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극복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15. 18:38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극복

 

 

 

팟캐스트방송이 있는데

 

팟캐스트방송이 있다. 마치 라디오처럼 방송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말한다. 그래서 라디오 듣듯이 다운 받아 소리를 듣는다. 그런 팟캐스트 방송으로 유명한 이가 김어준이다.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김어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이다.그러나 항상 철부지처럼 막말을 하며 되는 대로 내뱉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최근 김어준의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다. 이름하여 김어준평전이다.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 되어 있어서 마치 라디오 시대 연속극을 듣는 것 같다. 그 중에 김어준이 기독교에 등을 돌린 이유편이 있다. 이 편에서 김어준의 강한 개성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장례식장의 일이다.

 

김어준이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유가족은 울었다. 그러나 목사는 우는 사람들에게 아니 축복받아 천국가는데 왜 울어? 안그래?”라 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김어준은 설교자 있는 앞으로 나가서 목사님, 잠깐만 귓속말로 드릴 말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사람죽었는데 기뻐하라고? XXX!”

 

 

사람이 죽어 이별하게 되면 슬픈것이다. 그럼에도 목사는 그걸 자꾸 부정하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로부터 5분 동안 목사는 횡설수설하다가 설교를 끝냈다고 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인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좋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정도로 열광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은 마치 벌레보듯 한다. 사람들은 왜 종교인을 싫어 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만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인 하면 가장 먼저 위선자라는 말이 떠 오른다. 이런 범주에 앞서 언급된 목사 뿐만 아니라 스님이나 신부도 될 수 있다.

종교인들이 위선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리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맹신을 요구하는 종교일수록 모순 투성이다. 그래서 종교는 기본적으로 모순과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타락하였을 때 늘 하는 말이 처음 처럼일 것이다.

 

사상의 혼란기에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도 종교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특히 지배종교인 브라만교가 그랬다. 이런 타락상은 숫따니빠따에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을 들 수 있다. 이 경에서 이렇게 그들은 재물을 얻어 축적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욕망에 빠져들자, 그들의 갈애는 더욱 더 늘어만 갔습니다.(stn306)”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들이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아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다. 이런 바라문의 타락상이 극에 달하였을 때 자정능력은 없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이 출현한 것이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사상의 혼란기었다. 기존 바라문교와 이에 반발하여 육사외도의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고민은 맛지마니까에서도 보인다. 어느 날 부처님이 꼬살라국의 살라마을을 유행하다가 마을의 장자들로부터 사상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장자들은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M60)”라 하였다. 육사외도의 여러 사상이 휩쓸고 갔지만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사상가도 부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 하였다.

 

부처님가르침은 어느 사상가도 논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부처님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부처님당시 브라만교를 비롯하여 육사외도의 사상을 논파 하였다. 논파 하였다는 것은 논리로 부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외도의 사상을 어떻게 부수었을까?

 

깟짜야나곳따경(S12.15)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논파할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으로 외도의 사상을 부수어버렸다. 그런 외도논파에 대한 대표적인 경이 깟짜야나곳따경(S12.15)이다.

 

빠알리니까야에는 수 많은 경이 있다. 부처님의 법문에 대하여 8 4천 법문이라 하니 수 만개의 경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경이 있다. 그것이 바로 깟짜야나곳따경이다. 그렇다면 왜 깟짜야나곳따경이 중요한가? 그것은 외도사상을 논파하는 문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84천 법문 중에 매우 중요한 경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이 있음으로 해서 외도사상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깟짜야나인가, 깟짜나인가?

 

깟짜야나곳따경 번역비교를 해 보았다. 번역비교하면서 가장 첫 번째로 차이가 나는 것이 경의 제목이다. 성전협에서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이라 하였으나, 초불연에서는 깟짜나곳따 경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경의 제목이 다를까?

 

성전협 각주에 따르면 단순히 깟짜야나란 성씨를 가진 자란 뜻이다.(61번 각주)”라고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주석에서 깟짜야나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다고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깟짜나곳따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름 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를 달았다.

