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작은 꽃 그러나 큰 열매, 추억속의 감꽃과 요가케마의 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25. 15:48

 

 

작은 꽃 그러나 큰 열매, 추억속의 감꽃과 요가케마의 길

 

 

 

순수에 대한 열망

 

아홉살 때 까지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 때 당시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농촌에서 불과 몇 년간의 기억은 일생을 좌우한다. 그것은 순수(純粹)’에 대한 열망이다. 순진무구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순수를 갈망하는 것은 그 만큼 때가 끼었다는 것을 말한다.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때가 낄 수밖에 없는데 다시는 그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알 때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홉살 이전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깊은 산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야도 아닌 구릉에 자리잡았던 불과 20여호의 작은 마을은 아직도 여전히 마음의 고향이다. 그렇다고 하여 고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요즘 같이 개발의 시대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향이 아니다. 고향집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다만 사람이 없다. 빈 집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년전 고향집을 찾았다. 큰집이다. 백부댁이 살던 곳이다. 그리고 백부의 칠남매가 나고 자란 곳이다.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밭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6.25직후에 지었다는 큰집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 버렸지만 옛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인생의 2막을 살아가는 사람(2012-07-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아직도 그 자리에 제비집이

 

시골에서 몇 년간의 기억이 평생 가고 있다. ,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이 바뀔 때 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정서를 느끼곤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봄에 대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제비집감꽃에 대한 추억이다.  

 

어느 날 제비가 찾아와 열심히 제비집을 짓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제비새끼들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모습을 보면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리고 있다. 그렇게 크게 벌린 입에 제비는 열심히 먹이를 날라다 준다. 이렇게 거친 먹이를 먹고 자란 제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자란다. 그러다 어느 날 모두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텅빈 둥지만 남는다. 그래서 시골집에 가면 가장 먼저 확인 하는 것이 제비집이다.

 

 

 

 

 

이년전 시골집에 갔었을 때도 제비집이 있었다. 한여름에 갔었기 때문에 둥지는비어 있었다. 다만 제비들이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기한 것은 어렸을 적 보던 제비집 그대로이다. 위치 또한 그대로이다. 세월은 많이 흘렀건만그 자리 그 위치에 여전히 제비집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추억속의 감꽃

 

6.25직후에 지어진 시골집은 이제 6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어렸을 적 그 모습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초가에서 슬레트지붕으로 바뀐 것 외 변화가 없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지만 한때 사람들로 매우 북적이던 곳이다.

 

그 때 당시 마당이 매우 넓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훌쩍 자란 다음에 가 보니 그렇게 좁아 보일 수 없었다. 집도 좁아 보이고 방도 좁아 보이는 등 마치 갑자기 작은 나라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 키가 작은 아이이었을 때 본 것과 다 자라서 본 것과의 차이 일 것이다.

 

시골집을 볼 때 제비집과 함께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감꽃이다. 할머니가 심었다는 감나무가 돼지축사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가본 결과 돼지축사는 형태만 남아 있을 뿐 잡초가 무성하여 폐허화 되었다. 그 때 당시 축사에는 흑돼지가 꿀꿀 거리며 열심히 먹고 있었는데, 특히 물을 마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돼지축사 뒤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할머니가 심었다는 감나무이다. 어렸을 적 감나는 무척 크게 보였다. 이년전 다시 감나무를 쳐다 보았을 때 세월의 흐름만큼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다. 감나무는 더디게 자라는 것일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형님에게 물어 보니 한번 베어 내고 다시 자란 것이라 한다. 만일 옛날감나무가 지금까지 있었다면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감나무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감나무를 볼 때 마다 늘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감꽃에 대한 것이다. 시골에서 자랄 때의 일이다. 언젠가 마당에 감꽃으로 가득 하였다. 비바람이 불어 감꽃이 떨어진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감꽃을 보았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이 강렬하듯이 감꽃 역시 그랬다.

