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不死)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5. 16:10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不死)

 

 

 

어떻게 해야 포교를 잘 할 수 있을까?

 

조계종단에 ‘3대 종책이 있다. 1960년대 종단이 창종 되었을 때 세 가지 핵심에 대하여 역량을 집중키로 한 것이다. 그것은 도제양성, 포교, 역경이다. 이 핵심종책은 40여년이 지난 현재 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다.

 

최근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포교와 관련하여 김응철교수의 발언이 실렸다. 중앙승가대 교수이기도 한 김응철 교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포교역량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전한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명상과 수행의 열풍을 포교로 연결시킬 수 있는 수행 전문가 양성이 종단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종책 사업영역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종책 핵심은 포교…포교 성과 나와야 재원도 늘어”, 불교닷컴 2014-06-24)

 

 

김응철 교수에 따르면 조계종단에 대하여 1960년대 통합종단 출범기, 1970년대 불교현대화기, 1980년대 종단 자주화기, 1990년대 종단 개혁기, 2000년대 종단 안정기, 2010년 이후 종단 도약기로 시대구분 하였다. 그래서 현시대에 맞는 포교방식을 개발해야 하는데 명상수행지도자를 양성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이상 현재 방식으로는 먹혀 들어가지 않음을 말한다. 국민들의 수준은 갈수록 높아지고 종교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지고 있는데 구태의연한 방식을 고수한다면 기독교와 천주교에 이어 3의 종교로 전락할 것이라 한다.

 

수행전문가는 반드시 스님이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 불자라면 누구나 수행을 지도하는 전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스님들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스님들은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가자가 급감하는 현실에서 출가한 스님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한국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할 것임에 틀림 없다.

 

김응철교수에 따르면 앞으로 종단 출가자는 소수엘리트에 한정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출가목적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출가하면 직업으로서 스님이 되지만 출가목적이 분명하다면 수행자로서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출가수행자가 반드시 많아야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 재가전문가를 많이 양성하여 포교현장에 투입하는 것이다. 재가불자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 중에 인격과 덕망을 갖춘 10%만 양성하여도 한국불교는 몰라 보게 달라질 것이다.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

 

한국불교에서는 포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불교가 포교하는데 있어서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하게 하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appiccho ānanda sāriputto, santuṭṭho ānanda sāriputto, pavivitto ānanda sāriputto, asasaṭṭho ānanda sāriputto,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바라는 바가 없다.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만족할 줄 안다.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한가한다.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

 

(Susīmasutta -수시마 경, 상윳따니까야 S2.29, 각묵스님역)

 

 

이 경은 부처님이 사리뿟따존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다. 아난다 존자와 사리뿟따가 매우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서 아난다여, 그대도 사리뿟따를 좋아 하는가?”라고 묻자, 이에 아난다는 사리뿟따의 장점에 대하여 말한다. 이를 추인하는 형식으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수행과 포교가 출가수행자들의 의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가자들과 교재하지 않음을 칭찬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있지도 않은 사실을 번역하였을까?

 

각묵스님이 번역한 문구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와 관련된 원문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asasaṭṭho ānanda sāriputto”라는 문구이다. 문제의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문구는 빠알리어 ‘asasaṭṭho’의 번역어이다.

 

asasaṭṭho‘asasaṭṭha + o’의 형태로서, asasaṭṭha  ‘unmixed’의 뜻이다. 이는 ‘not mixed’ 또는 ‘not associating’의 뜻으로 섞이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asasaṭṭho섞이지 않음의 뜻임에도 각묵스님은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마치 출가하면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고 재가자보기를 멀리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라 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넣어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빅쿠보디의 CDB를 찾아 보니 관련 구절은 The Venerable Sariputta, venerable sir, has few wishes; he is content, secluded, aloof, energetic.”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존경한다는 뜻의 ‘Venerable’이 들어 간 것은 아난다가 한 말이다. CDB에서는 반복구문에 대하여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Venerable이 들어간 문장을 올려 놓은 것이다. 따라서 Venerable을 생략하면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 Ananda, sariputta has few wishes; he is content, secluded, aloof, energetic.(S2.29)”라고 말씀 하신 것이 된다. 여기서 문제의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라는 문구와 관련 된 단어가 aloof’이다. Aloof냉담한, 초연한, 떨어져서의 뜻이다. CDB에서도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문제의 asasaṭṭho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아난다여, 싸리뿟따는 교제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그 어디에도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번역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번역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키워드

빠알리어

asasaṭṭho ānanda sāriputto

asasaṭṭho

각묵스님역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음

빅쿠보디역

아난다여, 싸리뿟따는 교제하지 않는다

교제하지 않음

전재성님역

Ananda, sariputta is aloof

Aloof(초연하여)

 

 

 

비교표를 보면 차이가 있음이 드러난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asasaṭṭho의 뜻은 ‘not mixed(섞이지 않음)’임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음이라 하여 원문에도 없는 재가자를 집어 넣었다. 이는 과잉번역이라 본다. 그리고 오역이라 본다. 왜 사리뿟다가 재가들과 교재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별도의 설명도 보이지 않는다.

