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띠(sati), 그런 줄 아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5. 11:34

 

사띠(sati), 그런 줄 아는 것

 

 

 

사람은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사람은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다. 산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마치 신선처럼 홀로 사는 사람도 경계에 부딪치면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 경계란 무엇인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냄에 대한 것이 있다.

 

화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탐진치 중에 겉으로 가장 드러나기 쉬운 것이 성내는 것이라 하는데,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분노가 폭발하였다면 그의 본모습을 여지없이 보여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경계에 부딪쳤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

 

화가 단단히 난 바라문들이

 

상윳따니까야에는 부처님이 경계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경이 있다. 흔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결 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 되었을 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하며 초기경전을 떠들어 보는데, 상윳따니까야에서도 그 해답이 있었다. 

 

상윳따니까야에 브라흐마나상윳따(Brāhmaasayutta, S7)가 있다. 부처님당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 브라흐마나(바라문)이야기가 실린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당시 지배세력의 종교인 사제(브라흐마나)와 신흥종교라 볼 수 있는 불교와의 실제적인 관계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계급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흥종교의 교주라 볼 수 있는 부처님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경계하고 견제하는 장면이 경에서 보여진다. 심지어 부처님을 모욕 주는 장면도 보여 준다.

 

바라문들이 부처님을 모욕주는 대표적인 경이 있다. ‘악꼬사까의 경(S7.2)’이 그것이다. 이 경에서 바라문은 화가 단단히 나 있다. 그것은 바라문중에서 유능한 젊은이들이 속속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위기를 느낀 바라문은 부처님을 본격적으로 비방하고 비난한다. 그리고 망신을 주고자 한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그는 화가 나서 불만스럽게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전을 무례하고 추악한 말로 비난하고 모욕했다.(S7.2)”라고 표현 되어 있다. 바라문들에게 있어서는 부처님은 적대적이었고 사라져야 할 존재이었다.

 

한상 차림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게 비방이나 비난을 하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더구나 욕설까지 하면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부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바라문들 역시 비방과 비난, 심지어 욕설을 서슴지 있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바라문자제들이 속속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하자 화가 단단히 난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묻는다. 부처님과 바라문에게 이런 대화가 있다.

 

 

[세존]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에게 친구나 동료 또는 친지나 친족 또는 손님들이 옵니까?”

 

[악꼬싸까]

그대 고따마여, 나에게 때때로 친구나 동료 또는 친지나 친족 또는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세존]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에게 그대는 단단하거나 연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합니까?”

 

[악꼬싸까]

그대 고따마여, 나는 그들에게 단단하거나 연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합니다.”

 

[세존]

바라문이여, 그런데 만약에 그들이 그것들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악꼬싸까]

그대 고따마여, 만약에 그들이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돌아옵니다.”

 

(Akkosasutta-악꼬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 전재성님역)

 

 

바라문과 부처님의 대화를 보면 바라문의 말투가 퉁명스런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에게 그대 고따마여라 하면서 성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말로 어이, 김씨또는 어이, 이씨하는 식이다. 이처럼 화가 단단하게 나서 깔보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대화를 보면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님이 찾아 왔을 때 어느 나라에서든지 응대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일 것이다. 밥먹을 때가 되었다면 설령 불청객일지라도 한상 차려 바치는 것 또한 손님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런데 손님이 상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밥과 반찬은 모두 주인에게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한상차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은 부처님

 

이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바라문에게 말씀 하신다.

 

 

[세존]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비난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하고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화내고 욕지거리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지거리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 바라문이여,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고 화내는 사람에게 다시 화내고 욕지거리하는 자에게 다시 욕지거리를 한다면, 바라문이여,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Akkosasutta-악꼬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 전재성님역)

 

 

부처님과 부처님교단에 적대적이었던 지배세력 바라문들은 걸핏하면 비난과 비방, 욕설을 퍼붓기 일쑤이었다. 이런 바라문들의 비방과 비난과 욕으로 가득찬 밥상을 부처님은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 욕밥상은 어디로 갈까? 그것은 경에서 표현 된 것처럼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가 될 것이다.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

 

사람들은 경계에 부딪쳤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마치 화장발로 예뻐 보이는 얼굴이 민낯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sseva tena pāpiyo

yo kuddha paikujjhati,
Kuddha
appaikujjhanto

sagāma jeti dujjaya.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Akkosasutta-악꼬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 전재성님역)

