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낭만의 바다와 통곡의 바다, 자신을 섬(島, dipa)으로 만들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1. 11:18

 

 

낭만의 바다와 통곡의 바다, 자신을 섬(, dipa)으로 만들어야

 

 

 

하루라도 경전을 접하지 않으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한문으로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안중근 의사가 한 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안중근의사가 이 말을 처음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 문구는 추구(推句)’라 책에 나오기 때문이라 한다. 추구란 오언으로 된 좋은 문구들만을 발췌하여 만든 책이라 한다. 그래서 초학들이 처음 공부를 할 때 천자문 등과 함께 사용되는 교재라 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였다. 이는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마음수양을 매일 해야 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문구는 마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를 패러디 한다면 하루라도 경전을 접하지 마음에 때가 낀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하던 것이 경전에

 

하루라도 경전을 접하지 않으면 마음에 때가 끼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경전을 접하였을 때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무언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경전을 열어 보면 신기하게도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더욱 더 신기한 것은 고민하던 해법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게송으로 이루어진 법구경이 그렇다. 다음과 같은 법구경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이다.

 

 

Uṭṭhānenappamādena                웃타네납빠마데나

sayamena damena ca,             상야메나 다메나 짜

Dīpa kayirātha medhāvī,         디빵 까이라타 메다위

ya ogho nābhikīrati.            양 오고 나비끼라띠.

 

 

힘써 노력하고 방일하지 않고

자제하고 단련함으로써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 (Dhp25, 전재성님역)

 

 

思慮あるは、ち、

つとめみ、

自制克己によって、激流

すことのできないをつくれ。(Dhp25, 中村元)

 

항상 힘써 게으르지 않고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지혜있는 사람은 홍수로도

밀어낼 수 없는 섬을 쌓는 것과 같다. (Dhp25, 법정스님역)

 

發行不放逸 발행불방일

約以自調心 약이자조심

慧能作錠明 혜능작정명

不返冥淵中 불반명연중 (Dhp25, 한역)

 

Through initiative, heedfulness,

restraint, & self-control,

the wise would make

          an island

no flood

can submerge. (Dhp25, Thanissaro Bhikkhu

 

 

으뜸가는 노력과 주의력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여

잘 억제하고 단련된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다면

어떤 홍수도 휩쓸어 가지 못하리. (Dhp25, 거해스님역)

 

 

게송에서 키워드는 ‘Dīpa()’이다. 디빠에 포커스가 모아지지만 이는 지혜로운 자(medhāvī)’ 에 해당된다. 그 지혜로운 자는 어떤 자인가? 앞 구절에서 1) 힘써 노력하고, 2) 방일하지 않고, 3) 자제하고, 4) 단련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 하였다. 한마디로 항상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자라 볼 수 있다. 이는 한문용어인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주인이다. 지금 있는 곳이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번역되는 이 문구를 패러디 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알아차린다. 지금 여기에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라고 할 수 있다.

 

왜 정사유가 자비와 관련이 있을까?

 

게송에서 지혜로운 님이라 번역된 것은 빠알리어 ‘medhāvī’이다. 이 말은 지혜를 갖춘 자를 말한다. 여기서 지혜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지혜의 내용은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팔정도에서 정견정사유를 말한다.

 

팔정도에 대하여 계정혜삼학으로 나누었을 때 정견과 정사유는 혜온에 해당되고,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온에 해당되고,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정온에 해당된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혜온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통찰을 뜻하고 올바른 사유는 자비에 충만한 사유를 뜻한다.(DhpA.I.255)”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정사유가 자비에 충만한 사유라는 것에 걸린다. 왜 정사유가 자비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정사유에 대한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sakappo: yo kho bhikkhave, nekkhammasakappo avyāpādasakappo, avihisāsakappo, aya vuccati bhikkhave, sammāsakapp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2)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3)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S45.8,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정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불해(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S45.8, 각묵스님역)

 

 

정사유에 대한 두 가지 번역이다. 번역을 보면 정사유는 1) nekkhammasakappo, 2) avyāpādasakappo, 3) avihisāsakappo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를 전재성님은 욕망, 분노, 폭력을 여윈 사유라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출리, 악의 없음, 해코지 않음[불해(不害)]’이라  번역하였다. 공통적으로 탐욕과 분노 폭력이라는 말로 귀결 된다.

