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는 용어는 타당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3. 17:27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는 용어는 타당할까?

 

 

 

왜 안티조선운동이 일어났을까?

 

요즘 종편채널을 종종 본다. 태생자체가 문제 되고 있지만 이제 어느덧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고 말았다. 네 개의 종편채널 중에서도 ‘TV조선을 보면 살기가 느껴진다. ‘저격수다라는 프로를 보면 조선일보기자들의 융단폭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기자들의 거침 없는 발언을 보면 마치 특정인을 겨냥하여 마구 두들겨 패는 것 같다. 그래서 안티조선운동이 일어 났을 것으로 본다. ‘저격수다프로에서 기자들의 폭언을 보면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마치 조폭들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모습 같다. 거칠것 없이 마음껏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면서 언어폭력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 같다.

 

종편채널에서는 흥미를 끌만한 프로로 가득하다. 인터넷에서도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이야기가 실시간 검색어순위에 상위에 랭크 되고 있는데, 종편에서도 주로 연예인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다보니 마치 개콘프로를 보고 난 이후 허무감을 느끼지만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런 이야기 중에 왕년 개그맨 이원승이야기가 있었다.

 

오늘을 일생처럼 산다

 

왕년 개그맨 이원승은 오십줄이라 한다. 수염을 기른 모습이 마치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이름처럼 원숭이 같은 모습을 한 개그맨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직접 피자를 만든다. 이탈리아로 유학가서 배워 온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 나이에도 피자를 화덕에 굽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피자 굽는 모습을 보니 안되어 보인다. 나이 들어서까지 힘들고 고된 노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또한 인기연예인이었던 사람이 피자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매우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감동스러웠다.

 

그가 한 말 중에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그것은 오늘을 일생처럼 산다라는 말이다. 아침에 눈이 떠서 일어나는 것을 태어남에 비유하였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에 잠드는 것을 죽음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하루 보내는 것을 일생 보내듯이 산다고 하였다. 이런 말을 듣자 비록 왕년의 개그맨으로서 피자를 구워 가며 살아 가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충실 한다는 말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초기경전에서 지금 여기를 뜻하는 말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법문을 통하여 수 없이 좋은 말을 듣는다. 그러나 대부분 이나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업 때문이다라거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해 가는 말이지만 그다지 마음에 다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삶과 밀접한 가르침에 감동한다. 그런 말중에 지금 여기라는 말이 있다.

 

딧타담마가 부정적으로 쓰였을 때

 

지금 여기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등장한다. 그래서 사띠라는 말과 함께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에게 즐겨 사용 되는 말이다.

 

지금 여기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딧타담마 (ditthadhamma)라 한다. 그런데 딧타담마라는 말은  현법열반이라고도  번역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현세열반이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딧타담마라는 말은 긍정적인 뜻과 부정적인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부정적으로 쓰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a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범망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현법열반론(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64가지 외도의 삿된 견해 중에 하나이다.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법열반론이 삿된 견해임 틀림 없다.

 

딧타따담마가 긍정적으로 쓰였을 때

 

현법열반을 뜻하는 딧타담마가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M130)’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Te khemappattā1 sukhino

diṭṭhadhammābhinibbutā,
Sabbaverabhay
ātītā

sabbadukkha upaccagunti.

 

안온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M130)

 

 

