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수메다(sumedha)가 왜 현자와 동의어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4. 10:47

 

 

수메다(sumedha)가 왜 현자와 동의어일까?

 

 

 

학문은 젊어서 이루어야

 

아무리 바빠도 글을 쓴다. 특히 아침에 글을 쓴다. 아침 일찍 사무실로 출근하여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엠에스워드를 띄우는 일이다. 하얀여백을 마주 하며 걸어 올 때 생각해 놓았던 것을 글로 옮긴다. 이런 생활을 8년 하다 보니 이제 생활화가 되었다.

 

글을 쓸 때는 가급적 이른 아침 맑은 정신일 때 사작한다. 아주 바쁜 일이 있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렇게 오전에 글을 쓰는 이유는 마음이 혼탁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나 밤에 글을 쓰면 잘 쓰여지지 않는다. 이전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둑한 밤에 글을 쓰면 글쓰기가 싫어 진다. 그래서 학문은 가급적 젊어서 이루어야 하나 보다. 나이 들어 돈맛을 본 후에 학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준마와 둔마의 비유

 

법구경 압빠마다왁가 아홉 번째 게송에서는 말이 등장한다. 방일자와 불방일자를 둔마와 준마로 비유하여 노래 한 것이다.

 

 

Appamatto pamattesu,       압빠맛또 빠맛떼수

suttesu bahujāgaro,        숫떼수 바후자가로

Abalassa va sīghasso     아발랏상 와 시갓소

hitvā yāti sumedhaso.      히뜨와 야띠 수메다소

 

(Dhp 29)

 

 

방일하는 자 가운데 방일하지 않고

잠자는 자 가운데 크게 깨어있는 님,

아주 지혜로운 님은

마치 준마가 둔마를 제치듯 나아간다.

 

(Dhp29, 전재성님역)

 

 

怠りなまけている人の中で、

ひとりつとめはげみ、眠っている人の中で、

ひとりよく目めている思慮ある人は、

疾くはしる馬が、 足のろの馬をいてけるようなものである。

 

(Dhp29, 中村元역)

 

 

게으른 무리 중에서 부지런하고

잠든 사람 가운데서 깨어 있는 현자는

빨리 뛰는 말이 느린 말을 앞지르듯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Dhp29, 법정스님역)

 

 

不自放逸     불자방일

從是多寤     종시다오

羸馬比良     이마비량

棄惡爲賢     기악위현

 

(Dhp29, 한역)

 

 

게으르고 혼침한 자들의 무리 안에서도

마음이 집중되어 깨어있는 현자는

언제나 항상 발전한다.

마치 준마가 내달려

둔마를 뒤에 남겨 놓듯이.

 

(Dhp29, 거해스님역)

 

 

Heedful among the heedless,

wakeful among those asleep,

just as a fast horse advances,

leaving the weak behind:

       so the wise.

 

(Dhp29, Thanissaro Bhikkhu)

 

 

항상 현재를 사는 사람

 

첫 번째 구절에서 방일하는 자 가운데 방일하지 않는다(Appamatto pamattesu)”라 하였다. 마치 홍일점식으로 게으른 자들 만 있는 가운데 부지런 한 자가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석에 따르면 새김을 잃어버린 존재들 가운데 광대한 새김(sativepulla)의 성취를 통해서 방일하지 않음을 갖춘 번뇌가 부수어진 자를 말한다.(DhpA.I.262)”라고 설명 되어 있다. 방일하지 않는 자는 바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것도 광대한 알아차림(sativepulla))이라 하였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항상 현재를 사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흐리멍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면 눈의 초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자가 알아차림이 없는 자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간에

 

두 번째 구절에서 잠자는 자 가운데 크게 깨어있는 님(suttesu bahujāgaro)”이라 하였다. 누구나 잠을 잔다. 그런데 잠을 자지 않는 자도 있을까? 만일 잠을 자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닐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는 잠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알아차림(sati)을 잃어 버린 상태라 하였다. 현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았을 때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본 것이다.

 

그런데 현자는 항상 깨어 있는 자라 하였다.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네 가지 행동양식(cataro iriyapatha)’라 하였다. 한자식으로 표현 하면 행주좌와(行住坐臥)’이다.

 

수메다(sumedha)가 왜 현자와 동의어일까?

 

세 번째 구절에서 아주 지혜로운 님이라는 말이 있다. 각주에 따르면 ‘sumedhaso’라 한다. ‘수메다소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사전에는 ‘and (sumedho) Wise’라 매우 짤막 하게 소개 되어 있다. 그렇다면 sumedho는 무엇인가? 찾아 보니 ‘sumedha + o’형태이다. Sumedha는 부사로서 ‘wise(현명한)’이라고 역시 짤막하게 소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수메다는 현명한 자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Sumedhaso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思慮ある라 하여 사려 깊은 자라 하였다. 타닛사로빅쿠는 the wise’라 하여 현명한 자라 하였다. 다른 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대체로 현자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Sumedha의 이름을 가진 열 사람

 

