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신의 뜻 당신의 뜻? 존우화작설과 자유의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30. 15:40

 

신의 뜻 당신의 뜻? 존우화작설과 자유의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결국 모든 것이 원위치로 돌아 갔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기독교적 신앙으로 강변하던 문창극국무총리후보자가 낙마 함에 따라 그 동안 마치 좀비처럼 지내던 전총리를 다시 총리로 재임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문창극후보자의 하나님의 뜻 운운발언은 우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불교인을 포함하여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한반발을 일으킴에 따라 결국 낙마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먹혀 들어 가는 것 같다. 보수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여기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단지 프로그램된로보트에 불과하다.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뜻 운운 하는 말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기독교계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신앙과 본능 사이에서

 

최근 휴심정에 기고한 김형태변호사는 문씨 말대로 하느님이 게으르고 ‘무상급식’이나 바라는 조선 민족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일제에 식민지배를 허락했다면, 그 악역을 맡은 일본사람들은 어찌되는 걸까라고 의문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그 분에 대하여 일본 사람들의 하느님은 아닌 건가.(2014-06-07)”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렸을 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 좋은 예가 영화 밀양에 있다. 영화에서 목사를 유혹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때 목사는 어떻게 행동하였을까? 신앙과 본능사이에 갈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본능이 신앙보다 강하였던지 목사는 마침내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며 여인을 껴안으려한다. 이때 당신이라는 말이 하나님이다.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당신뜻대로라 하여 본능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뜻은 사실상 자신의 뜻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뜻?

 

하나님의 뜻 운운하지만 사실상 자신의 뜻이라는 글을 보았다. 기독교신학자인 오강남교수가 최근 휴심정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첫째공적인 일에서 신의 뜻을 들먹이는 경우다.  예를 들어 영향력이 큰 종교인이나 정치인이 분명 빗나가는 행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으려고 한다.  물러나라고 하는 사람도 그를 나가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며 계속 나가라고 주장한다.  어쩔 수 없이 양 쪽은 신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서 피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  ‘신의 뜻’은 이처럼 이현령비현령,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격용, 혹은 방어용 무기로 사용되기 일쑤다.

 

(` 뜻' 곧 ` 뜻'?, 오강남교수, 휴심정 2014-06-24)

 

 

오강남교수는 공적인 영역과 인간사에서 하나님의 뜻 운운 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였다. 먼저 첫 번째로 지적한 것이 공적인 영역이다. 종교인이나 정치인들이 하나님 뜻 운운 하지만 이는 자리를 지켜 내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반대편에서도 역시 신의 뜻이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서로 신의 뜻이라 하여 쌍방간에 피터지게 싸워 왔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종교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을 무력화 시키는 신의 뜻

 

다음으로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신의 뜻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오강남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둘째,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를 두고 신의 뜻을 함부로 들먹이며 그것을 최종적 해답으로 사용할 경우, 거기에 대한 깊은 성찰은 증발하고 만다.  오늘 왜 비가 오느냐?  그것이 신의 뜻이라 한다면 더 이상 기압골이니 뭐니 하는 기상학 같은 것을 논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 사회가 왜 가난을 면하지 못하냐?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면 수요공급이 어떻고 하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있을 수 없다.  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등장했는가?  단순히 신의 뜻이라고 하면 그 당시의 국제 관계라든가 이성계, 정도전의 역할 같은 것을 따져보는 역사학 같은 것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

(` 뜻' 곧 `신의 뜻'?, 오강남교수, 휴심정 2014-06-24)

 

 

신의 뜻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사에도 두루 적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신의 뜻이 되고, 가난해도 신의 뜻이 된다. 앞서 언급된 영화 밀양에서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신의 뜻이 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 비가 안오는 것 조차 신의 뜻으로 돌린다면 기상청이 무력화 될 것이라 한다. 가난하게 사는 나라도 역시 신의 뜻으로 돌리면 모든 경제학이 무력화 될 것이라 한다. 이처럼 신의 뜻, 또는 하나님의 뜻 한마디에 모두 무력화 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단지 신의 뜻에 따라 프로그램된 로보트에 불과한 것이다.