 

 

깟짜나곳따는 Ee: 깟짜야나곳따 대신에 Be, Se: 깟짜나곳따로 읽은 것이다.

 

(초불연 98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깟짜나곳따라 한 것은 Be Se에 따른 것이라 한다. 여기서 Be는 미얀마본을 뜻하고, Se는 스리랑카본이다. 그런데 깟짜야나곳따라는 말은 Ee라 하였는데 이는 PTS본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성전협의 번역서는 PTS 본을 따라 깟짜야나곳따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미얀마나 스리랑카본을 따라 깟짜나곳따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빅쿠보디의 CDB에서는 ‘Kaccānagotta(깟짜나곳따)’라 되어 있다. 초불연과 같은 이름임을 알 수 있다.

 

atthinatthi에 대하여

 

이처럼 두 번역서는 경의 이름부터 다르다. 그런데 번역내용 역시 다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는 경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라고 볼 수 있는 atthinatthi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번역에 있어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표로 만들어 보았다.

 

 

  

       

    

빠알리어

Dvayanissito kho'ya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atthita, natthita

전재성님역

깟짜야나여,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존재[], 비존재[]

각묵스님역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있다는 관념, 없다는 관념

빅쿠보디역

This world, Kaccana, for the most part depends upon a duality-

upon the notion of existence and the notion of nonexistence.

the notion of existence,

the notion of nonexistence

 

 

 

 

 

 

Meditation

 

 

호칭을 보면 성전협이나 초불연 모두 깟짜야나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의 경의 제목은 깟짜나곳따 경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번역서는 경의 제목과 본문의 내용이 맞지 않는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각주에서는 분명히 아무튼 깟짜나곳따존자는 본경에만 나타나고 있다(98번 각주)”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본문에서는 깟짜야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편집상의 실수 아닐까? 빅쿠보디는 Kaccana라 하여 깟짜나라 하였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경에서 키워드는 Atthinatthi이다. 이와 관련된 말이 ‘atthitañceva  natthitañca’이다. 이에 대하여 두 번역서의 번역이 아주 다르다. 전재성님은 존재[] 또는 비존재[]’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라 하였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많이 차이 나는 것일까?

 

먼저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tthita : 한역은 ()’인데 유는 존재의 영원성을 뜻한다. Krs.II.13에서 Mrs. Rhys David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대표하는 Kv.85에 등장하는 설일체유부는 이 경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언급했는데, 설일체유부의 경전으로 알려진 북전아함경에는 이 해당하는 경전(잡아함 12, 대정2.85c)이 있다. 또 여기서 존재(: atthita)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소멸 될 수 없는 파르메니데스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고 리스 데이비스 부인은 쓰고 있다. 여기서의 존재에 대한 견해란 존재의 영원성에 바탕을 둔 철학적 이론, 즉 영원주의[常見: sasataditthi]를 뜻한다.

 

Natthita : 한역에서는 ()’로 번역하고 있다. 무는 존재의 불연속적인 허무성을 뜻한다. 비존재()에 대한 견해란 우리에게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斷見: uccchedaditthi]를 말한다.

 

(성전협 63-64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근거함 없이 전재성님의 견해이다. Atthita에 대하여 존재의 영원성이라 하였고, Natthita에 대하여 존재의 불연속적인 허무성이라 하였다. 그래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견해를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경전상에서 유와 무를 뜻하는 말인 AtthitaNatthita는 부처님 당시 유행하였던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초불연에서는 AtthitaNatthita에 대하여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라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역자가 있다는 관념없다는 관념으로 풀어서 옮긴 원어는 각각 AtthitaNatthita이다. 이것은 있다와 없다를 뜻하는 동사 AtthiNatthi에다 추상명사 어미 ‘-ta’를 붙여서 만든 추상명사이다. 단순하게 취급하여 이 두 단어를 그냥 있음없음으로 옮기면 본서 제3꽃 경(S22.94)’에서 세존이 인정하시는 세상에 현자들이 있다(Atthi)’고 동의하는 것과 없다(Natthi)고 동의 하는 것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초불연 99번 각주, 각묵스님역)

 

 

