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21세기 화쟁(和諍)을 하겠다고? 함석헌의 저술도 불교경전이라는 조성택교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0. 19:43

 

 

21세기 화쟁(和諍)을 하겠다고?  함석헌의 저술도 불교경전이라는 조성택교수

 

 

 

승복의 권위, 박사의 권위

 

승복의 권위라는 것이 있다. 계행이 어떤지 알 수 없고 깨달음의 정도가 어느 경지인지 알 수 없어도 승복을 입고 있다면 권위가 부여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부처님 보듯이 예를 갖추어 삼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찬가지로 피에치디(Phd, 박사)의 권위가 있다. 학문적 성과가 어떤지 알 수 없고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도 닥터라고 하면 일단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승복과 Phd는 권위의 상징과도 같다. 그래서 승복을 걸친 스님이 한마디하면 법문이 되고, Phd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학자가 글을 쓰면 논문이 된다. 그러나 보통불자가 글을 쓰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아무리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써도 승복과 박사의 권위 앞에서는 잡문으로 취급된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좋은 말씀이 아니라고?

 

최근 불교닷컴에 조성택교수의 글이 여러 편 실렸다. 이름하여 조성택 교수 21세기 한국불교를 위한 교판이라는 시리즈의 글이다. 조성택교수가 화쟁아카데미에서 강연한 것을 요약한 기사를 말한다.

 

총 네 편의 글에서 세 번째 글에 화쟁(和諍)’에 대한 것이 있다. 화쟁이란 화해(和會)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이르는 말로 신라시대 원효의 중심사상이다. 그런데 불교학자인 조성택 교수가 또 다시 화쟁을 거론 하였다.

 

불교닷컴  조성택 교수 21세기 한국불교를 위한 교판_3강()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성택교수는 놀라운 말을 하였다. 기사에 따르면 조교수는 불설선설(佛說善說), 부처님 가르침만이 좋은 말씀이 아니다. 좋은 말씀이 모두 부처님 말씀이다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자들은 부처님가르침이 진리로 알고 있으나 부처님 가르침만이 좋은 말이 아니라니 참으로 파격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면서 좋은 말씀이라면 모두 부처님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함석헌의 저술도 불교경전이라는데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있다. 조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더욱 더 놀라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박제화된 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경전이다. 함석헌과 퇴계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면서 선설불설을 요구했다.

 

(조성택 교수 21세기 한국불교를 위한 교판_3강(), 불교닷컴 2014-06-08)

 

 

조성택교수는 함석헌의 말도 불교경전이라 하였다. 함석헌이 누구인가? 위키백과에 따르면 함석헌은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함석헌)”라고 소개 되어 있다.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함석헌의 저서도 불교경전일수 있다니!

 

조성택교수에 대하여 수 없이 비판하였다. 그것은 지난 2011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에 대한 것이다. 조계종에서 야심차게 추진하였던 선언문이다. 그러나 반대에 부딪쳐 실현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의 초안을 만든 사람이 바로 조성택교수라는 것이다. 그 때 당시와 비교해 보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조성택 교수는 왜 시점에서 불교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일까?

 

충격적인 열린 진리관

 

종교평화선언이라 불리는 아쇼카선언문 초안자가 조성택교수이다. 조계종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도법스님의 요청으로 초안문을 작성한 것이다. 그런데 초안문을 보면 매우 놀랍다. 그것은 불교의 존립 기반을 부정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열린진리관이 있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011-08-23)

 

 

초안문의 열린진리관을 보면 충격적이다.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불자라면 이런 진리관은 도저히 받아 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수 없이 비판글을 올렸다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종교?

 

불로그에 올린 수 많은 글에서 소위 아쇼카선언(종교평화선언)은 불교를 팔아 먹는 것이라고 맹비난 하였다. 이는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하는 진리관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인데 표현 하는 방식이 달라서 종교가 다른 것이라 한다. 이런 내용을 접하고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불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초기경전을 접한 불자라면 당연히 문제제기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조성택교수의 방식대로 진리는 하나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라면 사실상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종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언문에서 진리는 하나라는 뉘앙스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산에 갈 때 정상은 하나이지만 올라 가는 길은 여럿이라는 논리와 같다. 이런 방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조성택 교수는 함석헌의 저술도 불교경전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는 2011년 종교평화선언문에 있어서 열린진리관의 연장선상이라 본다. 기독교인이 바이블에 근거하여 저술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말씀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이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한 부류는 그럴 수도 있다라는 반응일 것이고, 또 한 부류는 정신병원에 가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할 것이다.

