘

 

 

 

불교를 어떻게 접할까?

 

불자들이 불교를 어떻게 접할까? 아마 대부분 인터넷으로 접할 것이다. 돈이 들지 않고 시간이 들지 않기 때문이라 본다. 인터넷은 거의 생활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수시로 드나 들 수 있어서 굳이 법문을 들으러 심산유곡에 사는 스님을 찾아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굳이 값이 비싼 책을 사지 않고 단지 키워드 검색만으로도 원하는 답을 찾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돈과 시간을 절약하게 해 주는 불교사이트는 수 도 없이 많다. 가장 흔한 카페나 블로그가 있고 기관이나 단체에서 운영하는 전문사이트도 있다. 그 중에 불자들이 믿고 찾는 곳이 아마 불교신문사이트일 것이다. 이름하여 불교신문, 법보신문, 현대불교신문, 미디어붓다, 불교포커스, 불교닷컴 등일 것이다. 나열하다 보니 보수에서 진보순으로 되어 있다.

 

팩트(fact)위주의 보도를 하지만

 

각 신문사이트에서는 사실위주의 보도를 한다. 이처럼 사실위주의 보도는 신문고유의 영역일 것이다. 그래서 팩트(fact)’ 위주로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나열된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문에는 팩트위주의 뉴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컬럼이나 기고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컬럼이나 기고문은 신문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수적 신문에서 진보적 컬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신문이든지 고정컬럼이 있고 또한 비정기적으로 외부기고문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컬럼이나 기고문을 보면 명망가들이 쓴 글이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스님이나 교수의 글이다.

 

스님들이나 교수들은 불교계의 리더이다. 그리고 여론을 주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피니언리더라도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칼럼이나 기고문을 보면 종종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내용도 보인다. 이는 불교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은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 선불교에 이르기 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병균교수의 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

 

최근 불교닷컴에서 포항공대 강병균교수의 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과학을 전공한 학자의 글 답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도 보인다. 먼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얼마나 핀트가 어긋났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고통을 극복하러 이 세상에 태어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 안 되기는, ‘죽으려고 태어난다는 말이나 비슷하다. 이게 본분사(本分事)란 말인가?

 

(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7-07)

 

 

불교에 사성제가 있다. 사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다. 그래서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코끼리 발자국에 포섭 되듯이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사성제에 포섭된다 . 이는 초기경에서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M28)”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84천 법문이 사실상 사성제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기본이고 불교의 근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강병균교수는 우리가 죽으려고 태어났다는 말인가?”라 하였다. 사성제를 이해하고 팔정도를 실천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임에도 이게 본분사(本分事)란 말인가?”라 하며 의문 한다.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렇다면 강병균 교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어지는 글을 보면 그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우리가 고통(번뇌)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순간 (혹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가 사라진다면(무여열반에 들어 윤회를 멈춤), 마치삶의 목적이 사라짐이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 ‘존재의 목적이 소멸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

 

(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7-07)

 

 

글에서 강병균교수는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모순이라 하였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가르침이 결국 존재의 소멸에 대한 것이라면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오자(돌아오자)는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소한 지구촌에 행복한 이들(대승보살)의 숫자가 계속 증가할 것이므로, 지구의 행복농도는 짙어갈 것이 분명하다.

 

(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7-07)

 

 

이 말은 이어지는 글에서 보살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성 글이라 볼수 있다. 그렇다면 강병균교수는 왜 이렇게 근본가르침을 폄하 하는 것일까? 그것은 글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고통 보다 행복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부처님이 괴로움만 말하는 염세주의자로 묘사 된 듯 하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이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지 않는 다는 말에 불안감을 갖는 것 같다. 그래서 소멸하지 않고 거듭 태어남이 대승철학이라 하였다 이런 이유로. 대승불교가 초기불교 보다 더 발전된 형태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불완전한 것이고 덜 완성된 것?