 

우바새나 우바이가 없이는

 

출가하였다고 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출가자는 재가자의 보시에 의지하기 때문에 출가자와 재가자는 소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재가자는 재보시를 하고, 출가자는 법보시를 함으로서 상호보시를 함으로서 유지된다.

 

교단은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진다. 출가의 빅쿠와 빅쿠니도 뿐만 아니라 재가의 우빠사까(우바새, 청신사)와 우빠시까(우바이, 청신녀)도 교단의 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부대중을 모두 승가의 개념으로 본다면 ‘사방승가(四方僧伽; Cattu- disasamgha)’라 볼 수 있다. 이런 사방승가는 시간적으로 삼세에 걸쳐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으로 확대되는 보편적 승가를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승가라 하면 현전승가를 말한다. 출가자의 출가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 승가로서 지역승가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나 재가신자인 우바새나 우바이가 없이는 사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이념이 결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가자는 생활의 물자를 얻기위해 노동할 수 없음으로,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생활필수품인 의식주를 위한 생필품와 의약품(四資具)을 공급받아야 생활공동체로서의 현전승가가 유지된다. 또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승가람(僧伽藍), 승가람물(僧伽藍物), (), 방물(房物)등을 기증받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지시켜야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승가’ 즉 사방승가가 성립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라는 번역어는 대단히 잘못 되었다고 본다. 더구나 빠알리원문에도 없는 재가자들이라는 말을 넣었다. 

 

매하다는 무슨 뜻일까?

 

초불연 번역에서 어색한 단어도 눈에 띈다. 그것은 매하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들어간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Evameta ānanda, evameta ānanda, kassa hi nāma ānanda, abālassa aduṭṭhassa amūhassa avipallatthacittassa sāriputto na rucceyya.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어리석지 않고 악하지 않고 매하지 않고 마음이 전도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사리뿟따를 좋아 하지 않겠는가?

 

(Susīmasutta -수시마 경, 상윳따니까야 S2.29, 각묵스님역)

 

 

어리석지 않다면 누구나 사리뿟따를 좋아 할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어서 중에 매하지 않고라는 말이 있다. “매하다는 무슨 뜻일까?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사전에 없는 말이다. 사전에도 등재 되어 있지 매하다는 무슨 뜻일까?

 

매하지 않고와 관련된 말이 ‘amūhassa’이다. 이는 ‘amūha + assa’의 형태로서, mūhamuyhati의 과거분사형으로서 ‘gone astray; forgotten; confused; erring; foolish’의 뜻이다. 잘못된 길을 가거나 자주 잊어 버림을 말한다. 요즘말로 맹한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muyhati맹하다의 뜻이 된다.

 

맹하다라는 말은 사전에 등재 되어 있다. 네이버사전에 따르면 싱겁고 흐리멍덩하여 멍청한 듯하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흐리멍덩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번역어 매하지 않고맹하지 않고로 했어야 했다.

 

amūhassa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헤매지 않고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undeluded’라 번역하였다. Delude속이다, 착각하게 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사전에도 없는 매하다라는 표현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키워드

빠알리어

abālassa aduṭṭhassa amūhassa avipallatthacittassa

amūhassa

각묵스님역

어리석지 않고 악하지 않고 매하지 않고 마음이 전도되지 않은

매하지 않고

빅쿠보디역

어리석지 않고 악하지 않고 헤메지 않고 어지럽지 않은 마음을 지닌

헤메지 않고

전재성님역

unless he were foolish, full of hatred, deluded, or mentally deranged

undeluded

 

 

 

애매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명확하지 못하다, 아무 잘못 없이 누명을 쓰거나 책망을 받아 억울하다라는 말이다. 한자어를 섞어 쓰면 애매(曖昧)하다라 한다.  애매라는 말은 애매모호(曖昧模糊)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흐리터분하고 분명하지 못하다, 말이나 태도 따위가 흐리터분하고 분명하지 못함을 뜻한다. 대체  매하다라는 어느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일까?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

 

수시마경(S2.29)에서는 아난다는 물론 부처님까지 사리뿟따존자를 칭찬하고 있다. 경에서는 사리뿟따에 대하여 1) 커다란 지혜(Mahāpañña)를 가지고 있고, 2) 넓은 지혜(Puthupañña)를 가지고 있고, 3) 명쾌한 지혜(Hāsupañña), 4) 빠른 지혜 (Javanapañña), 5) 예리한 지혜(Tikkhapañña), 6) 꿰뚫는 지혜(Nibbedhikapañña) 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혜제일로서 사리뿟따에 대하여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리니까야 ‘A1:196~1:275’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리뿟따에 대하여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이라 하였다. 이런 말은 대승불교에서도 사리뿟따에 대하여 십대제자중에서 지혜제일이라 하였다.