 

조성택교수가 이 시점에서 다시 열린진리관을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시동을 거는 것은 아닐까? 지난 2011년 선언문을 공표 하기 일보직전에서 좌절 되었는데 3년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 또 다시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다.

 

원효의 개비개시(皆非皆是)

 

불교인이라면 함석헌의 저술도 부처님말씀이다라는 열린진리관은 정상적인 불자라면 받아 들이기힘들다. 그럼에도 조성택교수는 화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불교닷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원효는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를 통해 우리 모두가장님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전제한다. 몇 사람의 장님이 코끼리를 묘사한다. 코를 만진 어떤 이는코끼리는 길다고 한다. 배를 만진 사람은벽과 같다고 하며 다리를 만진 이는기둥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

조 교수는이러한 장님들의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 원효는모두 옳다”(개시,
皆是)고 한다. 왜냐하면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코끼리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어그러나 원효는 또한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모두”()라고 하는 동시적 상황이다. 옳다면모두옳고, 틀렸다면모두틀렸다는 것이다.“고 했다.

 

(조성택 수 21세기 한국불교 위한 교판_3강(), 불교닷컴 2014-06-08)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는 매우 유명하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조성택교수는 원효의 이야기를 하였다. 7세기 불교종파간의 화쟁으로 유명한 원효스님이 장님과 코끼리 비유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전에 근거한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 불교학자라면 경전에 근거하여 어느 경전에서 인용된 것인지 밝혔어야 했다.  단지 원효가 언급하였다고 하여 그대로 인용한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 보다 원효의 말을 더 믿는 다는 것과 다름 없다.

 

부처님 말씀 보다 원효의 말을 더 믿나?

 

조교수는 원효의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개비개시(皆非皆是)라 하였다. 이 말은 옳다면모두옳고, 틀렸다면모두틀렸다라는 뜻이다. 장님이 한 부분만 보고서 진리라고 한 것에 대하여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교수는 개시개비에 대하여 어떤 입장도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며 각각의 주장이 부분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모두가 함께 부정되거나 긍정되어야 한다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왜 놀라운 말인가? 그것은 앞서 언급된 함석헌과 퇴계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더 멀리는 지난 2011년 추진하다 좌절 되었던 아쇼카선언문의 열린진리관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다나의 장님과 코끼리비유

 

조성택교수는 장님과 코끼리비유에 대한 원전을 밝히지 않았다. 단지 원효가 언급하였다고만 하였다. 그렇다면 장님과 코끼리 비유는 어떤 경전에 나와 있는 것일까?

 

장님과 코끼리비유는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사부니끼야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쿳다까니까야에 실려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글을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코끼리와 장님들(2013-11-17)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가 있다.

 

 장님과 코끼리비유는 우다나에서 볼 수 있다. 우다나에서 세 개의 경에 걸쳐 눈먼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장님과 코끼리 비유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Pa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Elephant and Blind men

 

 

부처님이 장님과 코끼리 비유를 든 것은 이교도들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당시 육사외도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가 코끼리의 특정 부위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어떤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은 코끼리의 머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폐하, 코끼리는 물항아리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Ud6.4)”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래서 코끼리 머리를 만진 자는 물항아리같다고 하였고, 귀를 만진 자는 키질하는 바구니와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예를 든 것이 아홉 가지에 달한다.

 

서로 모순되는 것을 붙잡고 싸운다

 

경에 따르면 육사외도의 주장 역시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예로서 영원주의견해에 대해서는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Ud6.4)”라 하였다. ‘허무주의의 경우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이다. 이처럼 경에서 언급된 육사외도의 견해는 모두 16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육사외도의 특징은 한결 같이 자신들의 견해가 진리라고 주장하고, 다른 견해는 모두 거짓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 하셨을까? 게송으로 요약된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Imesu kira sajjanti

eke samaabrāhmaā,
Viggayha na
vivadanti

janā ekagadassino” ti.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실로 이러한 견해들에 집착한다.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 (Ud6.4)

 

 