 

절대신에 의한 창조설, 존우화작설(尊祐化作說)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의 뜻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앙굿따라니까야 3권 해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고 이 밖에 바로 이 경에서는 절대자에 의해 모든 것이 운명지어졌다고 하는 절대신에 의한 창조설, 즉 존우화작설(尊祐化作說: issaramimmanahetu)이나 절대신(絶對神: issaro)의 창조자(創造者: sanjita)로서의 창생과 일체견자(一切見者: annadatthudaso)로서의 전지(全知)와 주재자(主宰者: vasi)로서의 전능(全能)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신학적 견해도 무작설에 포함시키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3권 해제, 전재성님)

 

 

해제글은 앙굿따라니까야 3권 이교도의 경(A3.61)에 실려 있는 외도사상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나라 유일신 사상과 매우 유사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존우화작설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있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을 지켜 보고 주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당시에도 신의 뜻이라는 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것이 운명지졌다는 절대신에 의한 창조설을 부정하였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다는 견해 등에 대하여 일종의 무작설(無作說)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무작설이란 무엇일까?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비윤리적 가르침

 

부처님당시 육사외도가 있었다. 모두 이교도의 견해로서 부처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삿된견해들이다. 이런 외도와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의지라 볼 수 있다. 외도들이 이런 저런 견해를 주장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비윤리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외도의 비윤리적 가르침 중에 무작설이 있다. 이 무작설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3권 해제에서는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무작설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무작설에도 결정론과 비결정론 두 가지가 있느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종류의 무작설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았다.

 

 

무작설

      

참 고

비결정론

대왕이여, 참으로 [어떠한 일을] 하거나 하도록 시켜도, 도륙하고 도륙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슬프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전율하고 전율하게 만들고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DN,I.52)

깟사빠

도덕부정론

결정론

팔만사천대겁이 있어서, 그 사이에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유전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극을 이룬다. 그래서 그 사이에 나는 계행과 덕행과 고행과 범행에 의해 미숙업을 성숙시키고, 혹은 이미 익은 업을 참아내고 그것을 소멸시킨다.’는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유전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을 이룬다.(DN,I.54)

고살라

윤회청정설

 

 

해제글에 설명되어 있는 내용을 표로 만든 것이다. 근거로 든 경은 ‘DN,I.52’라 하였는데, 이는 디가니까야 1 52페이지를 말한다. 찾아 보면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 실려 있는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부정론과 막칼리 고살라의 윤회청정설에 대한 것이다.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부정론

 

육사외도 깟사빠와 고살라의 견해는 넓은 의미에서 무작론에 속한다. 다만 이를 비결정론과 결정론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래서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부정론을 비결정론이라 하고, 막칼리 고살라의 윤회청정설에 대하여 결정론이라 하였다. 이런 차이는 무엇일까?

 

먼저 비결정론적 무작설이라 보는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부정론이다. 왜 도덕부정론이라 하였을까? 이는 그 어떤 행위를 해도 과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뿌라나 깟사빠는 악행을 하여도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D2)”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과를 부정하다 보니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뿌라나 깟사빠의 견해에 대하여 도덕부정론이라 한다.

 

인과를 부정하면 보시 등 선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시를 하면 공덕을 쌓아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믿음 역시 쓸데 없는 것이 된다. 그러다 보니 계를 지키고 보시를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사상은 무력화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시에 대한 공덕을 부정하고 인과를 부정하다 보니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어서 부도덕한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다. 이를 도덕부정론이라 하는데 주석에 따르면 무엇을 해도 죄악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업을 배척하는 이론이다.(Dat.I.289)”라 하였다.

 

이와 같은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부정론에 대하여 아자따삿뚜왕은 망고나무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망고나무에 대하여 묻자, 빵나무라 대답하고, 빵나무에 대하여 묻자 망고나무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D2)”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전혀 논리가 서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아자따삿뚜는 깟사빠의 말을 듣고도 “~그의 말을 듣기만 하고 유념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습니다.(D2)”라 하였다. 깟사빠의 도덕부정론에 대하여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막칼리 고살라의 윤회청정설

 

막칼리 고살라의 윤회청정설이란 무엇일까? 이는 경에서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유전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을 이룬다(D2)”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내버려 두어도 언제가 모두 윤회를 끝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실타래의 비유를 들었다.

 

경에서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D2)”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기 위하여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타래를 굴리면 저절로 실이 다 풀려지는 것처럼 멍청한 자나 똑똑한 자나 모두 한량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다 보면 결국 모두 청정하게 되어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게 될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윤회가 끝나게 된다는 것이 막칼리고살라의 윤회청정설이라 한다. 따라서 윤회청정설에 따르면 굳이 닦아야 할 필요가 없다. 보시 등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다. 마치 아침이 되면 눈이 떠지듯이 모두 윤회가 종식 되고 말것이라 한다.

 

하지만 막칼리 고살라의 윤회청정설은 철저하게 결정론적 사고방식에 따른다. 이는 경에서 이미 결정된 윤회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끝나거나 증가하거나 감소되거나 더하거나 덜함이 없습니다(D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써서 닦을 것도 없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듯이, 마치 실타레를 굴리면 실이 풀리는 것처럼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 한다.

