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노라”행위의 두려움 윤회의 두려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 지금 안은한 상태에 있더라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그것은 나와 가족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자들은 열심히 기도한다. 자신과 가족에 대한 건강, 학업, 사업 등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막연한 불안은 결국 미래에 대한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를 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반드시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변수가 많기 때문에 어떤 변수로 인하여 미래의 운명이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을 너머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네 가지 두려움이 있는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Cattārimāni bhikkhave bhayāni. Katamāni cattāri? Jātibhayaṃ jarābhayaṃ vyādhibhayaṃ maraṇabhayaṃ.
Imāni kho bhikkhave cattāri bhayān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태어남에 대한 두려움, 늙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Bhayasutta-두려움의 경1, 앙굿따라니까야 A4.119,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네 가지 두려움은 ‘생노병사’에 대한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임에도 사람들은 애써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신 사람들은 자신과 직접관련이 있는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불에 대한 두려움, 물에 대한 두려움, 왕에 대한 두려움, 도둑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A4.120)”라 하였다.
살다 보면 불이 나서 집이 타버릴 수도 있고, 도둑이 들어 재산을 훔쳐 갈 수도 있다. 이런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소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유하면 미래가 보장 될 것 같아 악착같이 모으지만, 막상 이루어 놓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를 지켜 내기 위하여 걱정한다. 그래서 애써 모아 놓은 것이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하고 걱정하고 , 또한편으로는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서 가져 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또 불법과 탈법으로 이루어진 재산이라면 정권이 바뀌어 모두 빼앗길까봐 걱정한다. 이처럼 보통사람들은 소유한 것에 대하여 지켜내기 위하여 걱정한다. 하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자나 가난한자에게나 예외 없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생노병사에 대한 것이다.
왜 태어남도 두려움이라 하였을까?
생노병사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아무리 미래가 보장되는 연금생활자가 되었어도 늙어 병들어 죽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애써 이런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면서 죽는 그 순간까지 꽉 움켜 쥐고 안락하게 살고자 한다. 그것도 영원히 지금 이대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바램은 생노병사라는 근본적인 두려움에서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만다.
부처님은 생노병사가 두려움이라 하였다. 그런데 생노병사 중에서 태어남도 두려움이라 하였다. 탄생은 일반적으로 축복으로 알고 있는데 왜 태어남도 두려움이라 하였을까?
태어남이 두려움이라는 말은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말과 같다. 청정도론에따르면 태어나는 것 자체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일단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 자체는 생노병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남은 괴로움임과 동시에 두려움이라 볼 수 있다.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노라”
두려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Bhavevāhaṃ bhayaṃ disvā
bhavañca vibhavesinaṃ,
Bhavaṃ nābhivadiṃ kiñci
nandiñca na upādiyinti.
[세존]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의 경(M49)’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부처님이 바까하느님(Baka Brahma)와의 대화에서 말귀를 못알아 듣는 바까하느님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창조주 행세를 하며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상락아’라는 삿된관념을 가진 바까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은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았다고 하였다.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존재 하는 것은 반드시 무상하게 소멸 되어 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원한 자아가 있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결국 소멸되고 말것이기 때문에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이라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결국 끊임 없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이다.
존재론자의 두려움은?
이 게송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이 시는 부처님이 사라진 것에 대한 가시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존재에 대한 환희를 제거하고, 부처님은 존재의 최상의 화현이자 세계긍정인 바까(Baka)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바까는 갈애에 묶여 있어,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넘어 그것을 포괄하는 부처님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M49 863번 각주)”라고 설명 되어 있다.
각주에 따르면 바까는 ‘존재론자’이다. 존재론자의 특징은 ‘자아와 세상을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단멸로 보고 두려워 한다. 부처님과 바까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신통대결에서 바까가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사라지는 신통을 보여 주었을 때 영원히 단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론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각주에서는 존재론과 함께 비존재론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 비존재론은 다름 아닌 단멸을 뜻한다. ‘몸이 파괴되면 정신역시 파괴 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보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한다.
죽고 싶은 것도 갈애이다
존재론과 비존재론은 극단적 견해이다. 이는 ‘절대로 존재한다’는 ‘절대유(絶對有)’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무(絶對無)’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극단은 연기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조건에 따라 법이 뒤이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단멸론적 절대무는 성립하지 않고, 조건에 따라 뒤이어 법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영원론적 절대유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순되고 명백히 거짓임에도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초전법륜경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집성제)’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ṃ: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카사무다야 아리야삿짱: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 까마딴하 바와딴하 위바와딴하.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여기서 존재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는 영원주의적 견해를 말하고, 비존재는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존재와 비존재에서 공통적 사항이 있다. 그것은 갈애이다. 그래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도 갈애이고, 죽어서 단멸하고 싶은 것도 갈애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가 있다고 하였다.