 

탐욕과 분노와 폭력, 이 세가지 말은 자비와 거리가 멀다. 분노하는 자에게 자비를 바랄 수 없고, 더구나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자비는 있을 수가 없다. 이처럼 무자비한 것이 분노이고 폭력이다. 그런데 정사유에서는 이런 분노와 폭력을 멀리하는 것이라 하였다.

 

자신의 뜻대로 하다(탐욕),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성질을 내고(분노), 그것도 모자라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위해를 가했을 때(폭력) 이는 자비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정사유 하는 것이 자비에 충만한 사유라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정사유는 자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정사유에 대한 아잔브람의 새로운 해석

 

이 정사유에 대하여 아잔브람이 한 말이 있다. 최근 아잔브람은 한국을 방문하여 법문을 한바 있다. 이 법문을 듣고 옮긴 글이 있다. 그 중에 정사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의 가르침과 수행은 같은가, 다른가?

정사유(正思惟, samma sankhappa, 좋은 의도)란 무엇인가?

①내려놓기(let go):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라. 잡고 있는 것-집착, 기억, 상처를 내려놓으라.

②자비와 친절(compassion, kindness): 당신의 몸과 마음에 친절하라.

③온화하고 유연하게(gentleness):억지로 하지 말고, 인내를 가져라. 기다려 주라.

 

(원담스님, 아잔브람 명상캠프 리포트-2, 2014-05-26)

 

 

아잔브람 명상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글에 따르면 정사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정사유에 대하여 단지 탐욕과 분노와 폭력이 없는 사유를 뜻하나 아잔브람에 따르면 자비와 관련지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뱌빠다(avyāpāda)와 아위힘사(avihisā)

 

이는 명백하다. 예를 들어 avyāpādasakappo라 하였을 때 이를 분노를 여읜 사유라 하는데,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자애의 사유라 볼 수 있다. 뱌빠다(Vyāpāda)‘ill-will(나쁜 의도); malevolent(사악한)’의 뜻인데, 여기에다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가 붙어 아뱌빠다(avyāpāda)’가 되었을 때 이는 분노없음의 뜻이 되어 자애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자애는 분노나 적의 등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하면 성냄이나 악한생각 등이 사라지고 오로지 자애로만 충만해진다고 한다.

 

더구나 정사유에서는 avihisāsakappo라 하여 폭력을 여읜 사유가 있다. 이 말이 정사유에 대하여 자비로 보는 가장 타당한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폭력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때 폭력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힘사(hisā)’이다. 이는 ‘teasing; injury; hurting’의 뜻으로 남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해침에 살생도 포함된다. 그래서 hisā에 대한 또 다른 의미는 ‘Hurting, killing’로서 단순히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이는 것 까지 해당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아위힘사(avihisā)’는 비폭력 뿐만 아니라 불살생도 포함된다. 폭력을 반대하고 더구나 작은 미물일지라도 살생하는 마음을 여의었을 때 바로 그 마음이 자비로 충만한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위힘사(avihisā)라는 것이 단지 비폭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 가득한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정사유라는 것이 주석에 따르면 자비의 실천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지혜로운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하는 것으로 본다. 지혜 있는 자가 자비가 있고, 자비가 있으면 역시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견이 사성제를 철견하는 지혜라면 정사유는 자비에 충만한 사유를 뜻한다.

 

지금 여기에서 멈추어라!