 

 

게송에 따르면 어떤 경우라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비난과 비방, 심지어 욕설을 들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대방이 갖은 비난, 비방, 욕설로 가득찬 분노의 밥상을 들이 내밀었을 때, 이를 받지 않는다면, 그 밥상은 밥상을 차린 자에 되돌아 가고 말 것이다. 결국 분노하는 자는 분노함으로 인하여 자신만 괴롭게 되고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함을 말한다. 마치 한손에는 빨간 숫불을 들고, 또 한손에는 똥무더기를 들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럴 경우 숯불을 든 손은 숯불의 뜨거움으로 자신의 손이 타들어 갈 것이다. 또 똥무더기를 든 손에서는 역겨운 구린내로 인하여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의 밥상을 받지 말라고 한 것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 가는 불자들에게

 

산중에서 수십년동안 도를 닦은 도인일지라도 경계에 부딪치면 무너질 수 있다.예를 들어 누군가 분노의 밥상을 주었을 때 이를 받아 먹는다면 저속한 표현으로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분노의 밥상을 받지 말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Ubhinnamattha carati

attano ca parassa ca,
Para
sakupita ñatvā

yo sato upasammati.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Akkosasutta-악꼬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서 키워드는 새김이다. 전재성님은 사띠(sati)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는 전제조건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야말로 현실의 삶을 살아 가는 불자들에게 가장 큰 가르침이라 보여진다.

 

마음 심()와 사띠(sati)

 

흔히 부처님법문에 대하여 팔만사천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를 마하야나에서는 마음 심()’자 하나로 요약하고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팔만사천법문에 대하여 마음 심()’자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라와다에서는 어떤 단어로 요약될까?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사띠(sati)’ 하나로 귀결된다. 그래서 팔만사천법문은 37조도품으로 요약되고, 37조도품은 팔정도로, 팔정도는 계정혜삼학으로, 계정혜삼학은 사띠 한글자로 요약된다고 한다. 이 사띠에 대하여 수행처에서는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늘 알아차릴 것을 강조 한다.

 

마하야냐의 마음심자와 테라와다의 사띠, 이렇게 두 종류의 단어가 팔만사천법문을 요약한 것이라고 서로 주장한다. 모두 일리 있는 이야기이고 근거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사띠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많다. 부처님이 말씀 중에 사띠에 대한 말이 빠짐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사띠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2009년 법보신문의 사띠논쟁

 

불교에 대하여 아는 사람치고 사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는 지난 2009년도 법보신문에 실렸던 사띠논쟁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 당시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나 스님 등이 사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초불연)이라거나, 새김(성전협), 마음지킴(임승택교수) 등의 번역어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처럼 사띠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것은 사띠가 교학과 수행 등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행과 관련하여 어떤 번역을 하는지에 따라 뜻은 매우 달라진다. 이런 사띠 논쟁과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여러 편의 글을 올렸다. 그 중에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띠 번역어 논쟁을 보고, 조만간 마나시까라와 쩨따시까도(2010-01-02)

2) 사띠(sati) 정확한 의미는?  마음챙김과 새김(2012-08-21)

3) 마음챙김은 국적불명 번역어, 번역권력과 용어남용(2013-05-20)

4) 칭이나 말에 속지 말자, 전도된 지각 상락아정(常樂我淨)(2013-11-08)

 

 

올린 글은 주로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잘 번역된 번역어가 알아차림으로 보았다. 사띠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수행처에서 늘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삼빠잔나와 함께 사용되었을 때를 말한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 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신조어를 생각해 내고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단어를 생각해 내게 되었다. 그것은 그런 줄 아는 것이다. 왜 그런 줄 아는 것인가?