 

감꽃은 다른 꽃과 달리 매우 작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잎사귀 아래에 숨어 있는 것처럼 달려 있기 때문에 마음 먹고 보지 않으면 보기 힘들다. 그런데 어느 날 비바람이 불어 마당에 감꽃이 가득 하였을 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그것은 감꽃만의 독특한 모양때문이다. 바닥에 무수하게 떨어져 있는 감꽃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옹골찬 느낌이다. 막 떨어져서 일까 마치 생동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감나무꽃이 필 때 쯤이면 감꽃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감나무속을 들여다보니

 

늦은 봄이서일까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요즘 낮의 날씨를 보면 마치 초여름 같다. 밤에는 쾌적하여 봄날씨 그대로이지만 낮에는 이미 초여름이다. 이렇게 오월 말이 되면 늘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장미이다. 그래서 거리에는 장미가 눈에 많이 띈다. 보통 6월을 장미의 계절이라 하는데 올해의 경우 날씨탓이어서인지 거리는 이미 장미의 계절이 되었다.

 

장미의 계절이 시작 될 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꽃이 있다. 그것은 감꽃이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피는 두 꽃을 보면 매우 대조적이다. 장미는 크고 화려하고 컬러풀하여 눈에 확 띠지만 감꽃은 피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작고 노랑색의 감꽃을 볼 수 있다.

 

 

 

 

 

 

 

 

 

감꽃에 대한 추억이 있기 때문에 감나무꽃이 필 때쯤 되면 의도적으로 감나무속을 들여다 본다. 그러면 커다란 잎사귀 아래에 작고 옹골찬 노랑색의 감꽃이 달려 있다. 너무 작어서 카메라로 촬영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촬영을 시도 하였다.

 

 

 

 

작고 노랑감꽃을 보니 옛날 시골집 마당에 떨어져 있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하지만 그 형태는 변함이 없다.

 

 

 

 

 

꽃에 비해 열매는 매우 큰 감나무

 

감나무를 좋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감꽃에 대한 추억도 있지만 무엇 보다 감나무열매 때문이다. 감나무가 꽃이 피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미미하지만 그 열매만큼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는 크고 화려한 꽃과 매우 대조 된다.

 

 

 

 

 

봄이 되면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난다. 또 릴레이 하듯이 시간차를 두고 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꽃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나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다. 겉만 번지르르 하지 그에 맞는 알찬 내용이나 실속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봄이 되어 화려하게 신고식을 하는 벚꽃이 있다. 그래서 벚꽃철이 되면 사람들은 벚꽃관광을 떠나기도 한다. 마치 하얀뭉게구름 처럼 하얀벚꽃이 군락을 이루어 필 때 사람들은 이를 즐긴다. 하지만 벚꽃이 지고 나면 쳐다 보지도 않는다.

 

모든 꽃들은 피고 나면 열매를 남긴다. 벚꽃 역시 피고 나면 열매를 남긴다. 이를 벚찌라 한다. 그런데 벚찌를 보면 벚꽂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벚꽃이 지고나면 사람들의 관심을 벗어 나서 일까 벚찌가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러나 감나무는 다르다.

 

감나무는 벚꽃과 달리 꽃이 피면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래서 언제 꽃이 피었다 졌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감나무가 벚꽃나무와 다른 것은 열매에 있다. 벚꽃나무의 벚찌는 너무 작어서 존재감이 없지만 감나무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존재감이 드러난다. 열매가 점차 커져서 마침내 노랗게 익어 갈 때, 그리고 빨간 홍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쳐다 본다. 이렇게 감나무는 꽃이 피었을 때는 존재감이 없지만, 열매를 맺었을 때는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과시하는 듯 하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다. 마치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도를 닦으면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도를 닦는 것에 대하여 꽃과 열매로 비유할 수 있다.

 

도를 닦는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도만 닦으면 되는 것일까? 만약 도만 닦고 결실이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열심히 도만 닦는다면 겉모습만 화려한 꽃과 같을 것이다. 도를 닦긴 닦지만 그 결실이 보잘 것 없다면,  마치 크고 화려한 꽃잎을 가진 꽃이 열매가 보잘 것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를 닦긴 닦되 결실이 크다면, 마치 감나무에 열린 감과 같을 것이다. 감나무꽃은 매우 작아 존재감이 없지만 그 열매 만큼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결실에 있다고 본다. 농사를 지으면 결실을 보듯이, 마찬가지로 도을 닦으면 결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심히 도를 닦아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큰 열매를 맺는 것이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1.

Te jhāyino sātatikā,             떼 자이노 사따띠까

nicca dahaparakkamā,           닛짱 달하빠락까마

Phusanti dhīrā nibbāa,        푸산띠 디라 닙바낭

yogakkhema anuttara.          요각케망 안웃따랑.