게송에서 핵심구절은 한쪽 관점만 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UdA.343에 따르면, ‘그대는 가르침과 계율을 잘 모른다.  나는 이 가르침과 계율을 잘 안다.’라는 등의 불화를 일으키는 이야기를 통해서 싸움을 일으킨다. 사견에 의존하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의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주의 등에 의해서 서로 모순되는 것을 붙잡고 싸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여기서 눈의 띄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을 붙잡고 싸운다라는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은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코끼리 상아를 만지면서 쟁기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쟁기가 사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만 들어서 알 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아와 이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자아와 세상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마치 한번도 코끼를 본적이 없는 장님이 머리통을 만지면서 물항아리같다든가, 귀를 만지면서 키질하는 바구니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육사외도의 주장은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두 허위가 된다. 맞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성택 교수는 원효의 개비개시를 거론 하며 옳다면모두옳고, 틀렸다면모두틀렸다라 하였다. 이는 명백히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 난 것이다. 우다나에 부처님은 육사외도의 견해에 대하여 단 한번도 옳은 것이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육사외도들은 서로 모순되는 견해를 붙잡고 싸운 것이다.

 

망상속에 엮이고 묶인 견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16가지 항목의 육사외도의 견해는 모두 그릇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진리가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육사외도의 견해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모두 논파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요약되었다.

 

 

1.

Ahakārapasutāya

pajā parakārūpasahitā.
Etad-eke nābbhaññi
su 

na na sallan-ti addasu.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추구하거나

타자가 만든 것이라고 사람들은 꺼둘린다.

어떤 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여

그것이 화살이라고는 결코 보지 못한다.

 

 

2.

Etañ-ca salla paicca passato
“Aha
karomī”-ti na tassa hoti,

“Paro karotī”-ti na tassa hoti

 

이것을 화살이라고 미리 보는 님은

자신이 만든다.’라고 생각을 여의고

타자가 만든.’라고 생각도 여읜다.

 

 

3.

Mānupetā aya pajā

mānaganthā mānavinibandhā,
Di
ṭṭhisu sārambhakathā ~

sasāra nātivattatī ti.

 

이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히고

망상에 엮이고 망상에 묶였다.

견해 속에서 화내며 논쟁할 뿐,

결코 윤회를 뛰어넘지 못한다. (Ud6.6, 전재성님역)

 

 

첫번째 게송에서 자신이 만드는 것은 자아를 창조자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그리고 타자가 만든 것은 타자를 창조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견해에 따라감을 말한다.

 

예를 들어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견해를 신봉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게송에 따르면 화살을 맞는 것이라 하였다. 어떤 화살일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견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괴로움을 일으키기 때문에 찌른다는 의미에서 화살이라 한 것이다.

 

어떤 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여

 

첫 번째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특히 세 번째 구절에서 어떤 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여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장문의 각주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Etad-eke nābbhaññisu : UdA.346에 따르면, 이러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그 해악을 보고 거기에 동의 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러한가?

 

만든 자로서 나라고 할 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따라 원하는 것만이 있게 되는 것이지 원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만드는 자로서의 나이다. 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곳에는 만드는 자로서의 나는 없다.

 

더구나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는 자재신 등을 원인으로 함축하고 있는데, 그 동일한 자재신이 자신을 위해서도 타자를 위해서도 활동한다. 만약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자신에 의해서 성취되지 못한 것이 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행해지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타자를 위하여 존재한다면 , 어떠한 고통과 불행도 이루어지지 말고 모든 안녕과 행복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재신을 통한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가 성립한다면, 그리고 자재신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무시하는 어떤 영원한 유일한 원인이 있다면, 행위를 통해서 아무것도 일어날 수가 없고, 원인의 지속으로 인해 모든 것은 조화로운 계획속에 발생해야 한다.

 

자재신의 불완전한 능력을 상상해서 무엇 하겠는가? 자재신을 원인으로 하는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생주신이나 원인이나 원질, 시간 등의 원인도 성립하지 않는다.

 

(우다나 858번 각주, 전재성님)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주석에 근거한 각주를 보면 만드는 자로서의 나’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는 모두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행위로 설명 하고 있다.

 

만드는 자로서의 나

 

먼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추구한다(Ahakārapasutāya)”라는 말이 있다. ’가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그 해악을 보고 거기에 동의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만든 자로서 나라고 할 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따라 원하는 것만이 있게 되는 것이지 원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만드는 자로서의 나이다. 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곳에는 만드는 자로서의 나는 없다.”라고 하였다.