 

사띠에 대하여 그런 줄 아는 것이라고 신조어를 생각해 내게 된 것은 경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평소 초기경전을 보면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경계에 부딪쳤을 때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막상 분노를 표출하고 보니 이제까지 쌓아 왔던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다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분노하는 것은 분노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쌓아 놓았던 공덕을 모두 파괴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화를 내면 친구사이도 멀어지고, 더구나 고객에게 화를 내면 고객은 다시 찾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면 이제까지 쌓은 공덕이 모조리 파괴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노함으로 인하여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분노함으로서 분노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더구나 쌓아 놓은 공덕까지 파괴 된다면, 결국 화를 낸다는 것은 파괴적인 행위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부처님도 분노하는 자에 분노하지 말고 분노의 밥상을 받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분노가 폭발하였을 때

 

사소한 감정으로 인하여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였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것, 잠재되어 있었던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 한순간에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다. 이미 분노가 폭발되고 난 이후 마음은 마치 폭탄이 떨어진 듯 황폐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을 계발하고 마음을 닦는다고 할지라도 한순간에 폭발된 분노로 인하여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고 허상이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말로만 사띠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실제로 경계에 부딪쳤을 때 분노가 폭발하였다면 이럴 경우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 할 것이다.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로서 마음챙김이나 새김, 마음지킴, 알아차림 하면 그만일까?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초기경전을 열어 보는 것이 좋다. 초기경전에는 해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이 우리와 매우 밀접한 생활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선사들의 법문을 보면  주관도 공하고 객관도 공하다든가 아공법공과도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이는 생활과 유리된 이야기이다. 산중에서 자연을 벗삼아 신선처럼 홀로 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늘 문제에 부딪치며 살아 가기 때문에주관도 공하고 객관도 공하다라는 말은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열어보면 아공법공과 같이 마치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 보다 현실을 살아 가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런 이야기가 2600년 전 이야기 들이지만 오늘날 감동을 주는 것은 인간들의 행태가 그 때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계를 지키지 않고 있고,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탐진치로 살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리고 공간도 초월하고 지역도 초월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런 가르침 중에 백미가 바로 사띠라 볼 수 있다.

 

마음만능주의와 사띠만능주의

 

마하야나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그다지 강조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마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하야나는 마음만능주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무수하게 사띠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사띠가 부각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띠가 수행에 대한 용어일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예를 부처님과 바라문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바라문이 욕설로 가득찬 밥상을 들이 내밀었을 때 이를 받지 않은 것도 사띠때문이라 볼 수 있다.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 역시 사띠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는 사띠라는 한단어에 포커스에 맞추어지고, 동시에 초기불교는 사띠만능주의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이 강조하신 사띠에 대하여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마음챙김, 새김, 마음지킴,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사띠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사띠에 대하여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 견해 중의 하나가 법현스님의 온마음이다.

 

법현스님의 온마음

 

법현스님은 최근 불교방송 BBS초대석에서 사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하였다.

 

 

온마음이라는 것은 인도말 사띠, 한자로는 염자이고,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이고,근래 우리학자나 수행자들은 마음챙김 마음새김 이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빠알리어나 한자에 능통하지 못하지만, 우리말에 쪼개진 것을 이라 하고, 뭉친것을 이라 하는데, 그게 전부 다라고 백프로로 쓰이기 때문에 온마음으로 살아 보자는 뜻에서 온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법현스님, BBS 초대석, 불교방송, 2014-06-01)

 

 

저자거리에서 열린선원을 열어 포교하고 있는 태고종의 법현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온마음이라고 정의 하였다. 이런 정의에 대하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거리에서 포교하면서 실제로 경험에 의하여 우러나온 말이라 볼 수 있다.

 

신조어를 게송에 대입해 보면

 

초기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인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새김, 마음지킴, 알아차림, 온마음 등의 용어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용어에 대하여 게송에 대입하면 어떤 결과가 얻을 수 있을까? 이들 용어와 함께 새로 만든 신조어 그런 줄 암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yo sato upasammati(S7.2)

키워드

전재성님역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새김

각묵스님역

마음챙기고 고요하게 처신하노라

마음챙김

임승택교수

마음지키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마음지킴

법현스님

온마음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온마음

진흙속의연꽃

그런 줄 알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그런 줄 앎

 

 

표에서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역은 번역서에서 가져 온 것이다. 나머지는 전재성님 번역에서 단어만 바꾼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마치 전혀 다른 말처럼 보인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등 여러가지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다 보니 딴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표에 실려 있는 구절은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하면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슬기롭게 넘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Para sakupita ñatvā, S7.2)”에 대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표를 보면  전재성님은 새김을 확립하고라 하였다. 이 때 새김은 전재성님의 설명에 따르면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시에 왠 대괄호치기인가?