 

강병균교수는 대승보살사상을 말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사성제와 열반을 간단히 부정해 버렸다. 그래서 괴로움 보다는 행복을, 소멸하여 없어지는 열반보다는 거듭태어나는 보살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대승보살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대승불교가 초기불교 보다 더 진보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설한 진리는 불완전한 것이고 덜 완성된 것이라는 뜻이다.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

 

오늘날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동남아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는 것이다. 이는 선사들의 법문을 들으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전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소승을 뜻하는 히나야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소승불교라 한다. 테라와다라는 말이 있음에도 왜 그들은 소승이라 할까? 그것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등 시대구분을 잘 몰라서라고 이고, 또 하나는 테라와다라는 말 자체를 몰라서 하는 말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폄하하는 듯한 소승불교(hinayana)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선승들이 서슴없이 사용한다. 이런 배경에는 선종이 최상승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서 일 것이다. 마치 대승이 스스로 마하여나라 하여 차별화 하였듯이, 선종 역시 스스로 최상승이라 하여 차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소승이라 하여 근기가 낮은 자들이나 따르는 것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불교라 하는데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원시불교라 한다. 이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원시라는 말 자체가 사실상 폄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완성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교가 진화해 왔다고 믿는 것이다. 강병균교수의 대승진보론 역시 선종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불교도 진화할까?

 

불교도 시대에 따라 발전 되는 것일까? 마치 동식물이 진화 하듯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불교도 진화 하는 것일까? 선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는 부단히 진화해 왔다. 마치 인류가 진화해 오듯이 불교역시 부처님 못지 않게 뛰어난 깨달은 자들이 나타나 오늘날 보는 것 처럼 불교의 진화를 이끌어 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나중에 나타난 선종이 가장 진화된 형태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법문할 때 최상승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부처님도 몰랐던 것

 

불교진화론을 말하는 자들은 사실상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 자체도 의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예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선가귀감)

 

 

 

 

 

zen-buddhism

 

 

서산대사가 지은 선가귀감에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도 몰랐던 것이 있다. 그것은 홀로 밝은 동그라미(凝然一相圓)라 한다. 여기서 홀로 밝다는 것은 자재함을 말한다. 동그라미는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 스스로 홀로 자재하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말이다.

 

원불교에서 동그라미 의미는?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말이나 문자로 표현 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해차원에서 동그라미(一相圓)’라 한 것이다.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하나의 동그라미로 표현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원불교에서 법신불에 대하여 동그라미로 표현한 것도 하나의 상징을 형상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게송에서는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라 하였다. 부처님도 깨닫지 못하였는데 전법제자인 가섭도 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은 아직 덜 깨달은 것이 된다.

 

선가에 말하는 홀로밝은 동그라미소소영영이라 말로도 표현 된다. 그래서 선사들의 법문을 보면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종본(從本) 이래로 저 무량겁 이전부터서 일찍이 생겨난 때가 없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해서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버텨. 항상 일상생활 속에 동작하는 가운데...”라고 말한다. 홀로밝은 동그라미가 이번에는 한물건이라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사들이 화두에 대하여 ~알 쑤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그렇게도 하고, 지금 ‘이뭐꼬’ 하고 있는 이놈이 뭐꼬 이렇게도 하고라고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라고 한다. 그래야 소소영영한 한물건, 또는 일원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다.

 

혜민스님의 블로그에서

 

홀로밝은 동그라미, 일원상, 한 물건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이렇게 여러 이름이 있는 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말과 문자로 표현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편리하게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놈이라고 표현 하는 것을 보았다. 혜민스님의 블로그에 있는데 길지만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뒤는 무형상이라서 컴퓨터 모니터보듯 볼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확인할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떨어져 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비여있지만

한 생각이 뽀록하고 올라오면 

그 생각이 일어 났다는 것을 그 놈이 바로 알아채요.

 

 

그럼 조금전까지만 해도 텅텅비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이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까요?

텅텅비어 고요했는데 그 텅텅비어 고요한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거

그리고 지성知性 있어서 빛보다 빠르게 안다는 거

텅텅비어 아주 고요한 상태로 살아있는 그것이 내 본성입니다.

그것이 알아챔, 앎 자체입니다.

 

내면의 빛을 본다던가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던가

천상에 있는 듯한 말할수 없는 지복감이나

부처님, 예수님을 명상이나 기도중에 만난다던가

화두가 깨지고 밑둥이 확 빠진듯한 느낌이나

내 몸이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변한 상태

내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경험이 아니고

 

 

오직 

오직

오직 앎만이 해탈을 시켜 줍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해탈할것이 없었다는 것을 아는 앏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앎 스스로를 확인할때 그렇다는 것을 앎니다.

즉 이 앎은 희한하게도 앎 스스로를 확인 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앎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아는 그놈

즉 앎자체가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온세상에 앎만 홀로있다는 것을 압니다.