 

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을 이해하려면 본문을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자아와 세계는 자기가 만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Ud6.6)”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주의자의 견해이다. 왜 그런가? 주석에 따르면 영원주의자들은 행위하는 자와 경험 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자아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구절에서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추구한다(Ahakārapasutāya, Ud6.6 )”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다.

 

왜 모순일까? 그것은 각주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자아를 가진 자가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감으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이라는 것이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로 괴로움을 만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추구한다(Ahakārapasutāya, Ud6.6 )”라는 견해는 모순이 된다. 그래서 주석에서  욕망에 따라 원하는 것만이 있게 되는 것이지 원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게 된다라 하였고, 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곳에는 만드는 자로서의 나는 없다라 한 것이다.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

 

두 번째 구절에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라는 말이 있다. 주석에서는 이를 자재신이라 하였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 역시 모순이라 하였다. 왜 모순인가?

 

두번째 구절에 대한 빠알리어가 “pajā parakārūpasahitā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타자가 만든 것이라고 사람들은 꺼둘린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꺼둘린다라는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아마 추구한다뜻일 것이라 보여진다.

 

주석에 따르면 타자가 만든 것에 대하여 자재신이 만든 것이라 하였다. 창조주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일까? 역시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이다. 자아와 세계도 타자가 만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Ud6.6)”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아와 세계를 타자가 만들었다면 이는 이 세상의 근본 원인이 되는 타자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대하여 자재신이라 하였다. 더구나 즐거움과 괴로움도 타자가 만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괴로움도 타자가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괴로움도 타자가 만들었다고?

 

요즘 국무총리후보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국민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청문회 준비를 하고 있는 후보자의 퇴근길에 한마디에 따라 갖가지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총리후보자는 여야 가리지 않고 거센 자신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그것은 우리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이라 하여 우리 민족이 겪은 시련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렸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불교인들은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뭐? 하나님의 뜻이라고? 문창극후보의 기독교우월주의(2014-06-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국무총리 후보자 문창극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36년과 한국전쟁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민족에게 시련을 줌으로서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게 한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기독교인들에게나 통용가능한 것이다. 불교인을 포함한 대부분 국민들은 이런 견해를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후보가 하나님의 뜻 운운한 것은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인간에게 닥친 시련이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리고 모순이라 생각한다. 이 세상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같은 이야기가 바로 주석에 설명되어 있다.

 

경의 본문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이다라는 견해는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 뜻과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괴로움과 관련하여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각주에 따르면 괴로움과 관련하여 원인을 자신이나 타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극단적인 이론이고, 윤리적으로도 위험한 이론이다(850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문창국후보처럼 인간의 행불행이나 나라의 시련 등 모든 것에 대하여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가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이다. 왜 모순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창조주

 

여기 자아와 이세상을 만든 창조주(자재신)가 있다. 자아와 세상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인간들이 겪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는 나만 만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보아 타인도 만들었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하여 자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창조주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내가 욕망에 따라 오욕락을 추구하였을 때 이것도 창조주의 뜻이라 볼 수 있을까? 영화 밀양을 보면 어느 목사가 여인의 유혹에 대하여 고민하는 장면이 있다. 한참 고민하다가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피조물에게도 행위가 있음을 말한다. 피조물이 자유의지에 따라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 까지 막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럴 때 누군가는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야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창조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재신의 불완전한 능력을 상상해서 무엇 하겠는가?”

 

창조주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만들었다. 그런데 창조주의 다른 사람들을위해서도 활동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그 어떠한 불행과 고통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끊임 없이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만일 창조주가 있다면 지진, 해일, 태풍, 쓰나미 등 자연재해나 항공기, 선박, 철도 등 운송수단으로 인한 재난 등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각지에서는 끊임 없는 재난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 과연 이것이 피조물로 하여금 시련을 겪게 하여 이를 자유의지로 극복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볼 수 있을까? 거꾸로 창조주로 무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아와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면 어떠한 고통과 불행도 이루어지지 말고 모든 안녕과 행복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일 자아와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면 나와 다른 사람은 행위를 통하여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창조주의 계획속에서만 움직이여만 하기 때문이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보트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겪는다. 이렇게 본다면 자재신(창조주)는 불완전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대체 그런 자재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주석에서는 자재신의 불완전한 능력을 상상해서 무엇 하겠는가?”라 하였다.