 

수시마경에서는 사리뿟따에 대하여 여섯 가지 지혜를 가진 자로 묘사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하늘아들은 네 가지 빛으로서 사리뿟따를 찬탄한다. 이를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에메랄드 구슬

깨끗하고 순수하고 잘 연마된 푸른 에메랄드 구슬이 광채를 내는 것 같이

금장식

공들여 정련하여 만든 금장식이 광채를 내는 것 같이

샛별

새벽녘에 샛별이 빛나고 반짝이는 광채를 내는 것 같이

태양

구름이 없는 가을 하늘 가운데 태양이 창천에 높이 떠올라 일체의 허공의 어둠을 제거하며 빛나고 작열하며 널리 비추는 것 같이

 

 

 

아난다존자와 사리뿟따존자는 절친한 도반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덕을 서로 칭찬한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사리뿟따의 여섯 가지 지혜를 칭찬하자 부처님은 이를 추인한다.

 

잘 훈련된 자처럼 때를 기다리는 님

 

이런 대화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하늘아들 수시마 역시 사리뿟따의 덕을 칭찬한다. 그러면서 광채가 나는 에메랄드 등 네 가지로 비유하여 찬탄한다. 이어서 수시마는 부처님 면전에서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스승의 찬사를 받을 만한 거룩한 님,/사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S2.29)”라고 게송으로 찬탄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Paṇḍitoti samaññāto

sāriputto akodhano,
Appiccho sorato danto

kāla kakhati sudantoti

 

[세존]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잘 훈련된 자처럼 때를 기다리는 님,

사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S2.29, 전재성님역)

 

 

빠알리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에 “kāla kakhati sudantoti”가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잘 훈련된 자처럼 때를 기다리는 님이라 번역하였다.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kāla kakhati sudantoti”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숙련된 일꾼처럼 시간 기다릴뿐이로다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Developed, well tamed, he awaits the time.”라 하여 개발되고 잘 길들여진 그는 그 시간을 기다린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kāla kakhati sudantoti”에 대하여 성전협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kāla kakhati sudantoti: Srp.I.126에 따르면, 번뇌를 끊은 자는 여러 다른 시간에 열반에 들게 되므로,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린다. 동일한 생각이 Thag.606에도 나와 있다.

 

(성전협 758번 각주, 전재성님역)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인생의 남은 기간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는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에서도 설명 되어 있는데 아라한은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 또한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죽음이 날만을 기다린다”아라한의 인생관과 오취온 논쟁의 종결(2012-02-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가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不死)

 

각주에서는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린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라한이 빨리 죽기를 바르는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아라한은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재생이 되는 업을 짓지 않은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미 초월된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의 죽음과 범부의 죽음은 다른 것이다. 자아에 집착이 있는 범부에게는 오온이 자아와 동일시 되어서 오온의 죽음은 죽음과 동일시 되지만, 더 이상 자아에 집착이 없는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오온의 파괴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 놓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범부의 죽음은 오온의 파괴가 죽음으로 이해 되지만,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구조적으로 불사(不死:amata)’가 수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갖는 범부의 죽음은 죽는 것이지만, 자아를 갖지 않은 아라한의 죽음은 죽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된다. 그래서 범부의 죽음은 죽음이 되지만, 아라한의 죽음은 불사(不死)가 된다.

 

보디 스님의 제안대로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보디 스님의 제안대로라는 말이 나온다. 빅쿠보디가 직접적으로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초불연에서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를 참고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빅쿠 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I read pada d with SS thus: kāla kakhati sudanto. This reading is suggested by VAT, who writes: "The third word has been removed by Be and Se, no doubt in the belief that it is a Sloka pada (failing, however, to regularize the cadence). But if one takes it as an Aupacchandasaka I pada there is no need to remove anything. Confirmation is got from Sn 516, the alteration of sa danto to sudanto being appropriate for the different contexts."