초불연 각주를 보면 은근하게 성전협의 번역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AtthiAtthita가 다른 것임에도 성전협 번역에서는 Atthita에 대하여 단지 있음을 뜻하는 로 번역하였음을 뜻한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주석을 근거로 하여 Atthita에 대하여 있다는 관념으로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각주에서 주석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Atthita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있다는 견해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있다는 견해없다는 견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있다는 관념없다는 관념은 주석의 견해를 중시한 주석적 번역이라 본다.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올라 온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직역이 아니라 과도한 의역이 되고 이는 결국 주석적 번역이 된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복주석의 내용까지 살펴서 있다는 견해없다는 견해로 번역하였음을 밝혔다. 그런데 또 한가지 밝힌 것은 빅쿠보디의 견해를 참고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보디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라 하였다. 빅쿠보디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빅쿠보디의 각주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무어라 말하였을까?

 

 

Dvayanissito kho'ya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Spk: "For the most part" (yebhuyyena) means: for the great multitude, with the exception of the noble individuals (yebhuyyena). The notion of existence (atthita) is eternalism (sassata); the notion of nonexistence (natthita) is annihilationism (uccheda).

 

Spk-pt: The notion of existence is eternalism because it maintains that the entire world (of personal existence) exists forever. The notion of nonexistence is annihilationism because it maintains that the entire world does not exist (forever) but is cut off.

 

In view of these explanations it would be misleading to translate the two terms, atthita and natthita, simply as "existence" and "nonexistence" and then to maintain (as is sometimes done) that the Buddha rejects all ontological notions as inherently invalid.

 

The Buddha's utterances at 22:94, for example, show that he did not hesitate to make pronouncements with a clear ontological import when they were called for. In the present passage atthita and natthita are abstract nouns formed from the verbs atthi and natthi. It is thus the metaphysical assumptions implicit in such abstractions that are at fault, not the ascriptions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 themselves.

 

I have tried to convey this sense of metaphysical abstraction, conveyed in Pali by the terminal -ta, by rendering the two terms "the notion of existence" and "the notion of nonexistence," respectively. on the two extremes rejected by the Buddha, see 12:48, and for the Buddha's teaching on the origin and passing away of the world, 12:44.

 

Unfortunately, atthita and bhava both had to be rendered by "existence," which obscures the fact that in Pali they are derived from different roots. While atthita is the notion of existence in the abstract, bhava is concrete individual existence in one or another of the three realms.

 

For the sake of marking the difference, bhava might have been rendered by

"being" (as was done in MLDB), but this English word, I feel, is too broad (suggestive of "Being," the absolute object of philosophcal speculation) and does not sufficiently convey the sense of concreteness intrinsic to bhava.

 

(CDB 29번 각주, 빅쿠보디)

 

 

문단은 편의상 구분해 놓은 것이다.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AtthitaNatthita에 대하여 "the notion of existence" "the notion of nonexistence"라 하였다. 이를 우리말로 하면 존재의 개념비존재의 개념이 될 것이다.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빅쿠보디의 제안을 따른 다고 하였으므로 이와 유사하게 있다는 관념없다는 관념으로 번역하였다. 사실상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면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짤막한 경이다. 그럼에도 이 경의 가치와 중요성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핵심사상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이다. 특히 이 경에서는 부처님의 유무중도사상이 담겨 있다. 이는 ‘Atthita’‘Natthita’라는 양 극단에 대한 중도이다. ‘Atthita’는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고, ‘Natthita’는 허무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는 양극단을 배격한다. 어떻게 배격하는가? 다음과 같은 짤막한 문구가 사실상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 하였다. 번역어를 비교표로 만들어 보았다.

 

 

  

      

    

빠알리어

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samudaya,

Lokanirodha

전재성님역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세상의 발생,

세상의 소멸

각묵스님역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어남,

세상의 소멸

빅쿠보디역

But for one who sees the origi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with correct wisdom, there is no notion of nonexistence in regard to the world.