천사의 경은 일곱 가지 사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를 천사의 경고라 볼 수 있다. 그것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뭇삶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경의 말미에 경에서 말씀 하신 가르침이 게송으로 요약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게송 두 번째 구절에서 diṭṭhadhammābhinibbutā’라는 복합어가 있다. 이는 diṭṭhadhamma+abhinibbūta로 분해 된다. diṭṭhadhamma지금 여기의 뜻이고, abhinibbūta‘perfectly calmed’의 뜻으로 완전하게 고요해짐의 뜻이다. 따라서 diṭṭhadhammābhinibbutā’의 뜻은 지금 여기에서 완전하게 고요해짐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와 빅쿠냐나몰리의 영역에서는 “And reach Nibbana here and now”라 하여 지금 여기에서 열반에 이르러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diṭṭhadhammā’는 긍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긍정적 현법열반론과 관련 하여 또 하나의 경을 들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가르침을 설하는 님의 경(S22.116)’이다. 이 경에서 어느 빅쿠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르침을 설하는 님이라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가르침을 설하는 님이 됩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님이 됩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이 됩니까?(S22.116)”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Rūpassa ce bhikkhu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dhamma deseti, "dhammakathiko bhikkhu"ti ala vacanāya. Rūpassa ce bhikkhu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ipanno hoti, "dhammānudhammapaipanno bhikkhu"ni ala vacanāya, rūpassa ce bhikkhu nibbidā virāgā nirodhā anupādā vimutto hoti,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 bhikkhu"ti ala vacanāya.

 

[세존]

수행승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설하는 님이라 할 수 있다. 벗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실천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님이라고 할 수 있다. 벗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하면, 그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이라고 할 수 있다.

 

(Dutiyadhammakathika sutta- 가르침을 설하는 님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116,전재성님역)

 

 

구문에서 핵심적 구절은 싫어하여 떠나, 사라지고 소멸한다라는 말이다. 이는 빠알리어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구문은 정형화 되어 있어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경에서는 싫어하여 떠나, 사라지고 소멸해야 할 대상으로서 오온이라 하였다. 그래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이렇게 다섯 가지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 사라지고 소멸해야 한다고 반복구문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구문에서 현법열반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 bhikkhu)”라는 복합어이다.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diṭṭhadhamma+nibbāna+patto의 복합어이다. diṭṭhadhamma는 지금 여기, nibbāna는 열반, patto‘Obtained(성취된)’의 뜻이기 때문에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지금 여기서 열반이 성취된의 뜻이 된다. 그래서 현법열반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현세열반으로 번역하였다. 현법열반이 맞을까 현세열반이 맞을까?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는데

 

이렇게 현법열반이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현법열반에 대하여 교계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노동의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노동의 종교적 의미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에릭 포름(Erich Formm)인간은생존의 욕구초생존의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 욕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보다 숭고한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이상을 땀 흘리는 노동의 현장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 열반은 이 세상을 떠나 저 멀리 피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노동은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뛰어넘어 종교적 의미로까지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기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무엇인가, 마성스님, 불교닷컴 2014-05-07)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직업에 대한 윤리의식이 실종 됨에 따라 대형참사가 발생하였다는 취지의 글이다.

 

마하시사야도의 현법열반론

 

그런데 글에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라 하였다. 이 문구를 보고서 비판글을 올린 바 있다. 그것도 도발적인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현법열반론은 범망경에서 62가지 사견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법열반은 부정적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취지로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법문집에 실려 있는 현법열반론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따르면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2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설명 되오 있다. 미얀마의 삼장법사이자 세계적인 위빠사나 수행처를 창립한 마하시사야도가 한 말이다. 이처럼 근거를 제시하여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 될 수 없음을 말하였다.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곧바로 반박을 받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강력하고도 단호한 어조의 메일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는 스님의 블로그에서도 느낄 수 있다. 스님의 블로그에 실려 있는 내용 중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며칠 전 진흙속의 연꽃이라는 자가 자기 자신의 블로그에 나의 현법열반론이 잘못된 견해라고 비판했다. 그의 견해가 옳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것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초기불교의 현법열반의 개념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혹평한 것이라면 그냥 가만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떠돌아 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학문적 명예가 달린 문제인 것이다. 그의 진심어린 사과가 없으면 앞으로 용서치 않을 생각이다.