 

그런데 아잔브람은 이러한 경전적 해석을 넘어 이를 수행의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아잔브람이 정사유에 대하여 1) 내려놓기(let go), 2) 자비와 친절(compassion, kindness), 3) 온화하고 유연하게(gentleness)라고 수행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 세가지 중에 내려놓기가 있다. 이는 정사유에서 nekkhammasakappo(욕망을 여읜 사유)’에 해당된다. 어떻게 내려 놓을 것인가? 원담스님이 남긴 글에 따르면 내려놓기(let go)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우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우화>당나귀는 어떻게 해서 당근을 먹을 수 있을까?

당나귀는 고집 센 동물이라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당나귀는 당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으로 당나귀를 움직일 수 있다.

 

주인이 당나귀 목에다 줄로서 막대기를 묶어 당나귀 머리 위까지 오게 한다. 그리고는 그 막대기에다 실을 묶고 그 끝에다 당근을 매단다. 그러면 당나귀 눈앞에 당근이 어른거리게 된다.

 

당근을 본 당나귀는 먹으려고 자꾸 목을 앞으로 뺀다. 그러면 먹을 앞으로 뺀 만큼 당근이 멀어진다. 따라서 당나귀는 자꾸만 몸을 앞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제 걷기 시작한 당나귀 당근을 먹을 욕심으로 더 빨리 달리게 된다. 그러나 당근은 항상 눈앞에 있을 뿐 먹을 순 없다.

 

욕심에 눈 먼 당나귀는 눈앞의 당근을 먹을 수 없다. 타는 목마름으로 당근을 향해 달려가지만 달려간 만큼 당근은 멀어진다. 갈망에 의해 이끌려지는 중생의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당근을 먹을 수 있을까?

 

불자 당나귀는 내려놓고 멈추면 이익이 있다는 가르침을 기억해낸다. 멈추면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달리다가 갑자기 멈춘다. 눈앞에 있던 당근이 순간 휙 앞으로 날아간다. ‘아차, 당근을 놓쳤구나!’ 하는 사이 그대로 기다린다면 앞으로 밀려갔던 당근이 되돌아온다. 그리고 입만 벌리고 있으면 입안으로 쏙 들어온다. 콱 맛있게 씹어 먹는다. 이것이 불자 당나귀가 내려놓음으로서 당근을 먹는 소식이다.

 

그대들은 어떤가? 내려놓으면 선정과 해탈이라는 최고의 당근을 먹을 수 있다.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려놓으라. 그리고 충분히 기다려주라. 당근이 저절로 입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원담스님, 아잔브람 명상캠프 리포트-2, 2014-05-26)

 

 

이 글은 원담스님이 아잔브람의 법문을 듣고 작성한 글이다. 편의상 글의 문단을 나누었다. 글에는 원담스님의 개인적인 견해도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한마디로 멈추라!”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여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는 고집센 당나귀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당나귀가 달리기를 멈추면 맛있는 당근을 먹을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인간도 지금 여기에서 멈추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사유의 nekkhammasakappo(욕망을 여읜 사유)’에 대하여 내려놓기(let go)’라는 수행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낭만의 바다와 통곡의 바다

 

법구경 세번째 구절에 거센 흐름이라는 말이 보인다. 그래서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Dhp25)”라 하였다. 그렇다면 폭류와 섬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게송에서 말하는 거센 흐름ogha’이다. 이를 한자용어로 표현 하면 폭류(暴流)’가 된다. 사납게 흐르는 물을 말한다. 가르침에서 말하는 폭류는 어떤 의미일까? 각주에 따르면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을 거센 흐름으로 비유한다라고 하였다. 주석을 인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재성님의 견해로 본다. 그래서 열반은 그러한 거듭되는 윤회가 끝나 파도가 미치지 않는 해안을 뜻한다고 하였다.

 

바다를 바라 볼 때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감상적으로 바다를바라 볼 때 낭만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와 정 반대로 통곡의 바다라 볼 것이다. 특히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들이 바라 보았을 때 그럴 것이다. 그 때 그 바다는 낭만이 가득한 바다가 아니라 생때 같은 내새끼를 집어 삼킨 통곡의 바다가 된다.