 

And for one who sees the cessatio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with correct wisdom, there is no notion of existence in

regard to the world.

the origin of the world,

the cessation of the world

 

 

 

이 짤막한 문구로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논파되었다. 부처님 당시 영원주의를 대표하는 브라만교와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외도 사상이 모순과 위선과 거짓임을 밝혀 낸 것이다. 어떻게 밝혀 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이는 위 짤막한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영원주의가 논파된 문장은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이다. 그리고 허무주의가 논파된 문장은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이다. 왜 그런가? 이는 연기법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전협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허무주의 논파

 

먼저 허무주의 논파이다.

 

 

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Srp.II.33에 따르면, 여기서 세계의 발생은 순관적 조건형태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지혜(sammappaññā) , , 올바른 통찰의 지혜(觀智, vipassanapaññā)와 올바른 길의 지혜(maggapaññā)로써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업(kamma),무명(avijja), 갈애(tanha) 때문에 끊임 없이 생겨나는 사실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게 더 이상 내생이 없다는 허무주의(단멸론)는 사라진다.

 

(성전협 65번 각주, 전재성님)

 

 

영원주의 논파

 

다음으로 영원주의 논파이다.

 

 

Lokanirodh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Srp.II.33에 따르면, 여기서 세계의 소멸은 역관적 조건형태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지혜(sammappaññā) , , 올바른 통찰의 지혜(觀智, vipassanapaññā)와 올바른 길의 지혜(maggapaññā)로써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상주론)는 사라진다.

 

(성전협 66번 각주, 전재성님)

 

 

초불연의 각주에서는

 

이번에는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의 일어남이란 형성된 세상의 생겨남을 뜻한다. ‘바른 통찰지란 위빳사나와 함께 하는 도의 통찰지를 뜻한다.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성된 세상에 대해서 법들이 생겨나는 것을 통찰지로 보게 되면, 없다는 단견이 일어나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의 소멸은 형성된 것들의 부서짐이다.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성된 세상에 대해서 법들이 부서지는 것을 통찰지로 보게 되면, 있다는 상견이 일어나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초불연 100번 각주, 각묵스님)

 

 

두 번역서의 각주를 보았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논파를 설명하였지만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는 연기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미안하지만 다음 생에서 계속 됩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허무주의가 논파 되는 것에 대하여 단견을 뿌리 뽑기 위해 순서대로 연기를 밝히셨다. 왜냐하면 세상을 조건으로 세상의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17,10)”라 하였다. 허무주의자들이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신구의삼업으로 지은 행위가 남아 있는 한 그 과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연기는 회전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미안하지만 다음 생에서 계속 됩니다라가 될 것이다. 

 

빠알리어로 연기는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이다. 이를 연기(緣起)라 번역한다. 빠띳짜가 조건을 뜻하기 때문에 연()이라 하였고, 사뭅빠다가 뒤이어 일어나기 때문에 기()라 한 것이다. 이처럼 연기는 조건발생한다. 지금 지은 행위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살인을 한 자가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인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다음생이 계속 되는 것이다. 이는 영원주의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천국이면 영원한 천국?

 

유일신교에서는 천국을 이야기 한다.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것도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이는 허구이다. 왜 허구인가? 예를 들어 천국에 태어난다고 하였을 때 한번 천국이면 영원한 천국일까? 죽어서 천국에 태어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연기법에 따르면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천국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수명과 공덕이 다하면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단어로 설명하면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Purimena sassatādīna, mabhāvo pacchimena ca padena;

Ucchedādivighāto, dvayena paridīpito ñāyo.

 

(청정도론 원문)

 

 

The first component will deny the false view of eternity And so on, and the second will prevent The nihilistic type of view and others like it, while the two Together show the true way that is meant.

 

(영역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앞의 단어(, )로 영원함(常見)등이 없음을

뒤의 단어(, )로 단멸(斷見)등의 논파를

두 단어를 합쳐서 바른 방법(āya)  밝혔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1, 대림스님역)

 

 

()으로 영원주의가 논파되고, ()로 허무주의가 논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단어를 합하면 중도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이 청정도론에 실려 있다.