 

(마성스님, 초기불교의 현법열반, 마성스님 블로그 2014-05-16)

 

 

참으로 살 떨리는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스님의 현법열반론을 보통불자가 비판하였다고 하여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치 않을 것이라 한다.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이런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만일 비판이 없다면 오로지 칭찬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판이 있기 때문에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과 비방은 명백히 구분 되어야 한다. 누구나 비판을 할 수 있지만 비난이나 비방으로 흘로서는 안되기 때문이디. 따라서 비판은 허용되지만 비난이나 비방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은 자신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치 않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사과하였는데

 

스님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에 따라 결국 사과하였다. 사과한 또 다른 이유는 현법열반이라는 말이 긍정적인 뜻과 부정적인 뜻이 있는데 부정적인 것만 고려 하여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문을 포함한 글을 블로그에 스님들과 학자들은 글을 안쓰는 것인가 못쓰는 것인가? 양식(糧食) 되는 글을 쓰고자(2014-05-18)’라는 제목으로 올렸다.

 

올린 글에서 다만 현법열반론이 불교의 목적이다라고 하였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기회가 되면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기회가 되면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정리해 보겠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블로그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사과 하였음에도 일부 스님을 추종하는 자들은 헐뜯기에 바빴다. 이는 스님의 블로그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정신병원에 가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불교계에서는 이해 하지 못할 관행이 있다. 승복입은 스님이 한말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불자가 말한 것에는 문제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승복의 권위가 있다는 말이다. 승복을 입은 것 자체에 힘이 실려 있음을 말한다. 이번 케이스도 그렇게 본다. 그래서 보통불자가 인터넷에 글을 쓰면 주제넘은 짓이라 하는가 하고, 더구나 스님을 비판하면 용서치 않는 것이 현실이다.

 

바보들을 위해

 

이어지는 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진흙속의연꽃과 같이 초기불교의 현법열반과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구경현법열반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들을 위해 이미 각묵스님이 <범망경: 범천의 그믈, 견해의 그믈>이라는 경에서 긴 주석을 달아 놓았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현법열반과 외도들이 말하는 현법열반이 다른 것임을 혼동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성스님, 초기불교의 현법열반, 마성스님 블로그 2014-05-16)

 

 

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바보라는 표현을 하였다. 현법열반과 구경현법열반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라 하였는데 이는 일단 한대 때리고 보는 것 같다. 마치 선사들의 선문답에서 제자가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자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고 다짜고짜 방망이질을 하는 것과 같다.

 

현법열반과 구경현법열반도 구별하지 못하면 바보일까? 모르면 친절하게 알려 주면 될 텐데 굳이 바보라는 표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불교의 현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선종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불교는 그다지 자비롭지 않다. 이는 선문답에서도 알 수 있다. 도를 구하려는 자에게 자비롭게 대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할(고함)이나 방(방망이)로 대하는 것이다. 일단 주어 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외국인 학자는 선사들의 선문답에 대하여 반문자주의반지성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존재론적 자아가 있어서

 

 현법열반이라 하였을 때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고 천명하였다면 이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현법열반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블로그에서는 각묵스님이 번역한 디가니까야 범망경의 각주를 소개 하고 있다.

 

마성스님이 현법열반론의 차이에 대하여 각종기고문에서 밝힌 바 있다. 가장 최근에 한국불교에 실린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에 따르면 현법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경에서 말하는 현법열반(現法涅槃, ditthadhamma-nibbana) <범망경(梵網經, Brahmajala-sutta)>(DN1)에서 말하는 구경현법열반(究竟現法涅槃, parama-ditthadhamma-nibbana)과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유의해야만 한다. <범망경>에서 말하는 현법열반론자(現法涅槃論者, ditthadhamma-nibbanavada)들의 견해는 어떤 존재론적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이런 삼매 혹은 선의 경지를 구족하여 머문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자아에 대한 견해, 초기불교에서 거듭 강조하는 유신견(有身見)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6>, 한국불교 2013-12-19)

 

 

글의 요지는 62사견에 속하는 현법열반론은 자아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자아가 있어서 지금 여기에서 오욕락을 즐기는 것, 선정삼매를 체험하는 것 역시 현법열반론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이런 삼매 혹은 선의 경지를 구족하여 머문다라고 하였다. 범망경에서 말하는 현법열반론이란 유신견을 극복하지 못한 자가 지금 여기에서 마음껏 향유하는 즐거움 또는 삼매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보통불자가 스님을 비판하면 안되는 것일까?