 

표에서 각묵스님은 마음챙기고라 하였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무슨 마음을 챙긴다는 뜻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종 기고문과 강연에서 마음이 대상(명상주제)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래서 앞서 게송에 대한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 사람 자신과 상대 둘 다의

이익을 도모하는 [여여한 사람이니]

상대가 크게 성이 난 것을 알면

마음챙기고 고요하게 처신하노라.

 

(S7.2,각묵스님역)

 

 

빠알리 게송에 대한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시로서 맛이 떨어진다. 그것은 사용된 용어가 경직되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어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대괄호치기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소월의 시에서 대괄호치기로 부연 설명해 놓았다면 이를 어떻게 볼까? 아마 시로서 감흥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yo sato upasammati” 구절에 대하여 마음챙기고 고요하게 처신하노라라 번역하였다.

 

사띠의 힘은 어떤 것일까?

 

지금 분노하는 자가 분노의 밥상을 들이 내밀고 있는데 과연 이 밥상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 만일 분노의 밥상을 받게 되면 분노하는 자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결국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들은 제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경계에 닥쳐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띠의 힘이다.

 

그런 사띠의 힘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암기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왜 외워야 하는가?(2014-04-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에서 사띠의 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었다.

 

 

Katamañca bhikkhave satibala: idha bhikkhave ariyasāvat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 vuccati bhikkhave satibala.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

 

(Balavitthatasutta -힘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4, 전재성님역)

 

 

 

이 가르침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당시에는 종이도 필기도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처님이 법문을 할 때 잘 새겨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들은 내용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근본법문을 늘 생각하고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 수행승들의 커다란 일과 중의 하나이었다고 보여진다. 만일 누군가 사성제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 물어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팔정도에서 여덟 가지 항목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수행자체게 제대로 될리 없다.

 

그러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때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른 길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팔정도에서 정견에 대하여 초기경전에 따르면 분명히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 되어 있는데, 누군가 부처님말씀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렸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아마 본래 나를 찾는다고 앉아 있을지 모른다.

 

수행승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법문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되새겼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띠의 의미는 기억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바른 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디. 이렇게 본다면 사띠라는 말은 기억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본다. 사성제 등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어야만 현상에 대하여 제대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전재성님의 우리말 번역어 새김은 매우 의미가 있다. 더구나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라고 정의한 것은 사띠번역어에 가장 근접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줄 아는 것

 

그런데 새롭게 생각해 낸 것이 그런 줄 아는 것이다. 이 말은 최근 경계에 부딪쳐 분노가 폭발하였을 때 불현듯이 떠오른 말이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나 새김 등과 같은 말대신에 그런 줄 아는 것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사띠번역어로서 그런 줄 앎이라고 표현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 발상이다. 누구나 사띠에 대하여 한마디 하는 시대에 그런 줄 앎이라고 표현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앎을 적용하였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먼저 앞서 언급된 게송에 그대로 적용해 보았다. 전재성님의 번역에서 단어만 바꾼 것이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그런 줄 알며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Mindfulness

 

 

전재성님이 번역한 게송에서 새김을 확립하고라는 문구 대신에 그런 줄 알며라는 구절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변경하였을 때 큰 무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그런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이 그런 줄 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줄 안다면, 요즘 말로 그런 인간인줄 안다면면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인간이 화를 낸다고 하여 그런 줄 알면 같이 화를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간은 이미 그런 인간인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런 줄 앎으로 바꾸면 번역이 부드러워지고 의미도 명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번역에 그런 줄 앎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특히 수행과 관련된 용어어로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생활과 관련된 구절에 적용하면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특히 분노와 관련된 구절에서 그렇다.

 

 

그런 줄 안다는 것은 단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에 대하여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굳이 내 뜻대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바꾸기 힘든데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조정하려 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내 뜻대로 하려 하다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화를 내는 것이다. 이처럼 나자신도 통제불능인데 타인마저 통제하려 한다면 다툼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안다면 그저 객관적으로 지켜만 보면 된다. 그 사람이 또는 그 인간이 그런 사람 또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그 인간이 싸움을 걸어 오더라도 단지 그런 줄 알면 된다. 이렇게 그런 줄 아는 것도 사띠가 아닐까?

 

 

 

2014-06-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