현자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매우 많다. 그렇다면 Sumedha가 왜 현자의 뜻이 되었을까? 빠알리사전에는 어원 분석도 나와 있지 않고 단지 ‘wise’라고만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빠알리 사전에서는 수메다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 하고 있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Sumedha:1. Sumedha. The Bodhisatta in the time of Dīpankara Buddha. He was a very rich brahmin of Amaravatī, and, having left the world, became an ascetic of great power in the Himālaya. While on a visit to Rammma-nagara, he saw people decorating the road for Dīpankara Buddha, and undertook to do one portion of the road himself. The Buddha arrived before his work was finished, and Sumedha lay down on a rut for the Buddha to walk over him. He resolved that he, too, would become a Buddha, and Dīpankara, looking into the future, saw that his wish would come true. This was the beginning of Gotama Buddha’s qualification for Enlightenment. J.i.2ff.; DhA.i.68; Bu.ii.5ff.; SNA.i.49; in Chinese Records he is called Megha. The Dvy. (p.247) calls him Sumati.

 

2. Sumedha. A khattiya, father of Dīpankara Buddha. J.i.29; Bu.ii.207.

 

3. Sumedha. A khattiya, father of Nārada Buddha. J.i.37; but Bu.x.18 calls him Sudeva.

 

4. Sumedha. The eleventh of the twenty four Buddhas.

 

He was born in Sudassana, his father being the khattiya Sudatta and his mother Sudattā. He lived in the household for nine thousand years, in three palaces, Sucanda, Kañcana (Koñca) and Sirivaddha, his wife being Sumanā and his son Sumitta (Punabbasumitta). He left home on an elephant, practised austerities for eight months, was given a meal of milk rice by Nakulā, and grass for his seat by the Ajīvaka Sirivaddha. He obtained Enlightenment under a mahānimba(mahānīpa)-tree. His body was eighty eight cubits in height. His chief disciples were Sarana and Sabbakāma among monks and Rāmā and Surāmā among women. Sāgara was his personal attendant. His chief lay patrons were Uruvela and Yasava among men, and Yasodharā and Sirimā among women. He preached his first sermon at Sudassana, to his younger brothers. The Bodhisatta was the ascetic, Uttara. Sumedha lived for ninety thousand years and died in Medhārāma. His relics were scattered. Bu.xii.??; BuA.163f.5. Sumedha. The name of a brahmin family in the time of Tissa Buddha. Vārana Thera was born in the family. ThagA.i.353.

 

6. Sumedha. An upatthāka of Sumedha Buddha, whom Pilindavaccha met at that time. Ap.i.59; but see Bu.xii.23, where Sumedha’s upatthāka is called Sāgara. Perhaps this refers to another.

 

7. Sumedha. A king of twenty kappas ago, a previous birth of Avopphiya Thera. Ap.i.112.

 

8. Sumedha. A king of seven kappas ago, a previous birth of Padasaññaka Thera. Ap.i.119.

 

9. Sumedha. An Elder of Ceylon, at whose request Buddhanāga wrote the Vinayatthamañjūsā. P.L.C. 201.

 

10. Sumedha. A Thera of Cūtaggāma, probably of the fourteenth century; author of the Sādhucaritodaya and the Anāpattidīpanī. P.L.C.247.

 

(빠알리사전 PCED194, Sumedha)

 

 

사전을 보면 수메다에 대하여 열 가지로 소개 하고 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사람 이름 이라는 것이다. 수메다를 이름으로 가진 열 사람에 대한 소개라 볼 수 있다.

 

열 사람의 수메다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1번항의 수메다존자 4번 항의 수메다붓다이다. 수메다존자는 고따마붓다의 전생담에 등장하는 인물이고, 수메다붓다는 과거24중의 하나로서 11번째 부처님을 말한다. 그러나 불자들에게 는 고따마붓다가 보살로서 삶을 산 수메다존자가 잘 알려져 있다.

 

수메다존자는 부처님이 보살의 삶을 살았을 때 이름이다. 특히 유명한 것은 연등불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연등불이라는 말은 금강경 장엄정토분에서 등장한다. “如來昔在然燈佛所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수메다존자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는 대목이다. 금강경에서는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얻은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물어 보는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웅덩이에 자신의 배를 깔아

 

수메다존자와 관련하여 빠알리사전에는 짤막하게 소개 되어 있다. 수메다존자가 디빵까라붓다(연등불)당시 보살로서 삶을 살 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디빵까라붓다는 아득한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최초의 붓다로 언급되어 있다. 이 연등불로부터 수메다존자는 수기를 받는다. 먼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수기를 받게 된 동기는 수메다존자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짤막하게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현자 수메다(Sumeda)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부를 물려 받았다. 그러나 그 재산이 결코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아니라고 깨달은 그는 그 재산을 버렸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서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곧 명상수행으로 깊은 선정을 얻게 되었고,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Sumeda

 

 

디빤까라붓다(Dapankara Buddha)가 람마와띠 마을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수행자인 수메다가 들었을 때 붓다가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붓다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여전히 길 주변을 정리 하고 있었지만 움푹패인 더러운 물 웅덩이가 있어서 미래의 붓다가 되기를 맹세한 그는 거기에 엎드리기로 하였다. 그의 옆에는 수밋따(sumitta)라 불리우는 젊은 아가씨가 연꽃 여덟송이를 들고 있었는데, 이중 다섯송이를 수행자에 주고 그녀 자신은 3송이를 들고 있었다.