 

마성스님이 불교닷컴에 기고한 기고문에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는 오해를 일으키기에 충분한다. 현법열반이라 하였을 때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있음에도 불교의 궁극의 목표가 현법열반에 있다라고 하였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발끈하여 나의 학문적 명예가 달린 문제라 하며 사과가 없으면 앞으로 용서치 않을 것이라 하였다. 스님이 잘못된 표현에 대하여 지적하고 비판한 것이 그토록 커다란 죄가 되는 것일까? 보통불자는 스님을 비판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런 법이 있다면 알고 싶다.

 

딧타담마의 두 가지 의미

 

지금 여기라는 뜻의 빠알리어가 딧타담마이다. 그런데 두 가지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긍정과 부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현법열반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에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디따담마(diṭṭha-dhamma)는 빨리 삼장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diṭṭha-dhamma 혹은 diṭṭheva dhamme(이 표현을 많이 쓴다)는 ‘현재’나 ‘금생 ’ 등의 의미가 있다. 이 경우 중국에서 현법(現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보여진 법’이고 이것은 대부분 처소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여진 법에서’가 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현재’나 ‘지금 여기’나 ‘금생’으로 해석이 된다. 과거생과 미래 생에 대()가 될 때는 ‘금생’의 의미가 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가 되어서 나타날 때는 ‘현재’의 의미가 되고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자금 여기에서’ 등의 의미가 된다.

 

이런 예는 본서 제 2장에서 볼 수 있는데,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로,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고 보는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idhammanibbāna-vada)이 그것이다.

 

(2) diṭṭha-dhamma는 문자 그대로 ‘법을 보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빨리 삼장에서는 거의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법을 이해해서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긴 경우를 뜻한다. 그래서 법의 눈이 생긴 위의 정형구 바로 다음에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문맥에서 나타난다.

 

이 경우 중국에서 견법(見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법의 무상·고·무아를 보았다’, ‘부처님 법의 의미를 보았다, 체득했다’는 뜻이 된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제8장 주석)

 

 

현법열반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딧타담마(diṭṭha-dhamma) 또는 딧테와 담메(diṭṭheva dhamme)로서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보여진 법에서’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법을 보았다’라는 의미라 한다.

 

그런데 보여진 법으로서 딧타담마(diṭṭha-dhamma)는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서 볼 수 있는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고 보는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idhammanibbāna-vada)이 해당된다.

 

반면 딧타담마(diṭṭha-dhamma) 가 ‘법을 보았다’라는 견법(見法)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견법으로서 딧타담마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으로 보기 때문이디.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나타나는 무상, , 무아를 보았다는 뜻이라 한다.

 

표로 정리해 보면

 

마성스님이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에서 현법열반은 긍정적인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설하는 님의 경(S22.116)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의 딧따땀마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였다.

 

 

딧타담마

의미

     

부정적의미

 

보여진 법에서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함.

(62가지 사견중의 하나)

긍정적의미

법을 보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법을 이해해서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긴 경우를 뜻함.

(見法의 의미)

 

 

 

딧타담마에 대하여 보여진 법의 의미로 본다면 62가지 사견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법을 보았다견법(見法)’의 의미로 본다면 법안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경전의 문구와 대비시켜 보면

 

이번에는 경전의 문구와 대비시켜 표를 만들어 보았다.

 

 

 

딧타담마

경전문구

보여진 법에서

(62가지 사견중의 하나)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D1)

법을 보았다

(견법(見法)의 의미로 법안이 생겨남)

수행승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설하는 님이라 할 수 있다.

 

벗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실천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님이라고 할 수 있다.