 

또 막칼리 고살라는 . 뭇삶이 오염되는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는 것이고, 또 원인 없이 청정해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모든 뭇삶,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 여섯 가지 계층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습니다.(D2)”라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말이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에는 자유의지 없이 본성대로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칼리 고살라의 윤회청정설에 대하여 결정론적 무작설로 본 것이다.

 

외도의 견해는 모두 무작설

 

뿌라나 깟사빠의 비결정론적 무작설과 막칼리 고살라의 결정론적 무작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작설이라 하고, 이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작론자라 한다. 반면 부처님은 작론자라 하였다. 왜 부처님이 작론자인가?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서 부처님은 무작론자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숙작인설

pubbekatahetū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A3.61)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존우화작설

issaranimmāahetu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A3.61)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무인론

ahetuappaccayā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A3.61)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앞서 언급된 무작설에서는 뿌라나 깟사빠의 비결정론적 무작설인 도덕부정론과 막칼리 고살라의 결정론적인 무작설인 윤회청정설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위 표를 보면 두 가지 견해는 무인론의 범주에 속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작설의 범주가 매우 넓어서 니간타들의 숙작인설과 오늘날 유일신교와 유사한 존우화작설도 무작설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제외한 외도의 견해는 사실상 모두 무작설이라 볼 수 있다.

 

세 가지로 본 무작설의 특징은 한마디로 자유의지가 없음을 말한다. 반대로 작설은 자유의지에 근거한다. 부처님에 대하여 작론자(kiriyavadin)’라 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교도의 경(A3.61)’에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의 분석을 통하여 세 가지의 무작론을 척파하였다.

 

존우화작설(issaranimmāahetu)이 왜 모순인가?

 

세 가지 무작론 중에 존우화작론이 있다. 오늘날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한 외도의견해를 말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Tatra bhikkhave ye te samaabrāhmaā evavādino evadiṭṭhino: ya kiñcāya purisapuggalo paisavedeti sukha vā dukkha vā adukkhamasukha vā, sabba ta issaranimmāahetu'ti, tyāha upasakamitvā eva vadāmi: sacca kira tumhe āyasmanto evavādino evadiṭṭhino: ya kiñcāya purisapuggalo paisavedeti sukha vā dukkha vā adukkhamasukha vā, sabba ta issaranimmāahetu'ti.

 

Te ce me eva puṭṭhā āmāti paijānanti, tyāha eva vadāmi: tena hāyasmanto pāātipātino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adinnādāyino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abrahmacārino bhavissanti issaranimmāahetūti, musāvādino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pisunavācā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pharusavācā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samphappalāpino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abhijjhāluno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byāpannacittā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Micchādiṭṭhikā bhavissanti issaranimmāahetu.

 

Issaranimmāa kho pana bhikkhave sārato paccāgacchata na hoti chando vā vāyāmo vā, ida vā karaīya ida vā akaraīyanti. Iti karaīyākaraīye kho pana saccato thetato anupalabbhiyamāne muṭṭhassatīna anārakkhāna viharata na hoti paccatta sahadhammiko samaavādo.

 

Aya kho me bhikkhave tesu samaabrāhmaesu evavādīsu evadiṭṭhīsu dutiyo sahadhammiko niggaho hoti.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라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거짓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이간질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욕지거리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꾸며 대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탐욕스럽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분노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절대자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는 이 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샘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새김을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라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논박이다.

 

(Titthā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절대자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하는 존우화작설(issaranimmāahetu)’의 모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전지전능한 창조주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면 피조물은 단지 프로그램된 로보트에 불과할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찾아 볼 수 없어서 오로지 신의 뜻으로 돌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할 것이며, 도둑질 하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할 지 모른다.

 

왜 유일신교는 전쟁도 불사하는가?

 

이렇게 오계를 어겨도 신의 뜻이고 십악행을 해도 신의 뜻이 된다. 더구나 신의 이름으로 전쟁도 불사 한다.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역시 신의 뜻에 따른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같은 유일신을 뿌리로 하는 형제종교임에도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것도 신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같은 종교내에서도 피터지게 싸운다는 것이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같은 이슬람인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종교전쟁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 믿는 신앙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무작설(akiriyāya)

 