 

Spk does not offer help with the reading but explains the sense: "He awaits the time of his parinibbana. For the arahant does not delight in death or yearn for life; he yearns for the time like a worker standing awaiting his

day's wage." Spk then quotes Th 1003, which may account for the replacement of bhavito by bkatiko in Eel. To obtain a Sloka line, Ee2 retains bhavito but not delete sudanto

 

(CDB 189번각주, 빅쿠보디)

 

 

이 각주에 대한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에 들 시간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번뇌 다한 자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마치 낮동안 일한 임금을 받기 위해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는 시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초불연 339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각주는 빅쿠 보디의 “He awaits the time of his parinibbana. For the arahant does not delight in death or yearn for life; he yearns for the time like a worker standing awaiting his day's wage.”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각주에서 보디 스님의 제안대로라는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번역비교를 하였더니

 

번역비교를 하여 보았다. 비교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많이 발견한다. 그것은 빠알리원문과 비교하였을 때 특히 그렇다. 초불연 번역에서 사리뿟따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라 하였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라 본다. 빠알리원문에 재가자들을 뜻하는 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번역자와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빠알리어 ‘asasaṭṭho’에 대하여 교제하지 않음(전재성님역)’aloof(초연한, 빅쿠보디역)’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출가자가 재가자들과 교류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아마 우리나라 불교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출가 하였다고 하여 세상과 단절하고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와 함께 신선과 같은 삶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출가자는 재가자들과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함으로써 서로 보시하며 살아 가는 사방승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방승가의 개념이어야 불교가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사원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에 불교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처럼 스님들이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도인처럼 살아 간다면 한세대가 지나기 전에 한국불교는 제3의 종교로 전락할지 모른다.

 

번역비교를 하면서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초불연의 번역어 매하다가 대표적이다. 빠알리어 ‘amūhassa’에 대한 것인데, 이 단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헤메지 않고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착각하게 하지 않다의 뜻으로 ‘undeluded’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의 매하다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기 때문에 그 뜻을 알 수 없다. 다만 맹하다거나 애매하다등으로 추측 할 수 있다. 그런 매하다라는 말은 대체 어느 지역에서 사용되는 말일까?

 

두 가지 번역어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메세지는 게송에 있다. 그것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때를 기다리는 님에 대한 게송이다. 이 게송을 접하면 아라한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준다.

 

선장은 왜 팬티바람으로 탈출 하였을까?

 

세월호참사는 모든 이에게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충분히 살릴 수 있었고 대부분 구조 할 수 있었음에도 대형참사가 발생한 것에 대하여 매우 가슴 아파 한다. 그리고 때로 분개 하기도 한다.

 

 

월호

 

 

특히 분노하는 것은 선장 등 승무원들의 탈출에 대한 것이다. 이는 TV에서 선장이 탈출 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팬티바람으로 다급하게 탈출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이는 국가의 수치이었고 세계적인 조롱거리이었다. 이와 같은 선장의 행동에 대하여 모두 비난을 한다. 하지만 월급여가 160만원 밖에 되지 않는 임시직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럼에도 선장이 팬티바람으로 황급하게 탈출하였다는 것은 아마 내가 죽는다!”라고 생각에 꽉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살기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할 것이다. 이는 불교적으로 설명한다면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느낌 등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애착이 갈 것이다.

 

의인(義人)과 잡인(雜人)의 차이는?

 

그럼에도 세월호 내부에서는 구조하다 숨진 사람도 있었다. 죽음이 곧 닥칠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 보다는 타인을 구조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의인(義人)’이라 한다. 그렇다면 의인들은 그 상황에서 왜 살신성인의 행동을 하였을까?

 

의인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그것은 자아관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이 강한 자는 죽어도 내가 죽는다고 할 것이다. 팬티바람으로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에 해당 된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 자신의 할일을 다한 의인들은 타인의 죽음을 더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 기인 한다고 본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이 옅으면 죽음도 그다지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義人)과 잡인(雜人)의 차이는 자아에 대한 집착의 차이라고도 보여 진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옅어지면 죽움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죽음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하루를 사는 것이나 10년을 사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아라한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와 같이 잘 길들여져 때를 기다리는 님 (kāla kakhati sudanto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세 종류의 번역서에서는 테라가타의 게송 606번을 소개 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vita,
Kāla
ca paikakhāmi

nibbisa bhatako yathā.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Thag.606,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I don't delight in death,

don't delight in living.

I await my time

             like a worker his wage.

 

(Thag.606, Thanissaro Bhikkhu)

 

 

나는 죽음도 즐거워 하지 않고

삶도 즐거워 하지 않네.

노동자가 월금을 기다리듯이

나는 나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네. (Thag.606, 타닛사로빅쿠역 번역)

 

 

 

2014-06-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