 

벗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하면, 그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이라고 할 수 있다. (S22.116)

 

 

 

 

이는 전재성님의 번역이다. 딧타담마에 대하여 현세에서 열반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세열반으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주석에서 과거생과 미래 생에 대()가 될 때는 ‘금생’의 의미라는 구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딧타담마라는 말이 지금 여기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생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 여기서라고 번역한 것 보다 금생을 뜻하는 현세라고 번역한 것도 타당하다고 본다.

 

신조어 지금여기서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지금여기에서 열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주에서는 현법열반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딧타담마에 대하여 영어의 뜻풀이인 here and now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금여기에서 열반이라 하였을 때 지금여기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 여기는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원어는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인데, 한문으로는 현법열반론자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옮기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풀어서 옮겼다. 지금 여기서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지금여기에서로 옮긴 이유는 지금 여기서로 옮길 경우 자칫 부사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지금여기를 합성어로 옮겼다.

 

(초불연 디가니까야 153번 각주, 각묵스님)

 

 

 

 

 

 

 

Here and now

 

 

딧타담마에 대하여 붙여쓴 글씨로 지금여기서라 하였다. ‘현법이라는 말이 한자어로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붙여쓴 글씨로 지금여기서라는 말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각묵스님이 새롭게 만든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새로 만든 말을 종종 볼 수 있다. 시각의 대상에 대하여 형색(形色)’이라 하였는데 이 말도 각묵스님이 만든 신조어이다.,

 

지금 여기서지금여기에서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서를 보면 딧타담마에 대하여 지금여기에서또는 지금 여기서라고 옮겼다. 이는 딧타담마에 대하여 현세라고 번역한 것과 대조된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딧타담마의 한문용어인 현법열반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 같다.

 

각주를 비교해 보면

 

브라흐마잘라경에 실려 있는 딧타담마 각주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었다.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

 

각묵스님

핵심적 내용을 보면 현법열반론자들의 견해는 어떤 존재론적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이런 삼매 혹은 선의 경지를 구족하여 머문다고 하는 주장이다.

(153번 각주 중의 일부)

지금여기에서 열반

전재성님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 : Smv.121에 따르면, 현세(diṭṭhadhamma)라는 것은 직접경험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때그때 자기존재와 동의어이다. 현세열반이란 이 자기존재 안의 괴로움의 지멸을 뜻한다.

(168번 각주)

현세열반

 

 

 

 

표를 보면 공통적으로 자아를 가진 자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자아를 가진 자가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을 향유하였을 때 현법열반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범주에 놀랍게도 선정삼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아를 가진 자가 삼매에 들었을 때 경험하는 것은 열반이 아니라 단지 자기존재 안에서 일시적으로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임을 말한다.

 

현법열반이라는 용어는 타당할까?

 

딧타담마라는 말은 현법열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는 한역경전의 문구를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법열반이라 하였을 때 불교사전을 열어 보기 전에는 그 정확한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현법열반이라는 말은 그다지 좋은 번역어라 볼 수 없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지금여기서 열반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전재성님은 현세열반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천년 전에 사용되던 현법열반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마성스님이 각종 기고문에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문구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슨말인지 모른다. 더구나 현법열반에는 긍정적인 것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있어서 현법열반이 불교의 목적이라 천명하였을 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현법열반이라는 용어는 타당할까?

 

한국불교에 기고된 마성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러나 ‘득현법열반(得見法涅槃)’이라는 대목은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증득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견()은 현()과 같은 글자이므로, ()으로 읽어야 한다. 현법(現法, ditthadhamma)이란 현세(現世), 즉 금생(今生)을 가리킨다. 따라서 현법열반은 금생에 적정해탈(寂靜解脫)을 얻는 것을 말한다.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6>, 한국불교 2013-12-19)

 

 

이 글은 한역 열반경에서 현법열반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글을 보면 ()은 현()과 같은 글자이므로, ()으로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견법열반(見法涅槃)’이라고 원문에 표현 되어 있음에도 현법열반(現法涅槃)’으로 바꾸어 해석하였다.