 

 

2.

선정에 들고 인내하고

언제나 확고하게 노력하는 님,

현명한 님은 열반,

위없는 안온을 경험한다. (Dhp23, 전재성님역)

 

 

3.

に)いをこらし、ぶことつよく、

つねに(たけ)くする、

思慮あるは、らぎにする。
これは無上せである。 (Dhp23, 中村元)

 

4.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는 생각을 깊이 하고

참을성 있고 항상 부지런히 수행하여

마음의 대자유에 이르리라.(Dhp23, 법정스님역)

 

 

5.

현자는 지속적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여

내적 고요함과 평화를 성취하나니

닙바나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난 경지.

닙바나는 위없는 참된 기쁨이며 행복이다. (Dhp23, 거해스님역)

 

 

6.

常當惟念道 상당유념도

自强守正行 자강수정행

健者得度世 건자득도세

吉祥無有上 길상무유상 (Dhp23, 한역)

 

 

7.

The enlightened, constantly

       absorbed in jhana,

       persevering,

       firm in their effort:

they touch Unbinding,

the unexcelled rest

       from the yoke. (Dhp23, Thanissaro Bhikkhu)

 

 

 

네 가지 길과 네 가지 경지가 있는데

 

법구경 압빠마도왁가(Appamādavaggo) 세 번째 게송이다. 게송에서 세 번째 구절을 보면 ‘phusanti’가 있다. 이 푸산띠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Phusanti : 원래는 접촉한다.’는 뜻이다. DhpA.I.230에 따르면, 열반과 관계된 두 가지 경험이 있다. 1) 앎을 통한 경험 : 네 가지 길[四向, cattaro magga] 2) 경지를 통한 경험 : 네 가지 경지[四果 : cattaro phalani]

 

(539번 각주)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사향사과(四向四果)’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여기서 사향사과는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즉 수다원의 도와 과, 사다함의 도와 과, 아나함의 도와 과, 아라한의 도와 과를 말한다. 이렇게 네쌍으로 된 여덟 가지 형태를 사쌍팔배라 한다.

 

사향사과나 사쌍팔배를 설명할 때 반드시 언급 되는 것이 도와 과이다. 그 도와 과를 빠알리어로 표현하면 막가(magga)와 팔라(phala)이다. Magga라는 말이 ‘path’로서 을 의미하고, phala라는 말이 ‘fruit’의 뜻으로 열매를 뜻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길을 간다거나 도를 닦는다하였을 때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거나 결실을 맺어야 함을 말한다.

 

목적 없이 행동하면

 

사람들은 목적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또 목적없이 말을 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만일 누군가 목적없이 행동을 하고, 목적없이 말을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아마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목적이 결여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없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행동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단번에 알아 본다. 마찬가지로 말하는 것으로 정신이 온전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정신이상자들의 특징은 목적이 없기 때문에 말 하는 것이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목적이 결여된 행동이나 말은 보통사람들과 확연히 차별된다. 그래서 행동이나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상태인지 순식간에 알 수 있다.

 

여기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목적이 없이 걷는다면 어떻게 보일까? 길을 걷긴 걷되 목적지 없이 걸을 때 아무 의미가 없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목적지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도를 닦는 다는 것도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도라는 말 자체가 길(magga)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목적지를 향하여 갈 수밖에 없다. 그 목적지는 어디일까? 게송에 따르면 최종목적지는 열반(nibbāa)’이다.

 

열반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불자들은 열반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떠난다. 길을 간다는 것은 도를 닦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이다.

 

그런데 열반체험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열반을 체험하면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도 단계가 있다. 이를 네쌍으로 여덟가지 형태로 분류해 놓았다. 그래서 길을 떠나 목적지 도달하는 것에 대하여 네 가지 형태와 여덟종류가 있다고 하여 사향사과라 한다. 이를 성취한 자를 사쌍팔배의 성자라 한다.

 

이처럼 네 종류의 성자가 있지만 네 종류의 성자가 체험하는 열반은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수다원이 체험하는 열반이 다르고 아라한이 경험하는 열반이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네 종류의 성자가 경험하는 열반은 모두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네 종류로 구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염원에 따른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남아 있는 정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라한의 도와 과를 성취하면 모든 번뇌는 소멸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윤회하게 하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되면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윤회의 원인이 되는 행위(kamma, )를 하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과 함께 재생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은 더 이상 태어남이 없음을 말한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아라한은 죽는 일도 없게 된다. 자아를 가진 보통사람들의 죽음과 달리 아라한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태어남도 없고 죽는 일도 없기 때문에 불사라 한다. 그 불사의 경지를 닙바나(열반)라 한다.