누가 갈애하는가?
누구나 영원히 살고자 한다. 지금 이 행복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라고, 지금 이 젊음과 청춘이 늙지 말고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는 바램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그렇다면 이런 바램과 갈애를 일으키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아’이다. 그래서 내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내가 영원히 젊기를 바란다. 이처럼 철저하게 ‘나(我)’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영원주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너무나 괴로워서 죽고 싶다고 하였을 때 누구 죽고 싶은 것일 것일까? 그것은 내가 죽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죽으면 단멸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과 단멸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를 기반으로 하는 갈애에 대하여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 설명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바까하느님이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영원히 사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리고 사라지는 신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도 ‘진짜 사라져 버리면 어쪄나?’하는 존재의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이는 철저하게 자아를 바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정반대로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bhavañca vibhavesinaṃ, M49)”라 하였다. 자아관념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는 안심스러운 것이지만, 반대로 무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가 죽으면 또 다시 윤회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태어남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같다.
태어남에 대하여
부처님은 ‘태어남에 대한 두려움(Jātibhayaṃ)’을 말씀 하셨다. 그러나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을 받아 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기가 탄생하였을 때 이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 보는 사람은 매우 드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 났을 때 이를 축복이라 보고 축하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탄생에 대하여 기뻐하고 축하한다.
아기가 태어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체로 기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이 태어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육사에서 태어난 소나 돼지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도 기뻐해야 할까? 농장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기뻐 해야 할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대부분 ‘무덤덤’하게 받아 들인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에게 살코기를 제공하는 역할로서 끝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 외 생명이 탄생하는 것에 대하여 무감각하다고 볼 수 있다.
창고문을 열자 부화한 오리들이
최근 뉴스에 따르면 경찰의 압수물 보관창고에서 오리가 부화하였다는 뉴스를 접하였다. 사연은 이렇다. 경찰은 지난 2일 축산물위생관리법위반 혐의로 김 모 씨를 입건했는데 이때 ‘반부화 오리알’을 압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폐기처분하기 위하여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몇 일 후 창고문을 열자 부화한 오리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났을까? 이에 대하여 동남아국가들의 식습관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하여 뉴스에서는 베트남 결혼이주민의 말을 빌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베트남 전통음식이라서 보신탕처럼 영양도 많고 튀김이나 삶거나 탕을 만들어서 즐겁게 먹습니다.”
(압수물 오리알 부화...오리 새끼 26마리 탄생, YTN 2014-07-15)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에서는 유정란 오리알을 먹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보통 28일 정도 되면 부화하는데 약 보름 정도 지나면 삶아 먹는 다는 것이다. 이를 ‘쩡빗롱’이라 한다. 부화하기 전에 오리로서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이 쩡빗롱을 보신용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이처럼 보신용으로 사용되는 오리알이 어떤 연유로 국내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를 경찰이 적발하여 창고에 보관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폐기처분하기 위하여 창고문을 여는 순간 오리새끼들이 꽥꽥 거리며 이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에 황당하였다는 것이다.
뉴스에 따르면 20마리가 넘는 오리새끼는 살처분 대신 공매처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보관하고 있는 나머지 300개의 오리알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되리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압수한 오리알에서 태어난 오리새끼는 해쳐서는 안되는 생명이다. 그래서 살처분 대신 공매로 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에 의하여 인간의 식탁에 올라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렵게 태어났지만 결국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운명은 사람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halānamiva pakka naṃ
pāto patanato bhayaṃ,
Evaṃ jātānamaccānaṃ
niccaṃ maraṇato bhayaṃ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tn576)
‘화살의 경(Sallasutta, Sn3.8)’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말씀 하시고 있다. 여기서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외면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원초적으로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애써 이를 외면하는 듯하다. 어떻게 외면 하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라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보는 것처럼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 이렇게 세 가지 갈애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갈애에 묶여 있는 한 죽음에 대하여 애써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자들은 누구나 죽는 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늘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알 고 있다. 왜냐하면 숫따니빠따에서와 같이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stn574)”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하여 애써 생각하지 않는 것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즐기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가 있다고 하였다.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는 제자들은 항상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계행을 갖추고, 의무계율을 실천하고, 의무계율을 통한 제어를 수호하고,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여,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운다. (A4.22)
이 문장은 초기경전에서 정형화 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말이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라는 말이다. 이는 ‘행위(kamma)’에 대한 두려움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재생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본다’라고 하였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이다.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국 윤회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표현 되어 있다.