 

기독교를 진리로서 받아 들이라고?

 

이렇게 부처님은 자아와 경험을 동일시하여 변치 않는 자아가 겪는 영원주의 견해가 있다고 하는 만드는 자로서의 나는 모순임을 말씀 하셨다. 또 자재신(창조주)등을 상정하여 만드는 자로서의 타자역시 부정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뜻운운하는 것은 넌센스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게송을 보면 견해에 집착되어 있는 자들은 망상에 묶인 것과 다름 없다고 하였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숙명론, 우연론 등 16가지 견해에 대하여 모두 자만에 따른 망상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육사외도의 견해에 대하여 명백히 진리가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성택교수는 경전적 근거도 갖지 않는 개비개시사상으로 외도의 사상도 진리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식이라면 기독교도 진리로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조성택교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만일 조성택 교수가 우다나를 참고 하였다면 개시개비와 같은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성택교수는 부처님 가르침과 전혀 다르게 개비개시를 말한 것일까? 대체 조성택교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어 장님과 코끼리비유를 든 것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21세기 화쟁을 하기 위해서라 본다. 그래서 아마 이런 말을 전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의 글이 잘 말해 준다.

 

 

 

조 교수는 “‘개시개비’는 어떤 입장도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며 각각의 주장이 부분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모두가 함께 부정되거나 긍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면서 “코끼리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펴는 것이 논쟁의 상황이라면 ‘개시개비’는 대화의 상황이다.”고 보았다. 

 

(조성택 교수 21세기 한국불교를 위한 교판_3강(), 불교닷컴 2014-06-08)

 

 

조성택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각각의 주장이 부분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모두가 함께 부정되거나 긍정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진리관에 따르면 불교의 진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부분적 진리 밖에 되지 않는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뒷다리 만지는 격이 된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기독교 진리 역시 코끼리 꼬리를 만지는 격이 될 것이다. 결국 진리는 하나인데 각자 다른 언어와 문법으로 표현 되었다는 뜻이다.

 

원효가 화쟁을 한 이유는?

 

원효는 7세기에 화쟁을 시도하였다. 7세기라면 신라에게 여러 종파의 불교가 동시에 들어온 시기를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 심지어 밀교까지 다양한 불교가 동시에 들어 왔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큰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대체 어느 불교가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차로에 차가 밀려 들면 큰 혼란을 겪으면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서부터 후기불교에 이르기 까지 각가지 종파가 한꺼번에 밀어 닥쳤을 때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태대사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이 나온 것이라 본다. 그런데 원효는 이를 뛰어 넘어 화쟁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의 불교를 위하여, 원효스님의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爭)(2011-10-2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원효 당시 불교는 난립되어 있었다. 종파도 다양하고 수행체계도 다양하여 도무지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때 원효가 나타나서 그 때 당시 신라에 들어 와 있던 여러 불교전통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사상과 수행체계를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단일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런 단일체계가 다름 아닌 원효의 일심(一心)사상이다. 일심사상은 여래장과 유식사상을 근거로 하여 만든 것이다.

 

21세기 화쟁을 하겠다고?

 

7세기 원효는 일심사상으로 그 때 당시 난립하였던 모든 불교를 통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그런데 조성택 교수에 따르면 21세기 화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놀랍게도 타종교와의 화쟁을 말한다.

 

현시대에서 티종라 하면 기독교를 말한다. 결국 불교와 기독교를 화쟁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함석헌과 퇴계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라 말한 것이고,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주장함으로서 불교와 기독교가 사실상 같은 종교라는 것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것이 조성택교수를 포함하여 2011년 당시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였던 조계종 화쟁위원회의 화쟁방식이었다고 본다.

  

다종교 사회인 21세기 한국에서 조계종 화쟁위원호에서는 종교평화선언을 추진 하였다. 그런데 21세기 화쟁방식이 매우 놀랍다. 7세기 원효시대의 경우 화쟁의 대상이 난립된 종파불교에 대한 것이었으나, 21세기 한국에서 화쟁방식은 타종교도 대상이다.