 

빠띳짜로 영원주의 논파

 

먼저 앞단어인 빠띳짜에 의하여 영원주의가 논파 되는 것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The first: the word “dependent” (paþicca) indicates the combination of the conditions, [522] since states in the process of occurring exist in dependence on the combining of their conditions; and it shows that they are not eternal, etc., thus denying the various doctrines of eternalism, no-cause, fictitious-cause, and power-wielder.3 What purpose indeed would the combining of conditions serve, if things were eternal, or if they occurred without cause, and so on?

 

(영역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앞의 단어로 : 빠띳짜라는 단어는 조건의 화합을 가리킨다. 생기는 법들은 조건의 화합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그 빠띳짜라는 단어는 영원하다거나, 원인없이 [생긴다거나], [신이나 창조주 등] 거짓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거나], 지배자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학설 등으로 분류되는 영원함 등이 없음을 보여준다. 영원하다거나 원인 없이 생긴다는 [견해] 등에게 이 조건의 화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2, 대림스님역)

 

 

여기서 앞의 단어는 ()’을 뜻한다. 조건을 뜻하는 빠띳짜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이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는 철저하게 조건발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법은 기본적으로 원인(hetu)’조건(paticca)’결과(phala)’로 이루어진다. 이를 인연과라 한다.

 

그런데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천국이나 원인 없이 생겼다는 창조주는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원인이나 조건 없이 발생한다는 것은 거짓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연기의 순관에서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기역관에서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연기법에서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若無此卽滅彼)”와 같은 구조이다. 따라서 죽어서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산다거나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하는다는 자재신은 연기법에 따르면 모두 모순이고 위선이고 거짓이다. 이처럼 뒤이어 사라지지는 법을 관찰함으로써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가 논파 되는 것이다.

 

사뭅빠다로 허무주의 논파

 

 

다음으로 뒤의 단어인 사뭅빠다로 허무주의 논파에 대한 것이다.

 

 

The second: the word “origination” (samuppáda) indicates the arising of the states, since these occur when their conditions combine, and it shows how to prevent annihilationism, etc., thus preventing the various doctrines of annihilation [of a soul], nihilism, [“there is no use in giving,” etc.,] and moral-inefficacy-ofaction, [“there is no other world,” etc.]; for when states [are seen to] arise again and again, each conditioned by its predecessor, how can the doctrines of annihilationism, nihilism, and moral-inefficacy-of-action be maintained?

 

(영역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뒤의 단어로 : 사뭅빠다라는 단어는 법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조건이 화합할 때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이라거나 허무하다거나 지금이 없다는 견해가 논파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뭅빠다라는 단어는 단멸이라는 등이 논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조건에 따라 계속해서 법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단멸하고, 허무하고 지음이 없는 견해가 발붙일 수 있겠는가?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3, 대림스님역)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에서 사뭅빠다는 함께 발생하여 일어남을 뜻한다. 한자어로 표기 하면 일어날 ()’라 한다. 그런데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연기가 회전함을 말한다. 이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여 일어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단멸이란 있을 수 없다.

 

단멸(uccheda)은 소멸(niroda)이 아니라 멸절(cut off)’을 뜻하기 때문에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허무주의(nihilationism)를 뜻한다. 그런데 뒤이어 일어나는 법이 있다면 단멸론은 거짓이 된다.

 

예를 들어 연기순관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라 되어 있는데, 이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남을 뜻한다. 이는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Imassuppādā ida uppajjati, 若生此卽生彼)”라는 연기법에 따른다. 따라서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어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짓지 않는 한 그 어느 존재도 단멸 할 수 없다.

 

자살하는 자가 죽으면 끝이라 하여 세상을 등졌지만 그 자살한 과보로 인하여 다음생을 시작 되는 것도 조건에 따라 뒤이어 일어나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 견해는 연기법으로 논파 되어 되어 결국 모순과 위선과 거짓이 된다. 

 

부처님의 중도사상

 

청정도론에서는 연기라는 말에 대하여 뜻 풀이로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논파 되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두 단어를 합쳐서 설명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어떤 내용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잘 담겨 있다.