 

한역경전에서 사용된 견법이라는 말은 잘못 적용된 말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제대로 적용된 것이라 본다. 이는 앞서 언급된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에서 이 경우 중국에서 견법(見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법의 무상·고·무아를 보았다’, ‘부처님 법의 의미를 보았다, 체득했다’는 뜻이 된다.”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이렇게 바꾸어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은 현()과 같은 글자이므로, ()으로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왜 이렇게 한 것일까? 아마도 현법열반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기 때문이라 본다. 딧타담마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불리 우고 있지만 한역경전에서 사용된 바 있는 한문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다섯 무더기또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도 같이 여러 명칭으로 번역 되어 있지만 이런 번역을 따르지 않고 한문용어인 오온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지금여기서 열반이라든가 현세열반이라는 번역어보다 전승된 현법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심자들에게 있어서 현법열반이라는 말은 매우 어렵고 그 뜻도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법열반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기고문에서 현법열반이라는 말과 함께 현세열반이라는 말도 사용하였다. 이는 그러므로 현법열반이란 현세에서 열반을 얻는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자세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딧타담마라는 말이 반드시 영어 표현 대로 ‘here and now’라고만 고집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초지일관 지금여기서라는 번역어를 고수하고 있다.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 딧타담마에 대하여 번역자들은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상윳따니까야 S22.116에 실려 있는 내용을 비교해 보았다.

 

 

 

 

   

비고

빠알리어

rūpassa ce bhikkhu nibbidā virāgā nirodhā anupādā vimutto hoti,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 bhikkhu"ti ala vacanāya.

diṭṭhadhamma

전재성님역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하면, 그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이라고 할 수 있다. (S22.116)

바로 현세에서

한역 열반경

於識生厭·離欲·滅盡, 不起諸漏, 心正解脫, 是名比丘見法涅槃.

見法

각묵스님역

만일 색()을 염오하고 색()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을 소멸하였기 때문에 취착 없이 해탈하였다면 그를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S22.116)

지금 여기에서

빅쿠 보디역

If, through revulsion towards form, through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one is liberated by nonclinging, one can be called a bhikkhu who has attained Nibbana in this very life.

(S22.116)

in this very life

 

 



표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복합어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에 대하여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전재성님역)”  見法涅槃(한역)”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각묵스님역)” “attained Nibbana in this very life(빅쿠보디역)”라고 번역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현법열반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한역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한역에서는 見法涅槃(견법열반)’이라 하여 견법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세 단계의 가르침

 

경에서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라는 복합어를 사용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 용어는 불쑥 튀어 나온 것이 아니다. 경을 보면 세 번째 단계에서 나온 말임을 알 수 있다. 경에서는 ‘1) dhamma deseti(가르침을 설한다), 2) dhammakathiko(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 3)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다)’이렇게 삼단계로 설명 하였다. 이를 다시 한번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설하는 님이라 할 수 있다. 벗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실천하면, 그 수행승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님이라고 할 수 있다. 벗이여, 어떤 수행승이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집착없이 해탈하면, 그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이라고 할 수 있다. (S22.116,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만일 색()을 염오하고 색()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을 소멸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만일 색()을 염오하고 색()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을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으면 그를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만일 색()을 염오하고 색()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색()을 소멸하였기 때문에 취착 없이 해탈하였다면 그를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 비구’라 부르기에 적당하다. (S22.116, 각묵스님역)

 

 

Bhikkhu, if one teaches the Dhamma for the purpose of revulsion towards form,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one can be called a bhikkhu who is a speaker on the Dhamma. If one is practicing for the purpose of revulsion towards form,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one can be called a bhikkhu who is practicing in accordance with the Dharnma. If, through revulsion towards form, through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one is liberated by nonclinging, one can be called a bhikkhu who has attained Nibbana in this very life. (S22.116, 빅쿠보디역)

 

 

세 가지 단계에 대한 표를 만들면

 