Saṃsāre bhayaṃ ikkhatīti bhikkhu.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He sees fear (bhayaí ikkhati) in the round of rebirths, thus he
is a bhikkhu.
(영역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
(청정도론,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서 “Saṃsāre bhayaṃ ikkhatīti bhikkhu”이 말은 매우 유명하다. 그것은 빅쿠에 대하여 정의 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짤막한 한구절에 지나지 않지만 왜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이라 볼 수 있다.
5세기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저자이다. 그는 빅쿠에 대하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빅쿠”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빅쿠 냐나몰리는 영역에서 “He sees fear (bhayaí ikkhati) in the round of rebirths, thus he is a bhikkhu”라 하였다. 이는 “그는 재생의 굴레에 있어서 두려움을 본다. 그래서 그는 빅쿠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the round of rebirths’는 빠알리어 ‘삼사라(Saṃsāra)’를 뜻한다. 삼사라는 일반적으로 윤회라고 번역된다.
누가 빅쿠인가?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에 대하여 빅쿠라 하였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지 못하는 자는 빅쿠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머리를 깍고 출가한 자만 모두 빅쿠라 볼 수 있을까?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빅쿠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모두 빅쿠라 볼 수 있다.
업을 지으면 반드시 재생한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빅쿠라 하였다. 그런데 윤회는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를 말한다. 행위는 반드시 미래의 결과로 나타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윤회의 두려움은 사실상 행위의 두려움이 된다. 그런 행위에 대하여 영어로는 빠알리어로 ‘깜마(kamma)’라 한다. 이를 영어로 ‘액션(action)’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업(業)’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의 두려움은 곧 ‘업의 두려움’이 된다. 업을 지으면 반드시 재생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존재의 두려움은 태어남의 두려움이고, 죽음의 두려움이고, 결국 이는 윤회의 두려움이 된다. 이렇게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면 자연스럽게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게 된다.
한 순간도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는 이유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에게 있어서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내일 죽음이 올 수도 있고 바로 이 순간에 죽음이 덮칠 수도 있다.
죽음이 한 호흡에 있는 것처럼 죽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한 순간도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한 순간도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까?
악하고 불전전한 마음을 가졌을 때 갑자기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끔찍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것이다. 예를 들어 격분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순간 ‘아수라’ 문이 열려 있을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성내는 자는 그 과보로서 아수라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 살생 등 잔인한 마음을 내었다면 어떻게 될까? 지옥문이 열려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행위에 적합한 세계가 전개 된다.
왜 축생의 종류는 다양할까?
축생들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그것은 우치와 탐욕의 결과라 본다. 한평생 흐리멍덩하니 어리석게 살았거나 오로지 먹는 것 싸는 것에만 올인하여 욕심만 부리고 살았다면 축생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런 축생의 다양성에 대하여 부처님은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축생계의 생물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생물도 보지 못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 축생계의 생물들조차도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진 것이다.
(가죽끈에 묶임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100, 전재성님역)
여기서 축생들은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유정물이라 보면 된다. 이런 유정물은 매우 다양하다. 아직까지 모르는 종도 매우 많다. 이를 우주까지 확대한다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축생들의 특징은 대량으로 태어나서 대량으로 소멸되기도 한다. 그래서 태어남이라는 말은 축생들에게나 적합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축생들이 모두 마음에 의하여 다양해진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존재는 마음의 투영물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 따라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많아 진 것은 모두 마음의 산물이라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은 마음의 다양성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유행화의 예를 들면서 “수행승들이여, ‘유행화’라는 그림의 그 다양성은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은 그 걸작보다도 다양한 것이다.(S22.100)”이라고 말씀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다양한 동물이 생겨난 것도 마음의 투영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바탕에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서 재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의 두려움은 행위(kamma)의 두려움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머리가 칠흑처럼 검은 나이에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고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라면 빅쿠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에 대하여 출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이가 많고 적음이 있을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머리가 칠흑처럼 검은 나이에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ṇā
Etaṃ bhayaṃ maraṇe pekkhamāno
lokāmisaṃ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3)
Accenti kālā tarayanti rattiyo
vayoguṇā anupubbaṃ jahanti,
Etaṃ bhayaṃ maraṇe pekkhamāno
lokāmisaṃ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4)
2014-07-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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