 

 

 

  

 

바다는 잠잠할 때는 한 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거센 흐름을 보인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버릴 듯 폭류로 변한다. 이런 오가(ogha)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존재를 존재의 영역에 가라앉게 하고 보다 높은 상태나 열반으로 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거센 흐름이라고 한다.(DhpA.I.255)”라 하였다.

 

네 가지 폭류가 있는데

 

존재를 윤회에 머물게 하는 것이 폭류라 하였다. 그 폭류는 다름 아닌 번뇌의 거센 흐름을 말한다. 이런 번뇌의 폭류를 건너가지 못하고 매번 휩쓸려 버리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센 흐름을 안전하게 건너 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거센 흐름(欲流, kamogha), 2) 존재의 거센 흐름(有流, bhavogha), 3) 견해의 거센 흐름(見流, ditthogha), 4) 무지의 거센 흐름(無明流, avijjogha)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번뇌의 폭류를 건너야 안전한 해안에 당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안전한 해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dīpa)’을 말한다.

 

윤회의 바다와 섬(dīpa)

 

게송에서 섬을 만들어야 하리(dīpa kayirātha)”라 하였다. 윤회의 거센 흐름에서 벗어나려면 안전한 해안선으로 당도 해야 하는데 바로 그곳이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 섬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윤회의 바다는 그 지지처인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 바닥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스스로 거룩한 경지(아라한과)인 섬을 만들어야 한다.(DhpA.I.255)”라고 설명되어 있다. 폭류의 바다에 있으면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이 있기 때문에 윤회의 바다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섬은 저 심연 깊은 곳으로부터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견고하다. 그래서 도피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안전한 섬에 대하여 아라한과와 같은 것이라고 주석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열반으로 묘사된 섬(dīpa)

 

섬은 아라한과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번뇌의 폭류에 휩쓸려 세세생생 윤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말하는 섬은 열반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초기경전에서는 섬을 열반과 같은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섬과 섬으로 이끄는 길을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

 

(섬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4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섬이란 무엇인가?”라고 설명하면서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가 섬이라 하였다. 이는 열반을 뜻한다. 폭류의 바다가 아닌 안전한 해안가가 있는 섬을 말한다. 섬은 윤회의 바다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함을 뜻하는 열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을 섬으로 하라(Attadīpā)”

 

섬에 대한 비유로서 자신을 섬으로 하고(Attadīpā, S22.43)”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경에서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과 자신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S22.43)”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을 섬으로 하라(Attadīpā)”는 말은 결국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안전지대인 섬으로 피난 하라는 것은 결국 번뇌의 거센 흐름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Desert Island in Sea

 

 

 

안전한 섬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다. 30도 이상을 웃도는 날씨가 벌써 몇 일 째 계속되고 있다. 6 1일이 되었으니 절기상으로는 여름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해수욕장도 개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뉴스에 따르면 해운대해수욕장의 경우 바다에 모래를 퍼부어 백사장을 두 배로 늘렸다고 한다. 이렇게 여름이 되면 너도 나도 바다에 몰려 간다. 그리고 낭만과 함께 수평선을 바라본다. 하지만 한국사람에게 올 바다는 예년의 바다와 다르다. 세월호희생유가족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는 통곡의 바다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통곡의 바다에서 희생자가족들은 절규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살아서 돌아온 자는 없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바다도 폭풍우가 몰아치면 거센 흐름으로 변하여 모든 것을 삼켜 버리기 때문에 폭류의 바다가 된다. 이런 폭류의 바다는 통곡의 바다가 되어 불러도 불러도 돌아 오지 않는 내새끼를 끝내 내주지 않는다.

 

이런 비극이 인류역사 이래 매번 되풀이 되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다는 낭만적이지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 이런 폭류의 바다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안전한 해안가로 대피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안전한 곳이 대양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이다. 이런 섬이 불교에서는 열반으로 묘사 되고 있다. 번뇌의 폭류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안전지대 즉, 열반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힘써 노력하고 방일하지 않고

자제하고 단련함으로써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 (Dhp25)

 

 

 

2014-06-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