태초부터 그 앎이 혼자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앎이 묘 부려서 

둘로 셋으로 나온후 원래 하나라는 것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왜냐면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앎은

개념적 앎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 나간후에 

그 마음 바탕을 확인한 앎입니다

즉 텅텅 빈 본성이 듣고 말하고 쓰고 다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텅텅 빈채로 있는 그 본성은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한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즉 아주 고요히 텅빈채로 있는 그것이 즉 앎입니다.

다시 말하면 빈 (마음의식) 공간=앎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앎을 통해서 

눈을 떠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앎에서 공간적으로 펼쳐진 세상입니다.

즉 앎 자체가 공간화 되어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앎과 공간안의 대상들이 둘이 아닙니다.

이래서 일체유심一切唯心 마음뿐 입니다.

 

 

하나다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앎자체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비여있다는 앎이 물질에 스며들어 보입니다.

즉 물질, 사람, 소리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앎이 물체를 투과하면서 자성自性 없이 비여서 있음을 스스로 앎니다.

 

 

그 앎안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도 없고 앎 자체입니다.

앎에서 펼쳐 놓으면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이 앎은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습니다.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

또 스스로를 확인하여 알수 있습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사실을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놈 스스로가 있는 그 자리 ,  관자재 보살이 이것이라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문 不二門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그 앎이라는 사실을

비어서 고요한데 영묘하게 아는 공적영지 空寂靈知 바로 이거라는 사실을

눈앞에 홀로 밝은 이놈

이 앎만 또렸합니다!

 

 

이 앎은 도착하려는 피안에서 

한발자국도 떠난적이 없었음을 

아는 부처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이 글은 ‘그놈’이나 ‘그분’이나,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2011-12-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혜민스님의 글을 보면 말미에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마치 선가귀감 게송에서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문구가 연상된다. 부처님도 알지 못하고 부처님도 깨닫지도 못한 그 놈이 있다는 것이다. 대체 그 놈은 어떤 놈일까?

 

그 놈은 어떤 놈 이길레

 

혜민스님은 그 놈의 정체에 대하여 긴 시의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경험한 것을 말이나 문자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문자로 설명해 놓았기에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말이나 문자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가귀감 게송에서도 혜민스님의 글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덜 깨달은 자로 되었다. 부처님도 알 수 없는 홀로밝은 동그라미, 소소영영한 한 물건, 그 놈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종에서 부초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소승이라고 무시하는 것일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그런데 무시의 절정에 대한 글을 보았다. 언젠가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주신 산중승님의 글이다. 출가하여 산중에서 선을 닦고 히말라야에 까지 가서 수행하였다는 산중승님은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佛敎]라는 宗敎가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한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님)

 

 

글을 주신 산중승님에 따르면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모두에 강병균교수가 절대로 사라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오자(돌아오자)는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성숙한 것, 미완성, 불완전한 가르침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선종은 조사불교

 

산중승님은 산중에소 수십년 수행한 수행자로 보인다. 그런데 산중승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라고 내쳤다. 아마 이런 견해가 대부분 선승들의 견해와 동일할 것이라 본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한결 같이 부처님 가르침을 소승이라 하고 오로지 조사스님들의 가르침만 받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선종은 불교가 아니라 조교(祖敎)’라 하였다. ‘조사불교라는 뜻이다.

 

어느 기독네티즌에 따르면

 

혜민스님은 문자로서 쓸 수 있는 한 소소영영한 그 놈에 대하여 상세하게 표현 하였다. 이에 감명을 받았던지 어느 네티즌이 글을 남겼다. 올린 내용을 보면 여기 수행법으로 가면 불교와 기독교가 차이가 없는듯해요.”라 하였다. 기독네트즌이 올린 글이다. 혜민스님이 세상에 잘 알려진 유명인이기 때문에 종교를 떠나 따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독네티즌은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내용의 글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을 읽는 기분인데요ㅎ라 하였다. 혜민스님의 그 놈에 대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 신에 공명 내지는 감응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혜민스님이 이라고 강조한 것에 대하여 그 앎을 인격화시킨 것이 기독교라는...^^”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혜민스님이 말한 그 놈은 기독교의 그 분은 사실상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어떤 내용일까?