부처님은 모든 것을 전생의 원인 탓으로 돌리는 숙작인설(pubbekatahetū)’, 모든 것을 절대자의 뜻이라고 보는 존우화작설(issaranimmāahetu)’, 그리고 모든 것이 원인과 조건 없이 생겨난다고 보는 무인론(ahetuappaccayā)’에 대하여 잘못된 가르침이라 하였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현자에 의해서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A3.61)”라 하였다. ‘무작설(akiriyāya)’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비윤리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작론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은 작론자로서 말씀 하였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윤리적 가르침을 말한다. 작론설이라 볼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세계이다라 하였다. 또 부처님은 설한 가르침에 대하여  논박받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 받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섯 가지 세계

, , , 바람, 공간, 의식

여섯 가지 접촉감역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열여덟 가지 정신적 탐구

형상을 보고 쾌락을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 등 18 가지

네 가지 진리

고집멸도 사성제

 

 

표를 보면 철저하게 관찰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감각기관의 접촉에 따라 형성된 세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channa bhikkhave dhātūna upādāya gabbhassāvakkanti hoti, okkantiyā sati nāmarūpa, nāmarūpapaccayā saāyatana, sa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iyamānassa kho panāha bhikkhave ida dukkhanti paññāpemi. Aya dukkhasamudayo'ti paññāpemi. Aya dukkhanirodho'ti paññāpemi. Ay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ti paññāpemi.

 

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있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이다라고 선언한다.”

 

(Titthā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접촉에 따른 연기적 가르침을 말씀 하셨다. 그리고 사성제의 진리로 괴로움과 윤회를 끝낼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느끼는 자( Vediyamānassa)’이다. 그렇다면 왜 느낌이 중요할까?

 

왜 느낌인가?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늘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항상 사띠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알아차림과 함께 강조되는 말이 느낌(vedana)’이다. 그런 느낌은 다름 아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을 말한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교도의 견해에 대하여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의 분석을 통해서 척파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느낌의 대상이 아닌 것은 실재 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진리는 지금 여기에서 느낌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walking-meditation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경행과 좌선을 한 후에 인터뷰시간을 갖는다. 이때 자신이수행 중에 경험하였던 것을 법사에게 말한다. 이 때 법사가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질문자에게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하십시요!”라는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행이나 좌선 중에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봄으로서 그런 느낌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고자 함이다.

 

그럼에도 뜬금 없이 불성이나 참나, 본래면목 등을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법사가 항상하는 말이 개념(관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라고 말하며 주의를 주는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처에서 창조주, 그리스도, 브라흐마, 아미타불, 비로자나, 관세음보살 등은 개념에 속한다. 실체가 없고 실재하지도 않아 오로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개념을 대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이는 한국불교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 그러나 라는 것은 개념에 속하기 때문에 결코 나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참나를 찾는 다는 명목으로 나를 찾는 수행을 10, 20, 30, 평생을 한다. 그러나 결코 나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나 또는 참나라는 것은 개념 또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이다.

 

반면 경행이나 좌선을 하면 감각접촉에 따라 차갑다든가 딱딱하든가 등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느낌이 수행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느낌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해제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비윤리적인 가르침들은 이 이교도의 경에서는 모두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의 분석으로 척파된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불자임이 자랑스러워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유행하던 이 숙작인설, 존우화작설, 무인설 등 에 대하여 무작설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전생이라는 원인, 절대자라는 원인, 그리고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발생한다는 견해를 모두 부정하였다. 그리고 접촉에 따른 느낌의 분석으로 이를 척파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그래서 육사외도의 가르침이 삿된 견해임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여전히 외도의 견해는 존재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극명하게 표출 되고 있다. 이번 국무총리후보자의 하나님 뜻 운운하는 발언 역시 부처님당시 존우화작설이라는 외도의 견해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종교인들은 신의 뜻이라 하여 성전을 벌인다. 또 하나님의 뜻이라 하여 합리화 한다. 그러다 보니 일제강점이나 한국전쟁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 하여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 한다. 더구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도 하나님의 뜻이라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유혹에 대하여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면서 신에게 책임을 떠 넘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 하면 어떻게 될까? 비가 와도 신의 뜻이고 비가 오지 않아도 신의 뜻이라고 하고, 나라가 가난해도 신의 뜻이라 한다면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상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  존우화작설이다.

 

부처님은 자유의지를 말씀 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stn651)”라고 하였다. 또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stn652)”라 하였다. 농부는 농부가 되고자 하는 현재의 의도적 행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고, 기술자 역시 자신의 의지대로 그런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유일신교 종교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유일신교에서 신의 뜻이라 하여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행위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여 자유의지를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외도사상은 무작론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비윤리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윤리적 가르침이다. 자신의 행위(kamma, )’에 따라 미래의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매력이다. 그래서 불자가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또한 불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2014-06-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