 

 

The two together: since any given states are produced without interrupting

the [cause-fruit] continuity of any given combination of conditions, the whole expression “dependent origination” (paþicca-samuppáda) represents the middle way, which rejects the doctrines, “He who acts is he who reaps” and “One acts while another reaps” (S II 20), and which is the proper way described thus, “Not insisting on local language and not overriding normal usage” (M III 234).4

 

(영역 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두 단어를 [합쳐서] : 각 조건이 화합하여 상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전체 단어인 빠띳짜사뭅빠다는 중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 그가 짓고 제 3자가 경험한다(S..20)”라는 견해를 버린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언어를 고집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넘어서지 않는다.(M..234) 이와 같이 전체 단어인 빠띳짜사뭅빠다는 바른 방법을 보여준다. 이것이 빠띳짜사뭅빠다라는 단어의 뜻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3, 대림스님역)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는 조건발생함을 뜻한다. 이를 길게 설명하면 조건이 화합하여 상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각각의 법들이 생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라는 말 자체는 중도를 뜻한다고 하였다. 이는 깟짜야나곳따경에서도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라는 문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연기는 양극단을 떠나 있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중간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절대유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무는 연기법에 따르면 결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유무양극단을 떠난 중도가 된다. 이런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라 연기법에 따른 중도이다. 그래서 깟짜야나곳따경에서 부처님이 중도임을 선언한 다음에 곧바로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말씀 하시고 있다.

 

뜻풀이를 표로 요약하면

 

빠띳짜사뭅빠다에 대하여 뜻풀이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논파되고,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설명 되는 것을 보았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빠띳짜사뭅빠다(緣起) 뜻풀이

   

      단어의미     

   

빠띳짜

(paticca, )

생기는 법들은 조건의 화합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빠띳짜()로 영원주의를 논파함

 

-영원하다.

-원인없이 생긴다.

-창조되었다.

-지배자에 의해 존재한다.

사뭅빠다

(samuppada, )

조건이 화합할 때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뭅빠다()로 허무주의를 논파함

 

-단멸한다.

-허무하다.

-지음이 없다

-도덕적 행위의 과보가 없다

빠띳짜사뭅빠다

(Paticcasamuppada,

緣起)

 

각 조건이 화합하여 상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빠띳짜사뭅빠다는 중도를 가리킴

 

-절대유와 절대무는 성립하지 않음

-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설명됨

 

 

 

일곱가지 중도가 있는데

 

깟짜야나곳따경은 짤막한 경임에도 중도사상을 거론 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는 유무중도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에는 유무중도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가지 중도가 있다. 이를 일곱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십사부 중도라 한다.

 

일곱가지 중도는 유뮤중도, 자타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 거래중도, 생멸중도, 고락중도를 말한다. 이 중 유무중도에 대한 것이 깟짜야나곳따경이다. 그렇다면 유무중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성철스님의 중도론

 

성철스님의 경우 중도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백일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라 하였고, 또 중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고 하였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였다.  백일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 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백일법문, 4 원교(圓敎)의 중도설, 성철스님)

 

 

이런 논리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중도에 대하여 실천적 특성을 고려 하지 않고 대승불교적시각에서 본 것이다. 중도와 동의어인 팔정도 역시 목적론임을 말하고 결코 방법론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글에서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에서 중도를 설명할 때 언급한 경이 깟짜야나곳따경이다. 성철스님은 단지 목적론적 중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경을 근거로 들었지만 유무중도가 어떻게 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 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바로 이것이 중도를 목적론으로 볼 것인가 실천론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라 본다.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중도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말을 보면 연기법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가르침을 순관과 역관으로 설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원인과 조건과 발생이라는 연기법으로 세상을 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순이고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말과 같다.

 

해제글에 따르면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무(natthita)는 성립하지 않고,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유(atthita) 의 세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발생과 소멸이야말로 조건적 발생이라고 하는 연기의 본질이라고 할 때, 유 또는 무라고 하는 개념은 관찰 할 수 없는 것으로 극단적인 견해이며 형이상학적 가정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우파니샤드적 범아일여의 영원주의와 사후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로 귀속시키는 단멸론적 허무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같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연기법으로 부수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짤막한 문구이다.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2014-07-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