 

기독네티즌은 혜민스님의 글을 읽고 요한복음1장을 읽는 기분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은 어떤 내용일까? 검색하여 보았다. 길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요한복음 1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오심

 

1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4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엣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7 요한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8 요한 자신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9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10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11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3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계획이나 바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15 요한이 그분에 대해서 증언하며 외쳤습니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

 

16 그분의 충만하신 것에서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17 그것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18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

 

 

요한복음 1장을 죽 읽어 보면 기독네티즌이 말한 대로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글과 유사하다. 명칭도 그 놈에서 그 분으로 바뀐 듯이 보인다.

 

 요한복음 15번 항과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

 

요한복음 15번 항에서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딘가 매우 익숙하다. 그것은 화두 중의 하나인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을 떠 올리기 때문이다. 현재 조계종 종정으로 있는 진제스님이 늘 하던 말이다. 이는 부모 몸에 들기 전에 어느 것이 참나인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본래면목이라는 말은 참나, 홀로밝은 동그라미, 소소영영한 한 물건, 그 놈 등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라는 말이 요한복음에도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립박수를 보낸 이유는?

 

몇 해전 진제스님이 종정이 되기 이전에 뉴욕에서 종교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 진제스님 그것도 사찰이 아닌 교회에서 한국 대표 선지식이 대규모 법회를 연 것이다.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던진 화두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What is my true self before my parents gave birth to me?)”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스님의 법문에 타종교인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이 뉴욕 시민들을 향해 던진 화두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What is my true self before my parents gave birth to me?)'. 40여 분의 법문이 끝나갈 무렵 스님이 말했다. "산봉우리에 구름이 걷히니 산마루가 드러나고 밝은 달은 물결 위에 떠 있음이로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진제스님이 대중에게 영어로 "What is your true self?(당신의 참나는 무엇인가)"라고 물음을 던지자 박수소리가 교회 안을 가득 메웠다.[10]

 

(진제선사, 위키백과)

 

 

기독인들은 왜 기립박수하였을까? 진제스님이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라는 말에 왜 극찬 하였을까? 혹시 요한복음 1장에 쓰여 있는 .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이라는 말과 똑같다고 보아서일까? 기독네티즌이 혜민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글을 읽고 요한복음 1장을 읽는 기분인데요ㅎ라 하였는데 미국의 기독인들도 바로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하느님이 법신불(진리)이라고?

 

진제스님과 신학자인 폴 니터와 대화하였다. 이는 KBS에서 방영된 바 있고 불교TV사이트에도 올려져 있다. 그런데 폴 니터는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사실이다. 가톨릭뉴스에 따르면 폴 니터가 동화사에서 강연한 내용을 싣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폴 니터(Paul F. Knitter, 71) 는 미국 유니언 신학교교수이다. 그는 사제 출신이지만 스스로 ‘불자-그리스도인’(Buddhist Christian)’라 하였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놀라운 내용이 소개 되어 있다.

 

 

이정배 교수는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소개하며, "유영모에게 견성성불과 고행은 하느님-예수-성령과 아무런 무리 없이 교차되는 개념으로 쓰였다. 우리는 예수라는 구속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만 생각하는데, 유영모는 예수의 그리스도됨은 제 뜻 버려 하느님 따라가는 데 있다고 했다"며 하느님 안에서 대화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에 미산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역시 "하느님이 법신불(진리)이라면, 예수는 구원을 발원하신 분이므로 화신불일 것"이라고 소개했다.

 

(다원주의 신학자 니터, 불교와 대화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1-01-06)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감신대 이정배교수가 유영모의 말을 빌어 견성성불이 기독교에서도 교차 되는 개념이라 한 것은 그렇다쳐도, 한국불교에서 대표적 학승으로 알려져 있는 미산스님이 하느님이 법신불이라고 말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산은 하나인데 다만 올라 가는 길이

 

진제스님이 신학자 폴 니터와 대담을 다룬 책은 발간되어 있다. 이렇게 진제스님이 외국 교회에서 주장자를 높이 들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을 강조 하였을 때 기독인들은 감격의 박수를 보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종교다원주의 관점에서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이자 신학자인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저는 다른 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하나고, 한분 하느님을 믿고, 궁극적 실재는 하나라고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산은 하나인데 다만 올라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 한다. 그래서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셋째, 위대한 종교 전통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은 공통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여럿이 아니라 ‘하나’로 여긴다. 형이상학적 일원론(metaphysical monism)이든 유일신 신앙(monotheism)이든 이들 종교전통들은 모두 잡다한 현상세계의 배후나 근저, 혹은 그 너머로 ‘하나’의 통일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있다.