 

장부다운 기백으로

 

게송에 따르면 현자만이 열반을 경험한다(Phusanti dhīrā nibbāa)” 하였다. 여기서 현자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디라(dhīrā)’이다. dhīrā의 원뜻은 ‘firm(확고한)’이다. 그래서 한자어로는 堅固的(견고한)’ 뜻으로 번역되고 이처럼 확고하다는 뜻을 가진 디라  현자(賢者)’라도 번역된다.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만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그 지혜로운 자는 어떤 자인가? 게송에 따르면 1) 선정에 들고, 2) 인내하고, 3) 확고하게 노력하는 자라 하였다. 여기서 세 번째 항 확고하게 노력하는 님에 대한 것이 ‘nicca dahaparakkamā

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장부다운 힘과 장부다운 노력과 장부다운 용맹으로 도달될 수 있는 것에 도달하기까지, 중도에서 물러나지 않고 일정하게 확고한 노력을 기울인다.(DhpA.I.230)”라고 설명 되어 있다.

 

길을 걷는 나그네는 목적지를 향해 간다. 그 목적지가 아주 멀리 있다고 할지라도 한걸음 한걸음 뚜벅뚜벅 걸어간다. 길을 가는 도중에 강을 만나면 강을 건너고, 산을 만나면 산을 건너간다.

 

 

중국양관

 

 

 

 나그네는 길을 가다 도둑이나 강도를 만날 수도 있다. 또 누군가 함께 길을 갈 수도 있다. 그 누군가가 나보다 낫거나 동등한 자라면 문제 없으나 어리석은 자일 수도 있다. 이처럼 목적지를 길을 향해 가는 과정은 험난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도중에 포기한다면 목적지에 결코 도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길을 가야 할까? 주석에 따르면 장부다운 마음으로 길을 떠나야 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길을 갈 것인가?

 

장부란 무엇일까? 장부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다 자란 씩씩한 남자의 뜻이다. 한마디로 패기와 기백이 넘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사내대장부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사내대장부가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험난한 길을 떠나는데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장부로서의 패기를 말한다. 주석에서와 같이 장부다운 힘과 장부다운 노력과 장부다운 용맹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도중에 포기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일정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중국양관

 

 

노력이 바로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늘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 어떤 어려운 일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1) 선정에 드는 것(jhāyino), 2) 인내하는 것(sātatikā), 3) 노력하는 것(dahaparakkamā)을 이렇게 세 가지를 들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방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수행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장부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장부의 기질이 있는 자만이 목표에 도달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대장부기질이 있는 자가 게송에 따르면 디라이다. ‘디라(dhīrā)’는 원뜻이 ‘firm’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확고부동한 자를 말한다. 대장부기질이 있는 자이다. 그런 자가 바로 현자라 하였다. 따라서 현자만이 열반이라는 목적에 도달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중국양관

 

 

요가케마(yogakkhema)에 대하여

 

열반에 도달하면 어떤 상태일까? 열반이라는 것은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표현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게송에 따르면 ‘yogakkhema이라 하였다. 이 용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위없는 안온으로 번역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無上라 하여 위없는 행복이라 번역하였다. 법정스님은 마음의 대자유, 거해스님은 위없는 참된 기쁨으로 번역하였다.

 

장부의 마음으로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길을 가면 마침내 열반에 도달 할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열반을 체험하는 것에 대하여 요가케마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요가케마는 구체적으로 어떤 말일까? 빠알리어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요가케마(yogakkhema)에 대하여 ‘release from the attachments’라 설명 되어 있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yogakkhemayoga+khema의 뜻이라 하였다. 여기서 yoga‘yokes(멍에), bonds(집착)’의 뜻으로 네 가지 번뇌의 또다른 이름이라 설명되어 있다.