 

그런데 화쟁을 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 하였다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이 정체성이 있기 마련인데 21세기 화쟁을 시도하면서 불교의 근본교리를 폐기 한 것이다. 그것은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타종교에도 연기법이 있을까? 타종교에도 열반의 개념이 있을까? 이런 모든 것을 가정하여 보았을 때 불교와 기독교는 도저히 화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화쟁을 시도하였다. 그 대가는 너무 큰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정체성을 포기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 함석헌 저술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조성택 교수는 불교인일까?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타종교 저술을 불교경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쇼카선언에 항거하고

 

지난 2011년 도법스님의 화쟁위원회에서 추진 하였던 일명 아쇼카선언이 추진 될뻔 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십 편의 글을 올려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블로그내 검색창에서 아쇼카선언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수십 개의 글을 볼 수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누군가는 집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도저히 묵과 할 수 없기에 항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스님들과 학자들은 침묵 하였다. 그런 침묵이 비겁해 보여서 “그들은 비겁했다” 아쇼카선언에 대한 학자들과 스님들의 이해 없는 침묵(2012-08-17)’라는 글도 올렸다. 21세기 화쟁을 명목으로 타종교와 통합을 시도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그 주역이 함석헌저술도 불교경전이다라는 말과 함께 원효의 장님과 코끼리 비유를 들어 또 다시 종교간에 화쟁을 시도하려는 듯이 보인다. 이런 스님과 학자들이 정상일까 아니면 이를 지적하는 보통불자가 비정상일까?

 

 

승복의 권위

 

불자들은 스님들을 믿고 존경한다. 또 일반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박사학위을 가진 자에게 존경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믿고 따른다. 바로 이것이 승복의 권위이고 학위의 권위라 볼 수 있다.

 

긴소매자락을 특징으로 하는 승복을 입은 스님이 있다. 그런 스님이 어느 날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하였을 때 불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 들일까? 아마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 들일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11년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수 많은 스님들이 기자회견에서 위와 같은 취지의 종교평화선언초안을 발표 하였다. 그러자 신문과 방송에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다. 심지어 교계신문사이트에서는 환영하는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로 이것이 승복의 권위라는 것이다.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이 그것도 종단의 고위직 스님들이 모여서 발표 하였을 때 먹혀 들어간 것은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 선언문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이의제기가 없었던 것도 바로 승복의 권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문구에 대하여 보통불자 몇 명이 모여 선언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정신병원에 가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의문할 것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머리를 기르고 짧은 소매를 입은 보통불자가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라고 읊조렸다면 아마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박사의 권위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가 함석헌과 퇴계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면 불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 들일까? 대부분 불교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교수가 말하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하며 의심 없이 받아 들일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블로거가 기독교인이 쓴 책도 사실 알고 보면 부처님 말씀입니다라고 하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싸늘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 다 틀렸다라거나 엉터리다또는 헛소리 그만해라등 험한 말을 할 것이다.

 

이처럼 박사의 말과 블로거의 말은 천지차이이다. 박사가 한 말은 진실로서 받아 들이지만 블로거가 한말은 망발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장 떼고 함 붙어볼까?”

 

요즘 하는 말 중에 계급장 떼고 함 붙어볼까?”라는 말이 있다. 모든 권위를 집어 던지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님이나 학자가  익명으로 기고 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도 해당 될 수 있다.

 

어떤 스님이 익명으로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열린진리관을 주장하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불자들 대부분 이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불교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학자가 익명으로 함석헌과 퇴계의 말도 불교경전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무어라 할까? 정반대의 교리를 가진 타종교인의 저술에 대하여 이를 불교경전과 동급이라 주장한다면 대부분 불자들은 미친넘!”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스님이나 학자들이 익명으로 발표 하였을 때 불자들은 대부분 대부분 부정적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헛소리망발등과 험한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계급장을 붙이고 말을 하면 일리가 있다든가 그럴수도 있다등의 긍정적 반응을 할 것이다. 이처럼 스님이나 박사라는 계급장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질 것이다.

 

진리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진리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타종교와 화쟁을 위하여 불교의 진리관을 버리는 행위는 명백히 훼불행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박사타이틀이라는 권위로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아무런 반론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를 팔아 먹으려 하는데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는 것이다.

 

종교의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진리는 하나라고 주장하면 평회가 이루어질까? 종교간의 평화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기독교에서 불교를 종교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2014-06-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