 

비록 이 실재가 다양한 이름(, Brahman, 太極, 하느님, 空 혹은 法身)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실재를 달리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 반대의 가설, 즉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가설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불교의 공사상이 형이상학적 일원론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공이 일단 일체의 차별성과 분별을 넘어선 실재를 지칭하는 개념임은 확실하다.

 

궁극적 실재가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이고 인류도 하나라면, 인류가 추구하는 구원/해방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일 것이라는 가설은 거의 자명한 일처럼 보인다. 비록 등산 중에 바라보는 산정의 모습들이 아직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해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실재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길희성교수, 휴심정 2012-05-04)

 

 

길희성교수에 따르면 각 종교에서 부르는 명칭은 사실 궁극적 실재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도(), 브라흐마( Brahman), 태극(太極), 하느님, () 혹은 법신(法身) 도 같은 범주라 하였다. 신학자인 오강남교수는 불교평론에서 하느님과 참나는 같은 것이라 하였기 때문에 불성, 본래불, 본래면목 등 도 역시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들어 갈 것이다.

 

종교도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까?

 

석가도 몰랐다는 홀로밝은 동그라미(凝然一相圓)’, 선사들이 늘 화두참구 할 때 하는 말인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한 물건’, 그리고 혜민 스님이 말하는 깨달아야 한다고 하는 그 놈이라는 말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이름 대열에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와 같은 개념들이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념이다. 궁극적 실재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개념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종교는 같은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종교도 하나로 통합 될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진제스님이 말한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라는 화두에도 요한복음에 있는 말과 일치 한다면 사실상 하나를 놓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열반은 궁극적 실재 리스트에서 보이지 않을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궁극적 실재 리스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만일 열반에 대하여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참나, 본래불, 비로자나등과 같은 개념에 포함시킨다면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브라만교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 된 것이 불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브라만과 아뜨만을 부정한다. 이는 궁극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열반은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차별화 된다. 아마 대승과 기독교와 통합은 될 수 있어도 테라와다와는 절대 통합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희성 교수가 말한 궁극적 실재 리스트에 열반이 빠져 있는 것이다.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는 존재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비판하고 성립 되었다. 이는 초기경전에 그대로 나타난다. 초기경전에 바까브라흐마가 있는데 해제에 따르면 망상가형 하느님으로 설명되어 있다. 왜 망상가인가?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에 따르면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때에 하느님 바까에게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가 생겨났다. ‘이것은 항상하고 이것은 견고하고 이것은 영원하고 이것은 홀로 완전하고 이것은 불멸이고 이것은 참으로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으니 따라서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은 없다.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 전재성님역)

 

 

바까하느님(브라흐마)는 자기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영원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뭇삶들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바까에 대하여 대한 설명이 있다. 마라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데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 전재성님역)

 

 

이 구절을 보면 유일신교의 신관이 그대로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창조자라 불리우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묘사된 수식어가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창조주에 대한 설명과 거의 똑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그리스도, 브라흐마, 비로자나, 참나 등을 같은 반열에 올려 놓았는지 모른다.

 

조사스님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수행의 목적이다. 바로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승에서 추구하는 목적은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다르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불교학자 체르바츠키 (Stcherbatsky) 박사는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고 주장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마하야나는 불교와 전혀 다른 종교라 볼 수 있다. 이는 강병균칼럼에서도 알 수있다. 강병균 교수글에 따르면  고통을 극복하러 이 세상에 태어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 안 되기는, ‘죽으려고 태어난다는 말이나 비슷하다. 이게 본분사(本分事)란 말인가?”라며 부처님의 사성제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또한 “‘존재의 목적이 소멸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라 하여 열반에 대하여 소멸 개념으로 보았다. 이 뿐만 아니다. 강병균교수는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 하여 부처님이 가르침이 불완전하고 미완성 된 것으로 간주 하였다. 이런 비판이 바로 마하야나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생겨난 선종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하야나와 조사불교에 추구하는 존재의 근원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았을 때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츠키가 말한대로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라고 말한 것에 일리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한국의 선종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패러디 하여 말할 수 있다.“조사스님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라고.

 

 

 

2014-07-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