 

 

Sumeda

 

 

디빤까라붓다 가 도착 하고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 때 수메다는 미래의 붓다가 될 것을 수기 하였고, 젊은 아가씨 수밋따는 그의 동료이자 조언자가 될 것이라고 또한 말씀 하셨다.

 

( http://phramick.wordpress.com/2009/07/24/life-of-the-buddha/에서 번역함)

 

 

이 글은 블로그에 우리는 부처님에게 오체투지 하는가(2014.01.10 15)’라는 제목으로 이미 올린 바 있다.

 

수메다존자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전체투지장면이다. 디빵까라붓다(연등불)이 지나갈 때 물웅덩이가 보이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배를 깐 것이다. 그래서 연등불이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몸과 옷을 아끼지 않고 온몸을 땅바닥에 던지는 행위가 오체투지의 시초라 한다. 그런데 온몸을 땅바닥에 깔았으므로 특히 전체투지(全體投地)’라 한다. 이런 전체투지는 지금도 티벳불교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을 위하여 중생을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바칠 수 있음을 전체투지로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현자와 둔자의 차이는?

 

현자를 뜻하는 ‘Sumedhaso’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DhpA.I.262에 따르면, 최상의 지혜를 갖춘 자는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을 제치고 학습과 성취에서 빠르게 효과를 나타낸다. 둔한 사람은 하나의 경을 외우는 동안, 하나의 품을 외운다. 이와 같이 학습에서 아주 지혜로운 자는 둔한 자를 제치고 달린다. 둔한 사람은 반나절이나 한나절이나 그 이상을 명상주제와 씨름하지만, 아주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이 그러는 동안 명상주제들뿐만 아니라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구출세법)를 체득하고 모든 번뇌를 부순다. 이와 같이 어떤 자가 성취에서 다른 자를 제친다. 그것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버리고, 수레바퀴를 제치고 나가는 것이다.

 

(568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보면 현자와 둔자를 비교하고 있다. 경을 외우는 것에서부터 수행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자는 항상 둔자를 제친다고 하였다. 그 결과 현자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먼저 벗어남을 말한다.

 

현자의 둔자의 차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준마와 둔마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님은 마치 준마가 둔마를 제치듯 나아간다.(Abalassa va sīghasso hitvā yāti sumedhaso. Dhp29)”라 하였다.

 

말달리는 모습이 호쾌해 보여서

 

종종 경마장에 간다. 그렇다고 베팅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레이스를 보러 가는 것이다. 그것은 말달리는 모습이 호쾌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부영화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을 좋아한다.

 

말은 한 번 타 보았다. 2013년 실크로드 여행 당시 우르무치 인근 목장에서이다. 관광상품에 포함 되어 있는데 대부분 처음 타보았다고 하였다.

 

 

 

 

과천경마장에 가면

 

과천경마장에 가면 갖가지 인생들을 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베팅하는 사람들이다. 대체로 표정이 비슷하고 심지어 옷차림도 비슷하다. 그런데 한결 같이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다. 경마출전예상지를 앞에 놓고 연구하는 모습이 매우 진지해 보인다. 그러나 종이만 보고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마장 바깥에서는 출전할 말들을 선보이기도 한다. 말의 상태를 보고서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학습지와 말의 상태를 보고 베팅을 한다. 그리고 경마가 시작 되면 일제히 모니터에 시선이 집중된다. 경마장 관중석이 있지만 대부분 실내에 있는 모니터를 바라 본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경마를 한다는 것은 내기게임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관중석에도 나가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찍은 말이 순위에 들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마장에서 크게 술렁일 때가 있다. 그것은 말들이 결승선에 진입할 때이다. 이때 사람들은 일제히 흥분하며 함성을 지른다. 그러나 결승선을 지나고 나면 대부분 긴 탄식을 한다.

 

 

 

 

경마장에서 준마와 둔마의 차이는 분명하다. 준마는 항상 순위권에 들어가지만 둔마는 항상 순위권 밖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말의 혈통의 차이도 있지만 기수도 영향을 미친다. 또 그날의 말이나 기수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변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은 베팅으로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베팅이 낮은 말이 순위권에 들어 가고, 반면에 베팅이 매우 높은 말은 거의 꼴찌에 가깝다.

 

 

 

 

빨리 성취하느냐 늦게 성취하느냐

 

준마이든 둔마이든 모두 결승점에 들어 온다. 다만 빨리 들어오고 늦게 들어 오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언젠가는 열반에 이를 것이다. 다만 빨리 성취하느냐 늦게 성취하느냐의 차이이다. 이런 차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방일하는 자 가운데 방일하지 않고

잠자는 자 가운데 크게 깨어있는 님,

아주 지혜로운 님은

마치 준마가 둔마를 제치듯 나아간다. (Dhp29)

 

 

 

2014-06-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