 

Khema‘safe(안전한); calm(고요한); full of peace(평화로 가득한)’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복합어 요가케마(yogakkhema)번뇌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안온이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윤회에 묶어두는 네 가지 멍에

 

요가케마(yogakkhem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유가안은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의 각주에 따르면 요가케마(yogakkhema)에 대하여 아라한과를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네 가지 속박에서 안전하고 괴롭힘이 없기 때문에 요가케마(yogakkhema)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빠알리사전과 초불연 각주에서 언급된 네 가지 번뇌 또는 멍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하여 해당 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yogakkhema anuttara : DhpA.I.231에 따르면, 사람을 윤회에 묶어두는 네 가지 멍에[ : cattaro yoga] ,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멍에(kamayoga), 존재의 멍에(bhavayoga), 견해의 멍에(ditthiyoga), 무지의 명에(avijjayoga)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 상태로 모든 세간적이고 출세간적 사실 가운데 최상이다. (Sdk.17 Dv.43 Dp.27 Sds.II.342)

 

(538번 각주, 전재성님)

 

 

yogakkhema anuttara의 뜻은 위없는 안온이라는 뜻이다. 이런 안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멍에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여기서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뜻한다. 이런 멍에를 짊어고 있는 한 소는 수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멍에를 맨 황소는 왜 고통스러울까?

 

멍에를 맨 황소는 왜 고통스러울까? 이에 대하여 멍에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만일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고 한다. 그래서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다.

 

 

 

 

 

Withers yokes in use in Burma

출처: 위키백과 yoke

 

 

 

 

만일 황소가 뒤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뒤로 벗어나려 하면 이번에는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 낼 것이라 한다. 그래서 황소는 멍에를 매고 수레를 끄는 한 앞으로도 옆으로도 뒤로도 결코 멍에를 벗어 날 수 없다. 따라서 황소는 멍에를 매고 있는 한 오로지 앞으로 나아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멍에가 빠알리어로 요가(yoga)이다. 영어로는 요크(yoke)라 한다.

 

 

 

 

ox cart

Single ox pulling ladies in ox cart near Newport News,

Virginia, USA (estimated c1900-1920).

 

 

 

 

멍에를 짊어 졌다는 것은 윤회할 수밖에 없는 삶을 말한다. 멍에로부터 빠져 나가려 하지만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때 오로지 앞만 보고 걷는 황소처럼 윤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멍에를 짊어지면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네 가지 멍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멍에(kamayoga), 2) 존재의 멍에(bhavayoga), 3)견해의 멍에(ditthiyoga), 4) 무지의 명에(avijjayoga)라 한다. 이런 멍에에서 벗어났을 때 최상의 안온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아라한의 삶 그 자체가 행복

 

게송에서는 현명한 님은 열반, 위없는 안온을 경험한다라 하였다. 위없는 안온(yogakkhema anuttara)이 바로 열반을 뜻한다. 그렇다고 하여 열반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열반은 마음이 없는 상태이므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게송이나 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행복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nibbāna parama sukha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204)”와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열반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보면 이는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주석에 따르면 이 경우 열반이 행복이라는 느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의 삶그 자체를 행복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 가지 멍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그 삶 자체가 행복이고 축복이다. 그래서 현명한 님은 열반, 위없는 안온을 경험한다라 하였을 것이다.

 

길을 떠나는 나그네

 

누군가 길을 가고 있다. 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혼자서 간다. 누군가 함께 길을 간다면 힘이 될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듯이 함께 길을 가는 동행자가 있다면 수월하게 길을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행자가 어리석다면도움이 되지 않는다.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Dhp61)”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와 우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가면 윤회는 아득한 것이라 하였다.

 

나그네가 길을 떠날 때는 장부의 마음을 가야 한다. 선정, 인내, 노력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간다는 것은 목적지를 전제로 한다. 목적지 없는 길을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지가 바로 열반이다. 나그네가 강넘고 산넘고 사막을 넘어 도착하는 곳은 열반이라는 목적지이다. 그 열반의 목적지에 도착한 대장부는 최상의 안온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중국양관

 

 

아무도 알아 주지 않지만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길을 떠나는 나그네 역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 그런 나그네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출발이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지만 길을 계속 가서 마침내 엄청난 열매를 맺었다. 이는 마치 감나무같다.

 

감나무꽃은 잎사귀에 가려져 있어서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열매는 점점 커진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길을 떠나는 나느네는 감꽃과 같다. 감꽃처럼 작고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꾸준히 장부의 패기와 기백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면 언젠가 큰 결실(mahaphala)’을 맺을 것이다.

 

 

 

2014-05-25

진흙속의연꽃