이 세 번역에서 세 가지 단계에 대한 것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빅쿠보디역

dhamma deseti

가르침을 설하는

법을 설하는

a speaker on the Dhamma

dhammakathiko

여법하게 실천하는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practicing in accordance with the Dharnma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증득한

attained Nibbana in this very life

 

 

 

S22.116에서 설명된 내용에 따르면 1) dhamma deseti, 2) dhammakathiko, 3)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 이렇게 세 가지 단계이다. 가르침을 설하면 이를 실천하여 열반을 증득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 번째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가 diṭṭhadhammanibbānappatto인데 이를 달리 번역한 것이다. 특히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지금 여기에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과 빅쿠보디는 금생이라는 뜻으로 현세this life’ 가각 번역하였다. 어는 번역이 맞는 것일까?

 

지금 여기가 아니라 금생인 이유

 

흔히 근기를 말한다. 어떤 이가 부처님 가르침 한 구절에 깨달았다면 상근기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도 받아 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법을 설하셨다.

 

경에서 부처님이 오온을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런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여 곧바로 열반에 들었다면 상근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 얼굴 다르듯이 성향도 다르고 근기도 다르다. 설령 부처님이 훌륭한 가르침을 설하였어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부지런히 정진하면 이 생에서도 열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금생의 개념으로 본다면 ‘diṭṭhadhamma’지금 여기라기 보다 현세라 볼 수 있다. 열반은 죽고 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성취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바로 현세에서라는 말과 빅쿠보디의 “in this very life” 번역어가 타당해 보인다. 반면 각묵스님의 지금 여기에서라는 번역어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보통불자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이전에 개그맨 이었던 이원승의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딧타담마라고 하는데 현법열반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용어는 한역경전의 용어를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 만들어진 한자어가 그렇듯이 단지 한자어만 보아서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급적 쉬운 우리말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우리말 용어를 적용하였을 때 문제가 된다. 딧타담마에 대하여 지금여기서라고 하였을 때 역시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딧타담마라는 말이 현법열반이라는 용어로 설명 될 때 범망경에서 보듯이 62가지 사견 중의 하나로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 되기도 하고, 천사의 경(M130)에서 보듯이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diṭṭhadhammābhinibbutā)”라 하여 긍정적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딧타담마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용어가 달리 사용된다는 것이다. 딧타담마라는 말이  영어식으로 ‘here and now’라 하여 일률적으로 지금여기서라고 적용하면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초불연 번역에서 볼 수 있다.

 

더구나 딧타담마라는 말은 현법열반이라는 말 보다  한역경전에서는 견법열반으로 번역되었다. 그럼에도 마성스님은 ()자와  ()자와 같은 것이라 하여 현법열반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무리한 적용이라 본다. 딧타담마라는 말이 보여진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법을 보았다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견법이 현법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마성스님은 기고문에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는 대단히 무리가 있는 선언이다. 이런 점을 지적하여 비판글을 올렸으나 호되게 반응하였다. 현법열반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였고 혹평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명예가 달린 문제라 하였다. 그러면서 진심어린 사과가 없으면 앞으로 용서치 않을 생각이다라 하였다.

 

이에 사과 하였다. 현법열반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가 있지만 부정적인 것만 염두에 두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의 블로그를 보면 “‘진흙속의연꽃과 같이 초기불교의 현법열반과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구경현법열반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여전히 있다. 이는 명백히 명예에 대한 것이다.

 

불교교리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하여 모두 바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논리로 따지면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모르는 불자들은 모두 바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보통불자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언어적 폭언이라 본다.

 

스님은 정당한 비판에 대하여 명예훼손이라 하며 용서치 않겠다고 하였다. 이는 그 어떤 비판도 수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스님은 보통불자에 대하여 바보같다고 하였다. 만일 보통불자가 스님에게 바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명예훼손이라 하여 사과를 요청할 것이다. 그렇다면 승복을 입었다고 하여 보통불자에게 막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는 명백히 비방이며 동시에 명예훼손에 해당된다. 그래서 바보라는 표현을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한다.

 

 

 

2014-06-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